“홍마리는 오늘도 조금 바쁨” _ 하동군 청암면 홍마리 글 / 팀 옥동 섬진강과 지리산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조용한 카페에서 홍마리를 만났다. 이곳은 그녀가 하동군 평생학습 수강생들과 수업 후 차를 마시기 위해 가끔 찾는 곳이라고 했다. 어린아이처럼 환한 웃음과 백발의 머리가 묘하게 잘 어울리는 하동군 청암면에 사는 큰언니 홍마리,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전형적인 노인의 모습에서 조금은 벗어난 길을 걷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동군 청암면에 사는 홍마리 씨 존경하는 나의 학생들 홍마리는 재작년부터 하동군 평생학습센터에서 일주일에 두 번, 저녁 일곱 시에 하동군민을 대상으로 생활영어를 가르친다. 수강생은 주로 50대 이상이고 예전에 영어를 좋아했지만, 그 동안 써먹을 기회가 없었거나 개인적인 이유로 영어의 필요성을 느껴 수업을 듣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언어란 게 그렇잖아요. 하루아침에 성과가 보이는 게 아니죠. 그래도 젊어서 공부하던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며 성취하는 기쁨을 하나씩 찾아가시는 것 같아요. 언어는 문화니까 한국 문화와 다른 여러 가지 외국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인문학 강의 같은 대화가 오가기도 하죠. 제 인생의 화두가 ‘사람과 사랑’이거던요.(웃음) 그러다 보니 개인 얘기를 안 할 수 없고 학기가 끝날 때쯤이면 서로의 속사정과 성격을 다 눈치채는 친구가 돼요. 그렇다고 다 영어로 말하는 건 아니에요. 언어는 초급이지만 내용은 고급입니다.”(웃음) 
평생학습센터에서 하동군민을 대상으로 생활영어 수업을 진행 중인 홍마리 씨 저녁 일곱 시는 애매한 시간이다. 고된 하루 일을 끝내고 저녁을 먹은 후 노곤해서 쉬고 싶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먹고 사는 데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다. 생산성의 관점에서 보면 무용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꾸준히 수업에 나오는 수강생들은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 뭔가 다른 것을 경험하는 것의 유용함과 매력을 아는 사람들이다. 홍마리는 그런 수강생들을 정말 존경한다고 몇 번이나 반복했다. 수동적이고 능동적인 홍마리는 국내는 물론 미국, 유럽 등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러나 노마드 비슷하게 산 건 홍마리의 의지라기보다는 남편의 직장, 세 자녀의 학업 때문이었다. 결혼하고 오로지 남편과 아이들만을 생각하며 산 인생이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홍마리는 아내와 엄마의 역할에만 만족한 것 같지는 않다. 호기심이 많아 정착했던 지역의 여러 가지 일에 관여했고 공동체 활동에 참여하며 지역 신문도 만들었다. “남편이 유학에서 돌아와 다시 외국 나갈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인생엔 많은 변수가 숨어 있잖아요. 애가 셋인데 둘째인 딸이 고1 때 혼자 몰래 유학 준비를 하고 유학 가겠다고 고집부렸는데 부모인 저희가 졌어요. 미성년이라 제가 다시 미국에서 애들 돌보면서 신문을 만들게 됐어요. 한때 가톨릭신문 객원기자를 좀 했는데 그게 도움이 됐고 일하는 게 절실했던 친구의 권유로 시작하게 됐지요. ‘일리노이대학’이 있는 ‘어바나-샴페인’이라는 곳이었는데 한국 유학생이 많았어요. 한국어, 영어, 중국어 세 개 언어로 된 신문을 일주일에 한 번씩 만들다 이주에 한번 나중엔 한 달에 한 번씩 냈어요. 나중엔 인터넷판 위주로 내고 하동에 와서도 3년 정도 계속했지요. 10년 동안 한 셈이에요. 손 털면서 속 시원했지요.” 어쩌다 하동, 우연히 ‘오!하동’ 하동은 퇴직한 남편이 좋아해서 따라왔지만 홍마리는 지역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신문 만드는 일은 다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어쩌다 보니 하동주민신문 ‘오!하동’을 만들고 있고 다른 누구보다 적극적이다. 매주 일요일 저녁 6시 30분부터 시작하는 편집회의는 한번 시작하면 3시간을 훌쩍 넘긴다. 지역의 작은 신문이라 사람이 부족해 기자도 하고 교정·교열 작업도 한다. 
하동주민신문 ‘오!하동’ 편집회의 중인 홍마리 씨 “우연히 ‘오!하동’ 신문 만든다는 사람 옆에 앉아있다가 또 신문을 같이 만들게 됐네요. 이렇게 제 인생은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가네요. (웃음) 우리나라는 ‘서울공화국’이라 할 만큼 모든 게 도시, 그것도 서울 중심이잖아요. 서울로만 향하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한국의 여러 문제 해결이 힘들다고 생각해요. 인구 4만의 하동군 같은 작은 곳의 모든 군민이 골고루 잘살고 군민의 의견이 잘 반영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면 굳이 서울 갈 필요가 있나요? 그러기 위해 신문의 역할도 적지 않다고 생각해요. 민주주의가 그렇듯 좋은 신문 만드는 데는 군민의 참여가 필요하죠. 신문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많은 분이 읽고 군민이 적극 참여하고 또 참여하도록 하는게 최선이죠.” 며칠 전에는 이번에 새로 바뀐 하동군수의 인수위원회에서 준비한 주민의 소리 듣기 행사에 하동 주민 대표로 참여해 목소리를 보탰다고 하는데 “주어진 시간이 짧아 아쉬웠지만 소통이 시작되었으니 의미 있었다”고 말한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이쯤에서 젊은 시절의 홍마리가 궁금했다. 현재 상황을 덤덤히 받아들이며 살았기 때문에 지난 시절에 대한 후회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대화 중에 결혼과 동시에 놓아버린 삶에 대한 아쉬움이 살짝 보였기 때문이다. 
신혼시절의 홍마리 씨와 남편 “제가 낼모레면 70이에요. 60/70 세대는 여성이 여러 가지 면에서 독립적이지 못했지만 그런 움직임이 활발히 태동하던 시기였어요. 저는 여자가 별로 없는 남녀공학을 다녔는데 여학생이 딱 2부류였던 것 같아요. 급진 아니면 꼴통보수. 저는 급진적인 친구와 친했음에도 보수적이었어요. 제때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인생의 목표라 생각하는 세대의 물결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요. 결혼 전 대우실업 기획조정실에서 근무했는데 대우에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여대생을 ‘공채’로 뽑았어요. 저희하고 같이 입사한 남자들과 월급 차이가 나는 걸 알고 김우중 사장을 직접 만나 해결도 하고 동기들끼리 단결해 칼퇴와 커피나 카피 같은 업무 거부도 주장했죠. 지금 같으면 결혼한다고 그만 두지 않았을 텐데 그때는 그게 당연한 시대였죠.” 하다 보면 끝낼 수가 없어 홍마리는 ‘지리산산악열차반대’ 주민모임인 ‘지리산을 그대로’ 단톡방에 시위 시작 시간에 맞춰 음악을 올린다. 적절한 음악을 찾는데 꽤 공을 들인다고. 그 일도 홍마리가 해왔던 다른 일처럼 꾸준함으로 1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처음엔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직접 나가서 피켓 들고 있는 분들이 너무 고맙고 또 미안했어요. 그래서 내가 음악을 좋아하니까, 그 분들도 서 있을 때 음악이라도 들으시라고 한두 번 올리다 보니 끊기가 또 쉽지 않았어요. 아침이다 보니 우울하고 쳐진 음악 올릴 수도 없고 게다가 시위다 보니 그에 맞는 힘을 실어주는 음악이면 좋겠고 그러다 보니 이제 마치 고정 음악프로그램 맡은 디제이처럼 잊을까 알람도 해뒀어요. 제가 전문인도 아닌데다, 듣는 분도 다양하다 보니 때론 한 곡의 선곡을 위해 오래 헤매기도 해요. 그리고 이게 또 하다 보니 끝낼 수가 없더라고요. 그렇게 1년이 넘었네요. 시작 할 때는 이렇게 오래 할 줄 몰랐죠. 이제 군수님도 바뀌었으니 저도 이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겠죠?”(웃음) 결혼 생활도 이렇게 오래할 줄 몰랐느냐란 인터뷰어의 농담에 홍마리는 “실은 바늘을 끝까지 따라갑니다.” 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뭐든 하고 싶은 거 하면 돼 홍마리와의 대화는 즐겁고 편안했다. 인터뷰어와 상당한 나이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개인적 친분이 있어 홍마리와 이야기할 기회가 종종 있지만 한 번도 어르신들이 하는 흔한 잔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호칭도 나이와 상관없이 ‘언니’라는 호칭을 좋아한다고 했다. 아직은 익숙지 않아 ‘마리언니샘’, ’마리언니님’, ’마리언니여사’ 등등으로 가끔 부르겠다고 했다. 그런 홍마리가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뭘까? “저는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줄건 없고 그들을 보고 많이 배워요.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많은 걸 보고 들을 기회가 있어요. 뭐든 하고 싶은 거 하면 되지요. 하다 보면 길이 보이고, 길이 생기고, 없는 길도 나게 되는 거지요. 그들이 뭘 하든 응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즘 홍마리의 일상은 어떨까 궁금했다. “하동에 오면서 내가 생각했던 삶은 ‘노동과 기도’였어요. 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고 조용히 기도하며 살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그리고 한동안은 그 비슷하게 흉내내며 즐거웠는데 지금은 피부에 문제가 생겨서 마당일은 쉬고 있어요.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눈은 침침하지만 읽고 싶은 책도 읽고 영화와 드라마도 맘껏 보고 있습니다. 또 가능하면 지리산 봉우리마다 땀 흘리며 발자국도 찍고 싶어요. 철부진가요?”(웃음) |
“홍마리는 오늘도 조금 바쁨”
_ 하동군 청암면 홍마리
글 / 팀 옥동
섬진강과 지리산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조용한 카페에서 홍마리를 만났다. 이곳은 그녀가 하동군 평생학습 수강생들과 수업 후 차를 마시기 위해 가끔 찾는 곳이라고 했다. 어린아이처럼 환한 웃음과 백발의 머리가 묘하게 잘 어울리는 하동군 청암면에 사는 큰언니 홍마리,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전형적인 노인의 모습에서 조금은 벗어난 길을 걷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동군 청암면에 사는 홍마리 씨
존경하는 나의 학생들
홍마리는 재작년부터 하동군 평생학습센터에서 일주일에 두 번, 저녁 일곱 시에 하동군민을 대상으로 생활영어를 가르친다. 수강생은 주로 50대 이상이고 예전에 영어를 좋아했지만, 그 동안 써먹을 기회가 없었거나 개인적인 이유로 영어의 필요성을 느껴 수업을 듣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언어란 게 그렇잖아요. 하루아침에 성과가 보이는 게 아니죠. 그래도 젊어서 공부하던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며 성취하는 기쁨을 하나씩 찾아가시는 것 같아요. 언어는 문화니까 한국 문화와 다른 여러 가지 외국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인문학 강의 같은 대화가 오가기도 하죠. 제 인생의 화두가 ‘사람과 사랑’이거던요.(웃음) 그러다 보니 개인 얘기를 안 할 수 없고 학기가 끝날 때쯤이면 서로의 속사정과 성격을 다 눈치채는 친구가 돼요. 그렇다고 다 영어로 말하는 건 아니에요. 언어는 초급이지만 내용은 고급입니다.”(웃음)
평생학습센터에서 하동군민을 대상으로 생활영어 수업을 진행 중인 홍마리 씨
저녁 일곱 시는 애매한 시간이다. 고된 하루 일을 끝내고 저녁을 먹은 후 노곤해서 쉬고 싶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먹고 사는 데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다. 생산성의 관점에서 보면 무용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꾸준히 수업에 나오는 수강생들은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 뭔가 다른 것을 경험하는 것의 유용함과 매력을 아는 사람들이다. 홍마리는 그런 수강생들을 정말 존경한다고 몇 번이나 반복했다.
수동적이고 능동적인
홍마리는 국내는 물론 미국, 유럽 등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러나 노마드 비슷하게 산 건 홍마리의 의지라기보다는 남편의 직장, 세 자녀의 학업 때문이었다. 결혼하고 오로지 남편과 아이들만을 생각하며 산 인생이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홍마리는 아내와 엄마의 역할에만 만족한 것 같지는 않다. 호기심이 많아 정착했던 지역의 여러 가지 일에 관여했고 공동체 활동에 참여하며 지역 신문도 만들었다.
“남편이 유학에서 돌아와 다시 외국 나갈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인생엔 많은 변수가 숨어 있잖아요. 애가 셋인데 둘째인 딸이 고1 때 혼자 몰래 유학 준비를 하고 유학 가겠다고 고집부렸는데 부모인 저희가 졌어요. 미성년이라 제가 다시 미국에서 애들 돌보면서 신문을 만들게 됐어요. 한때 가톨릭신문 객원기자를 좀 했는데 그게 도움이 됐고 일하는 게 절실했던 친구의 권유로 시작하게 됐지요. ‘일리노이대학’이 있는 ‘어바나-샴페인’이라는 곳이었는데 한국 유학생이 많았어요. 한국어, 영어, 중국어 세 개 언어로 된 신문을 일주일에 한 번씩 만들다 이주에 한번 나중엔 한 달에 한 번씩 냈어요. 나중엔 인터넷판 위주로 내고 하동에 와서도 3년 정도 계속했지요. 10년 동안 한 셈이에요. 손 털면서 속 시원했지요.”
어쩌다 하동, 우연히 ‘오!하동’
하동은 퇴직한 남편이 좋아해서 따라왔지만 홍마리는 지역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신문 만드는 일은 다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어쩌다 보니 하동주민신문 ‘오!하동’을 만들고 있고 다른 누구보다 적극적이다. 매주 일요일 저녁 6시 30분부터 시작하는 편집회의는 한번 시작하면 3시간을 훌쩍 넘긴다. 지역의 작은 신문이라 사람이 부족해 기자도 하고 교정·교열 작업도 한다.
하동주민신문 ‘오!하동’ 편집회의 중인 홍마리 씨
“우연히 ‘오!하동’ 신문 만든다는 사람 옆에 앉아있다가 또 신문을 같이 만들게 됐네요. 이렇게 제 인생은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가네요. (웃음) 우리나라는 ‘서울공화국’이라 할 만큼 모든 게 도시, 그것도 서울 중심이잖아요. 서울로만 향하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한국의 여러 문제 해결이 힘들다고 생각해요. 인구 4만의 하동군 같은 작은 곳의 모든 군민이 골고루 잘살고 군민의 의견이 잘 반영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면 굳이 서울 갈 필요가 있나요? 그러기 위해 신문의 역할도 적지 않다고 생각해요. 민주주의가 그렇듯 좋은 신문 만드는 데는 군민의 참여가 필요하죠. 신문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많은 분이 읽고 군민이 적극 참여하고 또 참여하도록 하는게 최선이죠.”
며칠 전에는 이번에 새로 바뀐 하동군수의 인수위원회에서 준비한 주민의 소리 듣기 행사에 하동 주민 대표로 참여해 목소리를 보탰다고 하는데 “주어진 시간이 짧아 아쉬웠지만 소통이 시작되었으니 의미 있었다”고 말한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이쯤에서 젊은 시절의 홍마리가 궁금했다. 현재 상황을 덤덤히 받아들이며 살았기 때문에 지난 시절에 대한 후회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대화 중에 결혼과 동시에 놓아버린 삶에 대한 아쉬움이 살짝 보였기 때문이다.
신혼시절의 홍마리 씨와 남편
“제가 낼모레면 70이에요. 60/70 세대는 여성이 여러 가지 면에서 독립적이지 못했지만 그런 움직임이 활발히 태동하던 시기였어요. 저는 여자가 별로 없는 남녀공학을 다녔는데 여학생이 딱 2부류였던 것 같아요. 급진 아니면 꼴통보수. 저는 급진적인 친구와 친했음에도 보수적이었어요. 제때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인생의 목표라 생각하는 세대의 물결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요. 결혼 전 대우실업 기획조정실에서 근무했는데 대우에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여대생을 ‘공채’로 뽑았어요. 저희하고 같이 입사한 남자들과 월급 차이가 나는 걸 알고 김우중 사장을 직접 만나 해결도 하고 동기들끼리 단결해 칼퇴와 커피나 카피 같은 업무 거부도 주장했죠. 지금 같으면 결혼한다고 그만 두지 않았을 텐데 그때는 그게 당연한 시대였죠.”
하다 보면 끝낼 수가 없어
홍마리는 ‘지리산산악열차반대’ 주민모임인 ‘지리산을 그대로’ 단톡방에 시위 시작 시간에 맞춰 음악을 올린다. 적절한 음악을 찾는데 꽤 공을 들인다고. 그 일도 홍마리가 해왔던 다른 일처럼 꾸준함으로 1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처음엔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직접 나가서 피켓 들고 있는 분들이 너무 고맙고 또 미안했어요. 그래서 내가 음악을 좋아하니까, 그 분들도 서 있을 때 음악이라도 들으시라고 한두 번 올리다 보니 끊기가 또 쉽지 않았어요. 아침이다 보니 우울하고 쳐진 음악 올릴 수도 없고 게다가 시위다 보니 그에 맞는 힘을 실어주는 음악이면 좋겠고 그러다 보니 이제 마치 고정 음악프로그램 맡은 디제이처럼 잊을까 알람도 해뒀어요. 제가 전문인도 아닌데다, 듣는 분도 다양하다 보니 때론 한 곡의 선곡을 위해 오래 헤매기도 해요. 그리고 이게 또 하다 보니 끝낼 수가 없더라고요. 그렇게 1년이 넘었네요. 시작 할 때는 이렇게 오래 할 줄 몰랐죠. 이제 군수님도 바뀌었으니 저도 이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겠죠?”(웃음)
결혼 생활도 이렇게 오래할 줄 몰랐느냐란 인터뷰어의 농담에 홍마리는 “실은 바늘을 끝까지 따라갑니다.” 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뭐든 하고 싶은 거 하면 돼
홍마리와의 대화는 즐겁고 편안했다. 인터뷰어와 상당한 나이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개인적 친분이 있어 홍마리와 이야기할 기회가 종종 있지만 한 번도 어르신들이 하는 흔한 잔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호칭도 나이와 상관없이 ‘언니’라는 호칭을 좋아한다고 했다. 아직은 익숙지 않아 ‘마리언니샘’, ’마리언니님’, ’마리언니여사’ 등등으로 가끔 부르겠다고 했다. 그런 홍마리가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뭘까?
“저는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줄건 없고 그들을 보고 많이 배워요.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많은 걸 보고 들을 기회가 있어요. 뭐든 하고 싶은 거 하면 되지요. 하다 보면 길이 보이고, 길이 생기고, 없는 길도 나게 되는 거지요. 그들이 뭘 하든 응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즘 홍마리의 일상은 어떨까 궁금했다.
“하동에 오면서 내가 생각했던 삶은 ‘노동과 기도’였어요. 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고 조용히 기도하며 살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그리고 한동안은 그 비슷하게 흉내내며 즐거웠는데 지금은 피부에 문제가 생겨서 마당일은 쉬고 있어요.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눈은 침침하지만 읽고 싶은 책도 읽고 영화와 드라마도 맘껏 보고 있습니다. 또 가능하면 지리산 봉우리마다 땀 흘리며 발자국도 찍고 싶어요. 철부진가요?”(웃음)
글쓴 사람. 팀 옥동
간소하고 간결한 삶을 지향하는 하동의 옥이. 호기심을 잃지 않고 늙고 싶은 하동의 동이.
두 사람이 천천히 걷고 때론 달리며 자주 멈춰서서 발견하는 하동의 작고 깊은 이야기를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