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에서 진행하는 지리산쌀롱은 지리산 안팎의 활동가들이 모여 지역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교류하는 자리다. 특히 올해 진행되는 지리산쌀롱은 “지리산 X○○”을 주제로 지리산과 다른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고자 시도한다. 12월 8일 토닥에서 진행된 이번 지리산쌀롱 번외편은 남원의 김양오 작가를 모시고 남원의 역사를 콘텐츠로 책을 펴낸 김양오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남원 춘향제는 사실 민중의 저항정신에서 시작된 축제다 김양오 작가는 자신이 입은 옷을 먼저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60년 이상의 세월이 담긴 그 옷을 선물한 사람은 93세 할머니였다. “풍물놀이. 옛날에는 농악이라고 했죠. 조선시대 때 농악은 다 남자들이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남원에 여성 농악단이 최초로 생겼어요. 1960년 서울에서 전국농악대회에서 1등 대통령상을 받은 농악대였어요. 전부 남성 농악단이였는데 유일한 여성 농악단으로 올라가서 1등까지 해낸 남원 여성 농악단. 그 대통령상을 받은 그 분, 장복녀 할머니께서 뜬 옷이에요.” 짙은 풀색 옷자랑. 그러다가 남원의 전국 최초 여성 농악단 자랑. 이야기는 최초 농악단이 받은 대통령상 자랑으로 이어지더니 그 자랑은 다시 옷으로 돌아왔다. 김양오 선생님이 입고 있는, 60년의 세월을 지나온 그 옷을 만든 사람은 전국 최초 여성 농악단의 상쇠(꽹과리를 연주하는 농악단의 리더)며 1960년 남성 농악단 사이에서 유일한 여성 농악단으로 참가해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연달아 이어졌다. 60년 된 옷이라는 것도 흥미로운데 전국 최초 여성 농악단의 상쇠이고 거기다 대통령상까지 받았다니. 그렇지만 진짜 흥미로운 이야기는 장복녀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최봉선을 아세요? 남원 하면 떠오르는 중요한 이미지 중 하나는 춘향이다. 2023년으로 93회차를 맞이한 춘향제를 통해 춘향을 기린다. 그냥 오래된 축제 같지만 93회를 거꾸로 계산해보면 그 시작이 일제강점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춘향제 다들 아시죠? 춘향제 가면 뭐해요? 맛있는 거 먹고, 춘향선발대회도 보고, 불꽃놀이도 보고, 미꾸라지 잡고 공연도 보고.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이런 춘향제를 왜 했을까? 어떻게 했을까?” 정절과 의리의 이야기로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고 있는 춘향전은 일제 강점기에 더 유명해졌다. 1882년 일본 아사히 신문에 연재가 되기 시작하면서 일본에도 널리 알려지게 됐다. 조선시대에 교방청에서 관기를 관리해왔지만 일제강점기 때 교방청을 다 없애면서 기생들은 예술협동조합의 형태로 일을 이어나가게 됐다. 평양과 경성 진주, 차례로 생긴 예술협동조합 권번은 남원권번으로 이어졌다. 전라도에서는 제일가는 예술조합이었다. 거기에 있던 최봉선 선생. 춘향 영정이 친일 작가의 작품 논란이 일자 영정 연구에 들어갔던 김양오 작가는 춘향제를 만든 게 최봉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지만 최봉선을 기록한 내용은 없었다. 춘향제를 위해 모든 재산을 헌납하고 춘향제를 위해 평생을 애썼다는 기록 외에 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최봉선이라는 인물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 분이 나타났는데 그분이 바로 남원 여성 농악단의 상쇠 장복녀 선생. 천천히 최봉선이라는 인물의 실마리를 풀어줬다. 최봉선은 실력이 대단한 국악인이었다. 명창으로 이름을 날려 경성 라디오 방송에 가서 녹음을 하기도 했다. 당시 예술 공연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부유해야 하며 권번에서 공연팀을 부를 수 있는 재력이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일본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업 홍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원 권번의 기생들은 전라북도에서 유일하게 일본말을 하지 않았고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전달하는 통로를 열었다. 일본 헌병들과 경찰들이 공연 요청하더라도 응대하지 않았을 정도로 민족적 성향이 강한 이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전국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춘향사당을 건립할 때 남원권번을 중심으로 평양과 경성, 진주, 부산 등 전국의 권번에서 성금을 냈고 제 1회 춘향제가 열렸던 1931년에는 전국에서 100여명의 기생들이 모여 춘향제 제사를 지내고 판소리 경연대회를 열었다. 사실 춘향제는 문화로 승화시켰던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특히 초기 춘향제를 만든 인물들은 최봉선을 포함해 모두 남원지역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지금의 춘향제는 민족적 색채는 전혀 없고 그저 ‘어리고 예쁜’ 춘향이 상을 드러내면서 먹고 즐기는 축제의 형태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있지만 춘향제의 시작은 그렇지 않았다. 문제가 된 영정 역시 친일 작가인 김은호가 그린 그림으로 ‘가부키 춘향’이라는 질타를 받고 있다. 앳된 외모를 강조하고 신윤복의 미인도를 참고한 형태로 그려졌다. 하지만 본래 춘향사당에 있던 영정은 독립운동가인 강신호와 임경수가 함께 만들었다. 30대 중반의 어사 부인의 모습이었다. 본래 영정은 일제의 탄압에도 민족을 위하겠다는 정절의 의지가 담겨있었으나 새로 만들어진 영정을 본래 영정 위에 덮어 봉안하게 되면서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의미로 수모를 겪게 됐다. 시간이 흘러 독립을 거쳤지만 영정은 그대로 봉안되었고 누군가 김은호의 그림을 칼로 찢어버렸다. 하지만 1965년 박정희 정권의 내각수반이었던 송요찬이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예쁜' 춘향이로 대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친일작가인 김은호는 다시 춘향이를 그렸다. 그러면서 춘향제 역시 그저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관광 축제가 되어버렸다. 1965년 조선일보에서 최봉선은 관에 밀려난 고전 춘향의 초상화를 반드시 돌려놓겠다는 글을 올렸다. 그리고 1966년 신문기사를 마지막으로 최봉선이라는 이름은 남원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지게 됐다. 잊혀질 위기에 있던 그 민족적인 역사를 악착같이 취재하고 발굴했던 김양오 작가는 이 이야기를 콘텐츠로 책 ‘백년 동안 핀 꽃’을 펴냈다. 백년 동안 핀 꽃 백년 동안 핀 꽃은 바로 무궁화다. 옮기기 전 본래 춘향사당 마당에 무궁화가 있었고 100년 동안 꽃을 피워내던 무궁화는 죽어버렸다. 생기를 잃어가던 무궁화를 살리고 싶었던 김양오 작가는 무궁화연구소 소장님을 남원에 모셔서 본래 무궁화 나무의 가지를 쳐서 연구소로 옮긴 뒤 50주를 무사히 키워냈다. 무궁화가 8월 15일 첫 송이를 피워냈다며 김양오 작가는 그 우연함에 감탄했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3·1운동은 전국으로 번져 4월 4일 남원 시장 장날에도 열렸다. 3월 1일 종로 탑골공원에서 일어난 3·1운동은 모두가 알지만 4월 4일 남원에서 열린 만세운동은 대부분 알지 못한다.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 기념해로 전국적으로 크게 3·1운동 기념행사를 준비했는데 남원에서는 김양오 작가가 준비위원장이 되어서 남원만의 3·1운동 기념행사를 기획하게 된다. 100주년 기념행사에 100일의 준비 기간, 학생 자원봉사자 100명, 난타에서 북치는 사람이 100명이 모여 광한루에서 만인만북 문화제를 열었다. 이때에 산내놀이단에서도 극을 만들어 함께했다. 인구의 서울집중화가 최고치를 찍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서울로 모이면서 문화 인프라와 콘텐츠 역시 서울 중심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지역의 콘텐츠와 지역의 역사는 외면받고 있다. 한국의 역사가 서울의 역사가 되어버리는 무겁고 참담한 미래. 지역의 이야기를 그저 흘려보내기만 한다면 지역의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리는 미래가 올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김양오 작가는 더욱 이 지역의 중요한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글 | 최학수 (주간함양) 사진 | 최학수 (주간함양) |
2023 지리산쌀롱
작은변화베이스캠프 들썩에서 4회(6월, 7월, 10월, 11월)에 걸쳐 2023년 지리산쌀롱을 진행합니다.
지리산쌀롱은 지리산 안팎의 활동가들이 모여 지역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교류하는 자리입니다.
올해는 "지리산X○○지역"을 테마로 지리산과 다른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고자 합니다.
각 지역을 거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분들을 초대하여 그 지역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변화의 경험을 나누고, 꿈꾸는 지역의 미래를 상상해 봅니다.
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에서 진행하는 지리산쌀롱은 지리산 안팎의 활동가들이 모여 지역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교류하는 자리다. 특히 올해 진행되는 지리산쌀롱은 “지리산 X○○”을 주제로 지리산과 다른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고자 시도한다.
12월 8일 토닥에서 진행된 이번 지리산쌀롱 번외편은 남원의 김양오 작가를 모시고 남원의 역사를 콘텐츠로 책을 펴낸 김양오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남원 춘향제는 사실 민중의 저항정신에서 시작된 축제다
김양오 작가는 자신이 입은 옷을 먼저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60년 이상의 세월이 담긴 그 옷을 선물한 사람은 93세 할머니였다.
“풍물놀이. 옛날에는 농악이라고 했죠. 조선시대 때 농악은 다 남자들이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남원에 여성 농악단이 최초로 생겼어요. 1960년 서울에서 전국농악대회에서 1등 대통령상을 받은 농악대였어요. 전부 남성 농악단이였는데 유일한 여성 농악단으로 올라가서 1등까지 해낸 남원 여성 농악단. 그 대통령상을 받은 그 분, 장복녀 할머니께서 뜬 옷이에요.”
짙은 풀색 옷자랑. 그러다가 남원의 전국 최초 여성 농악단 자랑. 이야기는 최초 농악단이 받은 대통령상 자랑으로 이어지더니 그 자랑은 다시 옷으로 돌아왔다. 김양오 선생님이 입고 있는, 60년의 세월을 지나온 그 옷을 만든 사람은 전국 최초 여성 농악단의 상쇠(꽹과리를 연주하는 농악단의 리더)며 1960년 남성 농악단 사이에서 유일한 여성 농악단으로 참가해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연달아 이어졌다. 60년 된 옷이라는 것도 흥미로운데 전국 최초 여성 농악단의 상쇠이고 거기다 대통령상까지 받았다니. 그렇지만 진짜 흥미로운 이야기는 장복녀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최봉선을 아세요?
남원 하면 떠오르는 중요한 이미지 중 하나는 춘향이다. 2023년으로 93회차를 맞이한 춘향제를 통해 춘향을 기린다. 그냥 오래된 축제 같지만 93회를 거꾸로 계산해보면 그 시작이 일제강점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춘향제 다들 아시죠? 춘향제 가면 뭐해요? 맛있는 거 먹고, 춘향선발대회도 보고, 불꽃놀이도 보고, 미꾸라지 잡고 공연도 보고.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이런 춘향제를 왜 했을까? 어떻게 했을까?”
정절과 의리의 이야기로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고 있는 춘향전은 일제 강점기에 더 유명해졌다. 1882년 일본 아사히 신문에 연재가 되기 시작하면서 일본에도 널리 알려지게 됐다.
조선시대에 교방청에서 관기를 관리해왔지만 일제강점기 때 교방청을 다 없애면서 기생들은 예술협동조합의 형태로 일을 이어나가게 됐다. 평양과 경성 진주, 차례로 생긴 예술협동조합 권번은 남원권번으로 이어졌다. 전라도에서는 제일가는 예술조합이었다. 거기에 있던 최봉선 선생.
춘향 영정이 친일 작가의 작품 논란이 일자 영정 연구에 들어갔던 김양오 작가는 춘향제를 만든 게 최봉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지만 최봉선을 기록한 내용은 없었다. 춘향제를 위해 모든 재산을 헌납하고 춘향제를 위해 평생을 애썼다는 기록 외에 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최봉선이라는 인물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 분이 나타났는데 그분이 바로 남원 여성 농악단의 상쇠 장복녀 선생. 천천히 최봉선이라는 인물의 실마리를 풀어줬다. 최봉선은 실력이 대단한 국악인이었다. 명창으로 이름을 날려 경성 라디오 방송에 가서 녹음을 하기도 했다.
당시 예술 공연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부유해야 하며 권번에서 공연팀을 부를 수 있는 재력이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일본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업 홍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원 권번의 기생들은 전라북도에서 유일하게 일본말을 하지 않았고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전달하는 통로를 열었다. 일본 헌병들과 경찰들이 공연 요청하더라도 응대하지 않았을 정도로 민족적 성향이 강한 이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전국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춘향사당을 건립할 때 남원권번을 중심으로 평양과 경성, 진주, 부산 등 전국의 권번에서 성금을 냈고 제 1회 춘향제가 열렸던 1931년에는 전국에서 100여명의 기생들이 모여 춘향제 제사를 지내고 판소리 경연대회를 열었다. 사실 춘향제는 문화로 승화시켰던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특히 초기 춘향제를 만든 인물들은 최봉선을 포함해 모두 남원지역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지금의 춘향제는 민족적 색채는 전혀 없고 그저 ‘어리고 예쁜’ 춘향이 상을 드러내면서 먹고 즐기는 축제의 형태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있지만 춘향제의 시작은 그렇지 않았다.
문제가 된 영정 역시 친일 작가인 김은호가 그린 그림으로 ‘가부키 춘향’이라는 질타를 받고 있다. 앳된 외모를 강조하고 신윤복의 미인도를 참고한 형태로 그려졌다. 하지만 본래 춘향사당에 있던 영정은 독립운동가인 강신호와 임경수가 함께 만들었다. 30대 중반의 어사 부인의 모습이었다. 본래 영정은 일제의 탄압에도 민족을 위하겠다는 정절의 의지가 담겨있었으나 새로 만들어진 영정을 본래 영정 위에 덮어 봉안하게 되면서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의미로 수모를 겪게 됐다.
시간이 흘러 독립을 거쳤지만 영정은 그대로 봉안되었고 누군가 김은호의 그림을 칼로 찢어버렸다. 하지만 1965년 박정희 정권의 내각수반이었던 송요찬이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예쁜' 춘향이로 대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친일작가인 김은호는 다시 춘향이를 그렸다. 그러면서 춘향제 역시 그저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관광 축제가 되어버렸다.
1965년 조선일보에서 최봉선은 관에 밀려난 고전 춘향의 초상화를 반드시 돌려놓겠다는 글을 올렸다. 그리고 1966년 신문기사를 마지막으로 최봉선이라는 이름은 남원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지게 됐다.
잊혀질 위기에 있던 그 민족적인 역사를 악착같이 취재하고 발굴했던 김양오 작가는 이 이야기를 콘텐츠로 책 ‘백년 동안 핀 꽃’을 펴냈다.
백년 동안 핀 꽃
백년 동안 핀 꽃은 바로 무궁화다. 옮기기 전 본래 춘향사당 마당에 무궁화가 있었고 100년 동안 꽃을 피워내던 무궁화는 죽어버렸다. 생기를 잃어가던 무궁화를 살리고 싶었던 김양오 작가는 무궁화연구소 소장님을 남원에 모셔서 본래 무궁화 나무의 가지를 쳐서 연구소로 옮긴 뒤 50주를 무사히 키워냈다. 무궁화가 8월 15일 첫 송이를 피워냈다며 김양오 작가는 그 우연함에 감탄했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3·1운동은 전국으로 번져 4월 4일 남원 시장 장날에도 열렸다. 3월 1일 종로 탑골공원에서 일어난 3·1운동은 모두가 알지만 4월 4일 남원에서 열린 만세운동은 대부분 알지 못한다.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 기념해로 전국적으로 크게 3·1운동 기념행사를 준비했는데 남원에서는 김양오 작가가 준비위원장이 되어서 남원만의 3·1운동 기념행사를 기획하게 된다. 100주년 기념행사에 100일의 준비 기간, 학생 자원봉사자 100명, 난타에서 북치는 사람이 100명이 모여 광한루에서 만인만북 문화제를 열었다. 이때에 산내놀이단에서도 극을 만들어 함께했다.
인구의 서울집중화가 최고치를 찍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서울로 모이면서 문화 인프라와 콘텐츠 역시 서울 중심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지역의 콘텐츠와 지역의 역사는 외면받고 있다. 한국의 역사가 서울의 역사가 되어버리는 무겁고 참담한 미래. 지역의 이야기를 그저 흘려보내기만 한다면 지역의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리는 미래가 올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김양오 작가는 더욱 이 지역의 중요한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글 | 최학수 (주간함양)
사진 | 최학수 (주간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