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변화기록원[구례] [뭉치고뭉개기] 용서하는 절기 동지에 팥죽은 드셨나이까 - 지리산사람들 동지 모임에 다녀와서 쓰는 글

2023-12-26

 

 

용서하는 절기 동지에 팥죽은 드셨나이까

지리산사람들 동지 모임에 다녀와서 쓰는 글 

 

 

글 / 문홍현경

 

 

 

** 뭉치고 뭉개기 12월호는 특별히 일기처럼 반말로 썼어요. 이해해 주세요.

 

 

 

“왜 그짝 거를 또 퍼 간데?”

 

 

화엄사 공양간에서 팥죽을 퍼 담는 내게 뒷줄에 선 어느 아주머니가 물었다. 내가 한쪽 솥에서만 팥죽을 퍼 담지 않고 양쪽 솥에서 한 국자씩 퍼 담는 모습을 보고 뭔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신 모양이었다.

 

 

“아, 저는 국물을 좀 먹고 싶어서요.”

 

 

이상하게 내 앞에 놓여 있던 솥에서는 사람들이 팥국물만 퍼 갔는지 새알과 밥알만 걸쭉하게 엉겨 있었고, 다른 한쪽 솥에서는 사람들이 새알과 밥알만 건져 갔는지 팥국물만 잔뜩 있었다. 새알만 먹으면 퍽퍽하고 국물만 먹으면 헛헛하니 고루 먹고 싶은 욕심에 양쪽 솥에 손을 댔다.

 

 

양껏 퍼 온 그릇을 흐뭇하게 보며 새알을 하나 먹었다. 따뜻할 거로 기대했는데, 다 식어 차가운 죽이었다. 실망은 잠깐, 그때 깨달음 하나가 띵 하고 다가왔다. 

 

 

‘나는 또 욕심을 부리고 있다.’

 

 

주시는 대로 내 앞 솥에서만 퍼 담았어야 했는데 손을 뻗어 다른 솥에까지 기웃거리다니. 나 때문에 뒷사람이 불편하지 않았겠나. 게다가 벌써 두 그릇째였다. 여럿이 조금씩 먹어야 할 터인데 나처럼 욕심부린 사람들 때문에 죽이 모자라서 이렇게 식은 죽이라도 내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공양간에서 일하신 분들이 식은 죽도 못 드시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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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은 죽.

 

 

 

내가 너무 예민한가? 별의별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추운 겨울 입김이 나오는 부엌에서 새알을 빚던 때를 떠올리니 여기서 봉사하시는 분들에게 더욱 미안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벌써 퍼 온 것을. 새알 하나 먹을 때마다 어깨에 짐 하나가 더해지는 마음이 들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다 돈을 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무엇이든 받으면 돌려주어야 순리라는 것. 그런데 꼭 받은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건 아니다. 오늘은 여기서 받고 내일 저기에 돌려줄 수 있다. 선배에게서 받고 후배에게 돌려주듯. 

 

 

‘내 오늘 여기서 먹은 팥죽은 다른 곳에서 돌려드리리다.’

 

 

그리 생각하고 먹으니 새알 하나, 국물 한 숟가락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지리산사람들 동지 모임으로 왔다가 모임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팥죽 두 그릇 얻어먹고는 벌써 빚을 여럿 꾸어 놓고 있었다. 그런데 내 어둑한 눈엔 세상일이 다 그런 것 같다. 빚지지 않고 살 수 있는 존재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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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모임 때 모습.

 

 

 

고개를 들어 동지 모임에 온 친구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니 서로 빚지고 빚 갚는 사이 같았다. 다람쥐와 참나무 같은 사이. 구례, 남원, 산청, 하동, 함양 다섯 마을에 사는 이들이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제힘 닿는 대로 지리산을 지키고 있으니 우리는 서로 빚지고 빚 갚는 사이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저이가 해 주고, 저이가 닿지 못하는 일에 내가 닿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 하는 동지 모임은 지리산에 빚 갚으며 사는 사람들이 한 해를 돌아보는 자리다. 『때를 알다 해를 살다』 책에는 동지제(冬至祭)가 “‘용서하고 용서 구하는 날’로서 모든 존재에게 해를 끼친 행동을 기억하고 용서를 구하고, 또한 나에게 잘못을 한 사람들도 용서하며 얽히고설킨 한 해 빚을 깨끗하게 마무리”하는 일이라고 했다. 마음에 진 응어리를 풀고 하늘의 봄을 새롭게 맞이하기 위한 자리인 셈이다.

 

 

신기하게 오늘은 다섯 마을에서 온 이들 얼굴만 봐도 좋았다. 나도 내가 신기할 만큼 들떠 있었다. 이것이 동지(同志) 효과인가. 헤실헤실 실없이 웃으니 윤주옥 대표님이 너 오늘 왜 그리 기분 좋냐며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따뜻했다. 당신들이 있으니 좋지요, 라고 말하려다가 부끄러워서 팥죽을 두 그릇이나 먹어서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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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모임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준 지리산방랑단과 다행수밤.

 

 

 

그치만 지리산권 다섯 시군에서 벌어진 일들을 들을 때는 웃을 수가 없었다. 구례 사람들은 양수댐과 지리산골프장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벌써 백일 넘게 아침마다 팻말 운동을 해 왔고, 남원 사람들은 산악열차를 막으려고 두 해가 넘게 싸워 오고 있었다. 또 산청에서는 케케묵은 케이블카 얘기에 더해 덕산댐 공사 얘기가 나와서 또 골칫거리가 늘었고, 하동에서는 마구잡이로 태양광을 놓아 돈 만지려는 인간들과 20년째 빚만 남긴 갈사산단 문제로 난개발을 걱정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함양은 이름도 낯선 데이터 센터 건설 문제와 태양광 이격거리 완화 문제, 소수력발전 건설 이후 물이 모자라 생태계가 위험에 처한 문제 등으로 몸살 앓고 있었다.

 

 

그래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갖가지 종합 막개발 세트를 선물하는 이들에 맞서 꾸준히 ‘살리기’에 진심인 이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말이다. 지난 동지 때도 같은 자리에서 만나 막개발 문제로 한숨을 쉬던 사람들이었지만, 한 해가 가도 또 이렇게 모이지 않았나. 그게 희망이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만 따지면 멸망만 보인다. 다들 사라지지 않고 옆에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또 고마운 일이 많다. 구례뿐 아니라 어디에도 양수댐 짓지 말라고 말하는 지구인다운 생각에 고맙다. 남원 시민단체들이 환경 관련 조례를 통과시키고 주민소환제를 신청하기 위한 서명 운동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고맙다. 하동에서 30년을 내다보고 산불 조사 사진을 계속 찍겠다는 의지가 고맙다. 우습게도 윤석열 정부 들어 알앤디 연구비가 축소되어 산악열차 사업이 미뤄진 것도, 섬진강 새와 수달 그리고 물살이를 조사하며 지치지 않고 기록해 오는 일도 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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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그대로!

 

 

이렇게 동지 모임을 열어 한자리에 모이게 해 준 지리산사람들과 다섯 시군을 연결해 온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에도 고맙다. 올해 다섯 고을을 돌아다니며 ‘나의 지리산운동 선언’을 기록해 온 이들에게도 고맙다. 이들을 대표하여 주리가 지난 기록들을 정리해 읊어 주었다. 겉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 자기 마음에 제 색깔대로 선언 하나씩 읊었으리라. 이들에게 빚 갚으려면 나도 팥죽값은 해야지. 다가오는 해엔 무슨 일로 빚을 갚을까. 다 같이 다음 해에 지리산과 둘레를 지키기 위해 무얼 해 볼지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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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운동 선언 나누기.

 

 

 

집에 돌아와 종이에 이것저것 끄적였다. 했던 일들도 써 보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도 써 보고. 다정함을 잃어 가던 지난날이 떠올라 용서를 구해도 본다. 내게 무례했던 마음도 용서해 본다. 그러고는 다행이라고 말했다. 

 

 

생명체가 사라져도 아무렇지 않은 ‘집단 무감동’에 빠진 세상에서 아직 예민하게 사는 듯해서 다행이었다. 그건 순전히 정말로 둘레 친구들 덕분이다. 오늘 만난 지리산의 사람들, 섬진강의 사람들 덕분이다. 도토리 모자냐 빤쓰냐를 두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내 친구들이다. 도토리를 오래 들여다보고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사람들만이 그런 우스갯소리도 할 수 있을 터. 이들은 물이 모자라 힘겨워할 물살이들을 걱정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베어진 나무를 보고 충격을 먹을 줄 아는 사람들. 그들 덕에 산다. 감동하고 동요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친구들 덕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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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과 섬진강을 지키기 위해 다음 해 할 일을 끄적여 본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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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날 새파란 하늘이 우리 마음을 닮았다.

 

 

 

동지가 지났는데도 아직 붉은 팥죽 삼키지 못한 분들이 많을 듯하다. 팥은 콩보다 거두기가 까다롭던데. 익는 대로 톡 하고 껍질이 터져서 여기저기 팥알이 굴러다니니, 나처럼 게으른 사람한테는 돌돌 말린 빈 깍지만 주는 에누리 없는 팥님. 그런 팥님을 잘 갈무리해서 팥죽으로 먹기까지 진짜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가. 한 해 가운데 가장 밤이 깊고 긴 동지에 붉은 팥죽을 쑤어 나누어 먹던 옛 문화는 어쩌면 이렇게 귀한 팥죽을 주신 모든 생명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예민한 사람들 덕분에 생겨난 게 아니었을까. 

 

 

해마다 찾아오는 동지에 귀한 팥죽을 먹으려면 이 예민한 사람들이 계속 있어야 한다. 고마워할 줄 알고, 미안해할 줄 알고, 용서할 줄 아는 예민한 마음들이 산과 강을 지킨다. 산과 강이 온전해야 팥죽도 먹을 수 있다. 산과 강을 그대로 두자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팥죽을 먹을 수 있다. 동지가 동지다울 수 있다. 

 

 

다시 한번 팥죽 맛을 떠올려 본다. 꼴깍 침 넘어간다. 다음 해에도 무사히 팥죽 먹을 수 있기를. (한 해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고마운 팥죽 드시고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쓴 ‘집단 무감동’이라는 표현은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이 쓴 책 『시간과 물에 대하여』에서 빌려 왔습니다. 지은이는 오늘날 사람들이 산성화, 해빙, 온난화, 상승 같은 단어들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수많은 기후위기 증거들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은 채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떠올리며 집단 무감동을 경험하는 듯하다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 동물들은 잃어버린 감동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요….

 

 

 

글 쓴 사람. 문홍현경

명랑해지고 싶은 기후활동가, <벗자편지> 함께지은이, 독립출판 니은기역 이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