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며 산 15년 남원살이, 더 확실한 기록이 필요하다 글 / 김양오 예전에 어떤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고해소에서 할머니들의 고백을 들으면 난감할 때가 있다고 한다. “사는 게 죄지요.” 하고 고백을 하시는 할머니들께 어떤 보속을 드려야 할 지 난감하다고.
오래된 상자에서 나온 중학교부터 대학 때까지 일기장. 이건 평생 쓰레기로 분류될 수 없다. 이삿짐을 싸다 보니 나도 모르게 사는 게 죄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웬 쓰레기들을 그렇게 만들며 살았는지, 정말 사는 게 죄다. 내일이면 15년동안 산 남원을 떠난다. 아니, 자정이 넘었으니 오늘이구나. 이제 8시간 뒤면 이삿짐 차가 올 것이다. 글을 쓰다가 짐 싸다가 학교 수업하다가 짐 싸고 청소하다가 벌써 자정이 넘어 버렸다. 식구들이 대충 정리하고 떠난 집에 혼자 밤을 지새며 정리하고 어떻게든 마지막 글을 남원에서 넘기고자 이렇게 분투하고 있다. 2023년 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의 남원 기록활동가로 지내면서 남원 시민들의 활동 11건을 기록했다. 그리고 마지막 이 원고는 지난 1년을 회고하라는 명을 받았다. 허나 이사를 앞두니 저절로 15년을 회고하고 있다. 15년 전 나는 마흔 살이었고 열 살, 일곱 살, 다섯 살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 고향 곡성이 가까운 남원으로 이사왔다. 남편 때문에 온 거냐고? 아니다. 결혼해서 10년간 인천과 곡성을 오가다 남원 특히 아름다운 요천에 반했고 결국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져 이사를 올 수 있었다.
15년동안 즐겁게 산 남원. 2019년 쯤에 우리 막내가 경비행기 체험을 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우리 동네 중심으로 찍은 것이다. 그렇게 원하던 남원에 와서 정말 즐겁게 열심히 살면서, 수많은 활동을 했고 그 활동을 기록했다. 처음엔 개인 블로그와 남원생협 홈페이지에 글을 썼다. 아이들 셋 키우면서 텃밭 농사 짓고 요천과 동네 하천, 동네 산과 지리산에서 노는 이야기를 개인 블로그에 썼다. 블로그를 보는 사람마다 남원 홍보대사라고 칭찬을 했다. 내 글을 보고 남원으로 놀러 오는 블로그 이웃들도 있었고 가까운 구례에는 진짜 이웃도 생겼다. 아이들 선물을 보내주는 분들도 여럿 계셨다. 오죽하면 방송국에서 삼남매 키우는 이야기 찍고 싶다고 섭외까지 들어왔을까? 그 정도로 재밌게 살고 재밌게 기록했다. 지금은 아이들이 공개하지 못하게 해서 다 막아놨다. 개인정보가 중요한 세상이라! 아이들도 크고 생협 활동을 매우 활발하게 하면서 아이쿱 생협 블로그 기자와 신문 기자 활동을 부지런히 했다. 남원 지역 소비자 조합원 활동과 생산지 탐방 기사를 썼다. 친환경 쌀농사를 짓는 농부를 만나기도 하고, 깨끗하게 한우를 키우는 축사를 방문하기도 하고, 태풍에 싹 다 떨어진 배 과수원을 방문해서 기사를 써서 올렸다. 덕분에 소비자뿐 아니라 생산자를 깊이 만날 수 있어서 아주 좋았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 아이쿱 신문에 생산자들의 쓴소리가 빠진 채 내 글이 실렸다. 나도 생산자들의 한숨 소리는 조심스럽게 담았는데 그것마저도 아이쿱 생협은 빼고 실었다. 두 번이나 그런 일을 겪고는 기자 노릇을 그만 뒀다. 너무 소비자 중심으로 변해가는 생협이 걱정스럽고 실망스러웠다. 이제는 협동조합이 아닌 ‘기업’이라고 대놓고 얘기하니 내가 애정을 갖고 뜨겁게 활동하던 생협이 아니다. 그래도 8년동안 남원생협 이사, 블로그 기자, 식생활센터 활동가로 전국구로 뛰어다니면서 많이 성장한 것은 분명하다.
뜨겁게 마을 활동을 했던 본부 생협 활동을 그만 두고 나오자마자 내가 사는 동네에 있는 남원사회복지관에서 러브콜이 왔다. 마을 활동가가 필요하다고. 생협 활동 속에 마을 활동도 포함되어 있어서 그동안 함께 마을모임도 하고 아이들과 마을 탐사도 했었는데 이제 제대로 ‘마을 만들기’를 해보자고 나를 마을 활동가로 기용을 하겠다는 것이다. 활동비도 준다니 수락. 그렇게 해서 ‘고향 같은 마을 만들기’를 목표로 마을에서 젊은 엄마들을 찾고 모아서 수많은 활동을 했다. 마을 신문도 몇 차례 만들고 마을 활동 일지를 써야 했다. 그 일지는 복지관에 있고 나한테는 없다. 2020년은 마을 활동이 최정점에 다다랐던 해다. 코로나19가 우리나라에도 퍼지기 시작할 때 온 국민이 벌벌 떨었다. 그런데 대규모 확진자가 나온 대구 지역 환자들이 병원이 부족해 남원 의료원으로 이송되어 왔을 때 우리는 의료진들 간식과 환자들 간식을 만들어서 보내줬다. 다른 지역에서는 코로나 확진자를 받지 않으려고 하는데 남원에서는 어서 오라고 현수막도 곳곳에 달아 놓고 시민들이 손편지가 씌인 간식을 보내주지 사람들이 감동을 많이 받았다. 여기저기 중앙 언론에도 나오고 그랬다. 코로나19가 점점 확산되던 그 해 여름 남원에 큰 수해가 났다. 우리 마을 주촌천 양쪽의 주택가도 심각하게 물에 잠겨 수재민이 많이 발생했다. 우리는 수재민들을 어떻게든 돕자고 결의를 했고 성금을 모아 연잎밥을 만들어 수재민과 자원봉사자들에게 드렸다. 수해 복구에 애쓴 군인들에게 샌드위치도 만들어 보냈다. 그밖에 한 일이 참 많다. 그래서 메스컴에도 많이 보도됐다. 국방신문에 사진도 실렸다. 그런 모든 활동을 마을 활동 일지에 다 썼다.
남원 역사 유적 답사 자료집부터 남원 역사 관련 글을 담은 책자들 책 형태로 만들어 낸 기록물도 꽤 많이 만들었다. 2009년 남원에 이사오자마자 내가 시작한 활동은 하천 생태 탐사와 남원 역사 유적지 탐방이었다. 생태 탐사는 전문가를 따라다니면서 배우는 것이었고 유적지 탐방은 남원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조합원 한 분과 함께 공부하면서 찾아다녔다. 사학과를 나오고 역사, 특히 유적 답사를 너무나 좋아하는 나는 해설을 해 준 조합원의 이야기에 나름대로 조사를 더 해서 블로그에 알찬 글을 올렸다. 2년 뒤에는 자료집도 냈다. 그 자료집 덕분에 초등학교 아이들의 역사 기행 강사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남원 역사 기행이 올 해까지 대충 따져봐도 그 횟수가 최소 500회에 이른다. 남녀노소 남원사람, 외지사람, 해외입양인들과 발달장애인까지 모시고 답사를 다녔으니 참 다양하게 많이도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유적 답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남원에 대한 공부를 더 깊이 하게 됐고 결국 여러 지면에다 역사 관련 글을 쓰기도 했다. 남원 시민들이 만든 소식지(계간 여뀌울)에 글을 썼고, 남원시(남원다움관)에서 발행하는 기록화 자료집에 우리동네 ‘노암동’의 과거와 현재를 담는 글을 썼다. 멋진 표지(눈 쌓인 금암봉과 금수정) 사진도 내가 찍은 것이다.
남원 시민들이 만든 소식지 여뀌울 그리고 아주 특별한 기록집도 하나 만들었다. 2019년 3.1운동(정확히 혁명이라고 불러야 한다. 일제시대에는 실제로 혁명이라고 불렀다.) 100주년을 기념하는 아주 큰 시민 행사를 했는데 그 행사의 ‘백서’를 만들었다. ‘남원 만인만북문화제 백서’다. 누가 맨 처음 이 일을 제안했고 어떻게 준비위원회가 꾸려졌고 준비위원들이 어떤 활동을 했고 행사 당일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거의 날마다 기록하다시피 했다. 그 기록을 나 혼자 했고 엮었다. 이 일을 맨 처음 하자고 제안한 사람이 나였고 준비위원장을 맡았으니 날마다 밴드에 그날 그날 활동 상황을 기록했다. 그래도 백서까지 안 만들어도 되는데 그 활동이 너무 뜨거웠기에 꼭 만들고 싶어서 했다. 그러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 준비위원회 결성한 날부터 2월 28일까지 활동한 날 수가 딱 100일이었다는 것이다. 3.1혁명 100주년 맞이 행사가 에 딱 100일동안 시민들이 활동해 거대한 행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수천명이 참여하는 시민 문화제와 거리 행진을 했다. 시에서 지원금을 못 받아 1000만원 가량의 행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음식 바자회도 하고 성금도 모금하고 기념 티셔츠와 소고도 팔아서 1300만원을 모았고 전라북도 의회의 지원을 간신히 얻어내 모두 2천만원을 확보했다. 영화 찍듯이 홍보 영상도 만들었다. 정말 준비위원들은 독립운동가가 된 듯한 마음자세로 활동했다. 그 특별한 과정을 기록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행사 끝나고 다들 각자 삶터로 돌아가 쉴 때 나는 손가락 관절이 아플 정도로 글을 써서 백서를 완성했다. 그리고 전국 주요 기관에 보냈다. 국사편찬위원회, 보훈처, 국가기록원... 남원의 독립운동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100주년 기념 사업을 꼭 기록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편지와 함께.
할머니들의 삶을 받아 적은 생애구술사 책 2019년 겨울에 남원시립김병종 미술관 로비에서 특별한 출판 기념회가 있었다. 미술관이라는 데를 처음 오시는 허리 굽은 할머니 네 분이 주인공이다. 남원시 인월면 신촌 마을에 사는 네 분의 할머니들. 험한 세상 사시느라 학교를 하나도 못 다니고 이 나이 드시도록 한글도 못 깨우쳐서 이제야 한글 학교를 다니시는 분들이다. 그런데 무슨 출판 기념회? 이 분들의 이야기를 우리가 듣고 기록해 드렸다. 나를 포함해 네 명이 각자 한 분씩 맡아서 이야기를 듣고 재구성해 글을 쓰고 사진 전문가인 시민들이 사진을 찍고 한 청년이 영상을 찍어 우리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겼다. 팔순이 넘으신 할머니들의 기억은 처음부터 분명하지 않았다. 열 번 가까이 만나면서 묻고 또 물으며 말씀하신 것을 녹음해 집에 와서 암호 풀듯이 풀어 썼다. 쉽지 않았다. 이것이 내 이름 걸고 낸 첫 책이다.
쉰 살이 되면서 역사 동화를 쓰기 시작해 네 권을 냈다. 할머니들 생애 구술사 책 작업을 함께 했던 네 명의 작가 중에 한 분이 출판사 대표였다. 서울에서 출판사를 하시다가 지리산 근처에 사시려고 내려오신 분이었는데 그 때 나에게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남원 도공들 이야기를 동화로 써 보라’고 권하셔서 은쾌히 수락,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자료 수집하고 글을 쓰면서 일본 가고시마까지 갔다왔다. 남원에서 잡혀간 심당길의 15대 후손 심수관을 만나고 그 분들이 살아온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서다. 드디어 2020년 6월에 첫 역사동화 <도자기에 핀 눈물꽃>이 나왔다. 내가 동화작가가 된 것이다. 그 뒤에 1년에 한 권씩 따박따박 책을 냈다. 춘향제를 만든 사람들과 역사를 다룬 <백 년 동안 핀 꽃>, 남원의 국가민속문화재이며 노블리스오블르제를 실천한 죽산 박씨 고택을 그림책으로 만든 <꿈과 마음이 담긴 집 몽심재>, 올 여름 일제 시대 우리 민족의 아픈 삶과 이화중선 명창의 불꽃 같은 삶을 다룬 <아리아리아라리요> 가 나왔다.
3년 동안 쓴 장편 역사 동화 세 권 나이 50에 이렇게 어렵지 않게 책을 줄줄이 낼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일기과 편지로 다져진 기본기가 있어서였다. 이삿짐을 싸다보니 아주 오래돼 바스러지는 종이 상자가 여럿 나왔다, 열어 보니 중학교 1학년때부터 쓴 일기장들과 수많은 편지들이었다. 나는 참 많은 사람들하고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많은 글을 썼는데도 작가가 안됐으면 그게 이상할 정도다. 이런 바탕이 있어서인지 나는 스물 다섯 살 때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하는 글쓰기 지도반과 아동문학작가 학교에 들어가 배웠다. 당시 이오덕 선생님을 포함해 쟁쟁한 강사진들에게 배웠지만 내가 어찌 감히 책을 쓰리오? 어줍잖은 책 낸다고 나무를 베는 것은 죄악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남원 역사를 공부하면서 죽기 전에 남원성 전투 관련 동화는 하나쯤 쓰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참이라 바로 쓴다고 했던 것이다. 지금도 작가라는 호칭이 매우 낯설고 과분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열심히 쓰는 수밖에 없다. 책을 낸다는 것은 소식지와 블로그, 이런저런 매체에 쓰는 짧은 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지는 일이고 작업 자체도 어렵다. 특히 내가 쓰는 역사동화는 말 그대로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실제 인물을 중심으로 쓰는 것이라 더 어렵고 기록성이 강하다. 그동안 묻혀졌던 남원의 중요한 인물 최봉선과 이현순, 이화중선을 세상에 부활시켰다. 그 것만해도 큰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리산작은변화센터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내가 마을 활동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2020년부터 작은변화 활동가를 시작했고 3년 뒤 마지막 2023년에는 기록 활동가를 했다. 그동안 담지 못한 분야 중심으로 기록했다. 춘향제를 만든 분들에 대해 연구하고 <백 년 동안 핀 꽃> 책을 쓰면서 알게 된 남원의 옛 국악인, 현재의 원로 국악인들을 신경 써서 담았다. 남원은 우리나라 그 어느 고장보다도 국악의 고장으로 이름 난 곳이다, 대한민국 국악의 성지도 남원이다. 그러나 남원을 국악의 성지로 만든 선조들과 애쓴 원로들을 제대로 기록해 놓지 않았다. 정말 기록이 너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힘들고 슬프고 화가 났다. <백 년 동안 핀 꽃>과 <아리아리 아라리요>를 쓰면서 일제시대와 그 이후 신문을 많이 찾게 되었다. 남원에서 발행된 그 어느 기록물에도 없는 사실들이 많이 나왔다. 특히 국악인과 춘향제를 만든 분들에 대한 기록들을 많이 찾았다. 남원의 역사는 많은 부분을 다시 써야 한다, 특히 춘향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 축제였는데 그런 의미가 그 어느 곳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춘향제 100주년이 이제 7년 남았다. 누군가는 해야 한다. 그 시작을 내가 했으니 그 누군가가 바로 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몸은 남원을 떠나지만 밖에서 남원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면서 제대로 연구하고 기록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 하늘이 정해주셔서 내려 온 남원, 이제 그 운명은 나를 다시 남원을 떠나게 하고 있다. 그 떠남은 우주인들이 지구 밖으로 나갔을 때 오히려 동그란 지구를 제대볼 수 있는 것처럼 나도 남원을 한발짝 떠나서 남원을 더욱 제대로 보게 할 것이다. 54년 살아 온 인생, 되돌아 보면 운명의 끈은 분명히 있었다.
우리 동네 노암초등학교에 기증한 무궁화 2022년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아서 우리 동네 노암초등학교에 무궁화 한 그루를 기증했다. ‘우리 무궁화 연구소’ 이춘강 소장님이 내게 준 것으로 품종명 ‘삼일홍’이다. 춘향제를 만든 남원예기조합의 상징화가 무궁화였고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수난처럼 수난을 많이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너무나 소중한 꽃이 되었다. 이 나무와 함께 남원의 어린이들이 잘 자라서 진짜 복된 남원이 되길 바란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어린이들을 가장 많이 만났다. 어린이들이야말로 나를 성장시킨 가장 큰 스승들이었다. 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남원 근현대사는 똑바로 다시 씌여져야 한다. 그게 나를 비롯한 남원 어른들의 의무다. 지금은 2024년 1월 4일 아침 8시 45분. 이삿짐 차가 왔고 일하시는 분들이 짐을 싸고 있다. 이렇게 마감을 하고 가서 다행이다. 지리산작은변화센터 식구들, 아름다운재단 식구들 모두 깊이 감사드린다. 그동안 내 글을 읽어주신 전국의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리며 용띠해 우렁차게 비상하시길... |
기록하며 산 15년 남원살이, 더 확실한 기록이 필요하다
글 / 김양오
예전에 어떤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고해소에서 할머니들의 고백을 들으면 난감할 때가 있다고 한다.
“사는 게 죄지요.”
하고 고백을 하시는 할머니들께 어떤 보속을 드려야 할 지 난감하다고.
오래된 상자에서 나온 중학교부터 대학 때까지 일기장. 이건 평생 쓰레기로 분류될 수 없다.
이삿짐을 싸다 보니 나도 모르게 사는 게 죄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웬 쓰레기들을 그렇게 만들며 살았는지, 정말 사는 게 죄다. 내일이면 15년동안 산 남원을 떠난다. 아니, 자정이 넘었으니 오늘이구나. 이제 8시간 뒤면 이삿짐 차가 올 것이다. 글을 쓰다가 짐 싸다가 학교 수업하다가 짐 싸고 청소하다가 벌써 자정이 넘어 버렸다. 식구들이 대충 정리하고 떠난 집에 혼자 밤을 지새며 정리하고 어떻게든 마지막 글을 남원에서 넘기고자 이렇게 분투하고 있다.
2023년 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의 남원 기록활동가로 지내면서 남원 시민들의 활동 11건을 기록했다. 그리고 마지막 이 원고는 지난 1년을 회고하라는 명을 받았다. 허나 이사를 앞두니 저절로 15년을 회고하고 있다.
15년 전 나는 마흔 살이었고 열 살, 일곱 살, 다섯 살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 고향 곡성이 가까운 남원으로 이사왔다. 남편 때문에 온 거냐고? 아니다. 결혼해서 10년간 인천과 곡성을 오가다 남원 특히 아름다운 요천에 반했고 결국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져 이사를 올 수 있었다.
15년동안 즐겁게 산 남원. 2019년 쯤에 우리 막내가 경비행기 체험을 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우리 동네 중심으로 찍은 것이다.
그렇게 원하던 남원에 와서 정말 즐겁게 열심히 살면서, 수많은 활동을 했고 그 활동을 기록했다. 처음엔 개인 블로그와 남원생협 홈페이지에 글을 썼다. 아이들 셋 키우면서 텃밭 농사 짓고 요천과 동네 하천, 동네 산과 지리산에서 노는 이야기를 개인 블로그에 썼다. 블로그를 보는 사람마다 남원 홍보대사라고 칭찬을 했다. 내 글을 보고 남원으로 놀러 오는 블로그 이웃들도 있었고 가까운 구례에는 진짜 이웃도 생겼다. 아이들 선물을 보내주는 분들도 여럿 계셨다. 오죽하면 방송국에서 삼남매 키우는 이야기 찍고 싶다고 섭외까지 들어왔을까? 그 정도로 재밌게 살고 재밌게 기록했다. 지금은 아이들이 공개하지 못하게 해서 다 막아놨다. 개인정보가 중요한 세상이라!
아이들도 크고 생협 활동을 매우 활발하게 하면서 아이쿱 생협 블로그 기자와 신문 기자 활동을 부지런히 했다. 남원 지역 소비자 조합원 활동과 생산지 탐방 기사를 썼다. 친환경 쌀농사를 짓는 농부를 만나기도 하고, 깨끗하게 한우를 키우는 축사를 방문하기도 하고, 태풍에 싹 다 떨어진 배 과수원을 방문해서 기사를 써서 올렸다. 덕분에 소비자뿐 아니라 생산자를 깊이 만날 수 있어서 아주 좋았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 아이쿱 신문에 생산자들의 쓴소리가 빠진 채 내 글이 실렸다. 나도 생산자들의 한숨 소리는 조심스럽게 담았는데 그것마저도 아이쿱 생협은 빼고 실었다. 두 번이나 그런 일을 겪고는 기자 노릇을 그만 뒀다. 너무 소비자 중심으로 변해가는 생협이 걱정스럽고 실망스러웠다. 이제는 협동조합이 아닌 ‘기업’이라고 대놓고 얘기하니 내가 애정을 갖고 뜨겁게 활동하던 생협이 아니다. 그래도 8년동안 남원생협 이사, 블로그 기자, 식생활센터 활동가로 전국구로 뛰어다니면서 많이 성장한 것은 분명하다.
뜨겁게 마을 활동을 했던 본부
생협 활동을 그만 두고 나오자마자 내가 사는 동네에 있는 남원사회복지관에서 러브콜이 왔다. 마을 활동가가 필요하다고. 생협 활동 속에 마을 활동도 포함되어 있어서 그동안 함께 마을모임도 하고 아이들과 마을 탐사도 했었는데 이제 제대로 ‘마을 만들기’를 해보자고 나를 마을 활동가로 기용을 하겠다는 것이다. 활동비도 준다니 수락.
그렇게 해서 ‘고향 같은 마을 만들기’를 목표로 마을에서 젊은 엄마들을 찾고 모아서 수많은 활동을 했다. 마을 신문도 몇 차례 만들고 마을 활동 일지를 써야 했다. 그 일지는 복지관에 있고 나한테는 없다. 2020년은 마을 활동이 최정점에 다다랐던 해다. 코로나19가 우리나라에도 퍼지기 시작할 때 온 국민이 벌벌 떨었다. 그런데 대규모 확진자가 나온 대구 지역 환자들이 병원이 부족해 남원 의료원으로 이송되어 왔을 때 우리는 의료진들 간식과 환자들 간식을 만들어서 보내줬다. 다른 지역에서는 코로나 확진자를 받지 않으려고 하는데 남원에서는 어서 오라고 현수막도 곳곳에 달아 놓고 시민들이 손편지가 씌인 간식을 보내주지 사람들이 감동을 많이 받았다. 여기저기 중앙 언론에도 나오고 그랬다.
코로나19가 점점 확산되던 그 해 여름 남원에 큰 수해가 났다. 우리 마을 주촌천 양쪽의 주택가도 심각하게 물에 잠겨 수재민이 많이 발생했다. 우리는 수재민들을 어떻게든 돕자고 결의를 했고 성금을 모아 연잎밥을 만들어 수재민과 자원봉사자들에게 드렸다. 수해 복구에 애쓴 군인들에게 샌드위치도 만들어 보냈다. 그밖에 한 일이 참 많다. 그래서 메스컴에도 많이 보도됐다. 국방신문에 사진도 실렸다. 그런 모든 활동을 마을 활동 일지에 다 썼다.
남원 역사 유적 답사 자료집부터 남원 역사 관련 글을 담은 책자들
책 형태로 만들어 낸 기록물도 꽤 많이 만들었다. 2009년 남원에 이사오자마자 내가 시작한 활동은 하천 생태 탐사와 남원 역사 유적지 탐방이었다. 생태 탐사는 전문가를 따라다니면서 배우는 것이었고 유적지 탐방은 남원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조합원 한 분과 함께 공부하면서 찾아다녔다. 사학과를 나오고 역사, 특히 유적 답사를 너무나 좋아하는 나는 해설을 해 준 조합원의 이야기에 나름대로 조사를 더 해서 블로그에 알찬 글을 올렸다. 2년 뒤에는 자료집도 냈다. 그 자료집 덕분에 초등학교 아이들의 역사 기행 강사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남원 역사 기행이 올 해까지 대충 따져봐도 그 횟수가 최소 500회에 이른다. 남녀노소 남원사람, 외지사람, 해외입양인들과 발달장애인까지 모시고 답사를 다녔으니 참 다양하게 많이도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유적 답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남원에 대한 공부를 더 깊이 하게 됐고 결국 여러 지면에다 역사 관련 글을 쓰기도 했다. 남원 시민들이 만든 소식지(계간 여뀌울)에 글을 썼고, 남원시(남원다움관)에서 발행하는 기록화 자료집에 우리동네 ‘노암동’의 과거와 현재를 담는 글을 썼다. 멋진 표지(눈 쌓인 금암봉과 금수정) 사진도 내가 찍은 것이다.
남원 시민들이 만든 소식지 여뀌울
그리고 아주 특별한 기록집도 하나 만들었다. 2019년 3.1운동(정확히 혁명이라고 불러야 한다. 일제시대에는 실제로 혁명이라고 불렀다.) 100주년을 기념하는 아주 큰 시민 행사를 했는데 그 행사의 ‘백서’를 만들었다. ‘남원 만인만북문화제 백서’다. 누가 맨 처음 이 일을 제안했고 어떻게 준비위원회가 꾸려졌고 준비위원들이 어떤 활동을 했고 행사 당일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거의 날마다 기록하다시피 했다. 그 기록을 나 혼자 했고 엮었다. 이 일을 맨 처음 하자고 제안한 사람이 나였고 준비위원장을 맡았으니 날마다 밴드에 그날 그날 활동 상황을 기록했다. 그래도 백서까지 안 만들어도 되는데 그 활동이 너무 뜨거웠기에 꼭 만들고 싶어서 했다. 그러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 준비위원회 결성한 날부터 2월 28일까지 활동한 날 수가 딱 100일이었다는 것이다. 3.1혁명 100주년 맞이 행사가 에 딱 100일동안 시민들이 활동해 거대한 행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수천명이 참여하는 시민 문화제와 거리 행진을 했다. 시에서 지원금을 못 받아 1000만원 가량의 행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음식 바자회도 하고 성금도 모금하고 기념 티셔츠와 소고도 팔아서 1300만원을 모았고 전라북도 의회의 지원을 간신히 얻어내 모두 2천만원을 확보했다. 영화 찍듯이 홍보 영상도 만들었다. 정말 준비위원들은 독립운동가가 된 듯한 마음자세로 활동했다. 그 특별한 과정을 기록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행사 끝나고 다들 각자 삶터로 돌아가 쉴 때 나는 손가락 관절이 아플 정도로 글을 써서 백서를 완성했다. 그리고 전국 주요 기관에 보냈다. 국사편찬위원회, 보훈처, 국가기록원... 남원의 독립운동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100주년 기념 사업을 꼭 기록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편지와 함께.
할머니들의 삶을 받아 적은 생애구술사 책
2019년 겨울에 남원시립김병종 미술관 로비에서 특별한 출판 기념회가 있었다. 미술관이라는 데를 처음 오시는 허리 굽은 할머니 네 분이 주인공이다. 남원시 인월면 신촌 마을에 사는 네 분의 할머니들. 험한 세상 사시느라 학교를 하나도 못 다니고 이 나이 드시도록 한글도 못 깨우쳐서 이제야 한글 학교를 다니시는 분들이다. 그런데 무슨 출판 기념회? 이 분들의 이야기를 우리가 듣고 기록해 드렸다. 나를 포함해 네 명이 각자 한 분씩 맡아서 이야기를 듣고 재구성해 글을 쓰고 사진 전문가인 시민들이 사진을 찍고 한 청년이 영상을 찍어 우리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겼다. 팔순이 넘으신 할머니들의 기억은 처음부터 분명하지 않았다. 열 번 가까이 만나면서 묻고 또 물으며 말씀하신 것을 녹음해 집에 와서 암호 풀듯이 풀어 썼다. 쉽지 않았다. 이것이 내 이름 걸고 낸 첫 책이다.
쉰 살이 되면서 역사 동화를 쓰기 시작해 네 권을 냈다.
할머니들 생애 구술사 책 작업을 함께 했던 네 명의 작가 중에 한 분이 출판사 대표였다. 서울에서 출판사를 하시다가 지리산 근처에 사시려고 내려오신 분이었는데 그 때 나에게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남원 도공들 이야기를 동화로 써 보라’고 권하셔서 은쾌히 수락,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자료 수집하고 글을 쓰면서 일본 가고시마까지 갔다왔다. 남원에서 잡혀간 심당길의 15대 후손 심수관을 만나고 그 분들이 살아온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서다. 드디어 2020년 6월에 첫 역사동화 <도자기에 핀 눈물꽃>이 나왔다. 내가 동화작가가 된 것이다. 그 뒤에 1년에 한 권씩 따박따박 책을 냈다. 춘향제를 만든 사람들과 역사를 다룬 <백 년 동안 핀 꽃>, 남원의 국가민속문화재이며 노블리스오블르제를 실천한 죽산 박씨 고택을 그림책으로 만든 <꿈과 마음이 담긴 집 몽심재>, 올 여름 일제 시대 우리 민족의 아픈 삶과 이화중선 명창의 불꽃 같은 삶을 다룬 <아리아리아라리요> 가 나왔다.
3년 동안 쓴 장편 역사 동화 세 권
나이 50에 이렇게 어렵지 않게 책을 줄줄이 낼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일기과 편지로 다져진 기본기가 있어서였다. 이삿짐을 싸다보니 아주 오래돼 바스러지는 종이 상자가 여럿 나왔다, 열어 보니 중학교 1학년때부터 쓴 일기장들과 수많은 편지들이었다. 나는 참 많은 사람들하고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많은 글을 썼는데도 작가가 안됐으면 그게 이상할 정도다. 이런 바탕이 있어서인지 나는 스물 다섯 살 때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하는 글쓰기 지도반과 아동문학작가 학교에 들어가 배웠다. 당시 이오덕 선생님을 포함해 쟁쟁한 강사진들에게 배웠지만 내가 어찌 감히 책을 쓰리오? 어줍잖은 책 낸다고 나무를 베는 것은 죄악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남원 역사를 공부하면서 죽기 전에 남원성 전투 관련 동화는 하나쯤 쓰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참이라 바로 쓴다고 했던 것이다. 지금도 작가라는 호칭이 매우 낯설고 과분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열심히 쓰는 수밖에 없다.
책을 낸다는 것은 소식지와 블로그, 이런저런 매체에 쓰는 짧은 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지는 일이고 작업 자체도 어렵다. 특히 내가 쓰는 역사동화는 말 그대로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실제 인물을 중심으로 쓰는 것이라 더 어렵고 기록성이 강하다. 그동안 묻혀졌던 남원의 중요한 인물 최봉선과 이현순, 이화중선을 세상에 부활시켰다. 그 것만해도 큰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리산작은변화센터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내가 마을 활동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2020년부터 작은변화 활동가를 시작했고 3년 뒤 마지막 2023년에는 기록 활동가를 했다. 그동안 담지 못한 분야 중심으로 기록했다. 춘향제를 만든 분들에 대해 연구하고 <백 년 동안 핀 꽃> 책을 쓰면서 알게 된 남원의 옛 국악인, 현재의 원로 국악인들을 신경 써서 담았다. 남원은 우리나라 그 어느 고장보다도 국악의 고장으로 이름 난 곳이다, 대한민국 국악의 성지도 남원이다. 그러나 남원을 국악의 성지로 만든 선조들과 애쓴 원로들을 제대로 기록해 놓지 않았다. 정말 기록이 너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힘들고 슬프고 화가 났다.
<백 년 동안 핀 꽃>과 <아리아리 아라리요>를 쓰면서 일제시대와 그 이후 신문을 많이 찾게 되었다. 남원에서 발행된 그 어느 기록물에도 없는 사실들이 많이 나왔다. 특히 국악인과 춘향제를 만든 분들에 대한 기록들을 많이 찾았다. 남원의 역사는 많은 부분을 다시 써야 한다, 특히 춘향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 축제였는데 그런 의미가 그 어느 곳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춘향제 100주년이 이제 7년 남았다. 누군가는 해야 한다. 그 시작을 내가 했으니 그 누군가가 바로 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몸은 남원을 떠나지만 밖에서 남원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면서 제대로 연구하고 기록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 하늘이 정해주셔서 내려 온 남원, 이제 그 운명은 나를 다시 남원을 떠나게 하고 있다. 그 떠남은 우주인들이 지구 밖으로 나갔을 때 오히려 동그란 지구를 제대볼 수 있는 것처럼 나도 남원을 한발짝 떠나서 남원을 더욱 제대로 보게 할 것이다. 54년 살아 온 인생, 되돌아 보면 운명의 끈은 분명히 있었다.
우리 동네 노암초등학교에 기증한 무궁화
2022년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아서 우리 동네 노암초등학교에 무궁화 한 그루를 기증했다. ‘우리 무궁화 연구소’ 이춘강 소장님이 내게 준 것으로 품종명 ‘삼일홍’이다. 춘향제를 만든 남원예기조합의 상징화가 무궁화였고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수난처럼 수난을 많이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너무나 소중한 꽃이 되었다. 이 나무와 함께 남원의 어린이들이 잘 자라서 진짜 복된 남원이 되길 바란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어린이들을 가장 많이 만났다. 어린이들이야말로 나를 성장시킨 가장 큰 스승들이었다. 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남원 근현대사는 똑바로 다시 씌여져야 한다. 그게 나를 비롯한 남원 어른들의 의무다.
지금은 2024년 1월 4일 아침 8시 45분. 이삿짐 차가 왔고 일하시는 분들이 짐을 싸고 있다. 이렇게 마감을 하고 가서 다행이다. 지리산작은변화센터 식구들, 아름다운재단 식구들 모두 깊이 감사드린다. 그동안 내 글을 읽어주신 전국의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리며 용띠해 우렁차게 비상하시길...
글 쓴 사람. 김양오
아이 셋을 다 키운 중년 아줌마. 젊었을 적 글쓰기와 아동문학을 배워 평생 잡다한 글을 쓰며 살았다. 그러다 쉰 살부터 역사동화를 쓰기 시작해 책 세 권을 냈다. 아름답게 흐르는 요천이 너무 좋아 남원으로 이사해 15년째 살고 있는데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이 사라져서 가슴이 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