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의 오랜 우정이 가능한 삶을 그리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나무 이야기 ② 글 / 자야 ※ 이 글은 지난 7월에 실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나무 이야기 ①’의 후속편입니다. 앞의 기사와 연계하여 읽으시면 상황과 맥락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인간이어서 슬프고 죄스러운 마음이 쌓일 때면 좋아하는 나무들을 찾아다니며 만나는 시간을 갖는다. 올봄에 함양읍 동문사거리 일대의 백합나무 수십 그루가 베어진 이후, 그 거리를 걸을 때마다 마치 벌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한여름 뜨거운 햇살이 정수리에 바늘쌈처럼 꽂혀 따끔거릴 때, 단풍도 낙엽도 사라진 길 위에 오직 아스팔트 뚫는 굴착기 소리만 요란하여 심장이 벌렁거릴 때, 일상적인 소음과 먼지에 예민해진 상가 주인과 행인 들의 뾰족한 표정을 마주할 때도. 이렇게 인간이어서 슬프고 죄스러워지는 마음이 쌓이고 또 쌓여 한없이 무거워지면, 그때는 좋아하는 나무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닌다. 직접 가서 나무들을 오래 쳐다보고, 만져도 보고, 또 가만히 등을 기대고 있거나 두 팔을 벌려 껴안기도 한다. 그러면 고해성사라도 하고 난 것처럼 기분이 조금은 맑아지고, 때로는 나무의 에너지가 흘러들어온 듯 내 안에 없던 힘이 생기기도 한다. <우리동네가로수를사랑하는모임>을 통해 ‘나무 산책’을 해보려 한 건 그래서였다. 겨울이 오기 전, 나는 지인들과 나무 아래서 ‘함께’ 정화되고 기운도 얻는 시간을 누리고 싶었다. 가로수에 대한 주민의 생각을 묻고 듣다 사람과 가로수가 공생하는 지역을 만들기 위해 뭐라도 해보자는 뜻에서 네댓 명의 주민이 모여 <꼬리에꼬리를무는나무이야기모임>을 만든 지 4개월이 넘어간다. 그사이 이름을 <우리동네가로수를사랑하는모임(이하 가로수모임)>으로 바꾼 이유는 일을 벌이고 군청에 찾아가 담당 공무원도 만나고 하자니 우리의 의도가 모임 명칭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바꾸고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가로수에 대한 주민의 인식을 알아보기 위한 ‘설문조사’였다. 지난 8월에 약 3주간 진행한 설문조사에는 10대부터 60대 이상까지 모두 248명이 참여했는데, 응답자 수가 많진 않아도 이를 통해 우리는 함양군청이 ‘지중화사업’을 이유로 읍내 가로수를 베어낸 것에 대한 여론이 상당히 부정적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크고 오래된 나무를 뿌리째 제거해야 하는 중대한 사업을 추진하면서 지자체가 그에 대한 사전 설명회는커녕 단순한 안내조차 없었다는 점에 사람들은 “이런 방식은 아닌 것 같다”며 한목소리로 문제를 제기했고, 이는 읍내 가로수 보존과 관리 방법을 묻는 설문 항목에 “주민과 생태전문가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고 응답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우리동네가로수를사랑하는모임>은 지난 8월 가로수가 잘린 거리의 상가를 돌아다니며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설문조사를 진행하며 가로수모임이 신경 쓴 일 중 하나가 잘린 가로수 주변에 자리한 상가를 돌아다니며 가게 주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설문지를 돌린 것인데, 그 과정에서 상가의 여론을 어렴풋이나마 가늠해볼 수 있었다는 점도 성과라면 성과였다. 보통의 가게 주인들은 “간판을 가리”고 “낙엽 때문에 주변이 지저분해진다”는 이유로 가로수를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오래된 나무를 이렇게 싹 다 잘라버리는 건 문제”라고 지적하는 이들이 예상외로 많았고, 무엇보다도 열에 예닐곱 정도는 동문사거리 인근에서 계속되는 대형 공사에 피로감과 불만, 심지어 분노를 표현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거기 사는 이들이 그곳의 풍경을 결정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함양 읍내 거리는 벌써 몇 년째 말이 아니다. 어느 해에는 도시가스 관을 묻는다고 주요 도로와 골목까지 뒤집어놓더니 그 이듬해에는 오수관 공사를 한다고 다시 헤집는 식이라 할까. 여기에 더해 잦은 보도블록 교체와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공사들까지 치면 그야말로 소음과 먼지 없는 날을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지난봄에 시작해 겨울을 코앞에 둔 지금까지 진행 중인 지중화사업은 날로 황폐하고 삭막해져 가는 이런 풍경에 치명타를 안겼다고 할 만하다. 그전까지는 그래도 가로수가 있기에 견딜 만했는데 올해 5월 이후로는 지친 시선과 마음을 잠시라도 얹어둘 ‘녹색’이 아예 사라지고 만 것이다. 계절마다 다른 색깔과 향기를 내뿜던 나무들의 자리를 이제는 굴착기와 덤프트럭이 차지하고 있으며, 남아 있는 나무들은 언제 뽑힐지 모를 운명을 예감해서인지 시름시름 앓는 것처럼 보인다.
몇 년째 공사 중인 읍내 거리 풍경. 가로수가 뽑힌 자리에는 소음과 먼지가 가득하다. 설문조사 이후 가로수모임이 개최한 강연회에 강사로 와준 최진우(가로수시민연대 대표) 씨는 함양터미널에서 읍내를 가로질러 상림까지 가는 길에 주변 가로수들을 살피며 이렇게 말했다. “읍내 가로수는 강전정을 많이 당해서 그런지 상처가 많고 죽어가고 있네요. 상림 근처 가로수는 뿌리가 물을 흡수하지 못해 목이 마른 상태고요.” 이어서 그는 “함양은 상림이라는 훌륭한 생태자원이 있는 곳인데 거기까지 가는 길 위의 나무들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날 강사가 강연회에서 보여준 몇몇 영상 자료가 지금도 눈앞에 그려질 듯 생생하기만 하다. 넓은 치맛자락처럼 드리운 가로수 그늘과 그 아래를 오가는 행인들의 행복한 걸음걸음, 그리고 건물과 나무와 사람과 자전거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딴 세상’을 보면서 부러움의 탄성과 한숨을 번갈아 내뱉던 우리에게 강사가 또 어떤 말을 했는지도 나는 아프게 기억하고 있다. “어떤 장소의 풍경은 거기 사는 이들의 의식에 따라 만들어집니다.”
지난 10월 중순에 열린 ‘올바른 가로수 보존과 관리를 위한 함양 주민 강연회’ 모습.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새들도 곤충도 떠나고 사람들은 서로 눈살만 찌푸린 채 외면하는 저 풍경이 나를 포함한 우리의 의식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생각하면 지자체 탓을 하기에 앞서 먼저 부끄러워진다. 이제 곧 겨울이고 얼마 안 있어 ‘강전정’이 시작될 텐데, 그러면 거리는 얼마나 더 흉흉해질까. 가뜩이나 키만 훌쩍 크고 수관은 얼마 되지 않는 나무들이 몇 개의 굵은 가지만 닭발처럼, 삼지창처럼 남은 채 잘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더 낯을 붉혀야 하는 걸까. 나무 앞에서 더 부끄럽기를, 그리고 행복해지려 애쓰길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기도한 시인의 고매한 영혼까지는 감히 기대하지 않지만, 적어도 나무 앞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나는 바란다. 어떤 이유에서든 나무를 싹둑 자르고 과도하게 가지치기하는 관행을 더는 용인하지 않는, 나무에게 ‘아낌없이 주는’ 희생을 강요하는 대신 나무 또한 사람처럼 건강하고 존엄하게 살 권리가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행동하는 시민들이 지금보다 더 늘어나기를. 가로수모임이 11월 중순으로 날을 잡은 ‘나무 산책’은 그런 사람, 그런 시민이 되기 위해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확인하는 자리로 계획된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결론을 말하면 나무 산책은 무산되었다. 진행자인 내가 심한 감기에 걸려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새벽엔 눈이 내렸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아침에 부엌문으로 내다본 세상은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바람이 어찌나 부는지 단단히 걸어 놓은 빗장에도 나무 대문이 앞뒤로 흔들리는 게 보였다. 지인들과 손잡고 나무를 찾아다니며 시를 읽고 노래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날 나는 군불을 때서 뜨끈해진 방안에 종일 누워 단단하거나 여린 가지에 눈이 쌓여 있을 나무들을 상상했다. 그리고 산책자들과 함께 읽으려고 준비한 시를 홀로 여러 번 낭독했다. 오직 비 때문에 길가 늙은 참나무 아래 멈춰선 건 아닙니다, 넓은 모자 아래 있으면 안심이 되죠 나무와 나의 오랜 우정으로 거기에 조용히 서 있던 거지요 나뭇잎에 떨어지는 비를 들으며 날이 어찌 될지 내다보며 기다리며 이해하며. 이 세계도 늙었다고 나무와 나는 생각해요 함께 나이 들어가는 거죠. 오늘 나는 비를 좀 맞았죠 잎들이 우수수 졌거든요 공기에서 세월 냄새가 나네요 내 머리카락에서도. _ 「비 오는 날 늙은 참나무 아래 멈춰서다」(올라브 하우게)
오래된 나무와 우정을 쌓으며 함께 늙어간다면 삶이 조금은 더 행복하지 않을까. 나에게도 잠시 멈춰서 비를 피할 나무가 있었던가. 단지 비가 와서가 아니라, 거기에 서 있으면 왠지 편안하고 안심이 되는 나무. 오랜 우정으로 나란히 서서 함께 늙어가는, 이미 잎이 우수수 져버린 계절에 그 아래서 비를 맞아 몸이 다 젖는대도 마냥 좋을, 그런 나무. 열에 달아오른 입술로 시를 우물우물 씹어 넘기면서 나는 생각했다. 나무와 이런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행복하겠지. 인간과 나무가 오랜 세월 동등한 존재로 우정을 쌓아갈 수 있는 곳에서라면 삶의 질이 분명 더 괜찮을 거야. 그렇다면 더 행복하고 더 괜찮은 삶을 위해 우리 스스로 노력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을까, 라고. 어떻게 덜 춥게 겨울을 함께 날까? 나무 산책이 무산된 이후 가로수모임은 휴식 중이다. 아무 규정도 의무도 없는 모임이니 휴식이 길어지면 어느 결엔가 사라질 가능성이 없다고도 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이제 곧 겨울이지 않은가. 모든 게 안으로 움츠러들고 잦아드는 계절엔 왕성한 활동을 벌이기가 쉽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나무와 더불어 이 겨울을 덜 춥게 날 수 있는 일들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나무권리’에 대한 생각을 모으고 공동의 언어로 작성해보는 워크숍이나 나무에 관한 낭독극 쓰기 같은 것. 아니면 전국의 가로수운동 사례들을 공부하면서 함양 지역에 적용할 것들을 탐색해보는 것은 또 어떨지.
올겨울엔 ‘나무권리’에 대한 생각을 모으고 공동의 언어로 작성해보는 워크숍을 해보면 어떨까. 옛사람들은 나무를 세계의 중심이자 생명의 원천으로 보았고, “하늘과 땅을 연결함으로써 신들의 통로가 되어주던”(『나무의 신화』/ 자크 브로스) 그 나무를 가리켜 ‘우주목’ 혹은 ‘세계수’라 불렀다. 물론 그와 같은 오래된 전설과 신화는 대부분 사라지고 힘을 잃은 지 오래다. 하지만 나무는 태초에 그랬듯 지금도 여전히 우리 곁에 서 있다. 계속해서 생명을 낳고 품고 살리는 역할을 하면서. 그를 통해 지구별의 실낱같은 수명을 연장하면서. 나는 그런 멋진 존재인 나무들 곁에서 살아가고 싶다. 그 묵묵한 힘과 고귀함을 닮아가며 늙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다가오는 겨울을 잘 나야 한다. 나무와 함께 앞으로의 날들이 “어찌 될지 내다보며, 기다리며, 이해하며” 맞이하는 봄은 적어도 올해 5월의 봄처럼 너무 절망적이지만은 않으리라 간절히 믿어본다. |
나무와의 오랜 우정이 가능한 삶을 그리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나무 이야기 ②
글 / 자야
※ 이 글은 지난 7월에 실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나무 이야기 ①’의 후속편입니다.
앞의 기사와 연계하여 읽으시면 상황과 맥락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인간이어서 슬프고 죄스러운 마음이 쌓일 때면 좋아하는 나무들을 찾아다니며 만나는 시간을 갖는다.
올봄에 함양읍 동문사거리 일대의 백합나무 수십 그루가 베어진 이후, 그 거리를 걸을 때마다 마치 벌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한여름 뜨거운 햇살이 정수리에 바늘쌈처럼 꽂혀 따끔거릴 때, 단풍도 낙엽도 사라진 길 위에 오직 아스팔트 뚫는 굴착기 소리만 요란하여 심장이 벌렁거릴 때, 일상적인 소음과 먼지에 예민해진 상가 주인과 행인 들의 뾰족한 표정을 마주할 때도.
이렇게 인간이어서 슬프고 죄스러워지는 마음이 쌓이고 또 쌓여 한없이 무거워지면, 그때는 좋아하는 나무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닌다. 직접 가서 나무들을 오래 쳐다보고, 만져도 보고, 또 가만히 등을 기대고 있거나 두 팔을 벌려 껴안기도 한다. 그러면 고해성사라도 하고 난 것처럼 기분이 조금은 맑아지고, 때로는 나무의 에너지가 흘러들어온 듯 내 안에 없던 힘이 생기기도 한다. <우리동네가로수를사랑하는모임>을 통해 ‘나무 산책’을 해보려 한 건 그래서였다. 겨울이 오기 전, 나는 지인들과 나무 아래서 ‘함께’ 정화되고 기운도 얻는 시간을 누리고 싶었다.
가로수에 대한 주민의 생각을 묻고 듣다
사람과 가로수가 공생하는 지역을 만들기 위해 뭐라도 해보자는 뜻에서 네댓 명의 주민이 모여 <꼬리에꼬리를무는나무이야기모임>을 만든 지 4개월이 넘어간다. 그사이 이름을 <우리동네가로수를사랑하는모임(이하 가로수모임)>으로 바꾼 이유는 일을 벌이고 군청에 찾아가 담당 공무원도 만나고 하자니 우리의 의도가 모임 명칭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바꾸고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가로수에 대한 주민의 인식을 알아보기 위한 ‘설문조사’였다. 지난 8월에 약 3주간 진행한 설문조사에는 10대부터 60대 이상까지 모두 248명이 참여했는데, 응답자 수가 많진 않아도 이를 통해 우리는 함양군청이 ‘지중화사업’을 이유로 읍내 가로수를 베어낸 것에 대한 여론이 상당히 부정적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크고 오래된 나무를 뿌리째 제거해야 하는 중대한 사업을 추진하면서 지자체가 그에 대한 사전 설명회는커녕 단순한 안내조차 없었다는 점에 사람들은 “이런 방식은 아닌 것 같다”며 한목소리로 문제를 제기했고, 이는 읍내 가로수 보존과 관리 방법을 묻는 설문 항목에 “주민과 생태전문가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고 응답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우리동네가로수를사랑하는모임>은 지난 8월 가로수가 잘린 거리의 상가를 돌아다니며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설문조사를 진행하며 가로수모임이 신경 쓴 일 중 하나가 잘린 가로수 주변에 자리한 상가를 돌아다니며 가게 주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설문지를 돌린 것인데, 그 과정에서 상가의 여론을 어렴풋이나마 가늠해볼 수 있었다는 점도 성과라면 성과였다. 보통의 가게 주인들은 “간판을 가리”고 “낙엽 때문에 주변이 지저분해진다”는 이유로 가로수를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오래된 나무를 이렇게 싹 다 잘라버리는 건 문제”라고 지적하는 이들이 예상외로 많았고, 무엇보다도 열에 예닐곱 정도는 동문사거리 인근에서 계속되는 대형 공사에 피로감과 불만, 심지어 분노를 표현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거기 사는 이들이 그곳의 풍경을 결정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함양 읍내 거리는 벌써 몇 년째 말이 아니다. 어느 해에는 도시가스 관을 묻는다고 주요 도로와 골목까지 뒤집어놓더니 그 이듬해에는 오수관 공사를 한다고 다시 헤집는 식이라 할까. 여기에 더해 잦은 보도블록 교체와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공사들까지 치면 그야말로 소음과 먼지 없는 날을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지난봄에 시작해 겨울을 코앞에 둔 지금까지 진행 중인 지중화사업은 날로 황폐하고 삭막해져 가는 이런 풍경에 치명타를 안겼다고 할 만하다. 그전까지는 그래도 가로수가 있기에 견딜 만했는데 올해 5월 이후로는 지친 시선과 마음을 잠시라도 얹어둘 ‘녹색’이 아예 사라지고 만 것이다. 계절마다 다른 색깔과 향기를 내뿜던 나무들의 자리를 이제는 굴착기와 덤프트럭이 차지하고 있으며, 남아 있는 나무들은 언제 뽑힐지 모를 운명을 예감해서인지 시름시름 앓는 것처럼 보인다.
몇 년째 공사 중인 읍내 거리 풍경. 가로수가 뽑힌 자리에는 소음과 먼지가 가득하다.
설문조사 이후 가로수모임이 개최한 강연회에 강사로 와준 최진우(가로수시민연대 대표) 씨는 함양터미널에서 읍내를 가로질러 상림까지 가는 길에 주변 가로수들을 살피며 이렇게 말했다. “읍내 가로수는 강전정을 많이 당해서 그런지 상처가 많고 죽어가고 있네요. 상림 근처 가로수는 뿌리가 물을 흡수하지 못해 목이 마른 상태고요.” 이어서 그는 “함양은 상림이라는 훌륭한 생태자원이 있는 곳인데 거기까지 가는 길 위의 나무들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날 강사가 강연회에서 보여준 몇몇 영상 자료가 지금도 눈앞에 그려질 듯 생생하기만 하다. 넓은 치맛자락처럼 드리운 가로수 그늘과 그 아래를 오가는 행인들의 행복한 걸음걸음, 그리고 건물과 나무와 사람과 자전거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딴 세상’을 보면서 부러움의 탄성과 한숨을 번갈아 내뱉던 우리에게 강사가 또 어떤 말을 했는지도 나는 아프게 기억하고 있다. “어떤 장소의 풍경은 거기 사는 이들의 의식에 따라 만들어집니다.”
지난 10월 중순에 열린 ‘올바른 가로수 보존과 관리를 위한 함양 주민 강연회’ 모습.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새들도 곤충도 떠나고 사람들은 서로 눈살만 찌푸린 채 외면하는 저 풍경이 나를 포함한 우리의 의식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생각하면 지자체 탓을 하기에 앞서 먼저 부끄러워진다. 이제 곧 겨울이고 얼마 안 있어 ‘강전정’이 시작될 텐데, 그러면 거리는 얼마나 더 흉흉해질까. 가뜩이나 키만 훌쩍 크고 수관은 얼마 되지 않는 나무들이 몇 개의 굵은 가지만 닭발처럼, 삼지창처럼 남은 채 잘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더 낯을 붉혀야 하는 걸까.
나무 앞에서 더 부끄럽기를, 그리고 행복해지려 애쓰길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기도한 시인의 고매한 영혼까지는 감히 기대하지 않지만, 적어도 나무 앞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나는 바란다. 어떤 이유에서든 나무를 싹둑 자르고 과도하게 가지치기하는 관행을 더는 용인하지 않는, 나무에게 ‘아낌없이 주는’ 희생을 강요하는 대신 나무 또한 사람처럼 건강하고 존엄하게 살 권리가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행동하는 시민들이 지금보다 더 늘어나기를.
가로수모임이 11월 중순으로 날을 잡은 ‘나무 산책’은 그런 사람, 그런 시민이 되기 위해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확인하는 자리로 계획된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결론을 말하면 나무 산책은 무산되었다. 진행자인 내가 심한 감기에 걸려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새벽엔 눈이 내렸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아침에 부엌문으로 내다본 세상은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바람이 어찌나 부는지 단단히 걸어 놓은 빗장에도 나무 대문이 앞뒤로 흔들리는 게 보였다.
지인들과 손잡고 나무를 찾아다니며 시를 읽고 노래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날 나는 군불을 때서 뜨끈해진 방안에 종일 누워 단단하거나 여린 가지에 눈이 쌓여 있을 나무들을 상상했다. 그리고 산책자들과 함께 읽으려고 준비한 시를 홀로 여러 번 낭독했다.
오래된 나무와 우정을 쌓으며 함께 늙어간다면 삶이 조금은 더 행복하지 않을까.
나에게도 잠시 멈춰서 비를 피할 나무가 있었던가. 단지 비가 와서가 아니라, 거기에 서 있으면 왠지 편안하고 안심이 되는 나무. 오랜 우정으로 나란히 서서 함께 늙어가는, 이미 잎이 우수수 져버린 계절에 그 아래서 비를 맞아 몸이 다 젖는대도 마냥 좋을, 그런 나무. 열에 달아오른 입술로 시를 우물우물 씹어 넘기면서 나는 생각했다. 나무와 이런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행복하겠지. 인간과 나무가 오랜 세월 동등한 존재로 우정을 쌓아갈 수 있는 곳에서라면 삶의 질이 분명 더 괜찮을 거야. 그렇다면 더 행복하고 더 괜찮은 삶을 위해 우리 스스로 노력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을까, 라고.
어떻게 덜 춥게 겨울을 함께 날까?
나무 산책이 무산된 이후 가로수모임은 휴식 중이다. 아무 규정도 의무도 없는 모임이니 휴식이 길어지면 어느 결엔가 사라질 가능성이 없다고도 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이제 곧 겨울이지 않은가. 모든 게 안으로 움츠러들고 잦아드는 계절엔 왕성한 활동을 벌이기가 쉽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나무와 더불어 이 겨울을 덜 춥게 날 수 있는 일들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나무권리’에 대한 생각을 모으고 공동의 언어로 작성해보는 워크숍이나 나무에 관한 낭독극 쓰기 같은 것. 아니면 전국의 가로수운동 사례들을 공부하면서 함양 지역에 적용할 것들을 탐색해보는 것은 또 어떨지.
올겨울엔 ‘나무권리’에 대한 생각을 모으고 공동의 언어로 작성해보는 워크숍을 해보면 어떨까.
옛사람들은 나무를 세계의 중심이자 생명의 원천으로 보았고, “하늘과 땅을 연결함으로써 신들의 통로가 되어주던”(『나무의 신화』/ 자크 브로스) 그 나무를 가리켜 ‘우주목’ 혹은 ‘세계수’라 불렀다. 물론 그와 같은 오래된 전설과 신화는 대부분 사라지고 힘을 잃은 지 오래다. 하지만 나무는 태초에 그랬듯 지금도 여전히 우리 곁에 서 있다. 계속해서 생명을 낳고 품고 살리는 역할을 하면서. 그를 통해 지구별의 실낱같은 수명을 연장하면서. 나는 그런 멋진 존재인 나무들 곁에서 살아가고 싶다. 그 묵묵한 힘과 고귀함을 닮아가며 늙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다가오는 겨울을 잘 나야 한다. 나무와 함께 앞으로의 날들이 “어찌 될지 내다보며, 기다리며, 이해하며” 맞이하는 봄은 적어도 올해 5월의 봄처럼 너무 절망적이지만은 않으리라 간절히 믿어본다.
글 쓴 사람. 자야
나에게 기록이란, 먼저 다가가 말 걸고 온 마음을 기울여 듣고 나를 앞세우지 않고 쓰는 것. 올해는 이 어려운 일을 해보려 한다. 이런 나를 조금은 칭찬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