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떠날 결심, 그 마음의 일렁임에 대하여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활동가 쭈이 글 / 자야
지난 한두 달 사이, 쭈이는 이웃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자 몇 번의 밥상을 차렸다. (사진제공_쭈이) ‘인터뷰’라는 작별 밥상 집은 금세 나갔다. 그렇다고 당장 짐을 빼는 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아침이면 그곳에서 눈을 뜨고, 출근 준비를 하고, 퇴근 후 돌아와 점점 길어지는 초겨울의 밤을 맞는다. 시간이 빌 땐 ‘작별 밥상’을 차리기도 한다. 가장 예쁜 식탁보에 가장 아끼는 그릇들. 전채로 시작해 메인을 거쳐 후식으로 이어지는 코스 요리. 서너 명의 나직한 목소리 들이 엮어가는 심심한 대화. 성격대로라면 소리소문없이 사라져야 맞지만 어쩐지 이번엔 그게 쉽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작년 이맘때도 그랬더란다. 그만둬야지 작정하면 본래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데 그게 안 되더라고. 왠지 걸리는 게 많더라고. 잘 정리한 다음 잘 떠나고 싶었다고. 이는 지리산권에서 활동 좀 해본 사람이라면 대개는 그 이름과 얼굴을 ‘알’ 법한 쭈이의 이야기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그를 아는 것일까. 혹은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지난 5년간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이하 센터)> 실무자로 일해온 쭈이가 올해 말로 일을 그만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함양 사람도 아닌 그에게 인터뷰를 청한 건, 그러니까 모두가 안다고 여기지만 실은 잘 모르는 그와 이제라도 속엣말을 조금은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요즘 그가 이웃들에게 하듯이, 어쩌면 나 또한 그에게 작별 밥상 비슷한 걸 차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정갈하고도 격식을 갖춘 음식 대신 녹음기와 메모지와 펜을 탁자에 올려 두고서. 2018년, ‘페친’들의 산내에 들어오기까지 쭈이가 처음으로 ‘산내’를 찾은 것은 2018년 5월, 백수로 산 지 5개월쯤 되던 때였다. “약간 조증이 의심될 만큼” 에너지가 끓어올라 각종 워크숍이며 강좌 들을 섭렵하느라 분주하던 그 시절. ‘페친’들을 통해 알고 있던 산내면에 그가 직접 내려온 이유 또한 <지리산이음(이하 이음)>에서 준비한 ‘시골살이 학교’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2018년 5월 지리산이음에서 진행한 ‘시골살이 학교’ 참가자들이 손모내기를 하고 있다.(사진제공_지리산이음) “그전부터 산내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문화기획달> 페이스북을 팔로우하고 있었어요. 거기서 발행한 잡지 ‘지글스’의 구독자이기도 했고요. 그러다 2018년 봄가을에 시골살이 학교와 지리산포럼에 참여하면서 직접 산내를 경험하게 된 거예요. 당시 산내에 대한 제 느낌은, 작은 마을인데 자기 색깔을 드러내며 뭔가를 해나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게 되게 흥미롭다는 거. 실상사와 그 옆 둑방 길을 천천히 걷는 것도 좋았고요. 그래서 이곳을 조금 더 알고 싶고 탐색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죠.” 흔한 시골 마을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특별해 보이는 산내에 관심과 호감이 있던 건 분명하다. 그렇더라도 마침 그 시기에 이음이 센터에서 일할 실무자를 구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인연이 길고 깊게 이어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쭈이는 말한다. 이는 그가 “일 중심으로 사고하고 움직이는” 사람이어서 그렇다. 백수 생활 일 년 만에 취업을 고민하던 그는 이음의 구인공고에 이끌려 다시 산내로 향했고, 그곳에 거처를 정해 그해 12월 1일부터 센터로 출근을 하게 된다. “시민운동이니 공익활동이니 그런 게 다 낯설었죠” 여기까지 들으면 그가 센터 실무자로 활동하게 된 과정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사실 쭈이는 이음이나 센터가 정확히 어떤 곳인지는 잘 모른 채 내려왔다고 고백한다. 비영리, 시민사회, 공익활동 같은 개념 자체가 생소했다는 것. 대학에 다닐 때도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그는, 굳이 따지자면 보수적이고 완고한 집안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그런 건 절대 하면 안 되는” 줄 아는 부류에 가까웠다. “센터에 들어가고 나서 처음 했던 일이 동네 주민과 함께하는 ‘사람책’이었어요. 산내는 귀농 귀촌 인구가 적잖은데 특히 그해에 20주년 된 분들이 꽤 많으셨거든요. 그걸 기념할 겸 한 달에 한 분씩 모시고 살아온 얘기를 들어보자는 취지였죠. 이제 막 지역 생활을 시작한 저에게도 주민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거 같아서 흔쾌히 진행을 맡았어요. 한 번은 최석민 샘을 모셨는데 그날 공연을 맡은 마을 사람이 ‘철의 노동자’라는 노래를 부르더라고요. 저한테는 그 자체가 되게 문화적 충격이었거든요?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전부 다 그 노래를 따라 부르는 거예요. 주먹 쥔 손을 이렇게 흔들면서.(웃음) 그걸 보고 혼자 생각했죠. 아, 여기가 ‘그런’ 덴가?(웃음) 내가 몰랐던 세계에 들어왔구나 싶더라고요.”
센터 동료들과 회의하는 모습.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쭈이다.(사진제공_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대학에서 신문방송을 전공한 그는 이십 대를 ‘영화판’에서 보냈다. 영화 프로듀서의 꿈을 펼치기 위해 학교도 졸업하기 전 유명 영화사의 문을 두드려 취직에 성공한 걸 보면, 당시의 쭈이는 운동은 몰랐어도 꽤 도전적이고 씩씩했던 것 같다. 하지만 생애 첫 직장이던 그 영화사는 겉은 멀쩡해도 쭉정이나 다름없는 곳이어서 비전도, 마땅한 일거리도 없었다. 좀더 안정된 일자리가 필요했던 그는 다른 영화사로 옮겨 홍보마케팅 일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카피 만들고 기사 쓰고 언론인 상대하고 배우들 조율하다 보면 퇴근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도 쭈이는 그 시절을 회고할 때마다 밤샘 작업을 끝내고 이른 아침 ‘24시간 설렁탕집’에 들어가 “뜨거운 뚝배기에 깍두기 국물 부어 먹으며” 회의하던 장면을 떠올린다. “한 달에 거의 한 편씩 영화를 개봉하다 보니까 잠시도 쉴 수가 없는 거예요. 일 경험을 많이 쌓을 수 있다는 건 좋았지만 2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더 이상은 못 하겠더라고요. 영화관에만 들어가도 신물이 올라오고 토가 나올 정도였으니까.” ‘이직의 여왕’, 그 이면의 그림자 영화판을 떠나면서 오랜 꿈을 접은 쭈이는 전혀 다른 분야에 도전해 그 안에서 자신을 시험하고 계발하는 과정을 밟아왔다. 손재주가 좋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한 그는 양식조리/제빵 기능사 자격증을 딴 후 2년을 베이커리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및 매니저로 일했고, 그 뒤로는 <부천문화재단>과 <수원영상미디어센터> 등의 기관에서 또 몇 년을 보냈다. 직장을 그만두기도, 새로 구하기도 잘해 친구들로부터 ‘이직의 여왕’이라 불리곤 했다는 그에게 비결을 물어보니 이런 대답을 들려준다. “비결이라기에는 뭣하지만 제가 어딜 가든 그 일을 되게 잘할 것 같은 인상을 주나 봐요. 그런데 그건 그 일에 딱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저의 심한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거거든요. 예를 들어 저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에 따라 얼굴이 바뀌어요. 태도와 표정과 말투 등 모든 게 그 일에 최적화되는 거죠. (갈아 끼우는 건가요? 라는 질문에) 네, 맞아요!(웃음) 그래서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저를 만나면 잘 못 알아보더라고요.” 자신이 정한 ‘잘’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그치는 성향은 종종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그건 또한 번아웃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 않을까. 어딜 가나 “적응 빠르고 일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만, 쭈이로서는 그게 자신을 ‘갈아 끼우는’ 노력으로 이뤄낸 것이기에 스트레스가 적잖았을 것이다. 단기간에 성과를 낼지언정 그만큼 지치기도 쉬웠을 테고. “젊을 때는 일을 잘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그에 따른 후유증이 어떤지 잘 몰랐는데 나이가 들고 내가 일해온 패턴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알겠더라고요. 너무 애를 쓰니까 어느 정도 지나면 심하게 번아웃이 오는 거예요. 이삼십 대에는 그런 나를 잘 돌보고 다스리는 대신 이직으로 탈출구를 찾은 것도 같아요.”
삼십 대까지는 일에 대한 강박관념이 너무 커서 종종 번아웃에 시달렸다는 쭈이. 이제는 일에 몰두하는 만큼 자기 돌봄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사진제공_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여기’여서 가능했던 다시 없을 경험들 꿈을 좇아 달렸던 이십 대와, 비록 꿈은 없어도 치열하게 일했던 삼십 대. 그렇게 이십여 년을 보내고 나서 만난 센터는 여러모로 이전 직장들과는 달랐다. 시민운동과 공익활동을 표방한다는 점도 새로웠지만,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지원을 우선하고 결과물에 대한 기대 없이 지원해준다는 점이 돋보였다. 쭈이에게 이는 일하는 내내 신선한 자극이 되어주었고, 퇴직을 앞둔 지금은 “이런 방식의 활동을 경험한 자체가 소중한 자산”이라는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그는 또한 센터 일을 즐겁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으로 조직 안팎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를 꼽는다. 영화사처럼 수익을 목적으로 세워진 회사든, 문화재단처럼 돈을 잘 쓰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든, 일하는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위계질서인 경우가 많은데 센터에 있는 동안에는 적어도 그런 문제 때문에 괴로움을 겪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만난 사람들은 다 동등한 관계였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리고 모두가 다르지만 그 다름을 넘어 서로 아끼고 격려하는 분위기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죠. 제가 그동안 해온 일이 공모사업과 활동가지원사업이어서 지리산권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많이 만났잖아요. 언제 어디를 가든 그분들로부터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환대를 받은 게 제일 기억에 남아요. 내 인생에 이런 기회가 또 올까 싶을 정도로요.”
구례에 사는 농부 부부와 인터뷰 중인 쭈이. 그는 지난 5년간 지리산권 곳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사진제공_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일 년 전 퇴사를 고민하던 시기, 그가 “증발하듯 사라지는” 과거의 습성을 따르는 대신 “잘 정리하고 가야겠다”고 결정한 배경엔 바로 그 ‘사람들’이 있었다. 서로서로 고마워하고 감동하는 지리산권의 활동가들, 찾아가면 늘 과하지 않은 다정함으로 반겨주는 농부들, 그리고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지지가 무엇인지 알게 해준 센터 동료들까지. 그들로 인해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쭈이의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고, 그 일렁임이 가슴 깊은 곳 어딘가에 사라지지 않을 무늬로 새겨졌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일 년 전의 고통, 조금은 희미해졌다 해도 이제 일 년 전으로 돌아가 이야기할 차례다. 어찌하여 그때 쭈이는 센터 일을 그만두고 산내를 떠나리라 결심한 것인지. 무엇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 “제가 여기로 들어올 때 삶을 다 옮긴 게 아니거든요. 파트너와 고양이 넷은 계속 인천에서 생활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저는 주말에만 올라갔고요. 돌아보면 이게 패착이었단 생각이 드는 게, 지난 5년간 저한테는 여기가 온전한 삶의 공간이기보다 일하는 곳일 뿐이었던 거예요. 초반엔 새로운 환경에서 일하는 거에 마냥 신나서 뭐가 문제인지 잘 몰랐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지치더라고요. 또 작년 늦가을에 반려묘 넷 중 하나가 많이 아팠거든요. 그런데도 제가 그 아이를 곁에서 돌봐줄 수 없다는 게 너무나 미안하고 힘들었어요. 이런 생활을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은 데는 그게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죠.”
그가 인천 집에서 키우는 반려묘들. 이 중 한 마리는 올 2월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사진제공_쭈이) 그 당시 쭈이는 인천 집에만 가면 ‘내일 당장 그만둬야지’ 했다가 산내에 내려오면 ‘그건 좀 아니지 않나’ 갈등하며 속을 끓였다. “나 자신과 고양이만 생각하면 그만두는 게 맞”는데 이미 마음에 훅 들어와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그럴 수가 없었다는 것. 고심 끝에 그는 일 년간 활동을 연장하며 업무와 관계를 잘 갈무리하기로 했고, 아픈 고양이는 올해 2월 어느 날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그 후 계절이 세 번 바뀌고 어느덧 일주기가 되어가는 지금. “여름 지나면서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구멍이 숭숭 난 느낌은 그대로여서 그의 삶은 여전히 시리고 아프고 슬프다. 아니, 이런 말로는 제대로 설명하기가 어려운지 그는 다만 따갑고 뜨거워지는 목울대를 쓰다듬을 뿐이다. “제게 고양이는 전에 몰랐던 감정을 일깨워준, 제 인생에 깊이를 더해준 큰 존재예요. 스승 같은 존재라 할까요. 고양이가 떠난 이후로 나의 죽음도 달리 보게 됐어요. 전에는 막연히 두렵기만 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죽어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사랑하는 것들 곁에서 편안해지기를 이제 며칠 후면 쭈이는 실상사 옆으로 난 둑방 길 대신 인천 남동공단과 송도신도시 사이에 조성된 좁은 숲길을 걷고, 지리산 정상에서부터 성큼성큼 다가오는 어둠을 맞이하는 대신 꺼지지 않는 도심의 불빛 속에서 겨울밤을 뒤척일 것이다. 가끔은 떠나온 시골의 어떤 풍경과 순간을 그리워하려나? 그건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도시만이 지닌 아름다움과 재미를 이미 아는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서운하기보다 안심이 된다는 것. “어떤 것들이 나를 빨리 뭘 하게 만들 때가 있어요. 이번엔 그에 넘어가지 않고 충분히 쉬려고요. 내 손발을 단단히 묶어놔야죠!(웃음)”
인천 집 근처의 산책길. 앞으로 그는 이 길을 좀더 자주 걷게 될 것이다.(사진제공_쭈이) 나 역시 그가 한동안은 그저 푹 쉬면 좋겠다. 잘 먹고 많이 걷고 사랑하는 고양이들에 둘러싸여 깊이 잠들면 좋겠다. 그래서 지금보다 모든 게 한결 편안해지기를. 지극한 편안함으로 눈빛과 표정과 말투도 변하기를. 변하고 변해서 언젠가 만났을 때 저 사람이 쭈인가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기를. 그래도 내가 먼저 다가가 ‘혹시?’ 하고 아는 척을 하면 반갑게 손잡아주기를. 언제라도 그런 때가 오기를 바라며 멀어져가는 그의 등 뒤로 가벼운 인사를 건넨다. 쭈이, 안녕. 그동안 고마웠어요. |
잘 떠날 결심, 그 마음의 일렁임에 대하여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활동가 쭈이
글 / 자야
지난 한두 달 사이, 쭈이는 이웃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자 몇 번의 밥상을 차렸다. (사진제공_쭈이)
‘인터뷰’라는 작별 밥상
집은 금세 나갔다. 그렇다고 당장 짐을 빼는 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아침이면 그곳에서 눈을 뜨고, 출근 준비를 하고, 퇴근 후 돌아와 점점 길어지는 초겨울의 밤을 맞는다. 시간이 빌 땐 ‘작별 밥상’을 차리기도 한다. 가장 예쁜 식탁보에 가장 아끼는 그릇들. 전채로 시작해 메인을 거쳐 후식으로 이어지는 코스 요리. 서너 명의 나직한 목소리 들이 엮어가는 심심한 대화.
성격대로라면 소리소문없이 사라져야 맞지만 어쩐지 이번엔 그게 쉽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작년 이맘때도 그랬더란다. 그만둬야지 작정하면 본래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데 그게 안 되더라고. 왠지 걸리는 게 많더라고. 잘 정리한 다음 잘 떠나고 싶었다고. 이는 지리산권에서 활동 좀 해본 사람이라면 대개는 그 이름과 얼굴을 ‘알’ 법한 쭈이의 이야기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그를 아는 것일까. 혹은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지난 5년간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이하 센터)> 실무자로 일해온 쭈이가 올해 말로 일을 그만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함양 사람도 아닌 그에게 인터뷰를 청한 건, 그러니까 모두가 안다고 여기지만 실은 잘 모르는 그와 이제라도 속엣말을 조금은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요즘 그가 이웃들에게 하듯이, 어쩌면 나 또한 그에게 작별 밥상 비슷한 걸 차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정갈하고도 격식을 갖춘 음식 대신 녹음기와 메모지와 펜을 탁자에 올려 두고서.
2018년, ‘페친’들의 산내에 들어오기까지
쭈이가 처음으로 ‘산내’를 찾은 것은 2018년 5월, 백수로 산 지 5개월쯤 되던 때였다. “약간 조증이 의심될 만큼” 에너지가 끓어올라 각종 워크숍이며 강좌 들을 섭렵하느라 분주하던 그 시절. ‘페친’들을 통해 알고 있던 산내면에 그가 직접 내려온 이유 또한 <지리산이음(이하 이음)>에서 준비한 ‘시골살이 학교’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2018년 5월 지리산이음에서 진행한 ‘시골살이 학교’ 참가자들이 손모내기를 하고 있다.(사진제공_지리산이음)
“그전부터 산내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문화기획달> 페이스북을 팔로우하고 있었어요. 거기서 발행한 잡지 ‘지글스’의 구독자이기도 했고요. 그러다 2018년 봄가을에 시골살이 학교와 지리산포럼에 참여하면서 직접 산내를 경험하게 된 거예요. 당시 산내에 대한 제 느낌은, 작은 마을인데 자기 색깔을 드러내며 뭔가를 해나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게 되게 흥미롭다는 거. 실상사와 그 옆 둑방 길을 천천히 걷는 것도 좋았고요. 그래서 이곳을 조금 더 알고 싶고 탐색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죠.”
흔한 시골 마을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특별해 보이는 산내에 관심과 호감이 있던 건 분명하다. 그렇더라도 마침 그 시기에 이음이 센터에서 일할 실무자를 구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인연이 길고 깊게 이어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쭈이는 말한다. 이는 그가 “일 중심으로 사고하고 움직이는” 사람이어서 그렇다. 백수 생활 일 년 만에 취업을 고민하던 그는 이음의 구인공고에 이끌려 다시 산내로 향했고, 그곳에 거처를 정해 그해 12월 1일부터 센터로 출근을 하게 된다.
“시민운동이니 공익활동이니 그런 게 다 낯설었죠”
여기까지 들으면 그가 센터 실무자로 활동하게 된 과정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사실 쭈이는 이음이나 센터가 정확히 어떤 곳인지는 잘 모른 채 내려왔다고 고백한다. 비영리, 시민사회, 공익활동 같은 개념 자체가 생소했다는 것. 대학에 다닐 때도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그는, 굳이 따지자면 보수적이고 완고한 집안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그런 건 절대 하면 안 되는” 줄 아는 부류에 가까웠다.
“센터에 들어가고 나서 처음 했던 일이 동네 주민과 함께하는 ‘사람책’이었어요. 산내는 귀농 귀촌 인구가 적잖은데 특히 그해에 20주년 된 분들이 꽤 많으셨거든요. 그걸 기념할 겸 한 달에 한 분씩 모시고 살아온 얘기를 들어보자는 취지였죠. 이제 막 지역 생활을 시작한 저에게도 주민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거 같아서 흔쾌히 진행을 맡았어요. 한 번은 최석민 샘을 모셨는데 그날 공연을 맡은 마을 사람이 ‘철의 노동자’라는 노래를 부르더라고요. 저한테는 그 자체가 되게 문화적 충격이었거든요?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전부 다 그 노래를 따라 부르는 거예요. 주먹 쥔 손을 이렇게 흔들면서.(웃음) 그걸 보고 혼자 생각했죠. 아, 여기가 ‘그런’ 덴가?(웃음) 내가 몰랐던 세계에 들어왔구나 싶더라고요.”
센터 동료들과 회의하는 모습.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쭈이다.(사진제공_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대학에서 신문방송을 전공한 그는 이십 대를 ‘영화판’에서 보냈다. 영화 프로듀서의 꿈을 펼치기 위해 학교도 졸업하기 전 유명 영화사의 문을 두드려 취직에 성공한 걸 보면, 당시의 쭈이는 운동은 몰랐어도 꽤 도전적이고 씩씩했던 것 같다. 하지만 생애 첫 직장이던 그 영화사는 겉은 멀쩡해도 쭉정이나 다름없는 곳이어서 비전도, 마땅한 일거리도 없었다.
좀더 안정된 일자리가 필요했던 그는 다른 영화사로 옮겨 홍보마케팅 일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카피 만들고 기사 쓰고 언론인 상대하고 배우들 조율하다 보면 퇴근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도 쭈이는 그 시절을 회고할 때마다 밤샘 작업을 끝내고 이른 아침 ‘24시간 설렁탕집’에 들어가 “뜨거운 뚝배기에 깍두기 국물 부어 먹으며” 회의하던 장면을 떠올린다.
“한 달에 거의 한 편씩 영화를 개봉하다 보니까 잠시도 쉴 수가 없는 거예요. 일 경험을 많이 쌓을 수 있다는 건 좋았지만 2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더 이상은 못 하겠더라고요. 영화관에만 들어가도 신물이 올라오고 토가 나올 정도였으니까.”
‘이직의 여왕’, 그 이면의 그림자
영화판을 떠나면서 오랜 꿈을 접은 쭈이는 전혀 다른 분야에 도전해 그 안에서 자신을 시험하고 계발하는 과정을 밟아왔다. 손재주가 좋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한 그는 양식조리/제빵 기능사 자격증을 딴 후 2년을 베이커리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및 매니저로 일했고, 그 뒤로는 <부천문화재단>과 <수원영상미디어센터> 등의 기관에서 또 몇 년을 보냈다. 직장을 그만두기도, 새로 구하기도 잘해 친구들로부터 ‘이직의 여왕’이라 불리곤 했다는 그에게 비결을 물어보니 이런 대답을 들려준다.
“비결이라기에는 뭣하지만 제가 어딜 가든 그 일을 되게 잘할 것 같은 인상을 주나 봐요. 그런데 그건 그 일에 딱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저의 심한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거거든요. 예를 들어 저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에 따라 얼굴이 바뀌어요. 태도와 표정과 말투 등 모든 게 그 일에 최적화되는 거죠. (갈아 끼우는 건가요? 라는 질문에) 네, 맞아요!(웃음) 그래서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저를 만나면 잘 못 알아보더라고요.”
자신이 정한 ‘잘’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그치는 성향은 종종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그건 또한 번아웃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 않을까. 어딜 가나 “적응 빠르고 일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만, 쭈이로서는 그게 자신을 ‘갈아 끼우는’ 노력으로 이뤄낸 것이기에 스트레스가 적잖았을 것이다. 단기간에 성과를 낼지언정 그만큼 지치기도 쉬웠을 테고.
“젊을 때는 일을 잘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그에 따른 후유증이 어떤지 잘 몰랐는데 나이가 들고 내가 일해온 패턴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알겠더라고요. 너무 애를 쓰니까 어느 정도 지나면 심하게 번아웃이 오는 거예요. 이삼십 대에는 그런 나를 잘 돌보고 다스리는 대신 이직으로 탈출구를 찾은 것도 같아요.”
삼십 대까지는 일에 대한 강박관념이 너무 커서 종종 번아웃에 시달렸다는 쭈이.
이제는 일에 몰두하는 만큼 자기 돌봄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사진제공_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여기’여서 가능했던 다시 없을 경험들
꿈을 좇아 달렸던 이십 대와, 비록 꿈은 없어도 치열하게 일했던 삼십 대. 그렇게 이십여 년을 보내고 나서 만난 센터는 여러모로 이전 직장들과는 달랐다. 시민운동과 공익활동을 표방한다는 점도 새로웠지만,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지원을 우선하고 결과물에 대한 기대 없이 지원해준다는 점이 돋보였다. 쭈이에게 이는 일하는 내내 신선한 자극이 되어주었고, 퇴직을 앞둔 지금은 “이런 방식의 활동을 경험한 자체가 소중한 자산”이라는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그는 또한 센터 일을 즐겁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으로 조직 안팎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를 꼽는다. 영화사처럼 수익을 목적으로 세워진 회사든, 문화재단처럼 돈을 잘 쓰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든, 일하는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위계질서인 경우가 많은데 센터에 있는 동안에는 적어도 그런 문제 때문에 괴로움을 겪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만난 사람들은 다 동등한 관계였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리고 모두가 다르지만 그 다름을 넘어 서로 아끼고 격려하는 분위기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죠. 제가 그동안 해온 일이 공모사업과 활동가지원사업이어서 지리산권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많이 만났잖아요. 언제 어디를 가든 그분들로부터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환대를 받은 게 제일 기억에 남아요. 내 인생에 이런 기회가 또 올까 싶을 정도로요.”
구례에 사는 농부 부부와 인터뷰 중인 쭈이.
그는 지난 5년간 지리산권 곳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사진제공_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일 년 전 퇴사를 고민하던 시기, 그가 “증발하듯 사라지는” 과거의 습성을 따르는 대신 “잘 정리하고 가야겠다”고 결정한 배경엔 바로 그 ‘사람들’이 있었다. 서로서로 고마워하고 감동하는 지리산권의 활동가들, 찾아가면 늘 과하지 않은 다정함으로 반겨주는 농부들, 그리고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지지가 무엇인지 알게 해준 센터 동료들까지. 그들로 인해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쭈이의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고, 그 일렁임이 가슴 깊은 곳 어딘가에 사라지지 않을 무늬로 새겨졌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일 년 전의 고통, 조금은 희미해졌다 해도
이제 일 년 전으로 돌아가 이야기할 차례다. 어찌하여 그때 쭈이는 센터 일을 그만두고 산내를 떠나리라 결심한 것인지. 무엇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
“제가 여기로 들어올 때 삶을 다 옮긴 게 아니거든요. 파트너와 고양이 넷은 계속 인천에서 생활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저는 주말에만 올라갔고요. 돌아보면 이게 패착이었단 생각이 드는 게, 지난 5년간 저한테는 여기가 온전한 삶의 공간이기보다 일하는 곳일 뿐이었던 거예요. 초반엔 새로운 환경에서 일하는 거에 마냥 신나서 뭐가 문제인지 잘 몰랐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지치더라고요. 또 작년 늦가을에 반려묘 넷 중 하나가 많이 아팠거든요. 그런데도 제가 그 아이를 곁에서 돌봐줄 수 없다는 게 너무나 미안하고 힘들었어요. 이런 생활을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은 데는 그게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죠.”
그가 인천 집에서 키우는 반려묘들. 이 중 한 마리는 올 2월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사진제공_쭈이)
그 당시 쭈이는 인천 집에만 가면 ‘내일 당장 그만둬야지’ 했다가 산내에 내려오면 ‘그건 좀 아니지 않나’ 갈등하며 속을 끓였다. “나 자신과 고양이만 생각하면 그만두는 게 맞”는데 이미 마음에 훅 들어와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그럴 수가 없었다는 것. 고심 끝에 그는 일 년간 활동을 연장하며 업무와 관계를 잘 갈무리하기로 했고, 아픈 고양이는 올해 2월 어느 날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그 후 계절이 세 번 바뀌고 어느덧 일주기가 되어가는 지금. “여름 지나면서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구멍이 숭숭 난 느낌은 그대로여서 그의 삶은 여전히 시리고 아프고 슬프다. 아니, 이런 말로는 제대로 설명하기가 어려운지 그는 다만 따갑고 뜨거워지는 목울대를 쓰다듬을 뿐이다.
“제게 고양이는 전에 몰랐던 감정을 일깨워준, 제 인생에 깊이를 더해준 큰 존재예요. 스승 같은 존재라 할까요. 고양이가 떠난 이후로 나의 죽음도 달리 보게 됐어요. 전에는 막연히 두렵기만 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죽어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사랑하는 것들 곁에서 편안해지기를
이제 며칠 후면 쭈이는 실상사 옆으로 난 둑방 길 대신 인천 남동공단과 송도신도시 사이에 조성된 좁은 숲길을 걷고, 지리산 정상에서부터 성큼성큼 다가오는 어둠을 맞이하는 대신 꺼지지 않는 도심의 불빛 속에서 겨울밤을 뒤척일 것이다. 가끔은 떠나온 시골의 어떤 풍경과 순간을 그리워하려나? 그건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도시만이 지닌 아름다움과 재미를 이미 아는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서운하기보다 안심이 된다는 것.
“어떤 것들이 나를 빨리 뭘 하게 만들 때가 있어요. 이번엔 그에 넘어가지 않고 충분히 쉬려고요. 내 손발을 단단히 묶어놔야죠!(웃음)”
인천 집 근처의 산책길. 앞으로 그는 이 길을 좀더 자주 걷게 될 것이다.(사진제공_쭈이)
나 역시 그가 한동안은 그저 푹 쉬면 좋겠다. 잘 먹고 많이 걷고 사랑하는 고양이들에 둘러싸여 깊이 잠들면 좋겠다. 그래서 지금보다 모든 게 한결 편안해지기를. 지극한 편안함으로 눈빛과 표정과 말투도 변하기를. 변하고 변해서 언젠가 만났을 때 저 사람이 쭈인가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기를. 그래도 내가 먼저 다가가 ‘혹시?’ 하고 아는 척을 하면 반갑게 손잡아주기를. 언제라도 그런 때가 오기를 바라며 멀어져가는 그의 등 뒤로 가벼운 인사를 건넨다. 쭈이, 안녕. 그동안 고마웠어요.
글쓴 사람. 자야
나에게 기록이란, 먼저 다가가 말 걸고 온 마음을 기울여 듣고 나를 앞세우지 않고 쓰는 것. 올해는 이 어려운 일을 해보려 한다. 이런 나를 조금은 칭찬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