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이야기와 노래가 세상을 이룰 때까지 2023년 기록 활동을 마무리하며 글 / 자야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지는 않을, 말과 글 동지 즈음에 한 솥 가득 끓여 냉장고에 넣어둔 호박죽을 꺼내 데웁니다. 따끈한 김과 순하디순한 자연 그대로의 단내가 퍼져나가면서 금세 부엌이 포근해지네요. 이 호박죽에 쓰인 늙은 호박과 머루콩, 선비잡이콩, 강화푸른밤콩은 모두 작년에 위림초등학교 텃밭 수업을 진행한 ‘생태텃밭팀’이 아이들과 함께 키워 거둔 것입니다. 냉동실 한구석엔 엊그제 ‘마을활력공간 빈둥’ 송년회에서 받아온 가래떡도 잠자고 있어요. 긴긴 겨울 동안 조금씩 꺼내 떡국을 끓여 먹어야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배가 든든해지는 이 기분을 짐작하시려나요? 생태텃밭팀과 공간빈둥은 제가 작년에 기록 활동을 하며 만난 사람/장소입니다. 이 외에도 여러 사람과 공간과 소모임 들을 만나 인연을 맺었지요. 그 과정에서 좋았던 건 원래 알던 이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몰랐던 이들과는 처음으로 말을 섞으면서 그 밑바닥에 음영처럼 드리운 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엿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터뷰나 취재 한 번으로 그 대상을 온전히 알고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뭐 어떤가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주앉아 한줄 한줄 쌓아 올린 순간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지는 않을 테니까요.
기록은 말하는 이와 쓰는 이가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진은 작년 9월 김다솜 님의 인터뷰 장면.) 말하는 이와 쓰는 이가 함께 길어 올린 이야기들이 흩어지거나 사라지는 대신 ‘기록’으로 남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이것은 기록에 참여하는 모두에게 적잖은 부담일지도 몰라요. 뭐든 순식간에 변해버리는 세상에서 자신의 말이나 글이 박제된다는 건 얼마간은 두려운 일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인터뷰나 취재에 기꺼이 응해준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릴 수밖에요. 더불어 지난 일 년 동안 기록 활동을 해온 저에게도 그만하면 애썼다고 토닥여주고 싶네요. 삶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말, 말, 말들 인터뷰나 취재를 하고 원고를 마감하기까지 적어도 세 번은 상대의 말을 듣거나 읽는 시간을 갖습니다. 먼저 인터뷰하면서 한 번, 집에 돌아와 녹음한 것을 풀면서 한 번 더 들어요. 그런 다음 한글로 적힌 내용을 출력해서 읽어보지요. 요즘은 음성을 활자로 변환해주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던데 그걸 써봐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똑같은 내용을 세 번, 혹은 그 이상 듣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그 사람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진수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아하, 이런 내용을 요렇게 구성하면 되겠구나, 하는 작은 반짝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고 할까요. 듣기를 반복하고 마침내 원고를 쓰기 시작해 완성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어떤 말들은 유독 여운과 잔상이 오래 남습니다. 그중 또 몇몇은 시간이 지날수록 환해져서 자꾸 되새겨보게도 되고요. 이번 글에서는 그처럼 삶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말들을 소환해 곱씹어보려 해요. “내가 왜 이 일을 하는가를 나 자신에게 항상 물어봅니다.”
함양교육지원청에서 환경교육특구 사업을 담당한 노정우 장학사님과의 인터뷰 중에 나온 말입니다. 사업을 기획하고 예산을 집행하는 위치에 있는 만큼 매 순간 내가 하는 일의 ‘의미’와 ‘가치’를 되묻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었죠. 저 자신을 돌아보면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의미를 부여하고 그를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듯해요.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일을 대하는 마음이 전 같지 않고 애초에 그 일을 빛나게 해준 의미 또한 퇴색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는 거지요. 그러다 결국 관성이 그 일을 지배하게 되면서 한없는 지루함과 심드렁함만이 남게 되고요. 올해 제가 무얼 하며 지낼지는 모르지만 어떤 일을 하게 되든 저 말을 자주 꺼내 볼 생각이에요.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의미를 묻는 꼭 그만큼만 새로워질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는 가진 게 충분하므로 서로 나누고 돌보는 것만으로도 풍요로울 수 있어요.”
<지리산생명연대>가 함양시장 인근에 사무실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차 방문했을 때 한승명 사무국장님이 들려준 말입니다. 요즘처럼 기후위기가 심각한 상황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무기력해지거나 냉소적으로 반응하기가 쉽지요. 그런다고 망가진 지구가 살아나겠어? 이왕 죽을 거 막살다가 죽지 뭐, 하는 식으로요. 자기 자신과 공동체의 삶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이런 관점과 태도를 극복하는 힘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는 데서 솟아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저는 지금 시작할 수 있는 일 중 하나가 이미 가진 게 충분함을 알고 감사하는 것, 소비하는 대신 나누고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올해는 우리 한번 그렇게 지내보면 어떨까요? 돈을 매개로 하지 않고 물건과 재능을 서로서로 교환하는 거예요. 주변의 어려움도 함께 살피고 돌보고요. 이 나눔과 돌봄의 정신을 인간만이 아닌 비인간 생명으로까지 확장하는 게 작년 봄 <지리산활동가대회>에서 제안된 ‘지리산운동’의 중심 내용이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2023년 봄에 열린 <지리산활동가대회>에서 발표된 지리산운동 선언 취지문. “저는 여기서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느껴요. 그러고 보니 저도 이곳을 사랑하고 있더라고요.”
문화놀이장날 기획단에서 활동하는 김선희 님이 이 말을 들려주었을 때 저의 가슴에 따뜻한 기운이 퍼져가던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사실 넘치도록 사랑을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연 속에서, 또 사람 속에서요. 지금 이렇게 생존해서 살아가고 있는 게 그 증거 아닐까요? 사랑받고 있음을 자각하면 사랑을 주는 데도 좀더 마음이 열리겠지요. 올해는 모두가 그러길 바라봅니다. “처음 해보는 이 실험이 어떻게 될지 오래 지켜보고 싶어요.”
‘카페’에서 회원들의 ‘공유공간’으로 변신한 <마을활력공간 빈둥> 매니저 은진이 한 말입니다. 빈둥은 지역에서 늘 반보 정도 앞서가는 실험과 도전을 시도해왔죠. ‘일단 해보는’ 것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작년에는 빈둥뿐 아니라 뭔가 새로운 걸 해보려는 이들을 많이 만났던 것 같아요. 다섯 명이 의기투합해 문을 연 <오후공책>을 취재하러 갔을 때 한 책방지기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을 해보려고 이 공간을 마련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한 달에 한 번 극장에 모여 좋은 영화 보기를 시도한 <함달극장> 이재영 대표 역시나 “이 지역에는 보고 싶은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 없으니 우리가 해보자, 해서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고요. 또 청년모임 <이소> 대표인 다솜도 말했죠. 오랜 준비나 계획 같은 거 없이 “그저 또래 친구를 만나고 싶은 마음 하나로 시도해본” 거라고요. 인간의 삶에 ‘빵’과 ‘장미’ 둘 다 필요하다면 우리가 사는 지역엔 특히 장미에 해당하는 것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문화적인 실천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해보려는 용감한 이들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요. 올해는 우리들 각자가 그런 존재가 되어 개인의 일상뿐 아니라 지역 전체의 삶이 더 풍요로워지면 좋겠습니다.
지역에 ‘장미’를 피우기 위해 도전하는 이들 덕분에 좋은 공간, 다양한 활동이 하나둘 늘고 있다. (사진제공_오후공책) “언제 어디를 가든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환대를 받은 게 제일 기억에 남아요.”
작년에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 활동가 쭈이는 지난 5년간 지리산권에서 일하며 가장 마음에 남는 것으로 환대받은 경험을 꼽았습니다. 환대의 사전적 의미는 ‘반갑게 맞아 후하게 대접함’이네요. 여행을 다니다 보면 멋진 풍경보다는 한 사람이 보여준 친절함 같은 것이 그곳을 잊지 못할 장소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던가요? 다시 도시로 돌아간 쭈이에게 지리산권이 환대받은 곳으로 기억된다니 참 다행이다 싶어요. 아울러 올해는 우리가 서로에게 더 살가워지기를, 지역에 새로 들어오는 타인을 편견과 차별 없이 환대하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조금은 더 ‘후해지는’ 사람이 되기를 기원해요. 이야기하고 노래하길 멈추지 않는다면 일 년을 회고할 때마다 늘 상반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들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저의 작년 한해살이에서 기록 활동은 기쁘고 즐거웠던 일에 속하지만요, 반면에 함양을 포함해 지리산권에는 화나고 실망스러운 일들도 참 많았지요. 오래된 이슈인 지리산 산악열차와 케이블카에 더해 골프장, 양수댐까지 추진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함양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천 (정비를 빙자한) 파괴와 (지중화사업을 명분으로 한) 가로수학살이 계속되고 있어요. 이 무지하고도 무모한 개발들 앞에서, 모르긴 몰라도 많은 이가 아파하고 지치기도 했을 겁니다.
함양 위천에서 진행 중인 공사 장면. 일본에는 ‘긴츠기’라고, 금 간 도자기를 수선하는 기법이 있다죠. 금가루 섞은 옻 접착제로 금 간 부분을 붙이는 거라는데요, 이는 그릇이 깨진 상태임을 드러내면서도 더 귀하게 만들어준다고 해요. 작가 리베카 솔닛은 자신의 책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에서 이 긴츠기를 가리켜 “과거와 같은 모습은 아니나 전과 다른 아름다움과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보여주는 ‘마법의 흉터’라고 일컫습니다. 저는 위의 문장을 읽으면서 어쩌면 우리가 하는 ‘작은변화’ 활동도 이와 비슷할 수 있겠다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 금 간 데를 붙이고 깨진 것을 이음으로써 더 나은 아름다움과 가치를 지닌 세상을 만들어가는 작업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우리 내면에서도 이런 작업이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되었죠. 활동 과정에서 느끼는 분노와 슬픔과 낙담과 좌절 같은 감정들을 모른 체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대신, 각자 안의 찢기고 금 간 부분들까지 섬세하게 붙이고 이어주자고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계속 입을 열어 자기 자신과 지역과 사회와 지구를 이야기해요. 손에 손을 마주 잡고 상상으로 가득한 꿈과 미래를 노래하고요. 또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와 노래 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나하나 몸으로 마음으로 기록도 해보아요. 진심과 용기와 무엇보다 사랑을 담아서요. 그것이 접착성 강한 금가루가 되어 우리 내면과 외면 세계를 수선하고 치유하고 변화시킬 때까지. 그때가 언제일진 모릅니다만, 그냥 해나가는 거지요 뭐. 가깝거나 조금 떨어진 곳, 아니면 보이지 않는 먼 곳일지라도 ‘같이 하는’ 이웃과 동료들이 존재함을 기억하면서요.
<함양작은변화네트워크> 2023년 송년회에 참가한 사람들. 올해도 우리의 이야기와 노래가 계속되길 기대한다. (사진제공_채홍필) ** 그동안 인터뷰와 취재에 참여해주신 분들,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데서 응원해주신 분들 모두에게 사랑과 고마움을 전합니다. |
우리의 이야기와 노래가 세상을 이룰 때까지
2023년 기록 활동을 마무리하며
글 / 자야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지는 않을, 말과 글
동지 즈음에 한 솥 가득 끓여 냉장고에 넣어둔 호박죽을 꺼내 데웁니다. 따끈한 김과 순하디순한 자연 그대로의 단내가 퍼져나가면서 금세 부엌이 포근해지네요. 이 호박죽에 쓰인 늙은 호박과 머루콩, 선비잡이콩, 강화푸른밤콩은 모두 작년에 위림초등학교 텃밭 수업을 진행한 ‘생태텃밭팀’이 아이들과 함께 키워 거둔 것입니다. 냉동실 한구석엔 엊그제 ‘마을활력공간 빈둥’ 송년회에서 받아온 가래떡도 잠자고 있어요. 긴긴 겨울 동안 조금씩 꺼내 떡국을 끓여 먹어야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배가 든든해지는 이 기분을 짐작하시려나요?
생태텃밭팀과 공간빈둥은 제가 작년에 기록 활동을 하며 만난 사람/장소입니다. 이 외에도 여러 사람과 공간과 소모임 들을 만나 인연을 맺었지요. 그 과정에서 좋았던 건 원래 알던 이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몰랐던 이들과는 처음으로 말을 섞으면서 그 밑바닥에 음영처럼 드리운 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엿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터뷰나 취재 한 번으로 그 대상을 온전히 알고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뭐 어떤가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주앉아 한줄 한줄 쌓아 올린 순간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지는 않을 테니까요.
기록은 말하는 이와 쓰는 이가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진은 작년 9월 김다솜 님의 인터뷰 장면.)
말하는 이와 쓰는 이가 함께 길어 올린 이야기들이 흩어지거나 사라지는 대신 ‘기록’으로 남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이것은 기록에 참여하는 모두에게 적잖은 부담일지도 몰라요. 뭐든 순식간에 변해버리는 세상에서 자신의 말이나 글이 박제된다는 건 얼마간은 두려운 일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인터뷰나 취재에 기꺼이 응해준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릴 수밖에요. 더불어 지난 일 년 동안 기록 활동을 해온 저에게도 그만하면 애썼다고 토닥여주고 싶네요.
삶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말, 말, 말들
인터뷰나 취재를 하고 원고를 마감하기까지 적어도 세 번은 상대의 말을 듣거나 읽는 시간을 갖습니다. 먼저 인터뷰하면서 한 번, 집에 돌아와 녹음한 것을 풀면서 한 번 더 들어요. 그런 다음 한글로 적힌 내용을 출력해서 읽어보지요. 요즘은 음성을 활자로 변환해주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던데 그걸 써봐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똑같은 내용을 세 번, 혹은 그 이상 듣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그 사람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진수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아하, 이런 내용을 요렇게 구성하면 되겠구나, 하는 작은 반짝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고 할까요.
듣기를 반복하고 마침내 원고를 쓰기 시작해 완성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어떤 말들은 유독 여운과 잔상이 오래 남습니다. 그중 또 몇몇은 시간이 지날수록 환해져서 자꾸 되새겨보게도 되고요. 이번 글에서는 그처럼 삶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말들을 소환해 곱씹어보려 해요.
함양교육지원청에서 환경교육특구 사업을 담당한 노정우 장학사님과의 인터뷰 중에 나온 말입니다. 사업을 기획하고 예산을 집행하는 위치에 있는 만큼 매 순간 내가 하는 일의 ‘의미’와 ‘가치’를 되묻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었죠. 저 자신을 돌아보면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의미를 부여하고 그를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듯해요.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일을 대하는 마음이 전 같지 않고 애초에 그 일을 빛나게 해준 의미 또한 퇴색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는 거지요. 그러다 결국 관성이 그 일을 지배하게 되면서 한없는 지루함과 심드렁함만이 남게 되고요. 올해 제가 무얼 하며 지낼지는 모르지만 어떤 일을 하게 되든 저 말을 자주 꺼내 볼 생각이에요.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의미를 묻는 꼭 그만큼만 새로워질 수 있을 테니까요.
<지리산생명연대>가 함양시장 인근에 사무실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차 방문했을 때 한승명 사무국장님이 들려준 말입니다. 요즘처럼 기후위기가 심각한 상황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무기력해지거나 냉소적으로 반응하기가 쉽지요. 그런다고 망가진 지구가 살아나겠어? 이왕 죽을 거 막살다가 죽지 뭐, 하는 식으로요. 자기 자신과 공동체의 삶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이런 관점과 태도를 극복하는 힘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는 데서 솟아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저는 지금 시작할 수 있는 일 중 하나가 이미 가진 게 충분함을 알고 감사하는 것, 소비하는 대신 나누고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올해는 우리 한번 그렇게 지내보면 어떨까요? 돈을 매개로 하지 않고 물건과 재능을 서로서로 교환하는 거예요. 주변의 어려움도 함께 살피고 돌보고요. 이 나눔과 돌봄의 정신을 인간만이 아닌 비인간 생명으로까지 확장하는 게 작년 봄 <지리산활동가대회>에서 제안된 ‘지리산운동’의 중심 내용이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2023년 봄에 열린 <지리산활동가대회>에서 발표된 지리산운동 선언 취지문.
문화놀이장날 기획단에서 활동하는 김선희 님이 이 말을 들려주었을 때 저의 가슴에 따뜻한 기운이 퍼져가던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사실 넘치도록 사랑을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연 속에서, 또 사람 속에서요. 지금 이렇게 생존해서 살아가고 있는 게 그 증거 아닐까요? 사랑받고 있음을 자각하면 사랑을 주는 데도 좀더 마음이 열리겠지요. 올해는 모두가 그러길 바라봅니다.
‘카페’에서 회원들의 ‘공유공간’으로 변신한 <마을활력공간 빈둥> 매니저 은진이 한 말입니다. 빈둥은 지역에서 늘 반보 정도 앞서가는 실험과 도전을 시도해왔죠. ‘일단 해보는’ 것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작년에는 빈둥뿐 아니라 뭔가 새로운 걸 해보려는 이들을 많이 만났던 것 같아요. 다섯 명이 의기투합해 문을 연 <오후공책>을 취재하러 갔을 때 한 책방지기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을 해보려고 이 공간을 마련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한 달에 한 번 극장에 모여 좋은 영화 보기를 시도한 <함달극장> 이재영 대표 역시나 “이 지역에는 보고 싶은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 없으니 우리가 해보자, 해서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고요. 또 청년모임 <이소> 대표인 다솜도 말했죠. 오랜 준비나 계획 같은 거 없이 “그저 또래 친구를 만나고 싶은 마음 하나로 시도해본” 거라고요. 인간의 삶에 ‘빵’과 ‘장미’ 둘 다 필요하다면 우리가 사는 지역엔 특히 장미에 해당하는 것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문화적인 실천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해보려는 용감한 이들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요. 올해는 우리들 각자가 그런 존재가 되어 개인의 일상뿐 아니라 지역 전체의 삶이 더 풍요로워지면 좋겠습니다.
지역에 ‘장미’를 피우기 위해 도전하는 이들 덕분에 좋은 공간, 다양한 활동이 하나둘 늘고 있다. (사진제공_오후공책)
작년에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 활동가 쭈이는 지난 5년간 지리산권에서 일하며 가장 마음에 남는 것으로 환대받은 경험을 꼽았습니다. 환대의 사전적 의미는 ‘반갑게 맞아 후하게 대접함’이네요. 여행을 다니다 보면 멋진 풍경보다는 한 사람이 보여준 친절함 같은 것이 그곳을 잊지 못할 장소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던가요? 다시 도시로 돌아간 쭈이에게 지리산권이 환대받은 곳으로 기억된다니 참 다행이다 싶어요. 아울러 올해는 우리가 서로에게 더 살가워지기를, 지역에 새로 들어오는 타인을 편견과 차별 없이 환대하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조금은 더 ‘후해지는’ 사람이 되기를 기원해요.
이야기하고 노래하길 멈추지 않는다면
일 년을 회고할 때마다 늘 상반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들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저의 작년 한해살이에서 기록 활동은 기쁘고 즐거웠던 일에 속하지만요, 반면에 함양을 포함해 지리산권에는 화나고 실망스러운 일들도 참 많았지요. 오래된 이슈인 지리산 산악열차와 케이블카에 더해 골프장, 양수댐까지 추진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함양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천 (정비를 빙자한) 파괴와 (지중화사업을 명분으로 한) 가로수학살이 계속되고 있어요. 이 무지하고도 무모한 개발들 앞에서, 모르긴 몰라도 많은 이가 아파하고 지치기도 했을 겁니다.
함양 위천에서 진행 중인 공사 장면.
일본에는 ‘긴츠기’라고, 금 간 도자기를 수선하는 기법이 있다죠. 금가루 섞은 옻 접착제로 금 간 부분을 붙이는 거라는데요, 이는 그릇이 깨진 상태임을 드러내면서도 더 귀하게 만들어준다고 해요. 작가 리베카 솔닛은 자신의 책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에서 이 긴츠기를 가리켜 “과거와 같은 모습은 아니나 전과 다른 아름다움과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보여주는 ‘마법의 흉터’라고 일컫습니다.
저는 위의 문장을 읽으면서 어쩌면 우리가 하는 ‘작은변화’ 활동도 이와 비슷할 수 있겠다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 금 간 데를 붙이고 깨진 것을 이음으로써 더 나은 아름다움과 가치를 지닌 세상을 만들어가는 작업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우리 내면에서도 이런 작업이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되었죠. 활동 과정에서 느끼는 분노와 슬픔과 낙담과 좌절 같은 감정들을 모른 체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대신, 각자 안의 찢기고 금 간 부분들까지 섬세하게 붙이고 이어주자고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계속 입을 열어 자기 자신과 지역과 사회와 지구를 이야기해요. 손에 손을 마주 잡고 상상으로 가득한 꿈과 미래를 노래하고요. 또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와 노래 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나하나 몸으로 마음으로 기록도 해보아요. 진심과 용기와 무엇보다 사랑을 담아서요. 그것이 접착성 강한 금가루가 되어 우리 내면과 외면 세계를 수선하고 치유하고 변화시킬 때까지. 그때가 언제일진 모릅니다만, 그냥 해나가는 거지요 뭐. 가깝거나 조금 떨어진 곳, 아니면 보이지 않는 먼 곳일지라도 ‘같이 하는’ 이웃과 동료들이 존재함을 기억하면서요.
<함양작은변화네트워크> 2023년 송년회에 참가한 사람들. 올해도 우리의 이야기와 노래가 계속되길 기대한다. (사진제공_채홍필)
** 그동안 인터뷰와 취재에 참여해주신 분들,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데서 응원해주신 분들 모두에게 사랑과 고마움을 전합니다.
글 쓴 사람. 자야
나에게 기록이란, 먼저 다가가 말 걸고 온 마음을 기울여 듣고 나를 앞세우지 않고 쓰는 것. 올해는 이 어려운 일을 해보려 한다. 이런 나를 조금은 칭찬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