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2018-2023 활동백서 기고문] 활동가라는 말도 몰랐던 내가 지리산이음의 이사? / 김한범

2025-02-23
활동가라는 말도 몰랐던 내가 지리산이음의 이사?

김한범 / 산청 작은변화활동가 (2020-2024)



라이트노벨이나 애니메이션, 웹툰의 소재로 많이 쓰이는 것이 이세계 전생((異世界 轉生)이다. 현실에서는 평범한, 혹은 평범보다 더 모자란 삶을 살고 있던 주인공이 검과 마법의 세계로 전이되어 맹활약하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작품마다 다른 설정이 있지만 많은 경우에 주인공은 다른 세계로 넘어가면서 그를 소환한 신이나 마법사로부터 특별한 능력이나 선물을 받고, 그것을 이용해 위기를 극복하며 빠르게 성장하여 멋진 동료들의 신뢰를 받으며 마왕을 무찌른다거나 세상의 몰락을 막아내거나 해서 해피엔딩으로 달려간다. 잘 기억해 두시라. 지금 내가 할 얘기는 위와 비슷한 이야기니까.



처음에는 어색했던 활동가라는 말


12년간 교사 생활을 하다가 그만둔 것은 교사도 학생도 대상이 되어 버린 학교 교육에 대한 절망과 그 절망이 잠식하면서 스스로 걱정스러울 정도로 흔들린 건강 때문이었다. 잠시 쉬면서 내가 가진 대안을 구체화할 준비를 하다가 산청 소식을 듣게 되었다. 대안적인 삶을 지향하며 느슨한 공동체를 꾸려 신나는 마을을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경직된 지역문화 속에서 한계를 느끼고 있었기에 우리 가족은 서둘러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었다. 학교를 그만둔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산청에서 만난 사람들은 우리를 환대해 주었다. 청소년과 관련된 일을 준비하고 있다고 이야기했을 때 응원해 주었다. 그렇게 산청에서 만난 사람들의 도움으로 나는 청소년 공간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이것을 하나의 개인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뿐, 내가 ‘공익 활동’의 세계로 스스로 뛰어든 것을 알지 못했다. 청소년 공간을 준비하면서 지원사업을 신청할 때 나는 담당자 직위에 뭐라고 써야 할지 몰라 고민했다. 당시 청소년 지원단체 하마의 대표였던 김병준 선생님께서 “직위는 뭐, 활동가지.”라고 정리해 주셨다. 그 활동가라는 말이 너무나 어색하게 들려서 혼자 몇 번 되뇌었던 기억이 난다. 세상에 사람이 하는 일이 활동 아닌 것이 어디 있다고 그런 애매한 호칭을 붙였는가 하면서 남몰래 투덜거리기도 했다. 


지원사업 신청에 대해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세계로 전생할 때 내가 받은 선물이 바로 그것이었다.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고백하건대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청소년 공간을 준비하면서 지역의 여러 사람들과 얽혀 모임을 갖던 어느 날, 김병준 선생님과 함께 온 사람이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의 활동과 지원 방향에 대해 설명했다. 그를 얼마나 자주 보게 될지 몰랐던 나는 적당히 흘려듣고 있었다. 어둠침침한 조명 아래에서 명분에 대한 딱딱한 단어들을 연신 쏟아내고 있는 그 사람 탓에 우리의 모임은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동안 나는 사업에 지원했을 때 얼마나 성가신 서류작업과 결산을 거쳐야 할지, 돈 내려주는 사람의 갑질을 견뎌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학교에서 경험했던 공모 사업으로 인해 쌓인 편견은 견고했던 것이다.



여긴 조금 다를지도 몰라


생각보다 간단했던 지원서를 작성하고 면접을 보면서 여긴 조금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청소년 공간을 준비하는 것을 생각보다 세심하게 물어보고, 만들어야 하는 성과보다는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했다. 그렇게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지원비로 청소년들과 밥이라도 사 먹으며 공간을 직접 만들어 가던 어느 여름, 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 일하고 있는 현장을 방문하겠다는 것이다. 한창 천장 페인트 작업을 하던 참이라 공사판 같은 현장에 접대할 것도 없는데 불쑥 찾아오겠다니 난감했다. 그렇다고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어서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속셈으로 오시라 했다. 간식을 손에 들고 온 세 사람은 비닐이 깔린 바닥에 그냥 함께 앉아 간식을 먹으면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어려움은 없는지 다정하게 물어보았다. 센터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지원사업이란 지원하는 대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파트너로서 함께 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확인하는 것은 자주 만나는 경험은 아니니까. 그 뒤로도 센터는 꾸준한 연락하며 종종 방문하여 관심을 보여주었다. 이런저런 변수가 생기면 쉬운 방법으로 사업을 변경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기도 해서 진심으로 응원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센터에 대한 호감이 충분히 높아졌을 때 <모이고 떠들고 꿈꾸는 지리산 워크숍> (이하 ‘모떠꿈’)에 초대를 받았다. 함께 하게 된 자리에는 센터와 긴밀히 활동하시는 분들이 모여 있었고 그분들은 서로 익숙해 보였다. 나만 혼자 어색한 느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눌 때 소외되거나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기술들을 실습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있던 활동가들과 연결될 수 있었다. 더욱이 교사로 지내던 시절부터 민주적으로 의견을 모으고, 대화를 통해 유의미한 결론을 도출해 가는 과정에 관심이 높았던 나에게 <모떠꿈>은 맞춤형 워크숍이었다. 다양한 환경에서 가장 효과적인 기술을 탐색하는 과정 속에서 나는 이것을 적용할 수 있는 수많은 상황을 상상할 수 있었고 이후 모임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활용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청소년 활동을 진행하면서 생기는 기술적 고민을 <모떠꿈>에서 나누며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 큰 도움이었다. 



새로운 꿈을 꿀 기회


그렇게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와 신뢰를 쌓으며 지낸 2년 후, 센터는 나에게 작은변화활동가 역할을 제안해 왔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터라 나는 저항감 없이 새로운 이름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조금 더 긴밀해졌더니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이름처럼 센터는 스스로의 운영 방식에서부터 지원사업의 형태까지 매년 조금씩 변화를 주고 있었는데 이는 이전 활동의 경험을 통해 방향을 설정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 유연함이 때론 불확정성이라는 불안 요소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관점에서는 계단을 하나씩 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속한 곳의 작은 변화를 스스로 일으킬 수 있도록 쉽게 지원받을 수 있다는 경험을 하고, 이를 통해 얻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네트워크를 확장하며, 동시에 새로운 활동가를 발굴해 더 다양한 분야의 세밀한 변화 또는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과정을 밟아가는 느낌이라는 말이다. 


지역의 이름을 앞에 건 작은변화활동가들은 그러한 지역 변화의 움직임 속에서 자연스럽게 중심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더 친근해지며, 정보를 공유하면서 서로 협력할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하곤 했다. 그렇게 지역 활동가를 중심으로 센터와 연결된 사람들은 <지리산 활동가대회>라는 행사를 통해 또 한 번 크게 연결될 기회를 만나면서 서로에게 자극받고, 위로를 얻으며, 새로운 꿈을 꿀 기회를 갖게 되었다.


활동가의 삶이라는 것은 나에게 이세계와 다름없었다. 전에 살던 세계와 사용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며, 사람들의 문화가 다르다. 불신과 의심 속에서 당장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을 출발점으로 생각하던 나에게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는 특별한 힘이 되어 주었다. 나는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의 사업들 속에서 빠르게 내 자리를 찾을 수 있었고, 믿음직하고 사랑스러운 동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런 만남과 성장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넓혀 주었고, 내가 직접 만들어 갈 수 있는 일들을 상상하고 구현하게 도와주었다. 덕분에 넉넉하지는 않으나 아슬아슬하게 생계를 유지해 갈 수 있는 활동가로 살고 있으며 다시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마음이 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나는 이 세계에 잘 정착한 것이 아닌가? 


2023년을 끝으로 아름다운재단의 지원을 더 기대할 수 없지만 지리산이음은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를 해체하지 않았다. 지원금이 없는 만큼 센터의 사업과 지원 범위는 대폭 축소되었지만, 센터의 의지는 축소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난 6년간 지원했던 지리산권의 활동가들을 어떻게 계속해서 지원하고 그들이 자생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지는 큰 숙제로 남았다. 금전적 지원이 축소된 만큼 그들을 어떻게 계속 연결하며 연대의 기회를 이어갈지도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6년간의 활동이 숙제만 남겼는가? 지역의 활동가들에게 지원이란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를 인식하게 한 것, 연결될 수 있었기에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변화들, 지역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역량들은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의 성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남았다. 뭣도 모르던 활동가 입문자가 지리산이음의 이사직을 제안받고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수락을 하게 만든 것,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가 애써 온 ‘사람 지원’의 결과다.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2018-2023 활동백서


아름다운재단과 지리산이음이 함께 만드는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이하 지리산센터)는 전남 구례군, 전북 남원시, 경남 산청군, 경남 하동군, 경남 함양군의 시민사회와 함께 지역에 필요한 작은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들과 공익활동을 지원해왔습니다. 2023년을 끝으로 아름다운재단의 지리산센터 지원이 종료됨에 따라 지난 6년간 지리산센터가 진행해 온 다양한 활동을 돌아보며,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활동백서를 제작했습니다.


본 활동백서를 통해 지난 6년간 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를 관심있게 지켜봐주시고 응원해주신 분께 감사 인사를 전하며, 민설민영 지원조직인 지리산센터의 활동 경험이 지리산권 및 전국 시민사회 생태계 전반에 의미있는 사례가 되길 바랍니다.



🚩활동백서 PDF 내려받기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