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변화기록원[남원][곧이곧대로 기록하기] 춘향 영정 문제로 일그러진 근대 축제의 효시, 춘향제

2023-06-12

 

 

춘향 영정 문제로 일그러진 근대 축제의 효시, 춘향제

학술세미나로 정체성 확립하고 영정 문제 해결해야

 

글 / 김양오

 

 

 

‘춘향골’로 불리는 전라북도 남원. 허나 바로 그 춘향이의 ‘영정’ 때문에 3년 동안 몸살을 앓고 있다. 시민들은 올 춘향제 때는 어떻게든 갈등이 마무리될 걸로 기대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더 큰 사단이 났다. 춘향 영정,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춘향제는 1931년에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 축제다. 일제강점기 남원 예기조합의 대표 기생이었던 최봉선의 제안으로 춘향 사당을 만들고 영정을 봉안한 뒤 제사를 지낸 게 춘향제의 시작이다. 당시 예기조합(권번)의 기생들은 일제에 말살되어가던 우리 전통 예술의 맥을 잇는 사람들이었다. 

 

 

춘향제는 남원 사람들만의 행사가 아니었다. 전국의 예기조합에서 성금을 냈고 100여명의 대표 기생들이 참여해 제사를 지내고 광한루에서 판소리 명창 대회를 한 전국행사였다. 마침 그 해 남원역이 개통되면서 기차를 타고 전국에서 수만 명의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는데 해가 갈수록 인기는 더욱 높아만 갔다.

 

 

춘향사당을 짓는 일은 192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되었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거의 불가능해지자 남원의 신간회와 청년동맹, 형평사 같은 항일운동 단체의 간부들이 권번과 함께 일을 꾸민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신간회 부지회장 겸 총무를 지낸 이현순, 청년회 회장이었던 정광옥이다. 당시 신문 자료를 보면 신간회, 청년회, 형평사, 동아일보, 권번이 지역 빈민 구제 활동, 수재민 돕기 활동 같은 여러 활동을 함께 했고 그 여세를 몰아 춘향제도 함께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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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춘향사당과 최봉선이 등장한 신문

 

 

당시 남원 권번은 민족성이 매우 강한 단체였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승하하자 바로 문을 닫고 영업을 하지 않아 오해건(조선총독부 편찬 ‘조선인 명감’에 수록된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 남원 군수와 기생 대표가 설전을 벌였다는 기사가 있을 정도다. 그 때 대표 기생이 바로 춘향제를 만든 최봉선이다. 전라북도의 권번을 연구한 논문(2010. 황미연)에 의하면 전북에서 유일하게 남원권번만이 일본말을 안 가르쳤다고 한다. 일본말을 안 가르친 것 뿐 아니라 일본 경찰과 헌병이 요청하면 가지도 않았다. 당시 최고의 춤꾼이었던 조갑녀 명무(제1회 춘향제부터 참가한 남원권번 기생)는 일본 기생(게이샤)이 돈 다발을 들고 찾아와 조선 춤을 가르쳐 달라고 해도 거부했다.  

   

 

그런 분들이 그냥 할 일이 없어서 춘향제를 만들었을 리 만무하다. 일제 치하에서 말살되어 가던 우리 민족의 얼과 문화를 지키기 위해 사당을 짓고 영정을 그려 봉안한 뒤 제사와 판소리 대회, 풍물굿을 했던 것이다. 

 

 

춘향제는 93년 동안 단 한 번도 제사를 거른 적이 없다. 일제의 탄압과 6.25전쟁, 박정희 군사 쿠데타 시기에도 다른 행사를 하나 못 해도 제사만큼은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었다. 그 말은 춘향제의 핵심이 바로 ‘제사’라는 뜻이다. 그 제사의 핵심은 바로 ‘춘향 영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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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첫 춘향제 때 봉안된 영정

 

 

그런데 춘향 영정에는 우여곡절이 많다. 1937년 중국까지 침략한 일제가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은 하나다)정책을 펼치면서 그 방법의 하나로 그동안 탄압하던 춘향제를 악용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가부키 극으로 춘향전 연극을 만들어 전국 순회  공연을 하고 거기 등장하는 가부키 춘향이의 모습처럼 얼굴이 하얗고 젊은 춘향이로 영정을 새로 그려 사당에 올려 버린 것이다. 일제의 지시로 그림을 그린 이는 당시 최고의 실력가이자 친일파 화가였던 김은호였고 사당은 신사처럼 개조되었고 입혼식(신사에 신을 올리는 의식)을 한 뒤 새 춘향 영정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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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내선일체예술의 악수’ 춘향전 홍보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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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에 ‘입혼식’을 했다고 기록한 김은호의 회고록 ‘서화백년’

 

 

 

 다행히 그 영정은 6.25때 훼손되어 없어졌고 최봉선이 지켰던 본래 영정이 사당에 돌아왔지만 1962년 김은호가 다시 그린 춘향 영정에 내쫓기고 말았다. 박정희 정권의 내각수반이었던 송요찬이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이쁜 춘향이로 대치하라(1965.5.11 조선일보)’고 했던 것이다. 그 때부터 춘향제는 ‘이쁜 춘향이 뽑기’를 비롯해 불꽃놀이, 다양한 구경거리, 놀거리 중심으로 바뀌었고 제사와 판소리 대회, 풍물굿은 점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춘향이는 예쁜 아가씨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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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송요찬이 김은호가 새로 그린 춘향상을 사당에 올리는 모습

 

 

2020년 9월 뜻있는 시민들의 강력한 요구와 정부의 친일청산 의지에 힘입어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영정이 60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그리고 박물관 수장고에 있던 최초 영정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남원시는 일부 시민들의 강력한 반대로 최초 영정을 봉안하지 못했다. 춘향이는 17세 전후의 아가씨 모습이어야 하는데 최초 영정은 결혼한 부인의 모습인데다 복식도 안 맞고 작가도 불분명하다는 까닭이었다.  

 

 

결국 최초 영정을 봉안해야 한다는 시민단체들과 새로 그려야 한다는 시민단체들의 갈등은 3년 가까이 이어졌고 남원의 정치권과 행정은 현명한 해결 방법을 찾기는커녕 갈등을 부추기는 일만 만들어냈다. 그 사이 남원역사연구회는 선조들이 춘향제를 왜 만들었는지 그 역사를 탐구해 최초 영정의 가치를 드높였다. 그리고 남원시와 의회에 계속해서 학술세미나를 개최한 뒤 영정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미 춘향제를 연구한 학자들이 많으며 영정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한 학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쪽으로 해결 방향을 잡지 않았고 새로 취임한 시장의 의견에 따라 새로 그리기로 결정해 버렸다. 

  

 

 

김양오의 인터뷰 <남원의 인물을 만나다>

남원정신의 뿌리를 찾아, 남원 정신연구회 강경식 부회장을 만나다 [바로가기]

* 2020년 인터뷰로, 강주수 화백이 그린 최초 춘향 영정과 저항의 정신으로 춘향제를 만든 기생 최봉선의 이야기를 춘향 영정 철거 활동을 이끈 강경식 부회장으로부터 들어보았다.

 

 

 

그리고 올해 93회 춘향제가 시작되던 지난 5월 25일 아침. 춘향사당에 새로 봉안된 춘향영정을 본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일그러졌다. 

 

 

“이게 뭐야? 이게 춘향이야?”

유치원 아이부터 노인들까지 거의 다 비슷한 반응이었다. 

 

 

새 춘향 영정을 그린 김현철 작가는 “춘향전 첫 대목에 등장하는 5월 단오일을 맞아 몸단장을 한 채 그네를 타기 위해 나오는 17살 안팎의 18세기 여인상”이라고 말했다.(전라일보. 2023.5.30.) 춘향전의 첫 대목이라면 붉은 댕기 머리를 한 처녀여야 하는데 머리를 올린 뒤 커다란 대나무 비녀를 꽂은 결혼한 여인의 모습인데다가 그네를 타기에는 너무나 부적절한 옷을 입은 모습이다. 그동안 영정을 새로 그리자고 강력하게 요구해 왔던 단체들도 격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그런데 시민들을 더 화나게 하는 것은 새 춘향의 얼굴이 현재 남원의 고3 여고생 일곱 명을 모델로 했다는 사실이다. 18세기 여인상을 그린다면서 21세기의 열아홉 살 여학생들 얼굴을 그리는 것도 앞뒤가 안 맞지만, 영정의 얼굴이 10대가 아니라 40대 얼굴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영정은 신윤복의 미인도를 차용해 그린 것이 명확해 보인다. 그런데 신윤복의 미인도는 기생을 그린 것이다. 춘향은 기생의 딸이지만 단 한 번도 기생 노릇을 한 적이 없으며 기생이 아니라 열녀로서 추앙받았다. 즉, 기생의 복식에 남원 여고생들 얼굴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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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그린 춘향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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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 <미인도>

 

 

 

3년 동안 끌어 온 춘향 영정 문제. 결국 남원시장의 독단 행정과 무능력한 시의회 때문에 해괴망측한 춘향이가 사당을 차지하고 말았다. 모욕감과 자괴감에 빠진 시민들의 한숨 소리가 하루하루 깊어만 간다. 이제라도 춘향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영정 문제를 올바로 해결하고 싶다면 춘향제를 제대로 연구한 연구자들을 불러 학술 세미나를 진행하고 진지한 토론회를 개최해야 한다. 그동안 목소리를 높여온 시민들뿐 아니라 냉철한 이성으로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참여만이 남원시의 역사를 한 걸음 진보하게 만들 수 있다.  

 

 

 

글 쓴 사람. 김양오

아이 셋을 다 키운 중년 아줌마. 젊었을 적 글쓰기와 아동문학을 배워 평생 잡다한 글을 쓰며 살았다. 그러다 쉰 살부터 역사동화를 쓰기 시작해 책 세 권을 냈다. 아름답게 흐르는 요천이 너무 좋아 남원으로 이사해 15년째 살고 있는데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이 사라져서 가슴이 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