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춤의 맥을 잇고 있는 정명희 교수와 시민들, 무겁게 들어 올리는 팔로 ‘남원춤’을 되살리다 글 / 김양오 더운 기운이 훅 올라오는 장마철 월요일 낮 12시, 남원청소년문화의집 2층에서 장구 장단이 울려 퍼져 내려온다. 소리 따라 계단을 올라가 연습실 문을 여니 신선들의 춤인 듯 선녀들의 춤인 듯 우아한 춤사위를 배우고 있는 사람들이 한 가득이다. “팔을 무겁게 들어야 해요. 팔에 들돌을 매달아 놓은 것처럼 무겁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전수생들을 위엄스럽게 지도하고 있는 사람, 정명희 교수다. 2시간 반이 훌쩍 넘어서야 팔을 내린다. 쉬는 시간은 단 한 번. 힘들다고 푸념할 만도 한데 정명희 교수의 열정에 아무도 힘든 내색을 안 한다. 아니, 춤뿐만 아니라 스승의 열정까지도 배우고 있는 듯하다. 
청소년문화의집에서 민살풀이를 배우고 있는 시민들 3시간 가까운 실내 연습이 끝나자 모두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이제 흩어지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다.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2차 연습 장소는 남원 예촌에 있는 ‘조갑녀살풀이명무관’이다. 이들이 배우고 있는 것이 바로 ‘조갑녀류 남원춤’이다. 춤을 가르치고 있는 정명희 교수는 바로 조갑녀 명무의 딸이자 유일한 제자다. 일제강점기 남원예기조합을 중심으로 화려한 꽃을 피웠으나 조갑녀 명무의 귀천으로 명맥이 끊어질 뻔한 남원춤을 다시 잇고 있는 사람이다. 정명희 교수는 본래 다른 춤을 추는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사실은 대단한 명무(판소리 잘 하는 사람은 명창이라고 하듯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전수를 받기 시작했다. 매우 늦은 선택이었지만 최상의 선택이었다. 
조갑녀 명무관에서 정명희 교수의 지도하에 춤을 배우고 있는 시민들 그렇다면 조갑녀는 누구인가? 남원예기조합(일제시대 ‘권번’이라고 불렀던 예술 기생들의 회사이자 학교)전설의 춤꾼 조영숙(예명)이다. 예인 집안의 딸이라 아주 어릴 적에 자연스럽게 조합에 들어가 예기로서 교육을 받았던 조갑녀는 우리나라 근현대사 최초의 지역 축제인 ‘춘향제’를 연 분이다. 1931년, 고작 아홉 살의 나이였다. 춘향제의 시작이요 핵심은 열녀 성춘향에게 올리는 제사다.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처음으로 해야 하는 의식은 춘향 영정 앞에 세워져 있는 초에 불을 붙이는 것인데 바로 그 촛불을 켠 사람이다. 전국에서 모인 100여 명의 쟁쟁한 예기들 앞에서 빨간 댕기 머리를 한 키 작은 조갑녀가 고사리 손으로 높은 촛대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가슴이 떨린다. 
조갑녀 명무가 어릴 적에 밝혔을 춘향제의 촛불 마침 1931년에 남원 기차역이 개통되면서 춘향제를 보려고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광한루 인근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첫 해에는 촛불만 켰지만 다음 해부터는 다른 기생들과 함께 꽃을 들고 화무를 추고 나중에는 혼자 승무를 췄다. 춘향제 때마다 남원의 전통 예술이 넘실댔고 남원의 소리와 춤, 풍물굿은 전국에 빠르게 소문이 났다. 그 핵심에 ‘춤은 조갑녀’라는 말이 있었다. ‘온 몸에 춤이 들어 있는 아이’라는 말이 돌았다. 정신대를 피해 급히 결혼한 이후 예기조합 활동을 멈추고 춘향제 때만 간간히 무대에 올랐던 조갑녀 명무가 2007년 서울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무겁게’ 팔을 들어 올렸을 때 진옥섭 한국문화재 재단 이사장은 ‘나이든 예기들의 입에서 입으로 떠돌던 이장선 춤의 마지막 뿌리가 나타났다.’고 극찬했다. 그 이후 또다시 공연을 준비할 때는 ‘와 봐라! 흉곽을 드르륵 열고 심장을 덥석 쥐는 그 5분’ 이라며 사람들 마음을 급하게 만들었다. 
민살풀이 춤을 추고 있는 조갑녀 명무, 명무관 전시 사진 조갑녀의 스승 이장선이 누구길래 조갑녀 춤이 그토록 특별하단 말인가? 이장선은 조선의 궁중 음악기관인 장악원(현재의 국립국악원이라 볼 수 있음)에서 조선 왕조의 마지막 진연을 진두지휘했던 사람이다. 조갑녀는 이장선에게 배운 마지막 제자였다. 객석에서 조갑녀의 춤을 숨죽이며 보고 있던 또 다른 춤의 명인은 “젊은 양반들 춤은 밥솥에 한 밥이고, 그 양반 춤은 가마솥에 한 밥입디다.”(노름마치, 진옥섭)하는 말을 남겼다. 지리산처럼 웅장한 남원 판소리 동편제처럼 조갑녀의 춤도 지리산을 닮아 웅숭깊다. 사람들은 이제 조갑녀류 남원춤을 ‘동편제 춤’이라고도 한다. 뒤늦게 어머니 춤의 높은 가치를 깨달아 전수를 받고 이제는 전국에 뛰어다니며 알리고 있는 여섯째 딸 정명희 교수. 누가 강사비를 주는 것도 아니고 교통비를 보태주는 것도 아니다. 서울에 살고 있지만 교육생들에게 만 원짜리 한 장 안 받고 배우겠다는 사람들만 있으면 제주도까지 날아다닌다. 이런 정교수의 노력 덕분에 조갑녀춤이 2015년 국립무형 유산원에 전승보존종목으로 선정되었다. ‘살풀이춤의 원형을 가장 잘 보존했다’는 평가와 함께 말이다. 민살풀이춤은 잘 알려진 살풀이춤과 달리 수건을 들지 않고 맨손으로 추는 춤이다. 손에 부채든 수건이든 칼이든 뭐라도 들면 의지가 되는데 아무 것도 들지 않고 맨 손으로 추니 훨씬 어렵고 힘든 춤이다. 하얀 버선을 신은 두 발을 어슷하게 놓는 ‘비정비팔’자세로 꼿꼿하게 서 있다가 장단 따라 기의 흐름 따라 자연스럽게 팔을 들어 올리면 춤이 시작된다. 
조갑녀 명무와 딸 정명희 교수, 조갑녀 명무관 전시 사진 2018년, 남원시가 조갑녀의 생전 거주지를 복원해 ‘조갑녀살풀이명무관’을 만들었다. 본래 조갑녀 부부가 운영하던 금남여관 자리다. 터가 넓으니 공연까지 할 수 있는 잔디 마당도 생겼다. 금남여관은 남원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여관이어서 고위급 인사들과 수학여행단이 숙박을 하던 곳이다. 1942년에 결혼해서 93세까지 살았던 곳으로 명무관 안에는 공설시장에서 산 만 원 짜리 지팡이를 비롯해 조갑녀 명무의 손때 묻은 소품들과 공연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큰 텔레비전에는 공연 영상과 장례식 영상이 돌아가고 있다. 특히 조갑녀 명무의 춤에 반해 각별히 교류를 했던 국악가요의 거장 장사익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살풀이는 조갑녀>라고 쓴 현판도 장사익이 직접 쓴 글씨다. 서로의 공연에 찬조 출연해 줄 정도로 각별했고 조갑녀 명무가 거동이 힘들었던 말년에는 업고 다녔다고도 하니 두 사람의 아름다운 교우를 짐작할 수 있다. 
조갑녀 명무와 장사익 가수의 교우 사진, 조갑녀 명무관 전시 사진 
장사익 가수가 쓴 ‘살풀이는 조갑녀’ 현판 명무관 마당 한 구석에 정겨운 모습의 할머니 조각상이 서 있다. 그리고 그 아래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이 집 마당 들어서면 누구든 배곯지 않게 한 상 내주셨던 우리의 어머니 조갑녀
정명희 교수의 기억에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다. 나무를 다 팔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나무꾼의 나무까지 다 팔아주셨던 따뜻한 분, 춤을 가르쳐 달라고 돈뭉치를 들고 찾아 온 일본 기생(게이샤)에게는 춤을 가르쳐 주지 않았던 지조 있는 분이셨다. 
명무관 한구석에 서 있는 조갑녀 명무 조각상 그런 넉넉한 마음과 곧게 선 지조가 팔과 허리에 그대로 다 스며있어 무대에 꼿꼿이 서서 팔을 들고만 있어도 사람들은 환호한다. 그것을 ‘속멋’ 또는 ‘지숨’이라고 한다. 아무런 몸짓이 없이 가만히 서 있어도 춤이 되는 춤꾼이다. 삶 자체가 춤이었기에 가능한, 그러하기에 ‘명무’라는 칭호를 받기에 손색이 없는 분이다. 정명희 교수가 몇 년 동안 공 들인 결과 드디어 남원에 ‘조갑녀민살풀이전수회'가 설립되었다. 남원, 구례, 곡성, 광주, 전주, 대구, 어떨 때는 제주도 회원도 남원으로 달려와 춤을 함께 춘다. 남원춤이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전수를 시작한 첫 해부터 지금까지 부지런히 춤을 배우러 다니고 있는 구례 군민 공정선 씨는 “아무리 전통이 의미가 깊다고 해도 재밌지 않으면 계속하지 못했을 거예요. 언제부터인가 민살풀이가 즐겁고 자유로운 것이구나, 내 영혼을 달래는구나 하고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하고 조용히 고백한다. 우리나라 전통 예술의 한 축인 춤, 우리 민족의 신명과 기백이 그 안에 담겨 있다. 판소리와 함께 우리 춤이 되살아날 때 우리 민족의 기백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 믿는다. 민살풀이를 시작으로 승무, 검무까지 남원의 춤부터 모두 다 되살아나길 바란다. 
2022년 가을, 조갑녀 명무관 공연 |
남원춤의 맥을 잇고 있는 정명희 교수와 시민들,
무겁게 들어 올리는 팔로 ‘남원춤’을 되살리다
글 / 김양오
더운 기운이 훅 올라오는 장마철 월요일 낮 12시, 남원청소년문화의집 2층에서 장구 장단이 울려 퍼져 내려온다. 소리 따라 계단을 올라가 연습실 문을 여니 신선들의 춤인 듯 선녀들의 춤인 듯 우아한 춤사위를 배우고 있는 사람들이 한 가득이다.
“팔을 무겁게 들어야 해요. 팔에 들돌을 매달아 놓은 것처럼 무겁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전수생들을 위엄스럽게 지도하고 있는 사람, 정명희 교수다. 2시간 반이 훌쩍 넘어서야 팔을 내린다. 쉬는 시간은 단 한 번. 힘들다고 푸념할 만도 한데 정명희 교수의 열정에 아무도 힘든 내색을 안 한다. 아니, 춤뿐만 아니라 스승의 열정까지도 배우고 있는 듯하다.
청소년문화의집에서 민살풀이를 배우고 있는 시민들
3시간 가까운 실내 연습이 끝나자 모두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이제 흩어지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다.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2차 연습 장소는 남원 예촌에 있는 ‘조갑녀살풀이명무관’이다. 이들이 배우고 있는 것이 바로 ‘조갑녀류 남원춤’이다. 춤을 가르치고 있는 정명희 교수는 바로 조갑녀 명무의 딸이자 유일한 제자다. 일제강점기 남원예기조합을 중심으로 화려한 꽃을 피웠으나 조갑녀 명무의 귀천으로 명맥이 끊어질 뻔한 남원춤을 다시 잇고 있는 사람이다. 정명희 교수는 본래 다른 춤을 추는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사실은 대단한 명무(판소리 잘 하는 사람은 명창이라고 하듯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전수를 받기 시작했다. 매우 늦은 선택이었지만 최상의 선택이었다.
조갑녀 명무관에서 정명희 교수의 지도하에 춤을 배우고 있는 시민들
그렇다면 조갑녀는 누구인가? 남원예기조합(일제시대 ‘권번’이라고 불렀던 예술 기생들의 회사이자 학교)전설의 춤꾼 조영숙(예명)이다. 예인 집안의 딸이라 아주 어릴 적에 자연스럽게 조합에 들어가 예기로서 교육을 받았던 조갑녀는 우리나라 근현대사 최초의 지역 축제인 ‘춘향제’를 연 분이다. 1931년, 고작 아홉 살의 나이였다. 춘향제의 시작이요 핵심은 열녀 성춘향에게 올리는 제사다.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처음으로 해야 하는 의식은 춘향 영정 앞에 세워져 있는 초에 불을 붙이는 것인데 바로 그 촛불을 켠 사람이다. 전국에서 모인 100여 명의 쟁쟁한 예기들 앞에서 빨간 댕기 머리를 한 키 작은 조갑녀가 고사리 손으로 높은 촛대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가슴이 떨린다.
조갑녀 명무가 어릴 적에 밝혔을 춘향제의 촛불
마침 1931년에 남원 기차역이 개통되면서 춘향제를 보려고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광한루 인근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첫 해에는 촛불만 켰지만 다음 해부터는 다른 기생들과 함께 꽃을 들고 화무를 추고 나중에는 혼자 승무를 췄다. 춘향제 때마다 남원의 전통 예술이 넘실댔고 남원의 소리와 춤, 풍물굿은 전국에 빠르게 소문이 났다. 그 핵심에 ‘춤은 조갑녀’라는 말이 있었다. ‘온 몸에 춤이 들어 있는 아이’라는 말이 돌았다.
정신대를 피해 급히 결혼한 이후 예기조합 활동을 멈추고 춘향제 때만 간간히 무대에 올랐던 조갑녀 명무가 2007년 서울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무겁게’ 팔을 들어 올렸을 때 진옥섭 한국문화재 재단 이사장은 ‘나이든 예기들의 입에서 입으로 떠돌던 이장선 춤의 마지막 뿌리가 나타났다.’고 극찬했다. 그 이후 또다시 공연을 준비할 때는 ‘와 봐라! 흉곽을 드르륵 열고 심장을 덥석 쥐는 그 5분’ 이라며 사람들 마음을 급하게 만들었다.
민살풀이 춤을 추고 있는 조갑녀 명무, 명무관 전시 사진
조갑녀의 스승 이장선이 누구길래 조갑녀 춤이 그토록 특별하단 말인가? 이장선은 조선의 궁중 음악기관인 장악원(현재의 국립국악원이라 볼 수 있음)에서 조선 왕조의 마지막 진연을 진두지휘했던 사람이다. 조갑녀는 이장선에게 배운 마지막 제자였다. 객석에서 조갑녀의 춤을 숨죽이며 보고 있던 또 다른 춤의 명인은 “젊은 양반들 춤은 밥솥에 한 밥이고, 그 양반 춤은 가마솥에 한 밥입디다.”(노름마치, 진옥섭)하는 말을 남겼다. 지리산처럼 웅장한 남원 판소리 동편제처럼 조갑녀의 춤도 지리산을 닮아 웅숭깊다. 사람들은 이제 조갑녀류 남원춤을 ‘동편제 춤’이라고도 한다.
뒤늦게 어머니 춤의 높은 가치를 깨달아 전수를 받고 이제는 전국에 뛰어다니며 알리고 있는 여섯째 딸 정명희 교수. 누가 강사비를 주는 것도 아니고 교통비를 보태주는 것도 아니다. 서울에 살고 있지만 교육생들에게 만 원짜리 한 장 안 받고 배우겠다는 사람들만 있으면 제주도까지 날아다닌다. 이런 정교수의 노력 덕분에 조갑녀춤이 2015년 국립무형 유산원에 전승보존종목으로 선정되었다. ‘살풀이춤의 원형을 가장 잘 보존했다’는 평가와 함께 말이다. 민살풀이춤은 잘 알려진 살풀이춤과 달리 수건을 들지 않고 맨손으로 추는 춤이다. 손에 부채든 수건이든 칼이든 뭐라도 들면 의지가 되는데 아무 것도 들지 않고 맨 손으로 추니 훨씬 어렵고 힘든 춤이다. 하얀 버선을 신은 두 발을 어슷하게 놓는 ‘비정비팔’자세로 꼿꼿하게 서 있다가 장단 따라 기의 흐름 따라 자연스럽게 팔을 들어 올리면 춤이 시작된다.
조갑녀 명무와 딸 정명희 교수, 조갑녀 명무관 전시 사진
2018년, 남원시가 조갑녀의 생전 거주지를 복원해 ‘조갑녀살풀이명무관’을 만들었다. 본래 조갑녀 부부가 운영하던 금남여관 자리다. 터가 넓으니 공연까지 할 수 있는 잔디 마당도 생겼다. 금남여관은 남원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여관이어서 고위급 인사들과 수학여행단이 숙박을 하던 곳이다. 1942년에 결혼해서 93세까지 살았던 곳으로 명무관 안에는 공설시장에서 산 만 원 짜리 지팡이를 비롯해 조갑녀 명무의 손때 묻은 소품들과 공연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큰 텔레비전에는 공연 영상과 장례식 영상이 돌아가고 있다. 특히 조갑녀 명무의 춤에 반해 각별히 교류를 했던 국악가요의 거장 장사익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살풀이는 조갑녀>라고 쓴 현판도 장사익이 직접 쓴 글씨다. 서로의 공연에 찬조 출연해 줄 정도로 각별했고 조갑녀 명무가 거동이 힘들었던 말년에는 업고 다녔다고도 하니 두 사람의 아름다운 교우를 짐작할 수 있다.
조갑녀 명무와 장사익 가수의 교우 사진, 조갑녀 명무관 전시 사진
장사익 가수가 쓴 ‘살풀이는 조갑녀’ 현판
명무관 마당 한 구석에 정겨운 모습의 할머니 조각상이 서 있다. 그리고 그 아래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정명희 교수의 기억에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다. 나무를 다 팔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나무꾼의 나무까지 다 팔아주셨던 따뜻한 분, 춤을 가르쳐 달라고 돈뭉치를 들고 찾아 온 일본 기생(게이샤)에게는 춤을 가르쳐 주지 않았던 지조 있는 분이셨다.
명무관 한구석에 서 있는 조갑녀 명무 조각상
그런 넉넉한 마음과 곧게 선 지조가 팔과 허리에 그대로 다 스며있어 무대에 꼿꼿이 서서 팔을 들고만 있어도 사람들은 환호한다. 그것을 ‘속멋’ 또는 ‘지숨’이라고 한다. 아무런 몸짓이 없이 가만히 서 있어도 춤이 되는 춤꾼이다. 삶 자체가 춤이었기에 가능한, 그러하기에 ‘명무’라는 칭호를 받기에 손색이 없는 분이다.
정명희 교수가 몇 년 동안 공 들인 결과 드디어 남원에 ‘조갑녀민살풀이전수회'가 설립되었다. 남원, 구례, 곡성, 광주, 전주, 대구, 어떨 때는 제주도 회원도 남원으로 달려와 춤을 함께 춘다. 남원춤이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전수를 시작한 첫 해부터 지금까지 부지런히 춤을 배우러 다니고 있는 구례 군민 공정선 씨는 “아무리 전통이 의미가 깊다고 해도 재밌지 않으면 계속하지 못했을 거예요. 언제부터인가 민살풀이가 즐겁고 자유로운 것이구나, 내 영혼을 달래는구나 하고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하고 조용히 고백한다.
우리나라 전통 예술의 한 축인 춤, 우리 민족의 신명과 기백이 그 안에 담겨 있다. 판소리와 함께 우리 춤이 되살아날 때 우리 민족의 기백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 믿는다. 민살풀이를 시작으로 승무, 검무까지 남원의 춤부터 모두 다 되살아나길 바란다.
2022년 가을, 조갑녀 명무관 공연
글 쓴 사람. 김양오
아이 셋을 다 키운 중년 아줌마. 젊었을 적 글쓰기와 아동문학을 배워 평생 잡다한 글을 쓰며 살았다. 그러다 쉰 살부터 역사동화를 쓰기 시작해 책 세 권을 냈다. 아름답게 흐르는 요천이 너무 좋아 남원으로 이사해 15년째 살고 있는데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이 사라져서 가슴이 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