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변화기록원[함양][지리산활동가대회와 n개의 시선 / 지금여기] 노래가 멈춘대도, 별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2023-05-15

 

 

노래가 멈춘대도, 별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4.29 지리산활동가대회> 참가 후기  

 

글 / 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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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지리산활동가대회>는 우리 안에 빛으로 어룽지는 이야기가 있음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먼 옛날, 높은 산 아래 흩어져 살던 부족들은 서로 어떻게 교류했을까. 공동의 언어도, 변변한 이동수단도 없던 시대에 어떤 방법으로 타인을 만나 필요한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을까. 브루스 채트윈이 쓴 책 『송라인』에는 조상들이 두 발로 닦아놓은 송라인(songlines), 즉 노래로 연결된 길을 따라가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교역을 해온 호주 원주민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언어가 달라도 일단 노래가 흘러나오면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니 이 얼마나 신비로운가. 

 

 

지난 4월 29일에 열린 <지리산활동가대회(이하 대회)>가 ‘노래’로 시작한 것은 어쩌면 의례적인 오프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5개 시군에서 달려온 참가자 50여 명이 둥그렇게 모여 서서 낯선 노래를 부를 때, 의미를 전혀 알 수 없음에도 그 노래가 만들어낸 파장 안에서 하나가 되어감을 느낄 때, 나는 우리 안에도 이미 신비로운 이야기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 사이엔 노래뿐 아니라 그보다 더 강한 연결고리가 있기에 삶의 조건과 고민이 달라도 이심전심으로 통할 수 있다는 것을. 서로를 이어주는 그것은 다름 아닌 ‘지리산’과 ‘작은변화’라는 것을. 

 

 

 

5개 시군의 모든 길은 ‘지리산’으로 통한다   

 

 

구례, 남원, 산청, 하동, 함양. 이 다섯 지역은 지리산 너른 자락에 닿아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어느 지역에서든 산그늘이 가장 울울하고 깊은 곳을 찾아 들어가면 거기에 지리산이 있고, 어디서 오르기 시작하든 길은 같은 정상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 도시에 살다가 이쪽으로 귀촌 귀농한 사람들 가운데는 “지리산이 좋아서”라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은데, 이를 단지 수려한 산세와 아름다운 풍광에 대한 찬사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보다는 지리산에 서린 독특한 의미와 가치에 끌렸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예전부터 개인과 사회의 이상향을 찾았던 곳이 지리산이다. 지리산은 21세기의 이상향에 대한 상징성을 지닌다. 지리산운동을 통해 지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적 삶과 문화를 모색하고 실천해야 (……)”

<지리산운동> 선언을 위한 취지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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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 시군의 길이 지리산으로 통하듯, 각 지역을 움직이는 작은변화 활동 또한 지리산 정신에 닿아 있다.

 

 

 

이상향을 추구하는 유일한 방법이 물리적 투쟁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머리띠 두르고 싸울 일이 적지 않지만, 그래도 이상향을 꿈꾸는 이들 스스로 대안적인 삶을 상상하고, 만들어내고, 직접 몸으로 살아내는 것이 더 중요해진 지 오래다. 그러고 보면 지리산이 지닌 정신에 끌려 정착한 이들이 작은변화를 궁리해내고 기존과는 다른 삶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물론 이와 같은 활동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대도시에 비해 시민운동의 기반이 취약한 ‘지역’에서는 크든 작든 모든 변화가 참으로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한발 앞서 고민하고 먼저 씨앗을 뿌린 이들이 있었다니, 그 이야기가 궁금하다.

 

 

“대한민국에 많은 사회문제가 있고 그걸 해결할 수 있는 건 정치가나 자본이 아닌 그 삶을 살아가는 시민들이잖아요. (이런 생각에서) 아름다운재단이 지원사업을 해왔는데, 언제부턴가 지역에서 올라오는 게 없더라고요. 이유가 뭘까 궁금해서… (지리산에 찾아와 보니) 지역에는 공익활동을 촉진하고 함께 움직이려는 동력은 있지만 그게 소용돌이처럼 일고 있진 않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먼저 <지리산이음>에게 함께하자고 했고, 그때 만났던 5개의 씨앗, 5개 시군의 지역활동가들이 (이 작업의) 시작이었죠.”

<아름다운재단> 활동가 홍리 

 

 

 

뭔가 ‘시도’해보려는 마음들의 ‘연결’       

 

 

아름다운재단과 지리산이음, 그리고 지리산 권역의 다섯 씨앗이 모여 첫 싹을 틔운 것이 바로 <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이하 센터)>다. 이후에 센터는 삶의 터전에서 작은변화를 구현할 사람과 모임을 발굴하기 위한 공모사업을 해마다 진행했고, 이는 지역 내 다양한 활동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고백해왔듯, 센터의 활동비 지원과 현장에서 일을 좀 더 ‘쉽게’ 하도록 배려해주는 방침 덕분에 “뭔가 시도해볼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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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활동가들이 2019년에 함께 진행했던 ‘모임들의 저녁식사’ 풍경.
 당시 지역에 다양한 모임이 생기고 활성화한 배경에는 <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가 있었다. 

 

 

 

지난 몇 년은 그런 마음들이 연쇄적으로 퍼져가며 “동력은 있지만 소용돌이로 일지는 않고 있”던 지역에 마침내 조금씩 틈을 내는 시간이었던 듯하다. 그 틈으로 바람이 통하고 그 바람이 지역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것을 확인하면서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언젠가, 어디에선가는 돌풍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가슴 부풀었던 시간. 그러나 무엇을 하든지 그처럼 기분 좋은 나날만 이어지진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경험하기 마련이다.

 

 

“작은변화 지원사업이 사람들을 모아내는 계기가 되었고 또 확장의 매개가 되었어요. 활동하는 사람들과 많은 모임이 생기면서 그들 간에 교류하고 소통하는 네트워크도 활성화되었는데, 코로나 이후로 확 꺼지고 각자의 일이 또 바빠지면서 연결될 기회가 사라졌죠. 올해는 그걸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함양 함께활동 <연결을 위한 지역 생태계 만들기> 발표자 김찬두  

 

 

코로나로 인해 한창 상승 기류를 타던 활동이 가라앉은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역을 바꿔 나간다는 건, 그것이 설사 시스템과 정책을 바꾸는 큰 변화가 아니어도 결코 수월할 수만은 없음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코로나가 아니었대도 또 다른 무언가가 발목을 잡았으리라는 것을. 장애물과 고민거리는 끊임없이 생겨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외부 환경과 조건에서만이 아니라 내면에서 비롯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러면 그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지역에서 청소년 공간을 만들고 운영하는 일이 힘든데) 그걸 같은 지역 사람들에게 얘기하기는 어렵더라고요. 비슷한 일을 하는 이들이 모여 고민을 나눠보면 어떨까 해서 작년에 청소년 공간을 운영하고 있거나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연락해 모이게 되었어요. 그 안에서 속풀이도 하고 안부도 묻고 하다 보니 문제와 대처방법도 논의하게 되고 (……)”

산청 활동가 김한범 

 

 

 

서로 돌보고 함께 배우면서 오래 가자

 

 

산청에서 청소년 공간 <명왕성>을 운영하며 <지리산권청소년공간활동가네트워크>를 만든 김한범 활동가는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 간의 네트워킹”을 통해 외로움과 힘듦을 해소하고 문제 해결의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며 길을 찾아가는 중이다. 이처럼 같은 주제로 활동하는 이들의 ‘느슨하지만 끈끈한’ 연대는 이제 센터 안에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다. 또 다른 연대체인 <지리산촉진자네트워크> 역시 작년부터 준비된 것으로, 현재 온·오프를 넘나들며 함께하는 인원이 열세 명에 이른다고. 

 

 

“지리산촉진자네트워크의 키워드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는 지역의 질문과 대화를 돌보자는 거예요. 우리 스스로 지역에서 필요한 질문들을 만들고 그걸 바탕으로 대화를 해나가면 좋겠다는 거지요. 둘째는 서로 배움 생태계 만들기. 대화가 배움의 핵심이므로 같이 배워나가는 모임을 지리산권에서 만들어가고 싶어요. 셋째는 각자 활동하는 현장에서 생기는 고민을 나누고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우리가 같이 성장하자는 것입니다.”

함양 활동가 이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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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발표가 끝날 때마다 지지와 응원의 메시지를 적는 참가자들. 서로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는 마음들이 유리창 가득 빛나고 있다. 

 

   

이은진 활동가의 말은 ‘아름다운재단과 센터의 지원이 끊긴 이후에 지역 활동은 어떻게 될까’라는 우려 섞인 질문에 대한 성찰 어린 답변으로 들린다. 우리 자신의 힘을 더 키워 자립해야 함을, 그 힘은 서로 배우고 돌보면서 함께 성장할 때만이 가능함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예년과 달리 지역마다 활동가 워크숍을 열어 올해 벌일 ‘함께활동’을 같이 기획하고 결정한 것은 바로 그 ‘자립’을 향한 첫 실험이 아니었나 싶다. 새로운 방식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지, 대회를 꽉 채운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빌려 전해본다. 

 

 

“인간의 욕심과 자본의 개입으로 파괴된 것을 회복하는 활동을 하면서 우리는 무너져본 기억이 너무 많거든요. 그래서 올해 활동은 많은 걸 기대하지 말고 즐겁게 가자고… (흑두루미가 찾아온) 갈사만 근처에 이미 화력발전소가 있고 그 뒤편에 또 융합복합단지를 만든다고 하니 그냥 놔두면 더 죽어가지 않겠어요? 우리가 그걸 완전히 막을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미룰 수 있게, 10년은 내다보고 가자는 거지요.”

하동 함께활동 <갈도를 기억하다> 발표자 이경숙  

 

 

“기후위기와 관련해서 같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고 의견을 모았어요. 그중에서도 일회용품 사용이 증가하고 쓰레기 분리배출이 잘 안 되는 문제를 풀어보기로 했고, 먼저 시내와 면 단위 음식점과 카페 등을 돌아다니며 실태조사와 모니터링을 해보려 합니다. 이걸 근거로 지자체를 압박해서 정책적 대안을 마련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조사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과 계속해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내고 싶어요.”

남원 함께활동 <‘기후위기’라고 함께 외쳐!> 발표자 이재향

 

 

 

우리의 몸짓이 ‘사랑’에서 비롯한다면  

 

 

작은변화는 여전히 우리의 활동을 관통하는 정신이지만 요즘 같은 시기엔 크고 작음을 운운하는 것이 어쩐지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문제가 이미 일상 구석구석에 스며든 데다, 산악열차에 케이블카에 골프장 같은 개발 광풍이 지리산을 온통 휘저어대며 인간과 비인간의 삶 모두를 무참히 파괴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고 보니 “지리산운동의 본질은 사랑이고, 그 사랑은 지리산과 우리 자신의 삶, 그리고 주변 생명의 삶을 지켜내며 이 지구가 직면한 기후위기를 함께 살피는 일을 해낼 것”이라던 윤주옥 구례 활동가의 말이 유독 가슴에 와닿은 이유를, 대회가 끝난 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야 조금은 알 것 같다. 멀리 보면 막막함과 공허함에 휩싸이고 당장 코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주목하면 두려움과 좌절감에 빠지게 되는 상황에서, 이 모든 걸 이겨내며 서로 돌보고 배우고 성장할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힘은 아마도 사랑일 테니. 

 

 

우리의 모든 몸짓은, 그러므로 사랑에서 비롯하기를 바란다. 한때는 아름다웠으나 지금은 죽어가는 섬을 다시 살리는 일부터 지역생협과 문화장터와 청소년 공간을 만드는 일, 그리고 지리산 개발을 멈춰 세우기 위해 싸우는 일까지. 그러면 화합의 돌림노래가 멈추고 어둠이 짙어 더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어디선가는 계속 변화의 씨앗이 뿌려지고 그중 어떤 것은 끈질기게 살아남지 않을까. 작고 연약하며 어딘가 부서졌으나 내면의 빛을 잃지 않는 사람들, 사랑의 힘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 그런 이들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니 이보다 더 큰 위로와 희망은 없으리라. 

 

 

 

* 위의 글에서 따옴표로 묶인 인용문은 발표자가 말한 것을 요약하여 문맥에 맞게 약간 다듬었음을 밝힙니다. 

 

 

 

 

글 쓴 사람. 자야

나에게 기록이란, 먼저 다가가 말 걸고 온 마음을 기울여 듣고 나를 앞세우지 않고 쓰는 것. 올해는 이 어려운 일을 해보려 한다. 이런 나를 조금은 칭찬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