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기억될 ‘이야기’가 있는 곳을 찾아서 슬렁슬렁 동네 탐방 ① 글 / 자야 여행 후 유독 마음에 남는 장면이 있다.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자연 풍광이나 장엄한 유적지 같은 건 의외로 쉽게 잊힌다. 오히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다정다감한 주인장이라든지, 날마다 같은 식당에 들러 먹고 마시던 로컬 음식이라든지, 아니면 해 질 녘 어느 사원 앞마당에서 주민들과 뒤섞여 기도하던 시간에 울린 요령 소리 같은 것을 떠올릴 때, 무덤덤하던 가슴이 열리며 그리움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때 그 자리에서 내가 경험한 이야기가 담겨 있기에 시간이 흘러도 소멸하지 않는 순간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문득 궁금해진다. 언젠가 함양을 떠났을 때, 아니 떠나지 않더라도 한참 시간이 흘러 돌아봤을 때 지금 이곳은 어떤 장면과 이야기로 기억될까? 이 질문을 품고서 지역민들에게 과거와는 조금 다른 시공간을 제공하는 ‘장소’들을 찾아다니며 그 안쪽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어느 볕 좋고 바람 서늘한 날 슬렁슬렁 산책이라도 다니듯. 책방 그 이상을 ‘상상’하게 하는 <오후공책> 
오후공책을 지키는 책방지기 삼인방. (왼쪽부터 갱구, 사사, 영선) 함양읍 인당마을에 책방 <오후공책>이 문을 연 지 한 달이 넘은 요즘. 어떤 이들에게는 책방 나들이가 봄꽃 구경보다 더 설레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이는 꼭 책을 많이 읽는 이들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서가에 꽂힌 책등을 바라보고 탁자에 전시된 책표지를 슬쩍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행복해지는 사람들이 존재하니까. 그들의 공통점은 책이 있는 공간과 그 속에서 헤엄치듯 떠다니는 시간을 사랑한다는 것, 그래서 동네 책방이 생기기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것이다. 영선 “처음에는 흔히 말하는 ‘오픈발’이 얼마나 갈까 싶었는데(웃음) 다행히 많이들 꾸준히 찾아주세요. 동네 책방이 생겼네요, 하면서 반가워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그런 분들이 여기서 천천히 책장을 둘러보고 시간 들여 책을 고르는 모습을 보는 게 저로서는 제일 기쁜 일이죠.” 오후공책을 운영하는 <협동조합 오늘>의 전신은 백전면을 근거지로 삼은 동네 친구들의 책 모임 <별책불혹>이다. 책을 매개로 만나 책방을 여는 데까지 이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꼭 책 하나만 고집하는 건 아니다. 이곳을 활용해 누구는 철학 모임을, 누구는 드로잉 모임을 만들고 싶어 하고, 또 누구는 자신이 직접 빚은 막걸리의 맛과 향기로 사람들 속에 스며들길 바란다. 갱구 “책 모임 할 때부터 우리는 다섯 명 각자가 원하는 것을 다양하게 구현하는 문화공간을 만들자고 얘기해왔어요. 기본은 책방이지만 이 안에서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는 일들을 해보자는 거였죠. 그런 일이 공익적인 성격을 띠면 더 좋겠어서 협동조합까지 만든 것이고요.” 적잖은 이들이 나의, 또는 우리의 공간을 꿈꾸지만, 그것을 위해 달려들자면 고려하고 따져야 할 게 많기에 대개는 꿈으로 묻어 두는 게 보통이다. 더군다나 협동조합이라는 형태로 여럿이 뭔가를 함께 일궈나가기란 주변의 사례만 살펴보아도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그 일을 과감히 저질렀다면 나름의 절실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까. 책방지기 삼인방 중 한 명인 사사가 이에 대해 말한다. 사사 “함양에서 십 년째 살고 있는데 그동안 어린아이들이나 초중학교 학생들과 편하게 활동할 만한 곳이 없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그래서 예전부터 아무 제약 없이 뭔가를 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갈증은 늘 있었죠. 물론 협동조합이 쉽지 않다는 걸 저도 경험상 알고 있어요. 구성원들이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게 제일 중요한데, 다행히 우리는 그런 면에서 잘 맞춰온 것 같아요.” 
오후공책의 첫 번째 북토크 자리. 스무 명 남짓이 모여 함께 이야기하고 웃고 노래했다. 얼마 전 오후공책에서는 첫 번째 북토크 “노래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가 열렸고, 함양과 인근 지역민 20여 명이 이 자리에 참석해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개인과 사회의 평화를 생각하며 함께 노래하는 시간을 가졌다. 5월 말에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고 책을 낭독하며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돌아보는 행사가 예정되어 있기도 하다. 책방이 없었다면 차도만 넓고 인적은 드문 거리로 남았을지도 모를 이곳에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따뜻한 불이 밝혀지고, 사람들 발길이 이어지고, 이야기와 노래와 웃음이 흘러나온다. 이만하면 <협동조합 오늘>의 제약 없는 상상이 앞으로 이 장소를 어떻게 계속해서 변화시켜 나갈지 기대해도 괜찮지 않을까. * 오후공책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그림책방 퐁당>, 작은 공간이지만 빛나고 있어 오후공책을 나와 인당교 앞에서 좌회전해 돌북교까지 걷는다. 돌북교 사거리에서 백전면 방향으로 다시 좌회전하면 몇십 발자국 앞에 간판도 없이 운영하는 <그림책방 퐁당>이 있다. 함양의 첫 그림책방이라는 ‘이름값’을 챙기지 않은 주인장 탓에 많이 알려지진 않았어도, 일단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림책 갈피갈피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지게 만드는 곳이다. 
돌북교와 위림초 사이, 친환경매장 산들내 안에 <그림책방 퐁당>이 있다. 희정 “문 연 지는 일 년쯤 됐어요. 이름을 못 정해 간판도 없이 시작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지금까지 그대로네요.(웃음) 여러 이름을 생각하다가 최근에 정한 게 ‘퐁당’이에요. ‘그림책에 퐁당, 내 마음에 퐁당’ 이런 느낌이 들어서 좋더라고요.” 수년째 남편과 같이 꾸려가고 있는 친환경매장 산들내 안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 그림책방을 시작한 희정은, 이 일이 순전히 “개인적인 욕심”에서 비롯했음을 고백한다. 그림책을 좀 더 싼 가격에 많이 구입하고 싶었다는 것. 다 본 책들을 집에만 쌓아두자니 자리가 부족하기도, 또 아깝기도 했단다. 한편으로는 몇 년 전에 취득한 그림책심리상담사 자격증을 활용해 그림책에 깃든 지혜를 타인과 나누고픈 마음이 들기도 했다고. 이 모든 것을 잘 담아내고자 일을 벌였지만, 그는 오는 손님만 맞이할 뿐 아직은 책방 안에서 활발하게 일을 벌이지 않고 있다. 대신 함양도서관과 연계된 프로그램인 ‘그림책 수업’ 강사로 관내 다수 초등학교에 나가 아이들을 만나는 중이다. 
희정과 함께하는 그림책 수업을 통해 아이들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알아차리는 법을 배워간다. “저는 아이들이 자기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을 주로 선정해요. 그걸 같이 읽고 이야기 나눈 다음 만들기 활동을 통해 자기 마음을 드러내게 하죠. 아이들이 글로 표현하는 건 힘들어해도 만들기는 좋아하더라고요.” 일례로 『소원나무』라는 그림책을 읽고 나서는 각자의 소원이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를 만들어보는 시간을 갖는다. 이때 중요한 것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소원이 아닌 나의 ‘진짜’ 소원을 발견하고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부를 잘하고 싶다는 건 나의 소원일까 엄마의 소원일까? 부자가 되거나 착한 아이가 되길 바라는 건 혹시 아빠나 선생님의 소원은 아닐까? 이런 질문은 낯설지만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어준다. 그리고 아이들은 비로소 그 문 너머에 감춰져 있던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림책은 마음을 비춰주고 때로는 읽는 자체만으로 큰 울림을 주기도 하죠. 그래서 요즘은 어른들이 더 많이 찾는 것 같아요. 앞으로는 책방에서 아이든 어른이든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이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해보려 해요.” <지리산생명연대>가 함양에 둥지를 튼 까닭은? 그림책의 속살거림을 뒤로하고 이제는 시장 쪽으로 갈 차례다. 장날이면 떠들썩해도 평소에는 의외로 한적한 시장 맞은편 건물 2층에 얼마 전 <지리산생명연대(이하 생명연대)>가 간판을 내걸었다. 생명연대는 이천년대 초반에 지리산권 일대를 들썩이게 한 ‘지리산댐반대운동’에서 태동해 무려 이십 년간의 싸움 끝에 승리를 거머쥔, 함양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엮인 단체다. 그렇다고는 해도 오랜 시간 남원시에 적을 두고 활동해온 생명연대가 왜 굳이 함양에 별도의 사무소를 내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요즘 지리산권 5개 지역 지자체가 산악열차니 케이블카니 골프장 같은 지리산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잖아요. 생명연대는 이런 때일수록 각 지역의 중심을 단단하게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보고 있어요. 생태환경에 관심과 의식이 있는 ‘보석 같은’ 분들을 찾아내고 모으는 역할을 하자, 그래서 올해는 남원과 함양 두 곳에 집중하기로 하고 함양에 사무소를 낸 거예요.” 
5월 초 어느 날, 지리산생명연대가 함양에 사무소를 마련하고 개소식을 열었다. 몇 년 전부터 생명연대 사무장으로 활동해온 한승명 씨는 지리산댐반대운동이 승리하게 된 배경에는 지리산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 어린 마음과 위기의식이 있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지리산만은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 그런데 불과 몇 년 사이 지리산에는 다시 온갖 개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그에 편승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이는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한 탓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시민이 공공의 일을 다 알고 대응하기가 어려워서 의원을 뽑고 의회를 구성하는 건데 그들이 제 역할을 못 하는 거죠. 지자체는 개발과 성장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을 건드려 그걸 자기 공적을 세우는 데 이용하고 있고요. 그래서 시민 세력의 의정 감시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정치인과 행정가들의 행태를 지적하는 한편, 그는 또한 우리 자신에게로 성찰의 시선을 돌린다. 나만 잘사는 데 집중해서 공공의 것을 지키는 일에 너무 무심하진 않은지 돌아봐야 할 때라고. 그리하여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존을 위협하고 일상을 파괴하는 기후위기와 개발 이슈는 크나큰 두려움을 안겨주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오히려 나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가진 게 충분하므로 생명과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서로 나누고 돌보는 것만으로도 풍요로울 수 있음을 널리 알리고 싶어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분들이 함양에도 많지 않을까요? 생명연대는 먼저 그분들을 만나려 해요. 그리고 함께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죠.” *지리산생명연대 페이스북 [바로가기] “초록 지붕 아래 이로움을 담아요” _ <모우나> 생명연대 사무소가 자리한 건물에서 길 건너 시장을 가로지르면 주차장 인근에 초록 지붕이 눈에 띄는 찻집 <모우나>가 있다. 걸을 때마다 작은 돌멩이 소리가 자박자박 울리는 널찍한 마당, 그 안에 말갛게 고이는 햇살 또는 빗물,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향기로운 차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곳. 일 년 전 함양으로 귀촌해 체류형농업창업지원센터에서 머물다 올 초에 도시재생사업과 관련해 지어진 이 공간을 위탁받아 운영하게 된 김혜경, 서지호 부부는 사람을 살리는 건강한 음식에 관심이 많다. 오래도록 뿌리내리고 살던 도시를 떠나 지역의 삶을 선택한 이유도 “음식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지리산함양시장 주차장 인근에 자리한 찻집 모우나. 혜경 “저희는 둘 다 요가 명상 일을 해왔어요. 남편은 서울에서 요가 명상과 차, 향을 다루는 복합문화공간을 운영하기도 했고요. 그런 일을 하다 보니 몸과 마음의 건강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게 결국은 음식으로 귀결되더라고요.” 지호 “음식 공부를 하면서 우리 몸의 디엔에이와 세포의 작용이 그대로 음식에 전달된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러니 차와 커피 같은 음료는 얼마나 더 민감하겠어요? 저희로서는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손으로 차를 준비하고 음식을 만든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건강’과 ‘이로움’을 삶의 핵심어로 제시하는 부부는 <모우나>를 통해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공유하고자 한다. 다소 비싸더라도 품질이 우수한 차와 커피를 엄선하여 내리는 것, 좋은 원료로 디저트류를 만드는 것, 그리고 이곳을 찾아온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건강 정보와 지식을 아낌없이 제공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그 때문이다. 이 공간이 더 크고 넓게 쓰이길 바라는 의도에서 두 사람은 각각 ‘다도’ 수업과 ‘차명상’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지역을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움직임들, 이를테면 수공예 작업자들이 판을 벌이는 장터나 목수들의 협동조합에서 하는 상자 텃밭 만들기 등의 행사가 있을 때면 기꺼이 마당을 내어주고 직접 참여하기도 하면서 힘을 보탠다. 
모우나에서 진행하는 ‘차명상’ 프로그램 홍보물. 이는 자율기부로 운영되며 모인 돈은 지역을 돕는 일에 쓰일 예정이다. 혜경 “단지 차만 팔기 위해 시작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하면 이 안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해보려 해요. 또 공간 운영의 기회를 얻은 만큼 저희도 지역에 보탬이 되고 싶죠. 그래서 최근에는 ‘함양청년보부상’이라고, 귀촌한 청년 중 자영업 하는 이들이 함께하는 모임도 만들었어요.” 귀촌 후 일 년 동안은 새로운 곳에 적응하고 먹고살기 위해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그처럼 치열하고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난 지금, 그들은 이곳에 붙박여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하는 중이다. 전자도 후자도 ‘배움’의 길인 것은 똑같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감사한 마음이 날로 커간다고 할까. “그래서 오시는 한 분 한 분에게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 두 사람의 얼굴이 마치 적당히 데워진 잔 속에 담긴 고요하고 맑은 찻물을 닮은 듯하다. * 모우나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한발 앞서가는 <빈둥>의 유쾌한 ‘실험’ 
지역에 ‘커뮤니티 공간’의 중요성을 알리고 정착시킨 <빈둥>이 올해 들어 ‘회원 자치’와 ‘무인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공유공간을 표방하며 다시 새로운 실험에 나섰다. 이번 산책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빈둥>으로 향하는 길. 익숙한 행로에 애틋함이 실리는 이유는 자명하다. 커뮤니티 공간이라는 낱말 자체가 낯설던 시기, 지역민의 소통과 교류를 내세우며 문을 활짝 열어젖힌 빈둥은 우리의 첫 아지트이자 놀이터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경계 없이 어울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였으니까. 이런저런 공간들이 생겨나고 코로나라는 암흑기를 거치면서 과거에 빈둥이 지녔던 구심력이 약해진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점이 아쉽다기보다는, 어려운 시기를 버틴 끝에 계속해나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반갑다. 더욱이 다른 곳보다 한발 앞서가는 ‘실험’을 진행 중이니 그것을 지켜보는 재미와 설렘도 뒤따른다. 은진 “함양읍에 전에 없던 곳들이 많이 생겼지만 ‘만만하게’ 쓸 수 있는 곳은 또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빈둥협동조합>이 그동안 해온 청소년문화기획단이나 놀이활력단에서 쓸 장소가 필요하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빈둥을 민간의 힘으로만 운영되는 자치공간으로 만들면 어떨까 싶었어요. 월세와 전기세 정도만 확보하면 어떻게든 유지는 될 거니까요.” 과거에 빈둥 지킴이였다가 몇 년간의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매니저로 ‘돌아온’ 은진은 지난 3월부터 카페가 아닌 마을활력공간으로 재탄생할 빈둥의 비전을 알리며 후원회원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런 제안을 지역민들에게 ‘편하게’ 던질 수 있기까지는 무엇보다 세월의 힘이 컸던 듯하다. 십 년이 흐르는 사이 주변 관계와 그 속에서 쌓은 믿음이 그만큼 두터워졌달까.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짧은 동안 30여 명이 ‘이용’ 혹은 ‘후원’ 회원으로 가입했고, 이제 빈둥은 오롯이 그들의 회비로 살림을 꾸려간다. 
회원들의 다양한 모임과 희의 장소로 자리잡은 빈둥. 공간 사용 일정표는 회원들만 가입하는 밴드를 통해 공유된다. (사진은 우쿨렐레 모임 풍경) “회원제니까 아무나 들어와서 쓸 수는 없지만, 이곳이 비어 있을 때 회원이 비회원들을 데리고 와서 뭔가 하는 건 가능해요. 공간 사용 일정은 매니저의 개입 없이 이용자들이 직접 밴드에 올려서 조정하고 있고요. 그러다 보니 오늘은 누가 뭘 하고 내일은 무슨 모임이 있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데, 그게 저는 재밌기도 하고 좋더라고요.” ‘무인’과 ‘자치’를 시스템화하는 것이 지향점이기에 은진은 매니저의 권한이나 역할을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고민하는 것은 회원들이 이 공간을 ‘제 것’으로 여기면서 좀 더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쓸 수 있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점이다. 아울러 회원들끼리 연결되고 서로 환대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뭘 해볼 수 있을까도 짬짬이 연구 중이라고. “적든 많든 다달이 후원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회원제의 기본 틀은 있지만 ‘꼭 이대로 가야 해’ 그건 아니에요. 공간의 취지를 이해하고 있다면 없을 땐 그냥 사용하고 있을 때 (회비를) 내고 그런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다만 처음 해보는 이 실험이 어떻게 될지 오래 지켜보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가능하면 구조를 잘 만들어서 다른 데 자랑도 하고 싶고.(웃음)” * 마을활력공간 빈둥 밴드 [바로가기] (회원 가입은 빈둥에 문의) 당신이 사는 동네를 사랑하고 싶다면 기존의 앎이나 선입견을 내려놓고 대상을 대하면 익숙한 모습이 달리 보이고 뻔한 이야기도 새롭게 들린다고 하던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동네 탐방길에 만난 장소들이 어느 순간 색다르게 다가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책방이든 찻집이든 환경단체든 공유공간이든, 그 안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게 정말 많다는 걸 새삼 알아가는 기쁨도 컸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코로나 이후 ‘시민’이라 할 만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정체되고 심지어 과거와 비교해 퇴보한 듯 보일지언정, 누군가는 수면 아래에서 끊임없이 고민을 이어가고 변화를 모색하고 있음을 발견했다는 것. 덕분에 앞으로는 조금 더 애정 어린 눈빛으로 이 동네를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혹시 사는 곳에 정나미가 떨어져 괴로운 이가 있다면 우선 동네의 크고 작은 장소들을 찾아다니며 묻고 듣는 시간을 가져보기를 권한다. 어쩌면 돌아올 때쯤엔 식었던 마음에 다시 온기가 퍼져가며 동네가 달리 보이는 것을 경험할지도 모르니. |
오래 기억될 ‘이야기’가 있는 곳을 찾아서
슬렁슬렁 동네 탐방 ①
글 / 자야
여행 후 유독 마음에 남는 장면이 있다.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자연 풍광이나 장엄한 유적지 같은 건 의외로 쉽게 잊힌다. 오히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다정다감한 주인장이라든지, 날마다 같은 식당에 들러 먹고 마시던 로컬 음식이라든지, 아니면 해 질 녘 어느 사원 앞마당에서 주민들과 뒤섞여 기도하던 시간에 울린 요령 소리 같은 것을 떠올릴 때, 무덤덤하던 가슴이 열리며 그리움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때 그 자리에서 내가 경험한 이야기가 담겨 있기에 시간이 흘러도 소멸하지 않는 순간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문득 궁금해진다. 언젠가 함양을 떠났을 때, 아니 떠나지 않더라도 한참 시간이 흘러 돌아봤을 때 지금 이곳은 어떤 장면과 이야기로 기억될까? 이 질문을 품고서 지역민들에게 과거와는 조금 다른 시공간을 제공하는 ‘장소’들을 찾아다니며 그 안쪽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어느 볕 좋고 바람 서늘한 날 슬렁슬렁 산책이라도 다니듯.
책방 그 이상을 ‘상상’하게 하는 <오후공책>
오후공책을 지키는 책방지기 삼인방. (왼쪽부터 갱구, 사사, 영선)
함양읍 인당마을에 책방 <오후공책>이 문을 연 지 한 달이 넘은 요즘. 어떤 이들에게는 책방 나들이가 봄꽃 구경보다 더 설레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이는 꼭 책을 많이 읽는 이들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서가에 꽂힌 책등을 바라보고 탁자에 전시된 책표지를 슬쩍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행복해지는 사람들이 존재하니까. 그들의 공통점은 책이 있는 공간과 그 속에서 헤엄치듯 떠다니는 시간을 사랑한다는 것, 그래서 동네 책방이 생기기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것이다.
영선 “처음에는 흔히 말하는 ‘오픈발’이 얼마나 갈까 싶었는데(웃음) 다행히 많이들 꾸준히 찾아주세요. 동네 책방이 생겼네요, 하면서 반가워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그런 분들이 여기서 천천히 책장을 둘러보고 시간 들여 책을 고르는 모습을 보는 게 저로서는 제일 기쁜 일이죠.”
오후공책을 운영하는 <협동조합 오늘>의 전신은 백전면을 근거지로 삼은 동네 친구들의 책 모임 <별책불혹>이다. 책을 매개로 만나 책방을 여는 데까지 이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꼭 책 하나만 고집하는 건 아니다. 이곳을 활용해 누구는 철학 모임을, 누구는 드로잉 모임을 만들고 싶어 하고, 또 누구는 자신이 직접 빚은 막걸리의 맛과 향기로 사람들 속에 스며들길 바란다.
갱구 “책 모임 할 때부터 우리는 다섯 명 각자가 원하는 것을 다양하게 구현하는 문화공간을 만들자고 얘기해왔어요. 기본은 책방이지만 이 안에서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는 일들을 해보자는 거였죠. 그런 일이 공익적인 성격을 띠면 더 좋겠어서 협동조합까지 만든 것이고요.”
적잖은 이들이 나의, 또는 우리의 공간을 꿈꾸지만, 그것을 위해 달려들자면 고려하고 따져야 할 게 많기에 대개는 꿈으로 묻어 두는 게 보통이다. 더군다나 협동조합이라는 형태로 여럿이 뭔가를 함께 일궈나가기란 주변의 사례만 살펴보아도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그 일을 과감히 저질렀다면 나름의 절실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까. 책방지기 삼인방 중 한 명인 사사가 이에 대해 말한다.
사사 “함양에서 십 년째 살고 있는데 그동안 어린아이들이나 초중학교 학생들과 편하게 활동할 만한 곳이 없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그래서 예전부터 아무 제약 없이 뭔가를 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갈증은 늘 있었죠. 물론 협동조합이 쉽지 않다는 걸 저도 경험상 알고 있어요. 구성원들이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게 제일 중요한데, 다행히 우리는 그런 면에서 잘 맞춰온 것 같아요.”
오후공책의 첫 번째 북토크 자리. 스무 명 남짓이 모여 함께 이야기하고 웃고 노래했다.
얼마 전 오후공책에서는 첫 번째 북토크 “노래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가 열렸고, 함양과 인근 지역민 20여 명이 이 자리에 참석해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개인과 사회의 평화를 생각하며 함께 노래하는 시간을 가졌다. 5월 말에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고 책을 낭독하며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돌아보는 행사가 예정되어 있기도 하다. 책방이 없었다면 차도만 넓고 인적은 드문 거리로 남았을지도 모를 이곳에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따뜻한 불이 밝혀지고, 사람들 발길이 이어지고, 이야기와 노래와 웃음이 흘러나온다. 이만하면 <협동조합 오늘>의 제약 없는 상상이 앞으로 이 장소를 어떻게 계속해서 변화시켜 나갈지 기대해도 괜찮지 않을까.
* 오후공책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그림책방 퐁당>, 작은 공간이지만 빛나고 있어
오후공책을 나와 인당교 앞에서 좌회전해 돌북교까지 걷는다. 돌북교 사거리에서 백전면 방향으로 다시 좌회전하면 몇십 발자국 앞에 간판도 없이 운영하는 <그림책방 퐁당>이 있다. 함양의 첫 그림책방이라는 ‘이름값’을 챙기지 않은 주인장 탓에 많이 알려지진 않았어도, 일단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림책 갈피갈피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지게 만드는 곳이다.
돌북교와 위림초 사이, 친환경매장 산들내 안에 <그림책방 퐁당>이 있다.
희정 “문 연 지는 일 년쯤 됐어요. 이름을 못 정해 간판도 없이 시작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지금까지 그대로네요.(웃음) 여러 이름을 생각하다가 최근에 정한 게 ‘퐁당’이에요. ‘그림책에 퐁당, 내 마음에 퐁당’ 이런 느낌이 들어서 좋더라고요.”
수년째 남편과 같이 꾸려가고 있는 친환경매장 산들내 안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 그림책방을 시작한 희정은, 이 일이 순전히 “개인적인 욕심”에서 비롯했음을 고백한다. 그림책을 좀 더 싼 가격에 많이 구입하고 싶었다는 것. 다 본 책들을 집에만 쌓아두자니 자리가 부족하기도, 또 아깝기도 했단다. 한편으로는 몇 년 전에 취득한 그림책심리상담사 자격증을 활용해 그림책에 깃든 지혜를 타인과 나누고픈 마음이 들기도 했다고.
이 모든 것을 잘 담아내고자 일을 벌였지만, 그는 오는 손님만 맞이할 뿐 아직은 책방 안에서 활발하게 일을 벌이지 않고 있다. 대신 함양도서관과 연계된 프로그램인 ‘그림책 수업’ 강사로 관내 다수 초등학교에 나가 아이들을 만나는 중이다.
희정과 함께하는 그림책 수업을 통해 아이들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알아차리는 법을 배워간다.
“저는 아이들이 자기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을 주로 선정해요. 그걸 같이 읽고 이야기 나눈 다음 만들기 활동을 통해 자기 마음을 드러내게 하죠. 아이들이 글로 표현하는 건 힘들어해도 만들기는 좋아하더라고요.”
일례로 『소원나무』라는 그림책을 읽고 나서는 각자의 소원이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를 만들어보는 시간을 갖는다. 이때 중요한 것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소원이 아닌 나의 ‘진짜’ 소원을 발견하고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부를 잘하고 싶다는 건 나의 소원일까 엄마의 소원일까? 부자가 되거나 착한 아이가 되길 바라는 건 혹시 아빠나 선생님의 소원은 아닐까? 이런 질문은 낯설지만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어준다. 그리고 아이들은 비로소 그 문 너머에 감춰져 있던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림책은 마음을 비춰주고 때로는 읽는 자체만으로 큰 울림을 주기도 하죠. 그래서 요즘은 어른들이 더 많이 찾는 것 같아요. 앞으로는 책방에서 아이든 어른이든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이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해보려 해요.”
<지리산생명연대>가 함양에 둥지를 튼 까닭은?
그림책의 속살거림을 뒤로하고 이제는 시장 쪽으로 갈 차례다. 장날이면 떠들썩해도 평소에는 의외로 한적한 시장 맞은편 건물 2층에 얼마 전 <지리산생명연대(이하 생명연대)>가 간판을 내걸었다. 생명연대는 이천년대 초반에 지리산권 일대를 들썩이게 한 ‘지리산댐반대운동’에서 태동해 무려 이십 년간의 싸움 끝에 승리를 거머쥔, 함양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엮인 단체다. 그렇다고는 해도 오랜 시간 남원시에 적을 두고 활동해온 생명연대가 왜 굳이 함양에 별도의 사무소를 내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요즘 지리산권 5개 지역 지자체가 산악열차니 케이블카니 골프장 같은 지리산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잖아요. 생명연대는 이런 때일수록 각 지역의 중심을 단단하게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보고 있어요. 생태환경에 관심과 의식이 있는 ‘보석 같은’ 분들을 찾아내고 모으는 역할을 하자, 그래서 올해는 남원과 함양 두 곳에 집중하기로 하고 함양에 사무소를 낸 거예요.”
5월 초 어느 날, 지리산생명연대가 함양에 사무소를 마련하고 개소식을 열었다.
몇 년 전부터 생명연대 사무장으로 활동해온 한승명 씨는 지리산댐반대운동이 승리하게 된 배경에는 지리산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 어린 마음과 위기의식이 있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지리산만은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 그런데 불과 몇 년 사이 지리산에는 다시 온갖 개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그에 편승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이는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한 탓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시민이 공공의 일을 다 알고 대응하기가 어려워서 의원을 뽑고 의회를 구성하는 건데 그들이 제 역할을 못 하는 거죠. 지자체는 개발과 성장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을 건드려 그걸 자기 공적을 세우는 데 이용하고 있고요. 그래서 시민 세력의 의정 감시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정치인과 행정가들의 행태를 지적하는 한편, 그는 또한 우리 자신에게로 성찰의 시선을 돌린다. 나만 잘사는 데 집중해서 공공의 것을 지키는 일에 너무 무심하진 않은지 돌아봐야 할 때라고. 그리하여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존을 위협하고 일상을 파괴하는 기후위기와 개발 이슈는 크나큰 두려움을 안겨주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오히려 나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가진 게 충분하므로 생명과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서로 나누고 돌보는 것만으로도 풍요로울 수 있음을 널리 알리고 싶어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분들이 함양에도 많지 않을까요? 생명연대는 먼저 그분들을 만나려 해요. 그리고 함께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죠.”
*지리산생명연대 페이스북 [바로가기]
“초록 지붕 아래 이로움을 담아요” _ <모우나>
생명연대 사무소가 자리한 건물에서 길 건너 시장을 가로지르면 주차장 인근에 초록 지붕이 눈에 띄는 찻집 <모우나>가 있다. 걸을 때마다 작은 돌멩이 소리가 자박자박 울리는 널찍한 마당, 그 안에 말갛게 고이는 햇살 또는 빗물,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향기로운 차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곳. 일 년 전 함양으로 귀촌해 체류형농업창업지원센터에서 머물다 올 초에 도시재생사업과 관련해 지어진 이 공간을 위탁받아 운영하게 된 김혜경, 서지호 부부는 사람을 살리는 건강한 음식에 관심이 많다. 오래도록 뿌리내리고 살던 도시를 떠나 지역의 삶을 선택한 이유도 “음식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지리산함양시장 주차장 인근에 자리한 찻집 모우나.
혜경 “저희는 둘 다 요가 명상 일을 해왔어요. 남편은 서울에서 요가 명상과 차, 향을 다루는 복합문화공간을 운영하기도 했고요. 그런 일을 하다 보니 몸과 마음의 건강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게 결국은 음식으로 귀결되더라고요.”
지호 “음식 공부를 하면서 우리 몸의 디엔에이와 세포의 작용이 그대로 음식에 전달된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러니 차와 커피 같은 음료는 얼마나 더 민감하겠어요? 저희로서는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손으로 차를 준비하고 음식을 만든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건강’과 ‘이로움’을 삶의 핵심어로 제시하는 부부는 <모우나>를 통해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공유하고자 한다. 다소 비싸더라도 품질이 우수한 차와 커피를 엄선하여 내리는 것, 좋은 원료로 디저트류를 만드는 것, 그리고 이곳을 찾아온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건강 정보와 지식을 아낌없이 제공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그 때문이다.
이 공간이 더 크고 넓게 쓰이길 바라는 의도에서 두 사람은 각각 ‘다도’ 수업과 ‘차명상’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지역을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움직임들, 이를테면 수공예 작업자들이 판을 벌이는 장터나 목수들의 협동조합에서 하는 상자 텃밭 만들기 등의 행사가 있을 때면 기꺼이 마당을 내어주고 직접 참여하기도 하면서 힘을 보탠다.
모우나에서 진행하는 ‘차명상’ 프로그램 홍보물. 이는 자율기부로 운영되며 모인 돈은 지역을 돕는 일에 쓰일 예정이다.
혜경 “단지 차만 팔기 위해 시작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하면 이 안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해보려 해요. 또 공간 운영의 기회를 얻은 만큼 저희도 지역에 보탬이 되고 싶죠. 그래서 최근에는 ‘함양청년보부상’이라고, 귀촌한 청년 중 자영업 하는 이들이 함께하는 모임도 만들었어요.”
귀촌 후 일 년 동안은 새로운 곳에 적응하고 먹고살기 위해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그처럼 치열하고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난 지금, 그들은 이곳에 붙박여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하는 중이다. 전자도 후자도 ‘배움’의 길인 것은 똑같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감사한 마음이 날로 커간다고 할까. “그래서 오시는 한 분 한 분에게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 두 사람의 얼굴이 마치 적당히 데워진 잔 속에 담긴 고요하고 맑은 찻물을 닮은 듯하다.
* 모우나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한발 앞서가는 <빈둥>의 유쾌한 ‘실험’
지역에 ‘커뮤니티 공간’의 중요성을 알리고 정착시킨 <빈둥>이 올해 들어 ‘회원 자치’와 ‘무인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공유공간을 표방하며 다시 새로운 실험에 나섰다.
이번 산책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빈둥>으로 향하는 길. 익숙한 행로에 애틋함이 실리는 이유는 자명하다. 커뮤니티 공간이라는 낱말 자체가 낯설던 시기, 지역민의 소통과 교류를 내세우며 문을 활짝 열어젖힌 빈둥은 우리의 첫 아지트이자 놀이터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경계 없이 어울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였으니까.
이런저런 공간들이 생겨나고 코로나라는 암흑기를 거치면서 과거에 빈둥이 지녔던 구심력이 약해진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점이 아쉽다기보다는, 어려운 시기를 버틴 끝에 계속해나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반갑다. 더욱이 다른 곳보다 한발 앞서가는 ‘실험’을 진행 중이니 그것을 지켜보는 재미와 설렘도 뒤따른다.
은진 “함양읍에 전에 없던 곳들이 많이 생겼지만 ‘만만하게’ 쓸 수 있는 곳은 또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빈둥협동조합>이 그동안 해온 청소년문화기획단이나 놀이활력단에서 쓸 장소가 필요하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빈둥을 민간의 힘으로만 운영되는 자치공간으로 만들면 어떨까 싶었어요. 월세와 전기세 정도만 확보하면 어떻게든 유지는 될 거니까요.”
과거에 빈둥 지킴이였다가 몇 년간의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매니저로 ‘돌아온’ 은진은 지난 3월부터 카페가 아닌 마을활력공간으로 재탄생할 빈둥의 비전을 알리며 후원회원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런 제안을 지역민들에게 ‘편하게’ 던질 수 있기까지는 무엇보다 세월의 힘이 컸던 듯하다. 십 년이 흐르는 사이 주변 관계와 그 속에서 쌓은 믿음이 그만큼 두터워졌달까.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짧은 동안 30여 명이 ‘이용’ 혹은 ‘후원’ 회원으로 가입했고, 이제 빈둥은 오롯이 그들의 회비로 살림을 꾸려간다.
회원들의 다양한 모임과 희의 장소로 자리잡은 빈둥. 공간 사용 일정표는 회원들만 가입하는 밴드를 통해 공유된다.
(사진은 우쿨렐레 모임 풍경)
“회원제니까 아무나 들어와서 쓸 수는 없지만, 이곳이 비어 있을 때 회원이 비회원들을 데리고 와서 뭔가 하는 건 가능해요. 공간 사용 일정은 매니저의 개입 없이 이용자들이 직접 밴드에 올려서 조정하고 있고요. 그러다 보니 오늘은 누가 뭘 하고 내일은 무슨 모임이 있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데, 그게 저는 재밌기도 하고 좋더라고요.”
‘무인’과 ‘자치’를 시스템화하는 것이 지향점이기에 은진은 매니저의 권한이나 역할을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고민하는 것은 회원들이 이 공간을 ‘제 것’으로 여기면서 좀 더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쓸 수 있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점이다. 아울러 회원들끼리 연결되고 서로 환대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뭘 해볼 수 있을까도 짬짬이 연구 중이라고.
“적든 많든 다달이 후원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회원제의 기본 틀은 있지만 ‘꼭 이대로 가야 해’ 그건 아니에요. 공간의 취지를 이해하고 있다면 없을 땐 그냥 사용하고 있을 때 (회비를) 내고 그런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다만 처음 해보는 이 실험이 어떻게 될지 오래 지켜보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가능하면 구조를 잘 만들어서 다른 데 자랑도 하고 싶고.(웃음)”
* 마을활력공간 빈둥 밴드 [바로가기]
(회원 가입은 빈둥에 문의)
당신이 사는 동네를 사랑하고 싶다면
기존의 앎이나 선입견을 내려놓고 대상을 대하면 익숙한 모습이 달리 보이고 뻔한 이야기도 새롭게 들린다고 하던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동네 탐방길에 만난 장소들이 어느 순간 색다르게 다가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책방이든 찻집이든 환경단체든 공유공간이든, 그 안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게 정말 많다는 걸 새삼 알아가는 기쁨도 컸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코로나 이후 ‘시민’이라 할 만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정체되고 심지어 과거와 비교해 퇴보한 듯 보일지언정, 누군가는 수면 아래에서 끊임없이 고민을 이어가고 변화를 모색하고 있음을 발견했다는 것. 덕분에 앞으로는 조금 더 애정 어린 눈빛으로 이 동네를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혹시 사는 곳에 정나미가 떨어져 괴로운 이가 있다면 우선 동네의 크고 작은 장소들을 찾아다니며 묻고 듣는 시간을 가져보기를 권한다. 어쩌면 돌아올 때쯤엔 식었던 마음에 다시 온기가 퍼져가며 동네가 달리 보이는 것을 경험할지도 모르니.
글 쓴 사람. 자야
나에게 기록이란, 먼저 다가가 말 걸고 온 마음을 기울여 듣고 나를 앞세우지 않고 쓰는 것. 올해는 이 어려운 일을 해보려 한다. 이런 나를 조금은 칭찬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