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변화기록원[함양][이 사람] 사랑받았다는 느낌, 사랑하고 있다는 깨달음 - 다양한 활동의 조력자, 김선희

2023-06-25

 

 

사랑받았다는 느낌, 사랑하고 있다는 깨달음

다양한 활동의 조력자, 김선희  

 

글 / 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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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모임에서 조력자로 활동하는 김선희 씨를, 그의 작업장 <꿈둥이>에서 만났다.

 

 

 

누구라도 그를 만나고 나면 이름 석 자는 기억 못 해도 생글생글한 미소와 친절한 응대를 떠올릴 법하다. 스스로를 ‘극내향형’이라 진단하는 그는 외향적인 이들이 흔히 보이는 붙임성과는 조금 다른, 조용하고 은근하게 곁을 내주는 태도로 상대에게 다가간다. 이런 성향은 여럿이 함께하는 활동에서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문화놀이장날>, <정보화농업인연합회>, <삼삼오오행복마을학교> 등 여러 모임에서 일을 하고 있으나 앞에 나서서 끌어당기기보다 뒤에서 밀어주는 역할을 자처한달까. 눈에 확 띄지는 않을지언정 없으면 허전하고 티가 나는 사람, 바로 김선희 씨다. 

 

 

“십 년 정도는 직장 동료들 말고는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살았어요. 그런데 직장을 그만두고 ‘내 일’을 시작한 후로 자꾸 누군가를 만나게 되고 관계가 연결되면서 지역의 여러 활동도 조금씩 하게 되더라고요. 지금은 오히려 너무 많은 걸 벌여놓아서 탈이죠.(웃음)”

 

 

 

 

‘일 년만’ 살아보자 하고 온 이곳에서

 

 

선희 씨는 전라도 광주에서 나고 자랐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광주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던 그는 취업만큼은 타지에서 하리라 작심하고 일부러 다른 지역만 골라 이력서를 집어넣었다. 며칠 후 함양군에 자리한 모 실버타운에서 면접을 보자고 연락이 왔다. 이 사실을 안 부모님이 “왜 굳이 시골로 가려 하냐”며 크게 반대했기에 그도 마음을 접었으나 “얼굴만이라도 한번 보자”는 원장님의 간곡한 부탁까지 거절하기는 어려웠다고. 2007년 어느 봄날, 그가 광주에서 함양 유림면에 이르는 낯선 길을 달려간 이유다. 

 

 

“고속도로를 타다가 생초IC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실버타운까지 연결되는 길이 엄청 예뻤어요. 그날 동행한 부모님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골짝’이라며(웃음) 극구 반대하셨지만, 저는 물과 산이 어우러진 그 시골스러운 풍경에 결심할 수 있었어요. 여기서 일 년만 있다 가자, 그 정도는 살아봐도 좋겠다,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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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면에 자리한 실버타운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하던 때의 모습. (사진제공_김선희, 이하동일) 

 

 

 

이십 년이 넘도록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회색 세상에 만족하며 살던 그였다. 시골에 대한 그리움이나 동경 같은 건 잠시도 품어본 적이 없었다. 다만 또래 친구들과는 달리 그에게는 ‘더 크고 높은’ 곳, 다시 말해 서울이나 수도권을 향한 욕망 또한 희미했다. 선희 씨가 처음 보는 예쁜 시골길에 아무 계산 없이 반할 수 있었던 건, 그리하여 주변의 만류에도 ‘골짝’으로 들어가는 남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그처럼 소박하고 무구한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 선택에는 “일 년만”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었다. 보건대학에서 물리치료를 전공한 그는 일 년간 현장 경험을 쌓은 뒤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삶이란 종종 내가 정해놓은 전제나 계획과는 상관없는 곳으로 내달리지 않던가. 선희 씨 역시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기면서 애초의 설계도와는 다른 행로를 그려갈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실버타운에 물리치료사로 들어갔다가 거기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지금의) 남편을 만난 거예요. 바로 연애를 시작했고 그다음 해 결혼을 하는 바람에 함양을 떠날 새가 없었어요.(웃음) 그러고 보면 여기서 일자리를 얻고 남편을 만난 게 다 ‘인연’이었던 거 같아요.”

 

 

 

 

새로운 일 속에서 몰랐던 나를 ‘발견’하다 

 

 

 

결혼 후 꽤 오랜 시간을 집과 직장만 오가며 살던 그이는 2016년에 물리치료사 일을 그만두고 수제청을 만들어 온라인으로 파는 자영업의 세계로 뛰어든다. 수제청에 대해서는 ‘1도 몰랐’지만 같은 직장에 다니다 비슷한 시기에 그만둔 동료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는 것. 사업 초보인 여자 둘이 작은 공간 하나 얻어 시작한 일은 다행히 기대 이상으로 잘 풀렸고, 덕분에 그는 전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열정을 쏟아부으며 밤낮없이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선희 씨가 동업에서 홀로서기로 방향을 바꾼 건 사업을 시작하고 3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처음 2년이 몸과 영혼을 ‘갈아 넣으며’ 일한 시간이었다면, 나중 1년은 망가진 몸을 돌보고 회복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할까. 충분히 쉬면서 바닥까지 내려간 체력을 끌어올린 그는 2019년에 수제 간식을 만들어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일에 복귀하며 지역의 다양한 ‘장터들’을 만났고, 이는 그가 전에 가본 적 없는 길로 한걸음 내딛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처음에 알게 된 곳은 소심마켓이라고, 함양에서 핸드메이드 제품을 만드는 분들이 알음알음 모여 만든 작은 장터예요. 저는 일을 다시 시작하고 얼마 안 됐을 때부터 셀러로 참여했어요. 낯가림이 심한 편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언니들이 따뜻하게 대해줘서 한시름 놓았죠. 잘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그리 두려워할 일은 아니라는 걸 배운 곳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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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대표적인 장터 <소심마켓>과 <문화놀이장날> 행사장 모습.

처음에 판매자로 참여했던 그는 현재 각 장터에서 기획자 및 운영자로 활동하고 있다. 

 

 

 

비대면이 편해서 온라인판매만 하다가 <소심마켓>을 통해 직접 사람들과 만나 연결되는 ‘재미’를 알아버린 선희 씨는 그해에 하림에서 시작된 <문화놀이장날>에도 자신이 만든 다양한 먹거리를 들고 셀러로 참여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2020년에는 작업장 <꿈둥이>를 열더니 <문화놀이장날>에 장터기획자로 결합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정보화농업인연합회>에서 사무차장(현재는 국장)을 맡고 <삼삼오오행복마을학교>에 마을교사로 참여하는 등, “과거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던” 방식으로 일을 넓혀갔다고. 

 

 

코로나로 많은 이들이 모임을 멈추고 활동을 축소한 시기에 오히려 인생에서 가장 다채롭고 분주한 나날을 보낸 그는, 이에 대해 “엄청난 변화”라고 강조한다. 스스로는 내향적이라 하지만 어쩌면 그는 본인이 아는 것보다는 더 적극적이고 사회적인 유형이 아닐까. 혹은 적어도 하고 싶은 일에는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 줄 아는 사람이거나. 

 

 

“문놀장은 제가 좋아하는 장터이기 때문에 (스태프로) 함께하자는 제안이 왔을 때 안 할 이유가 없었어요. 정보화농업인연합회 일은 전에 강의 한 번 같이 들은 것을 계기로 사람들과 가까워지면서 맡은 거고요. 다들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라 컴퓨터 다루는 걸 어려워하셔서 처음엔 제가 그 부분을 도와드린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돌아보니 그분들이 저를 더 많이 도와주고 아껴주신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싶었죠. 저도 내 안에 이런 적극적인 면이 있는 줄 몰랐는데, 새로운 일을 통해 새로운 나를 계속 발견하게 되는 게 재밌어요.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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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정보화농업인연합회> 회원들과 함께한 선희 씨. 그는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렇게까지 안 살아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됐죠”

 

 

이즈음 그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관계한 모임 중에는 유림초등학교를 기반으로 한 <삼삼오오행복마을학교>도 있다. 유림초는 선희 씨 부부가 읍에서 유림면으로 출퇴근하던 시기에 큰아이를 병설유치원에 맡기면서 인연을 맺은 곳이다. 유치원 생활이 즐거웠던지 아이는 몇 년 후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을 때 읍에 있는 초등학교 대신 유림초를 선택했다. 그리고 또 몇 년 후. 부모가 직장을 그만두면서 굳이 유림면을 오갈 필요가 없어졌을 때도 아이는 유림초에 대한 한결같은 애정을 드러내며 전학을 마다했다고 한다.

 

 

“지금은 유림면에서 살고 있지만, 그때는 집과 남편 직장이 다 읍에 있었고 저도 막 가게를 시작해서 엄청 바빴어요. 마침 둘째가 유치원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큰아이만 괜찮다면 전학을 시켜 읍에서만 움직여도 좋겠다고 생각했죠. 주변에서 다들 ‘애는 읍에서 키워야 한다’며 바람을 넣기도 했고요.(웃음) 그런데 큰아이가 자기는 우리 학교가 좋다고, 전학 가기 싫다고 하더라고요. 걔는 지금 중학생인데도 주말이면 마을학교에 나가요. 그 나이 때 선배들과 동네 어른들의 돌봄을 받았으니 이제는 자기가 후배들한테 그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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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함께 어울려 잘 ‘놀기’ 위해 주말마다 만난다는 <삼삼오오행복마을학교> 사람들. 

 

 

 

누나의 발걸음을 그대로 좇아 올해 유림초 3학년이 된 둘째도 역시나 학교를 좋아한다. 코로나로 인해 한창 비대면 온라인수업을 하던 시기, 아이는 입만 열면 “학교 가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십 년이 넘도록 학교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던 선희 씨가 마을교사로 참여할 마음을 먹고 움직이게 된 데는 이와 같은 아이들의 영향이 컸다. 내 아이들에게 행복감을 안겨주는 곳에 작게나마 보탬이 되고 싶었달까.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이, 그때쯤엔 그이 자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랑받은 건 비단 아이들만이 아니며, 시골살이를 통해 자신 또한 큰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이곳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모르는 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두려워하며 알을 깨고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페이스북에 마을학교 관련한 사진을 올리면 가장 많이 달리는 댓글이 시골이라 여유로워 보인다는 거예요. 그런데 바쁘기로 치면 시골도 도시 못지않아요. 단지 차이가 있다면 도시에서는 뭘 하든 항상 부족하고 뒤처지는 것 같고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했는데, 여기서는 그런 게 많이 ‘내려놔’졌다는 거죠. 그렇게까지 안 살아도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으니까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면서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그래서 다양한 활동도 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동경과 신념보다 필요한 건 사랑

 

 

시골살이에 대한 동경이나 신념 없이 단지 고향을 벗어나고 싶어서 왔던 곳. 잠시 스쳐 지나가는 여행지라 여겼는데 어쩌다 보니 가족을 이루어 정착하게 된 곳. 하지만 15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는 사이 그에게 함양은 어떤 ‘의미’가 되었다. 말하자면 백지 같던 마음에 색이 들고 모양이 새겨진 것. 선희 씨에게 그 색과 모양은, 굳이 언어로 표현하면 ‘사랑’에 가깝다.

 

 

“저는 여기서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느껴요. 그리고 어느 순간 보니까 저도 이곳을 사랑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사는 동네와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그리고 함양이 계속 남아 있길 진심으로 바라죠. 제가 하는 일과 활동이 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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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이곳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그는, 그래서 이 동네가, 학교가, 그리고 함양이 오래도록 남아
 누군가의 고향이 되고 삶의 터전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지역 소멸’이라는 크고 복잡한 담론 앞에서 때때로 작아지고 무력함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그는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행복하면 그걸로 문제의 반 정도는 해결된 거라 믿고 있다. 지역에 대한 주민들의 자부심과 신뢰가 결국은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가장 큰 힘이 될 것이기에.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바깥으로 나가더라도 언젠가는 ‘행복했던 시간’을 기억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기에. 

 

 

그러므로 그는 일단은 이곳에서 계속 행복하기로 마음먹는다. 이웃들이 주는 도움을 흔쾌히 받고 적어도 그 이상은 기꺼이 베풀기로 한다. 이것이 천천히 다가가고 은근히 스며드는 내향형의 선희 씨가 이 지역에서 사랑하고 일하며 삶을 지속해가는 방법이다. 

 

 

 

 

 

글쓴 사람. 자야

나에게 기록이란, 먼저 다가가 말 걸고 온 마음을 기울여 듣고 나를 앞세우지 않고 쓰는 것. 올해는 이 어려운 일을 해보려 한다. 이런 나를 조금은 칭찬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