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변화기록원[함양][변화의 소리] 동네 금은방 주인이 들려주는 ‘싸우면서 순응하는’ 삶 - <함양시민연대> 상임대표 · <지리산생명연대> 공동대표 임병택

2022-11-01

 

 

동네 금은방 주인이 들려주는 ‘싸우면서 순응하는’ 삶

<함양시민연대> 상임대표 · <지리산생명연대> 공동대표 임병택

 

글 / 자야

 

 

 

사진1 (4).jpg

지리산권의 대표적인 환경단체 <지리산생명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는 임병택 선생. (사진제공_임병택) 

 

 

함양읍 동문사거리는, 서울로 치면 광화문 네거리쯤 되지 않을까. 읍내에서 가장 번화한 곳인 만큼 이동 인구와 차량이 많고, 거리 양편엔 이런저런 가게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다. 그런데도 지나치게 어수선한 느낌을 주지 않는 건 도로가 넓지 않고 건물이 대체로 아담하기 때문이다. 토박이 주민들이 꾸려온 오래된 점포들이 꽤 많은 것도 이 거리의 소박하고 정겨운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 한몫한다. 

 

 

두어 달 사이에 새 건물이 들어서고 우후죽순 문을 연 가게들이 잠시 시끌벅적했다가 사라지는 건 여기서도 드문 풍경이 아니나, 그런 가운데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는 곳들이 있다. 간판을 내건 지 42년 된 ‘보옥당’도 그중 하나. 가게는 주인을 닮는다더니, 임병택 사장 역시 우직하기로 소문 난 사람이다. 현재 <함양시민연대> 상임대표면서 <지리산생명연대> 공동대표인 그이는 처음 ‘이런’ 활동에 뛰어든 후 오래도록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왔다. 지금도 지리산권에서 변화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현장’에 가면 어김없이 반백의 묵묵한 선생을 만날 수 있다. 

 

 

 

 

보옥당 ‘사장님’을 지역 ‘활동가’로 만든 것 

 

 

임병택 선생이 이곳 함양에서 가게 ‘사장’만이 아닌 지역 ‘활동가’로서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약 23년 전부터다. 1999년 당시 정부가 대규모 ‘지리산댐’ 건설 추진안을 내놓으면서 지리산권 전체가 발칵 뒤집힌 게 그 계기였다. 

 

 

“댐이 들어서면 실상사가 잠긴다고 하니까 불교계가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들고 일어났지요. 거기에 다른 종교 지도자들, 환경운동과 시민운동 하던 사람들이 전부 붙어서 지리산댐백지화 대책위원회를 만들었어요. 나야 뭐 천주교 대표로 참여는 했지만, 아는 거 하나 없이 그저 따라만 다닌 거고.(웃음)” 

 

 

 

사진2-.jpeg

길고 길었던 지리산댐백지화 싸움에 이어, 현재 지리산권에서는 산악열차 반대 싸움이 뜨겁게 진행 중이다. 

 

 

지리산댐백지화 싸움의 역사는 상당히 길다. 정부와 지자체가 손발을 맞추어 댐 건설을 철회했다 다시 추진하길 거듭하며 무려 20년을 끌었으니, 그 오랜 시간 동안 반대 운동을 이끌어온 사람들이 겪었을 고초를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만 다녔다”고 하지만 웬만한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그조차 불가능했을 터. 이처럼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싸움의 현장을 지켜낸 그만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세상 만물이 다 하느님이 빚은 소중한 창조물이니 보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어디 가서 환경이론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단지 그 마음 하나뿐이에요. 또 환경이나 사람을 망가뜨리는 건 강자고 힘 있는 이들이잖아요. 그러니 약한 것, 힘없는 자들과 가능하면 함께하고 싶은 거지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선생은 과거에 그랬듯 지금도 자신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신앙이라고 고백한다. 지리산댐백지화 싸움을 비롯해 그 뒤로 이어진 활동이 그에게는 곧 창조주의 섭리와 내면의 빛을 좇아 그려나간 궤도였다는 것. 자신보다 더 큰 존재의 뜻에 ‘내맡기는’ 것을 당연시하는 선생에게, 그러고 보면 “따라만 다녔다”는 말이 단지 겸양의 표현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똥장군 지던 열다섯 소년의 객지살이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신앙생활은 그의 나이 열다섯에 시작되었다. 1968년인 그해는 소년 임병택이 고향인 함양군 수동을 떠나 대구로 나가 정착한 때이기도 하다. 8남매 중 다섯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부잣집이었다면 귀한 아들 대접을 받았을 터이나 지독히도 가난했던 탓에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거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형편이 더 어려워지면서 형제자매가 뿔뿔이 흩어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때는 농사가 나락밖에 없었어요. 그것도 우리 땅이 아니라 남의 논을 부쳤지요. 나락 거두고 나면 보리를 심는데 거기 거름 준다고 똥장군도 수시로 지고 그랬다고.(웃음)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는 같이 먹고살 형편이 안 되니까 각자 제 살길 찾아서 나갔죠. 나는 대구 당숙모네로 가고, 남동생은 가구공장으로 여동생들은 고무공장으로 갔어요. 남동생이 좀 일찍 세상 뜬 거 빼고는, 다행히 지금은 다들 잘 삽니다.”

 

 

사진3 (3).jpg

함양의 오래된 금은방 ‘보옥당’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는 임병택 선생.

 

 

당숙모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시절, 6촌 형님은 자신이 책임자로 일하던 곳으로 소년을 이끌었다. 대구는 물론 경북지역을 통틀어 가장 큰 금은방으로 알려진 ‘미성당’의 세공공장이었다. 당시만 해도 양복점이든 구둣방이든 금은방이든 손으로 익히는 기술은 전부 ‘도제식’으로 전수되었고, 갓 들어온 신참자에게 허락되는 건 청소와 심부름뿐이었다. 미성당 공장도 예외는 아니어서 소년은 꼬박 몇 년을 월급도 뭣도 없이 허드렛일만 도맡아 하며 버텨야 했다.

 

 

“미성당 뒤에 세공공장 몇 개가 가동되고 있었거든요. 금은방 안에서 판매하는 종업원들 빼고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만 40명이 될 정도로 큰 데였어요. 처음엔 시키는 대로 청소만 죽어라 하다가 몇 년 지나 겨우 망치를 잡았죠. 금이 덩어리로 나오면 그걸 잘라 망치질을 해서 성냥처럼 작은 사각 모양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 일을 또 한참 하다가 나중에 용접도 하고 차츰 금은세공의 전 과정을 책임지는 기술자가 된 거지요.” 

 

 

대구에 막 뿌리내리던 시기에 주변 사람 중 유독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던 건 우연이었을까. 쉬는 날에도 갈 곳 없고 만날 사람 하나 없던 그는 지인들을 따라 성당에 발을 디뎠고 열일곱 무렵에는 세례도 받았다. 그 후 50년이 넘도록 ‘믿는 자’로서 성실하게 살아왔으니, 뭐든 일단 시작하면 ‘함부로’ 그만두지 않는 성격은 여기서도 드러난다. 

 

 

“직업도 종교도 내가 원해서 선택한 게 아니에요. 기술을 배워야겠다거나 성당에 다니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그때 그 상황에서 저절로 된 거죠. 그러니 그만두고 자시고 할 게 있습니까?(웃음)”

 

 

 

‘되어가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

 

 

선생의 말대로라면, 스물셋에 다시 함양으로 돌아온 것이나 그로부터 몇 년 후 동문사거리 인근에 금은방을 낸 것도 그저 ‘되어간’ 일이다. 모든 게 수월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린 시절에 그랬듯 가난은 줄곧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실력으로 알아주는 기술자가 되었지만, 수중엔 여전히 돈이 없었다. 시계방 하던 이와 동업해 처음 가게를 열 때도 빚으로 시작했고, 신혼살림 역시 십만 원짜리 사글셋방에 겨우 마련했다. 

 

 

그나마 이제 좀 형편이 폈다고 느낀 건 결혼 후 독립된 내 가게를 차리고 나서 몇 년 뒤 현재 자리로 옮기고 나서다. 열다섯 소년이 맨몸으로 세상에 뛰어든 지 20년은 족히 지났을 때다.

 

 

“지인과 동업할 때는 상호가 옥금당이었어요. 그걸 몇 년 하다가 결혼 이듬해인 1980년에 독립해서 하약국 옆에다 보옥당을 차렸죠. 육칠 년 지나서 이 자리로 옮겼는데 장사가 좀 될 만하면 꼭 도둑이 들더라고.(웃음) 벽을 뚫고 들어와 싹 털어간 것만 두 번이에요. 크게 손해를 본 건 맞지만 뭐 어쩌겠어요. 상심에 빠지고 억울해한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상황에 일희일비하는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담담한 태도는 활동에서도 드러난다. 지리산댐백지화 싸움을 통해 만난 사람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함양시민연대>는 한때 지역의 여러 현안에 개입하며 변화를 일구는 데 앞장섰으나, 지금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존재가 희미하다. 판을 벌이고 일을 만드는 실무자 없이 흔히 말하는 ‘어른’들에 의해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할까. 초반부터 현재까지 단체가 지역에 정착할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애를 써온 선생에게 이는 분명 아쉬운 일일 테지만, 그렇다고 크게 걱정하거나 억지로 뭔가를 이루려 하지는 않는다.

 

 

사진4 (2).jpg

함양군청 앞에서 집회 중인 함양시민연대. 

지역사회에 변화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민단체는 꼭 필요하지만, 현실적인 여건상 활동을 이어가기가 쉽지는 않다.

 

 

“젊은 활동가가 들어와서 단체에 활력이 생기면야 좋겠지만, 그런 사람이 있든 없든 나는 똑같이 내 할 일을 해왔거든요. 어디서 서명받아달라고 하면 받아주고, 회의에 부르면 가고, 집회가 있으면 참여하는 겁니다. 함양시민연대와 지리산생명연대 대표도 그래서 맡았어요. 아무도 안 한다고 나더러 하라니까.(웃음) 회의 가고 집회에 참여하는 정도는 할 수 있어서 그러겠다고 했죠. 그런 건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도움이 필요한 곳에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다는 게 오히려 기쁘지.”

 

 

최근 남원을 중심으로 지자체와 주민 간 갈등이 심해지고 있는 ‘지리산산악열차’와 관련해서도 선생은 남원시청부터 정령치까지 시위가 열리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고 본다. 나서서 말 한마디 안 할지언정 뒤에서 플래카드를 펼치고 빈자리를 채워주는 것이다. 몇십 년을 그렇게 살아왔으므로 임병택 대표를 아는 이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모습이다.

 

 

 

‘싸움’과 ‘순응’을 통합해서 사는 사람    

 

 

모처럼 회의도 집회도 없는 날. 그런 날엔 종일 보옥당을 혼자 지킨다. 아이엠에프 이후 빠르게 쇠락한 까닭에 금은방은 이제 수지가 안 맞는다. 그래도 고장 난 시계를 들고 오는 아저씨에, 간혹 장롱 깊숙이 숨겨놓은 장신구를 팔거나 자녀들 예물을 맞추러 오는 아주머니에, 그리고 차 한 잔 놓고 수다 떨러 오는 이웃들이 있어 심심하진 않다. 뼛속까지 보수라는 이 지역에서, 심지어 개발 이슈가 떠오를 때마다 찬성표를 던지기 일쑤인 상가에서 거의 유일하게 ‘다른’ 길을 걷고 있음에도 주변과 잘 어울려 살아가는 비결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 게 있을 리가요.(웃음) 계속 얘기하잖아요. 나는 뭐가 어떻게 되길 바라거나 계획하지 않는다고. 사람들하고도 그냥 지내는 거예요. 그때그때 순응하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거, 그거 말고는 없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지키기 위해 ‘싸움’의 길을 걸어온 사람에게서 듣는 ‘순응’이라는 단어는 묘한 울림을 준다. 앞서 등장한 “따라다녔다”는 말처럼 “순응” 역시 선생의 삶을 관통하는 신앙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짐작해보지만, 여전히 알 듯 모를 듯하다. 다만 그와 같은 단어들을 자신의 삶에 모순 없이 적용하고 표현한다는 게 아무나 할 수 없는 근사한 일이라는 건 알겠다. 이런 어른을 저잣거리의 ‘금은방’과 변화를 뜨겁게 갈구하는 ‘현장’에서 동시에 만날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값진 경험이며 큰 행운인지도. 

 

 

 

사진5 (3).jpg

‘2022 지리산생명평화 한마당’ 현장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둥글게 손을 잡고 하나의 원을 이룬 모습. 

임병택 선생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의 형상을 보는 듯하다.

 

 

 

 

 

글쓴 사람. 자야

나에게 기록이란, 먼저 다가가 말 걸고 온 마음을 기울여 듣고 나를 앞세우지 않고 쓰는 것. 올해는 이 어려운 일을 해보려 한다. 이런 나를 조금은 칭찬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