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변화기록원[산청][희영에게] 시천면에 있는 그림 모임 ‘이층미술관’에서 야외스케치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어.

2022-10-05

 

 

희영에게_ 일곱 번째 편지

 

글과 그림 / 효림

 

 

* 시골에 전혀 살아본 적 없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친구에게 산청의 삶을 소개합니다. 

편지를 쓰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다소 친근한 글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릴 적 나갔던 사생대회 기억나니? 궁이나 능 한편에 앉아 화판 위 도화지에 연필로 쓱쓱, 팔레트에 미리 짜둔 물감에 물을 묻혀 붓으로 몇 번 칠하다 말고 뛰놀던 기억. 낯선 교복을 입고 백일장 하러 온 다른 학교 학생들. 점심시간 전에 이미 다 먹어버린 김밥이랑 라면. 어찌 알고 찾아왔는지 모를 아이스크림 아저씨. 

 

 

며칠 전, 산청 시천면에 있는 그림 모임 ‘이층미술관’에서 야외스케치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어. 이층미술관은 그림을 그리는 것뿐 아니라 다양한 재료로 각종 소품을 만드는 지역 모임이야. 이번에는 단성면에 있는 ‘공간산아’에서 만났어. 작은 마을에서도 굽이굽이 한참을 더 올라가 이쯤에서 길이 끝나지 않을까, 막다른 곳에서 차를 돌릴 수는 있을까, 걱정이 커질 때쯤 반가운 입간판이 보여. 곧 민박, 책방, 카페 등 다양한 체험을 한데 할 수 있는 공간산아가 나와. 조금 더 숲 안쪽으로 들어가면 이곳의 백미, 비밀 놀이터가 있어. 높게 뻗은 소나무 사이로 해먹이 걸려 있고, 클라이밍을 할 수 있는 장치들도 있지. 밧줄로 엮은 놀이터는 어린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가장 좋아할만 해.

 

 

새로운 공간에 오면 마음이 확 트이고 붕 뜨잖아. 널찍한 데크에 앉아 각자가 그릴 풍경을 고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어. 알알이 영근 밤들이 툭툭 떨어지고, 나무에 길게 매달린 그네가 바람에 흔들리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있나. 설레는 마음으로 재료들을 꺼내며 아이처럼 웃던 멤버들은 자리를 잡자 금세 진지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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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001.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경주씨, 민효씨, 은옥씨, 유미씨, 송연씨, 산아씨

 

 

 

그림그리기는 철저히 ‘나’를 위한 개인 작업이야. 같이 연주를 하는 음악 작업이나, 연기를 주고받는 연극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그리는 ‘대상’과 ‘나’의 관계가 그림이야. 풍경을 정하고 나면 그 대상을 천천히 관찰하며 종이에 그려. 누군가는 붉게 물들기 시작한 산을 그리고, 누군가는 구름 낀 하늘에서도 미묘한 색의 변화를 감지해. 또 다른 사람은 나무 밑동에서 제멋대로 자란 잎들의 형태를 관찰하고, 그 사람의 뒷모습을 화폭에 담는 사람도 있지. 

 

 

촉촉하게 올라오는 땅의 기운에, 쌉싸름한 나무 냄새를 맡고, 새소리를 들으며 스케치하다 보면 그야말로 오감이 활짝 열려. 가만히 앉아 각자의 작업에 집중하면서도 어느새 사는 이야기들을 꺼내게 돼. 예전 살았던 동네부터 요즘 집중하고 있는 관심사, 만화가를 꿈꿨다던 소싯적 이야기까지. ‘내’ 그림을 그리면서도 서로 하나가 되는 경험이 사생이 아닐까 싶어.

 

 

예보대로 굵은 빗방울이 뚝뚝, 우리는 예정보다 일찍 카페에 내려왔어. 그리곤 사생대회에서처럼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하나둘씩 꺼냈지. 멤버들은 처음 본 인터뷰어에게도 선뜻 젓가락을 건넸어. 직접 만든 김밥은 파는 것보다 왜 항상 더 맛있을까? 한자리에 모여 김밥과 유부초밥, 된장국과 컵라면을 먹으니 숲에서 서늘해졌던 몸이 사르르 녹았어.

 

 

풍경을 보고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던 적 있지? 노을이 구름을 적시는 모습을 보거나 푸른 잎들이 마지막 한철을 불태울 때, 황금빛 억새가 햇살을 머금고 너울너울 춤을 출 때 등등. 그렇다면 그 풍경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질 때, 그 순간을 연장하고 싶을 때, 가장 탁월한 방법은 그림으로 남기는 거야. 그림을 그리다 보면 아름다운 것조차 스치듯 감탄했다는 것을 알게 돼. 무언가를 깊이 들여다본 경험이 생각보다 더 적다는 것도.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대상을 그려보렴. 어느 하나 똑같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쓰고 그린 사람. 효림

어쩌다 흘러 들어온 산청에 7년째 거주 중.

생긴대로 살기 위해 어떻게 생겼는지 매일 관찰하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