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선스럽’게 행복할 것, 내일 말고 오늘 우리 동네 청년들 ④ : 95년생 김민선 글 / 자야 
2020년에 귀촌한 김민선 씨. 함양에서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생활 중이다. (사진제공_김민선/이하동일) 그는 기록하는 것을 좋아한다. 청소년 때부터 쓴 일기가 노트로 스물여덟 권이나 된다. 시작은 ‘아픈 몸’이었다. 고통과 죽음에 대한 사색은 글쓰기로 이어졌고, 이는 이과 특성화 중학교에 다니던 그를 문과 지망생으로 바꾸어 놓았다. 교사들이 이를 ‘말리려고’ 집에 찾아오기도 했지만, “당장 내일이나 다음 달에 죽을지도 모르니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겠다”는 그의 절실함을 꺾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 그는 건강을 되찾았고, 원하던 대로 시를 써서 대학에 들어갔다. 졸업하고 나서는 한식, 양식, 일식 조리사 과정을 전부 수료한 후 요리사로 경력을 쌓았다. 그런 다음 다시 ‘글쓰기’로 돌아가 방송작가로 일하길 몇 년. 2020년에는 함양으로 ‘귀촌’해 일 년간 농사를 배웠고, 올해 봄부터 의욕적으로 카페 운영을 시작했으나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얼마 전 짐을 빼서 나와야 했다. 짧은 동안 많은 것에 도전했고 그만큼 실패도 겪었다는 사람, 흔히들 이십 대 청년에게 기대하는 맑고 해사한 얼굴을 가졌으나 눈빛과 입매에서 깊고 단단한 심지가 엿보이는 사람. 95년생 김민선 씨의 이야기다. 하고 싶은 건 일단 ‘해보는’ 삶 “제가 함양 오기 전에 방송작가로 일한 프로그램이 <한국인의 밥상>이거든요. 어느 날 구례에 내려가 촬영을 하는데 출연자 중에 삼십 대 청년이 있는 거예요. 그렇게 젊은 분을 만난 게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을 따로 물어봤어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시골에 왔는지, 주변에 청년들이 얼마나 되는지, 또 제일 행복할 때가 언제인지.” 민선 씨는 그와의 사적인 대화를 통해 도시를 떠나 시골로 내려오는 젊은이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았다. 각자도생하는 대신 청년 커뮤니티를 만들어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는 이들에 관한 ‘가슴 뛰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무엇보다 도시 직장인에서 농촌 양봉업자로 변신한 그의 삶이 무척 ‘평화’롭고 심지어 ‘재미’있어 보여 ‘나도 귀촌을 하면 어떨까’ 상상해보는 시간이 늘어갔다. “시골이 사라지고 있잖아요. 제가 초중고 시절을 보낸 충북 단양도 비슷한 처지라서 늘 그 점이 안타까웠어요. 그런데 도시에서 나고 자란 청년들이 시골에 내려가 서로 어울려 살고 있다니 그럼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죠. 또 제가 아무래도 시골 정서를 잘 알고 있고 경험도 많으니까 먼저 내려가 애쓰는 청년들에게 뭔가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귀촌 전 <한국인의 밥상> 취재작가로 일할 때 찍은 현장 사진. 프로그램 성격상 시골 어르신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그 후 정보를 모으고 살 곳도 찾아보며 차근차근 귀촌을 준비하길 일 년. 그가 마침내 가족들에게 뜻을 밝혔을 때 가장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인 건 어머니였다. “네가 가면 나도 간다”며 2020년 2월에 딸보다 먼저 함양에 내려와 자리를 잡은 것이다. 민선 씨가 직장 일을 정리하고 어머니 곁으로 온 건 그로부터 4개월 뒤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결정과 행동에 많은 것이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긴 했지만, 마당 있는 집에서 자유롭게 숨 쉬며 지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마냥 신나고 좋았다 한다. 이듬해 봄이 되자 그는 농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함양군 체류형농업창업지원센터(이하 체류센터)’에 지원해 들어간다. 이번에는 하나뿐인 여동생이 동행인이 되어주었다. 다른 귀촌인보다 시골을 잘 안다고 자부하던 그는 이제 농사만 배우면 ‘완전체’가 되리라고, 또 완전체가 되면 하고 싶은 게 무엇이든 실현 가능할 거라고 믿었다. “농사에 대한 관심은 전부터 많았어요. 요리사와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보니까 농사 경험이 없으면 제철 메뉴나 계절 밥상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더라고요. 이제 시골에 내려왔으니 더더욱 농사를 알아야 한다고, 그게 저의 결함을 채워줄 거라고 생각했죠.” 완전체는 환상, 도전과 실패를 통해 배워갈 뿐 
함양군 체류형농업창업지원센터에서 농사교육을 받고 있는 민선 씨. 체류센터는 일 년간 입주자들에게 시골에서 농부로 살아남는 법을 교육하는 데 집중했다. 강의에 실습까지 치면 하루 스케줄은 결코 느슨하지 않았다. 이는 농사를 배우는 데 분명 도움이 되었지만, 경제활동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난감한 문제이기도 했다.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민선 자매는 그로 인해 재정난을 겪었고 나중에는 일하러 가느라 교육을 빠지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숙소와 교육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은 물론 감사하죠. 그런데 생활 지원이 안 되니까 저처럼 돈을 벌어야 하는 젊은이들이 지내기는 어렵더라고요. 게다가 센터에서 나오고 나면 갈 데가 없는 거예요. 빈집 정보가 안 들어오거든요. 마땅한 일자리도 없고. 다들 우스갯소리로 그래요. 나중에 일용직 구하러 인력시장 나가면 거기서 센터 사람들 다 만날 수 있다고.(웃음)” 체류센터를 나오기도 전에 ‘현실’이라는 벽을 마주한 민선 씨는 입주 생활이 끝나면 서울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기회가 찾아온다. 어머니가 함양에서 알게 된 지인을 통해 ‘망해가는’ 카페 운영을 맡아달라는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주방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는 데다 요리를 좋아하는 그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올해 3월부터 그는 동생과 함께 공간을 다시 꾸미고 메뉴를 새로 구성하는 등 ‘카페 살리기’에 모든 에너지와 열정을 쏟아부었다. 육체적으로 힘든 그 시기에 곁을 내어준 건 ‘다정한’ 이웃들이다. 젊은 자매가 시골에 와서 애쓴다며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채소며 과일을 한 소쿠리씩 안기는 건 예사고, 식당에서 우연히 아는 할아버지라도 만나면 쌈짓돈을 꺼내어 밥값을 내주시곤 했다. 5월에 정식으로 카페 재오픈을 하고 나서는 “수고를 알아주는” 손님들이 있어 더없이 행복했다고 그는 또한 말한다. 집과 시장과 아이 학교를 오가는 길에 수시로 들러주는 한동네 단골들, 도시에서부터 먼길 달려 와주는 여행자들, 그리고 주인장보다 더 열심히 카페를 알리는 ‘홍보요정’들 덕분에 내면 깊이 잠재된 불안과 시름마저 잊고 지낼 수 있었다고. “정말 많은 공을 들였고 그만큼 장사가 잘돼서 좋았어요. 지역 청년들이 생산한 빵과 로메인, 요거트 등으로 제품을 개발해서 판매하는 일에도 보람을 느꼈고요. 또 카페를 무대 삼아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들이 참 많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그만두게 돼서 아쉽죠. 처음엔 화도 많이 났지만 지금은 또 한고비 넘겼다고 생각해요. 실패를 겪었고, 그걸 견디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랍니다.” 
그는 올해 봄부터 동생과 함께 유림면의 한 카페를 맡아 운영해왔으나 지금은 그만둔 상태다. 그래도 심장은 뛰고 꿈은 계속돼 자매가 운영하면서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카페를 사이에 두고 그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한 사정을 알긴 어렵다. 다만 “또 한고비 넘겼다”는 말에 감춰진 고단함과 그에 깃들어 있을 한숨과 눈물을 짐작해볼 따름이라 할까. “실패를 견디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라니, 한편으로는 그의 다음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가 궁금해진다. “곡성에서는 저와 동갑인 청년 부부가 한달살이, 백일살이 프로젝트를 해서 도시 청년들과 지역을 이어주고 있어요. 전국적으로 청년마을이나 청년공동체를 만들려는 움직임도 정말 많고요. 저도 사실은 그런 걸 하고 싶었죠. 비어 있는 마을회관이나 공간을 활용해서 커뮤니티를 만든다거나, 할머니들과 손잡고 향토요리사전을 펴낸다거나. 또 함양에 술도가가 많으니까 관련 지도를 만들고 관광상품을 개발할 수도 있겠고요. 카페를 계속 운영했다면 지역 청년들과 협업하여 다양한 문화 활동도 시도했을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여전히 제 심장이 뛰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좀 지친 상태라 우선은 힘이 차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최근에 생긴 ‘좋은’ 일 하나는 그가 기다리는 시간 동안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고 기운도 불어 넣어줄 또래들의 모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바로 함양 청년 커뮤니티 ‘이소’다. “자신의 안부나 소식, 용무 따위를 다른 사람에게 적어 보내는 글”이라는 뜻을 지닌 이소에는, 이름 그대로 소소한 생각과 취향과 가치를 나누며 느슨한 연대의 끈을 이어가고자 하는 스무 명 남짓한 청년들이 가입해 있다. 
함양 청년 커뮤니티 ‘이소’의 첫 모임 사진. 이 모임을 처음 제안한 최학수 씨와 함께 이소 기획단을 함께 해나가는 민선 씨는 “다들 이런 자리와 만남에 목말라 있었기에” 단기간에 많은 청년이 모일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귀촌한 청년들이 부딪히는 큰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외로움’이고, 때론 그게 너무 지독해서 우울증을 앓기도 한다고. “이소가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엄청 끈끈한 게 있어요. 서로를 굉장히 지지하고 응원한다는 느낌을 받죠. 비슷한 아픔을 겪었고, 그럼에도 떠나지 않고 남은 사람들이라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청년들 스스로 풀어가야 할 매듭이 있다면 ‘정책’을 통해야만 해결되는 문제도 있지 않을까. 함양에서 지내는 동안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끼고 생각해왔는지도 한마디 청해 들어본다. “바깥에서 청년을 끌어오려고 하지 말고 함양군 스스로 알차졌으면 좋겠어요. 이미 들어와 정착하고자 애쓰는 청년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하고요. 또 이 지역과 청년에 어울리는 기업을 들이는 방안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부 다 창업을 할 수도, 아르바이트로만 살 수도 없으니까요.” 헛된 순간 없고 모든 경험이 소중해 철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자’는 좌우명을 지니고 살았다. 그러다 말이 지닌 무게를 실감한 뒤에는 조금 가볍게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자’로 바꾸었다. 그러고 보면 김민선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도” 스스로를 값지게 쓰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인 듯하다. “여기 내려와 안 좋은 일을 겪을 때마다 그게 바보 같은 생각인가 되묻곤 하지만, 그래도 제가 옳다고 정한 방향과 마음은 계속 유지하고 싶어요.” 욕망을 따라 움직이기보다 내면에 힘이 차오를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야 하는 요즘 같은 시기엔 농사를 배우고 경험한 것이 도움이 된다. 땅속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 꽃 피어 열매 맺은 후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전 과정을 목격하면서, 그는 한순간도 헛된 건 없음을, 그 한순간을 위해 모든 존재가 협력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 경험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금’이 고맙고 소중해진다. 나를 찾아오는 모든 순간에 행복하지 않을 이유는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온전히 힘을 회복하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몰라도, 이제 민선 씨는 다음과 같이 결정하는 게 어렵지 않다.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언젠가 페이스북과 블로그에 썼듯이 이게 가장 ‘민선스럽’고 ‘민선다운’ 결정임을 그는 이미 알고 있다. 누구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때 가장 강해지는 법이니 그가 힘을 되찾을 날도 멀지 않았다. 
도전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김민선은 어떤 순간에도 기꺼이 행복하기로 결정한다. 내일이 아닌 오늘, 다음이 아닌 지금 여기서. |
‘민선스럽’게 행복할 것, 내일 말고 오늘
우리 동네 청년들 ④ : 95년생 김민선
글 / 자야
2020년에 귀촌한 김민선 씨. 함양에서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생활 중이다. (사진제공_김민선/이하동일)
그는 기록하는 것을 좋아한다. 청소년 때부터 쓴 일기가 노트로 스물여덟 권이나 된다. 시작은 ‘아픈 몸’이었다. 고통과 죽음에 대한 사색은 글쓰기로 이어졌고, 이는 이과 특성화 중학교에 다니던 그를 문과 지망생으로 바꾸어 놓았다. 교사들이 이를 ‘말리려고’ 집에 찾아오기도 했지만, “당장 내일이나 다음 달에 죽을지도 모르니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겠다”는 그의 절실함을 꺾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 그는 건강을 되찾았고, 원하던 대로 시를 써서 대학에 들어갔다. 졸업하고 나서는 한식, 양식, 일식 조리사 과정을 전부 수료한 후 요리사로 경력을 쌓았다. 그런 다음 다시 ‘글쓰기’로 돌아가 방송작가로 일하길 몇 년. 2020년에는 함양으로 ‘귀촌’해 일 년간 농사를 배웠고, 올해 봄부터 의욕적으로 카페 운영을 시작했으나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얼마 전 짐을 빼서 나와야 했다. 짧은 동안 많은 것에 도전했고 그만큼 실패도 겪었다는 사람, 흔히들 이십 대 청년에게 기대하는 맑고 해사한 얼굴을 가졌으나 눈빛과 입매에서 깊고 단단한 심지가 엿보이는 사람. 95년생 김민선 씨의 이야기다.
하고 싶은 건 일단 ‘해보는’ 삶
“제가 함양 오기 전에 방송작가로 일한 프로그램이 <한국인의 밥상>이거든요. 어느 날 구례에 내려가 촬영을 하는데 출연자 중에 삼십 대 청년이 있는 거예요. 그렇게 젊은 분을 만난 게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을 따로 물어봤어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시골에 왔는지, 주변에 청년들이 얼마나 되는지, 또 제일 행복할 때가 언제인지.”
민선 씨는 그와의 사적인 대화를 통해 도시를 떠나 시골로 내려오는 젊은이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았다. 각자도생하는 대신 청년 커뮤니티를 만들어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는 이들에 관한 ‘가슴 뛰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무엇보다 도시 직장인에서 농촌 양봉업자로 변신한 그의 삶이 무척 ‘평화’롭고 심지어 ‘재미’있어 보여 ‘나도 귀촌을 하면 어떨까’ 상상해보는 시간이 늘어갔다.
“시골이 사라지고 있잖아요. 제가 초중고 시절을 보낸 충북 단양도 비슷한 처지라서 늘 그 점이 안타까웠어요. 그런데 도시에서 나고 자란 청년들이 시골에 내려가 서로 어울려 살고 있다니 그럼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죠. 또 제가 아무래도 시골 정서를 잘 알고 있고 경험도 많으니까 먼저 내려가 애쓰는 청년들에게 뭔가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귀촌 전 <한국인의 밥상> 취재작가로 일할 때 찍은 현장 사진. 프로그램 성격상 시골 어르신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그 후 정보를 모으고 살 곳도 찾아보며 차근차근 귀촌을 준비하길 일 년. 그가 마침내 가족들에게 뜻을 밝혔을 때 가장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인 건 어머니였다. “네가 가면 나도 간다”며 2020년 2월에 딸보다 먼저 함양에 내려와 자리를 잡은 것이다. 민선 씨가 직장 일을 정리하고 어머니 곁으로 온 건 그로부터 4개월 뒤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결정과 행동에 많은 것이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긴 했지만, 마당 있는 집에서 자유롭게 숨 쉬며 지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마냥 신나고 좋았다 한다.
이듬해 봄이 되자 그는 농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함양군 체류형농업창업지원센터(이하 체류센터)’에 지원해 들어간다. 이번에는 하나뿐인 여동생이 동행인이 되어주었다. 다른 귀촌인보다 시골을 잘 안다고 자부하던 그는 이제 농사만 배우면 ‘완전체’가 되리라고, 또 완전체가 되면 하고 싶은 게 무엇이든 실현 가능할 거라고 믿었다.
“농사에 대한 관심은 전부터 많았어요. 요리사와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보니까 농사 경험이 없으면 제철 메뉴나 계절 밥상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더라고요. 이제 시골에 내려왔으니 더더욱 농사를 알아야 한다고, 그게 저의 결함을 채워줄 거라고 생각했죠.”
완전체는 환상, 도전과 실패를 통해 배워갈 뿐
함양군 체류형농업창업지원센터에서 농사교육을 받고 있는 민선 씨.
체류센터는 일 년간 입주자들에게 시골에서 농부로 살아남는 법을 교육하는 데 집중했다. 강의에 실습까지 치면 하루 스케줄은 결코 느슨하지 않았다. 이는 농사를 배우는 데 분명 도움이 되었지만, 경제활동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난감한 문제이기도 했다.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민선 자매는 그로 인해 재정난을 겪었고 나중에는 일하러 가느라 교육을 빠지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숙소와 교육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은 물론 감사하죠. 그런데 생활 지원이 안 되니까 저처럼 돈을 벌어야 하는 젊은이들이 지내기는 어렵더라고요. 게다가 센터에서 나오고 나면 갈 데가 없는 거예요. 빈집 정보가 안 들어오거든요. 마땅한 일자리도 없고. 다들 우스갯소리로 그래요. 나중에 일용직 구하러 인력시장 나가면 거기서 센터 사람들 다 만날 수 있다고.(웃음)”
체류센터를 나오기도 전에 ‘현실’이라는 벽을 마주한 민선 씨는 입주 생활이 끝나면 서울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기회가 찾아온다. 어머니가 함양에서 알게 된 지인을 통해 ‘망해가는’ 카페 운영을 맡아달라는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주방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는 데다 요리를 좋아하는 그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올해 3월부터 그는 동생과 함께 공간을 다시 꾸미고 메뉴를 새로 구성하는 등 ‘카페 살리기’에 모든 에너지와 열정을 쏟아부었다. 육체적으로 힘든 그 시기에 곁을 내어준 건 ‘다정한’ 이웃들이다. 젊은 자매가 시골에 와서 애쓴다며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채소며 과일을 한 소쿠리씩 안기는 건 예사고, 식당에서 우연히 아는 할아버지라도 만나면 쌈짓돈을 꺼내어 밥값을 내주시곤 했다.
5월에 정식으로 카페 재오픈을 하고 나서는 “수고를 알아주는” 손님들이 있어 더없이 행복했다고 그는 또한 말한다. 집과 시장과 아이 학교를 오가는 길에 수시로 들러주는 한동네 단골들, 도시에서부터 먼길 달려 와주는 여행자들, 그리고 주인장보다 더 열심히 카페를 알리는 ‘홍보요정’들 덕분에 내면 깊이 잠재된 불안과 시름마저 잊고 지낼 수 있었다고.
“정말 많은 공을 들였고 그만큼 장사가 잘돼서 좋았어요. 지역 청년들이 생산한 빵과 로메인, 요거트 등으로 제품을 개발해서 판매하는 일에도 보람을 느꼈고요. 또 카페를 무대 삼아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들이 참 많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그만두게 돼서 아쉽죠. 처음엔 화도 많이 났지만 지금은 또 한고비 넘겼다고 생각해요. 실패를 겪었고, 그걸 견디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랍니다.”
그는 올해 봄부터 동생과 함께 유림면의 한 카페를 맡아 운영해왔으나 지금은 그만둔 상태다.
그래도 심장은 뛰고 꿈은 계속돼
자매가 운영하면서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카페를 사이에 두고 그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한 사정을 알긴 어렵다. 다만 “또 한고비 넘겼다”는 말에 감춰진 고단함과 그에 깃들어 있을 한숨과 눈물을 짐작해볼 따름이라 할까. “실패를 견디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라니, 한편으로는 그의 다음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가 궁금해진다.
“곡성에서는 저와 동갑인 청년 부부가 한달살이, 백일살이 프로젝트를 해서 도시 청년들과 지역을 이어주고 있어요. 전국적으로 청년마을이나 청년공동체를 만들려는 움직임도 정말 많고요. 저도 사실은 그런 걸 하고 싶었죠. 비어 있는 마을회관이나 공간을 활용해서 커뮤니티를 만든다거나, 할머니들과 손잡고 향토요리사전을 펴낸다거나. 또 함양에 술도가가 많으니까 관련 지도를 만들고 관광상품을 개발할 수도 있겠고요. 카페를 계속 운영했다면 지역 청년들과 협업하여 다양한 문화 활동도 시도했을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여전히 제 심장이 뛰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좀 지친 상태라 우선은 힘이 차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최근에 생긴 ‘좋은’ 일 하나는 그가 기다리는 시간 동안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고 기운도 불어 넣어줄 또래들의 모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바로 함양 청년 커뮤니티 ‘이소’다. “자신의 안부나 소식, 용무 따위를 다른 사람에게 적어 보내는 글”이라는 뜻을 지닌 이소에는, 이름 그대로 소소한 생각과 취향과 가치를 나누며 느슨한 연대의 끈을 이어가고자 하는 스무 명 남짓한 청년들이 가입해 있다.
함양 청년 커뮤니티 ‘이소’의 첫 모임 사진.
이 모임을 처음 제안한 최학수 씨와 함께 이소 기획단을 함께 해나가는 민선 씨는 “다들 이런 자리와 만남에 목말라 있었기에” 단기간에 많은 청년이 모일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귀촌한 청년들이 부딪히는 큰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외로움’이고, 때론 그게 너무 지독해서 우울증을 앓기도 한다고.
“이소가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엄청 끈끈한 게 있어요. 서로를 굉장히 지지하고 응원한다는 느낌을 받죠. 비슷한 아픔을 겪었고, 그럼에도 떠나지 않고 남은 사람들이라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청년들 스스로 풀어가야 할 매듭이 있다면 ‘정책’을 통해야만 해결되는 문제도 있지 않을까. 함양에서 지내는 동안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끼고 생각해왔는지도 한마디 청해 들어본다.
“바깥에서 청년을 끌어오려고 하지 말고 함양군 스스로 알차졌으면 좋겠어요. 이미 들어와 정착하고자 애쓰는 청년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하고요. 또 이 지역과 청년에 어울리는 기업을 들이는 방안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부 다 창업을 할 수도, 아르바이트로만 살 수도 없으니까요.”
헛된 순간 없고 모든 경험이 소중해
철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자’는 좌우명을 지니고 살았다. 그러다 말이 지닌 무게를 실감한 뒤에는 조금 가볍게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자’로 바꾸었다. 그러고 보면 김민선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도” 스스로를 값지게 쓰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인 듯하다.
“여기 내려와 안 좋은 일을 겪을 때마다 그게 바보 같은 생각인가 되묻곤 하지만, 그래도 제가 옳다고 정한 방향과 마음은 계속 유지하고 싶어요.”
욕망을 따라 움직이기보다 내면에 힘이 차오를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야 하는 요즘 같은 시기엔 농사를 배우고 경험한 것이 도움이 된다. 땅속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 꽃 피어 열매 맺은 후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전 과정을 목격하면서, 그는 한순간도 헛된 건 없음을, 그 한순간을 위해 모든 존재가 협력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 경험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금’이 고맙고 소중해진다. 나를 찾아오는 모든 순간에 행복하지 않을 이유는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온전히 힘을 회복하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몰라도, 이제 민선 씨는 다음과 같이 결정하는 게 어렵지 않다.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언젠가 페이스북과 블로그에 썼듯이 이게 가장 ‘민선스럽’고 ‘민선다운’ 결정임을 그는 이미 알고 있다. 누구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때 가장 강해지는 법이니 그가 힘을 되찾을 날도 멀지 않았다.
도전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김민선은 어떤 순간에도 기꺼이 행복하기로 결정한다. 내일이 아닌 오늘, 다음이 아닌 지금 여기서.
글쓴 사람. 자야
나에게 기록이란, 먼저 다가가 말 걸고 온 마음을 기울여 듣고 나를 앞세우지 않고 쓰는 것. 올해는 이 어려운 일을 해보려 한다. 이런 나를 조금은 칭찬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