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꿈가방 메고 오늘도 공부길 나선다 글 / 팀 옥동 기역니은 한글 기초부터 시작해서 3년의 초등학교 과정까지. 올해 1월 초등학교 졸업 학력 인정을 받으신 어르신 중 한 분을 만났다. 악양 글벗학교 이순자 반장님. 오래된 옷 안 버리고 입는다며 입은 옷이 낡았다고 말씀하셨지만, 분홍스카프로 살짝 멋도 부리신 단정한 멋쟁이셨다. 차분하게 인터뷰를 해주셨는데 당신의 감정과 느낌, 의견까지 잘 표현하는 점이 돋보이셨다. 
정동마을의 이순자 반장님 인터뷰 시작 전, 할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점심은 혼자 챙겨 드시라 말씀하신다. 각자 자기 몸이 있다 보니께, 내 혼자면 어디든 간단히 다닐 수 있는데, 집에 영감님 계시는데, 연세가 있으셔서 깜빡하는 거 그게 와서. 건강하면 내 마음이 안정될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이 걱정이 많아요. 그렇다고 자기만 바라보고 있을 수도 없고. 친구들은 학교 가고 혼자 외로운 마음에 울기도 많이 했다는 어린 시절. 나이 칠십 넘고 무릎 아파서 잘 걷지도 못하게 됐을 때, 우연히 접하게 된 배움의 기회! 깊은 생각 끝에 더는 농촌 일 안 하겠다는 결단을 내리셨다고 한다. 평생을 해 온 농사일을 접는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할아버지를 보살피면서 자신을 위한 배움의 삶을 용기 내어 시작하신다. “그만 농촌 일을 안 해 72살부터.” 관절이 너무 안 좋아져서 수술해야 하나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내가 수술하러 들어가면 자녀들이 있어도 자기들도 애 키우고 살아야 하니 할아버지까지 맡게 할 수가 없었어요. 내 인생 얼마나 남았다고. 그래서 그만 농촌 일을 안 해 72살부터. 학교는 내 마을이니 생각을 깊게 해봤지. 일을 포기하니까 1주일에 2번 수업하니까 그래서 하겠다 해서 갔어요. 공부한 지 여기서는 3년 됐지만 정동마을에서 먼저 했어요. 3년 개근상도 받으시고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하는 분으로 소문난 이유가 있었다. 배움의 목적이 아주 뚜렷하시다. “내 삶에 앞으로 살아갈 그동안이라도 뭐라도 알고 가보자 하지요.” 우리가 둘 다 못 배웠어요. 둘 다 모르니까 공문이 나오면 이게 뭔가를 모르니까 무조건 면사무소 가서 물어봐야 해. 그리 사람들 도움을 받아야 해. 못 배워 놓으니 땅만 파고 일만 하고 살았어. 자녀 집에 한 번 갈라 해도 버스도 모르고 갈 수가 없잖아요. 글을 모르면 너무 힘들잖아요. 그래 공부를 잘하려고 결심을 했어요. 영감님도 녹내장 와서 이미 기회를 놓쳐서 공부도 못하고. 내라도 배워서 한가지라도 알아야 내가 중심을 잡아야지 되지. 결석도 많이 할 수 있었지만. 목적은 공부니까 그걸 잡아서 절룩거려도 웬만하면 다녀야지. 오면 한 자라도 익히고 가니까.
아픈 다리 때문에 고생도 했지만,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어 힘드셨다고. 근데 잘 이겨내서 지금까지 이르렀다고, 포기하지 않아서 참 잘한 일이라 말씀하신다. “공부를 쉬쉬하고, 가면 가고, 배우면 배우고 그러면 여기까지 못 왔을 텐데. 그걸 내가 이겨냈어.” 가방 메고 걸어갈 때 다리가 아파서 힘들었어요. 아이고 소리가 나와요. 내가 얼마나 살다가 죽을 거라고 남 보기도 저래갖고 배운다고 다니냐 하는 거 힘들었어요. 공부하는데 부락에서 이상한 소리 하는 분들이 있어. 공부해서 면장 할기고, 이장 할기고. 이런 소리 하니 너무 싫었어. 그러나 당신들 말을 듣고 내가 공부 아닌 거 아니고. 그리 다니다 보니 3년. 한 개라도 기초를 배우니 아! 이거는 내가 노력한 결실이구나. 내가 열심히 한 결과구나. 자랑스러운 거보다 자녀들이 상 받을 때마다 축하해준다고 그 소리에 힘을 얻어. 
이순자 반장님의 시 '가지와 오이' 가지와 오이 오이 가지를 심었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벌써 주렁주렁 많이 열렸네 나는 왜 배운 글이 내 머리 속에 많이 드러오지를 안해 공부를 해보니 작난이 아니구려 나의 삶에 공부가 꼭꼭 피료한데 왠지 머리 속에 잘 드러오지 안네 하지만 오이와 가지처럼 내 머리 속에도 꼭 주렁주렁 달려 있을 거야 내 나이 칠십두 살 정동학교 공부 시작했는데 두 분 선생님이 너무 열심히 가르쳐 주시니 너무 감사하니 열심히 배워서 내 생에 가야 할 좋은 길이 있다면 묻지 않고 가겠노라
13살의 어린 큰딸을 남의 집에 보내고, 눈물로 살아온 세월. 하지만 이제는 얼굴도 엄마를 똑 닮고, 주도적으로 배움의 길을 향해 나섬도 엄마를 똑 닮은 큰따님의 대학교 입학 이야기에 얼굴이 환해지신다.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지 밑에 동생들 젖먹이고 사는 시대인데, 밥을 못 먹으니 젖이 안 나와. 내가 배가 못 차니까 애기도 배를 못 채우고. 그리 사는 시대에 우리 딸아이를 부잣집에 가서 잘 살아라 했지. 엄마도 품팔이하고 아빠도 품팔이하니 아쉽기는 했지. “딸아이 보내고 가을에 남의 나락을 베는데 참 많이 울었어요.” 초등학교 졸업 마친 그해 7월에 남의 집에 보내고. 내가 그 어린 딸을 왜 보냈는가. 중학교 못 보내니까. 내 혼자 일하면서 얼마나 울었는가. 오줌 못 누는 그게 팍 와 버린기라. 보건소 내려와서 주사 맞고 다시 올라가서 일하고. 그렇게 마음이 그리 아픈 걸 그때 느꼈어요. 내 가슴에 멍이 들었지, 지금은 내처럼 학교, 대학교 다니고 있지만. 핸드폰을 건네주시면서 따님 사진을 한번 찾아보라 하신다. 두 분이 정말 많이 닮아서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옛날에 산 거 얘기하다 보니 딸 자랑도 하고 싶네. 자랑하면 안 되는데.” 평생 공부하는 학교에 입학했다고 입학 사진을 보내주대. 나같이 그런 공부를 해가니. 공부 못 시킨 게 마음이 지금 조금 낫습니다. 둘이 같이 걸어가면 남들이 빵떡이래요. 너무 많이 닮았다고. 딸은 하나지만 아들 열 못지않게 잘해요. 대화도 많이 하고 자기가 살기 바쁘니까 먹거리도 많이 사다 주고 부모에게 참 잘해요. 학교 다니시며 공부하고 시도 쓰고 상도 받으니 좋으시겠다고 말씀드리니, 학교 다니면서 웃을 수 있어 좋다고 하신다. “한동안 내가 우울증 앓았어.” 상을 받는 거보다 내가 나다니면서 전에 몰랐던 거. 예를 들어 학생들이 마냥 웃고 얘기도 하잖아. 들어앉아 살면서 몰랐던 거. 웃고 그런 거. 50대부터 병원에 가면 우울증이 나왔어. 이리 나다니다 보니까 만나면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다 보니 웃음도 나오잖아. 그 시간에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좋고. 왜 우울증이 왔을까 하니, 살다 보니께 먹을 건 없고 자식들은 제대로 못 배우고 그러다 보니 신랑과도 티격대고, 마음속에 그런 것들이 좀 많이 생각했나 봐. 요즘 이리 나다니다 보니 나만 이리 힘들게 살았는가 했는데 남들 얘기 들어보니 다들 힘든 고비를 넘겼구나. 그런 나 혼자 느껴지는 생각이 들어. 시인이라는 직함과 수상 경력도 눈길을 끈다. 2016년에‘가지와 오이’라는 시로 1박 2일 촬영도 하시고 표현 으뜸 시인상 트로피를 받으셨다. 2020년에는 전국에서 154명이 참가한 교육부 주최 성인 문해교육 시화전에서‘애터진다 코로나’로 최우수상 및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특별상을 수상한 방년 79세의 실력파 시인이시다. “시인까지는 그렇고. 공부하는 데서 쓰라 하면은 내가 몇 자 적지.” 상은 시인일 때 3번인가? ‘애터진다 코로나’로 시화전 그때 한꺼번에 상을 2개 받았어. 시는 써내기는 많이 했지. 공부하면서 써내기는 써도 독자적으로는 안 쓰고. 그런 거지. 
2020년 성인 문해교육 시화전 출품작 ‘애터진다 코로나’ 애터진다, 코로나! 스무 살에 시집와서 여덟 식구 사니라고 힘들고 숨찼는데 칠십 넘어 배우는데 코로나 뉴스에 더 힘들고 숨이 찬다. 허락 없이 와 놓고 가지를 않느냐 재난지원금 너 줄테니 어서 가라 속히 가라
앞으로 할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실까 여쭤보았다. 나고 자란 이곳에서 남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고 싶다는 어르신만의 소박한 바램을 들을 수 있었다. “만약에 할 사람이 없으면, 이장이라도 해서 봉사하는 거지.” 내가 배워서 뭘 하냐. 앞으론 노인네만 많이 살고. 남자분들도 많이 가시고. 내가 배우면은 부락에 이장을 해서 봉사라도 하고 싶어요. 이 나이에 내가 배워서 직장을 얻겠어요. 희망이 없는기라. 이장이라도, 중학교라도 나오면, 만약에 할 사람이 없으면 봉사하는 거지. "젊은 시절은 고생을 너무 해서 생각 안 해." 인터뷰가 끝날 때쯤 하신 말씀이다. 너무 힘들었기에 돌아보기도 싫었을 시절의 이야기였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된다. 그럼에도 당신이 살아온 삶을 함께 들여다볼 수 있게끔 하나하나 들려주셨음에 참 감사하다. 오늘도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고 꿈꾸며 도전하는 멋진 어르신, 아니 멋진 하동의 언니를 만나니 마음도 맑아진다. 좋다. |
오늘도 꿈가방 메고 오늘도 공부길 나선다
글 / 팀 옥동
기역니은 한글 기초부터 시작해서 3년의 초등학교 과정까지. 올해 1월 초등학교 졸업 학력 인정을 받으신 어르신 중 한 분을 만났다. 악양 글벗학교 이순자 반장님.
오래된 옷 안 버리고 입는다며 입은 옷이 낡았다고 말씀하셨지만, 분홍스카프로 살짝 멋도 부리신 단정한 멋쟁이셨다. 차분하게 인터뷰를 해주셨는데 당신의 감정과 느낌, 의견까지 잘 표현하는 점이 돋보이셨다.
정동마을의 이순자 반장님
인터뷰 시작 전, 할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점심은 혼자 챙겨 드시라 말씀하신다.
각자 자기 몸이 있다 보니께, 내 혼자면 어디든 간단히 다닐 수 있는데, 집에 영감님 계시는데, 연세가 있으셔서 깜빡하는 거 그게 와서. 건강하면 내 마음이 안정될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이 걱정이 많아요. 그렇다고 자기만 바라보고 있을 수도 없고.
친구들은 학교 가고 혼자 외로운 마음에 울기도 많이 했다는 어린 시절.
나이 칠십 넘고 무릎 아파서 잘 걷지도 못하게 됐을 때, 우연히 접하게 된 배움의 기회!
깊은 생각 끝에 더는 농촌 일 안 하겠다는 결단을 내리셨다고 한다. 평생을 해 온 농사일을 접는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할아버지를 보살피면서 자신을 위한 배움의 삶을 용기 내어 시작하신다.
“그만 농촌 일을 안 해 72살부터.”
관절이 너무 안 좋아져서 수술해야 하나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내가 수술하러 들어가면 자녀들이 있어도 자기들도 애 키우고 살아야 하니 할아버지까지 맡게 할 수가 없었어요. 내 인생 얼마나 남았다고. 그래서 그만 농촌 일을 안 해 72살부터. 학교는 내 마을이니 생각을 깊게 해봤지. 일을 포기하니까 1주일에 2번 수업하니까 그래서 하겠다 해서 갔어요. 공부한 지 여기서는 3년 됐지만 정동마을에서 먼저 했어요.
3년 개근상도 받으시고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하는 분으로 소문난 이유가 있었다. 배움의 목적이 아주 뚜렷하시다.
“내 삶에 앞으로 살아갈 그동안이라도 뭐라도 알고 가보자 하지요.”
우리가 둘 다 못 배웠어요. 둘 다 모르니까 공문이 나오면 이게 뭔가를 모르니까 무조건 면사무소 가서 물어봐야 해. 그리 사람들 도움을 받아야 해. 못 배워 놓으니 땅만 파고 일만 하고 살았어. 자녀 집에 한 번 갈라 해도 버스도 모르고 갈 수가 없잖아요. 글을 모르면 너무 힘들잖아요. 그래 공부를 잘하려고 결심을 했어요.
영감님도 녹내장 와서 이미 기회를 놓쳐서 공부도 못하고. 내라도 배워서 한가지라도 알아야 내가 중심을 잡아야지 되지. 결석도 많이 할 수 있었지만. 목적은 공부니까 그걸 잡아서 절룩거려도 웬만하면 다녀야지. 오면 한 자라도 익히고 가니까.
아픈 다리 때문에 고생도 했지만,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어 힘드셨다고. 근데 잘 이겨내서 지금까지 이르렀다고, 포기하지 않아서 참 잘한 일이라 말씀하신다.
“공부를 쉬쉬하고, 가면 가고, 배우면 배우고 그러면 여기까지 못 왔을 텐데.
그걸 내가 이겨냈어.”
가방 메고 걸어갈 때 다리가 아파서 힘들었어요. 아이고 소리가 나와요. 내가 얼마나 살다가 죽을 거라고 남 보기도 저래갖고 배운다고 다니냐 하는 거 힘들었어요. 공부하는데 부락에서 이상한 소리 하는 분들이 있어. 공부해서 면장 할기고, 이장 할기고. 이런 소리 하니 너무 싫었어.
그러나 당신들 말을 듣고 내가 공부 아닌 거 아니고. 그리 다니다 보니 3년. 한 개라도 기초를 배우니 아! 이거는 내가 노력한 결실이구나. 내가 열심히 한 결과구나. 자랑스러운 거보다 자녀들이 상 받을 때마다 축하해준다고 그 소리에 힘을 얻어.
이순자 반장님의 시 '가지와 오이'
13살의 어린 큰딸을 남의 집에 보내고, 눈물로 살아온 세월. 하지만 이제는 얼굴도 엄마를 똑 닮고, 주도적으로 배움의 길을 향해 나섬도 엄마를 똑 닮은 큰따님의 대학교 입학 이야기에 얼굴이 환해지신다.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지 밑에 동생들 젖먹이고 사는 시대인데, 밥을 못 먹으니 젖이 안 나와. 내가 배가 못 차니까 애기도 배를 못 채우고. 그리 사는 시대에 우리 딸아이를 부잣집에 가서 잘 살아라 했지. 엄마도 품팔이하고 아빠도 품팔이하니 아쉽기는 했지.
“딸아이 보내고 가을에 남의 나락을 베는데 참 많이 울었어요.”
초등학교 졸업 마친 그해 7월에 남의 집에 보내고. 내가 그 어린 딸을 왜 보냈는가. 중학교 못 보내니까. 내 혼자 일하면서 얼마나 울었는가. 오줌 못 누는 그게 팍 와 버린기라. 보건소 내려와서 주사 맞고 다시 올라가서 일하고. 그렇게 마음이 그리 아픈 걸 그때 느꼈어요. 내 가슴에 멍이 들었지, 지금은 내처럼 학교, 대학교 다니고 있지만.
핸드폰을 건네주시면서 따님 사진을 한번 찾아보라 하신다. 두 분이 정말 많이 닮아서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옛날에 산 거 얘기하다 보니 딸 자랑도 하고 싶네. 자랑하면 안 되는데.”
평생 공부하는 학교에 입학했다고 입학 사진을 보내주대. 나같이 그런 공부를 해가니. 공부 못 시킨 게 마음이 지금 조금 낫습니다. 둘이 같이 걸어가면 남들이 빵떡이래요. 너무 많이 닮았다고. 딸은 하나지만 아들 열 못지않게 잘해요. 대화도 많이 하고 자기가 살기 바쁘니까 먹거리도 많이 사다 주고 부모에게 참 잘해요.
학교 다니시며 공부하고 시도 쓰고 상도 받으니 좋으시겠다고 말씀드리니, 학교 다니면서 웃을 수 있어 좋다고 하신다.
“한동안 내가 우울증 앓았어.”
상을 받는 거보다 내가 나다니면서 전에 몰랐던 거. 예를 들어 학생들이 마냥 웃고 얘기도 하잖아. 들어앉아 살면서 몰랐던 거. 웃고 그런 거. 50대부터 병원에 가면 우울증이 나왔어. 이리 나다니다 보니까 만나면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다 보니 웃음도 나오잖아. 그 시간에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좋고.
왜 우울증이 왔을까 하니, 살다 보니께 먹을 건 없고 자식들은 제대로 못 배우고 그러다 보니 신랑과도 티격대고, 마음속에 그런 것들이 좀 많이 생각했나 봐. 요즘 이리 나다니다 보니 나만 이리 힘들게 살았는가 했는데 남들 얘기 들어보니 다들 힘든 고비를 넘겼구나. 그런 나 혼자 느껴지는 생각이 들어.
시인이라는 직함과 수상 경력도 눈길을 끈다. 2016년에‘가지와 오이’라는 시로 1박 2일 촬영도 하시고 표현 으뜸 시인상 트로피를 받으셨다. 2020년에는 전국에서 154명이 참가한 교육부 주최 성인 문해교육 시화전에서‘애터진다 코로나’로 최우수상 및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특별상을 수상한 방년 79세의 실력파 시인이시다.
“시인까지는 그렇고. 공부하는 데서 쓰라 하면은 내가 몇 자 적지.”
상은 시인일 때 3번인가? ‘애터진다 코로나’로 시화전 그때 한꺼번에 상을 2개 받았어. 시는 써내기는 많이 했지. 공부하면서 써내기는 써도 독자적으로는 안 쓰고. 그런 거지.
2020년 성인 문해교육 시화전 출품작 ‘애터진다 코로나’
앞으로 할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실까 여쭤보았다. 나고 자란 이곳에서 남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고 싶다는 어르신만의 소박한 바램을 들을 수 있었다.
“만약에 할 사람이 없으면, 이장이라도 해서 봉사하는 거지.”
내가 배워서 뭘 하냐. 앞으론 노인네만 많이 살고. 남자분들도 많이 가시고. 내가 배우면은 부락에 이장을 해서 봉사라도 하고 싶어요. 이 나이에 내가 배워서 직장을 얻겠어요. 희망이 없는기라. 이장이라도, 중학교라도 나오면, 만약에 할 사람이 없으면 봉사하는 거지.
"젊은 시절은 고생을 너무 해서 생각 안 해." 인터뷰가 끝날 때쯤 하신 말씀이다. 너무 힘들었기에 돌아보기도 싫었을 시절의 이야기였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된다. 그럼에도 당신이 살아온 삶을 함께 들여다볼 수 있게끔 하나하나 들려주셨음에 참 감사하다.
오늘도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고 꿈꾸며 도전하는 멋진 어르신, 아니 멋진 하동의 언니를 만나니 마음도 맑아진다. 좋다.
글쓴 사람. 팀 옥동
간소하고 간결한 삶을 지향하는 하동의 옥이. 호기심을 잃지 않고 늙고 싶은 하동의 동이.
두 사람이 천천히 걷고 때론 달리며 자주 멈춰서서 발견하는 하동의 작고 깊은 이야기를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