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썩 통신

[2022 (가을) 지리산 워크스테이] #5 군더더기 많은 나와 헤어질 결심

지리산이음
2022-11-02

 

순전히 ‘워크’만 하기 위해


며칠 동안 얼굴 보며 일할 장소가 필요했다. 울산에 계신 ‘형님’(프로그래머)과 서울에 사는 나는 단체 홈페이지 리뉴얼 작업도 마무리하고, 새로운 프로젝트 개발환경 세팅 등을 위해 만나야 했다. 그럴만한 장소와 시간을 찾던 중이었다.


지리산이음 뉴스레터에 워크스테이 프로그램 모집 공고가 떴다고 해서 바로 신청했다. 그야말로 ‘일’만 하려고. 고백하자면 프로그램의 의미나 상세 내용은 나중에야 봤다. 신청서를 워낙 짧고 건조하게 써서 우리팀 선정 가능성이 적어 보였다. 안 돼도 괜찮다고 쿨한 척 했지만 결과 발표에 내적 기쁨 폭발해 소리를 내지른 건 사실이다. 


숙소를 알아봐야했다. 주변 민박집을 찾던 중 동료 언니가 실상사에 계신 법인스님께 도움을 요청했고, 감사하게도 ‘화00’이라는 아주 특별한 장소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다. 그리고 실상사에서 공양도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다. 이상했다. 애쓰지도 않았는데 누군가의 좋은 뜻과 인연이 연결-연결되어 지리산으로 떠밀려 가는 기분이었다. 




업무 능률 높음


강변역 동서울터미널에서 오전 10시 30분에 출발하는 마천행 버스를 타고 지리산 실상사 앞에 도착한 건 오후 3시 즈음. 4시에 들썩으로 갔다.

  

사진 |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지리산백무동행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중간에 실상사 앞에서 내리면 된다. 



마당의 화단은 보통 정성으로 가꾼게 아니었고, 벽에 붙은 작은 안내판 하나 하나 예쁘고 섬세했다. 그러면서 여기 계신 분들은 어떤 분들일까 무척 궁금해졌다(하지만 아쉽게도 표현을 못했다). 첫날은 간단한 오티 후 안산에서 오신 다른 팀과 사무국분들과 저녁 식사하는 일정이었다. 낯선 곳에 온 긴장이 풀린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바로 앞 천에서 잡은 다슬기로 만든 뜨끈한 수제비 한 솥을 일곱명이 나눠먹으면서부터.


 

사진 | 예쁜 마당. 첫눈에 반했다.

 

사진 | 큰 솥으로 나온 다슬기 수제비. 색깔이 곱다.


이튿날부터 매일 아침 일찍 들썩에서 ‘워크’했다. 일하기에 완벽한 공간이었다. 주변 조용하지, 인터넷 잘 되지, 냉장고 싱크대 있고 커피 내려마시기 좋지, 화장실 깨끗하지, 조명도 아늑하지, 화상회의도 따로 할 수 있지, 시원한 폴딩 창문 너머로 지리산 천왕봉도 보이지. 계획했던 일은 다 했고 추가적인 일도 시작했다. 그렇다고 일만 한 건 아니다. 수요일엔 반나절 쉬면서 뱀사골 계곡까지 다녀왔으니 업무 능률 ‘매우 높음’이었다.



사진 | 들썩의 공유오피스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



나를 흔들어 놓은 ‘스테이’


손님으로 머문 ‘화00’에서 너무나 따뜻한 환대와 예상못한 경험을 했다. 참고로 그곳은 공동체 수행 공간으로 일반 숙소가 아니다. 들썩에서 개천 다리를 건너 이십여 분 산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대단히 영화같은 입소 이야기를 가진 분들이 공동체로 살고 계셨다. 군더더기 없는 삶. 바람, 비, 물, 햇볕의 신세를 지고 사는 겸허한 존재들 앞에 나는 부끄러웠다.

 


사진 | 아침 출근길



단순한 집에 머무르며 눈 코 귀도 열렸다. 뻥 뚫린 하늘, 빛나는 별, 찾으면 보이는 반딧불이, 사방으로 둘러싼 산자락, 나무 냄새, 풀벌레 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새의 날개짓, 고라니 울음소리, 내 발걸음과 숨소리만 들리던 길 … 저녁 9시면 누웠고 5시면 눈이 떠졌다. 기름기 없이 눈이 맑은 공동체분들과 마주 앉아 건강한 식사를 하는 것도 즐거웠다. 


그새 잡다한 식욕도 줄고 생태화장실도 익숙해졌는데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니… 이 좋은 걸 맛보았으니 이제 어쩌지. 서로 열매를 맺는(실實 상相) 공존 협력 나눔의 실천을 삶을 사는 분들이 한 마을에 이렇게 많다니. 여기는 좀 비현실적이라고 스님들 앞에서 헛소리까지 했다. 


마지막 날 형님은 ‘귀농인의 집’을 알아보셨다. 살아보지 않고는 모르니까, 우리 다시 오자고 약속했다. 그때는 가방을 좀 더 가볍게 해야겠다. 



-    끝




글쓴 사람. 별밤 (참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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