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썩 통신

[2022 (가을) 지리산 워크스테이] #2 지리산 워크스테이, 가슴으로 만나는 또 다른 사람의 공간

지리산이음
2022-11-02

 

지리산 산내면에 왔다. 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의 ‘워크스테이’를 신청했는데 받아 주었다. 일하는 장소를 지리산에 와서 활동하는 프로그램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기관 대표들은 잘 안 받는데 어쩌다가 비수기에 걸린 모양이다. 고마웠다. 이곳은 이번 해 두 번째 방문이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인구소멸지역 청소년정책에 대해서 연구 중인데 공동연구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사례 정리해 보려고 지역 분들 만나기 위해서 조 이사장님께 부탁했었다. 지리산 인근에 5개 권역에 청소년활동가분들 찾아뵙고 깊은 이야기도 나누었다. 지리산살롱에서 “청소년 공간이 지역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지역 분들 대상으로 강의도 했었다. 몇 달 전 인연이 이렇게 이어질 줄 몰랐다. 


첫날 오후, 산내면 도착해서 예약한 숙소를 찾아갔는데 산꼭대기에 있었고 길이 좋지 않았다. 내비게이션이 숙소를 다른 곳으로 알려 주어서 30여 분이나 후진해야 했다. 이놈의 기계가 길이 없는 곳으로 계속해서 나를 이끌었다. 몇 년 전 지리산에서 활동가들 세미나 마치고 폭우가 내리는 밤 운전하고 나오다가 진흙탕에 빠져서 고생한 일이 생각났다. 그때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했다. 차가 나뭇가지에 긁히건 말건 상관없었다. 숙소 사장님과 통화가 되었고 친절히 안내해 주셔서 무사히 찾아갔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첫날부터 가슴이 뛰다니.


저녁 일정을 센터 사무실에서 하려고 예약했는데 밤길이 너무 무섭고(?) 또 길을 못 찾을 것 같아서 나가지 못하고 숙소인 ‘순이네흙집’에서 노트북 켜고 끄적댔다. 숙소 사장님과 대화하다가 운영하는 연구소 막내 선생님의 이야기가 나왔고 딸이 친구라고 했다. 신기한 인간관계를 만났다. 하루가 빠르게 갔다.




또 다른 공간을 만났다


다음 날 아침부터 분주했다. 오전에 법인 진행하는 활동 때문에 TF 회의 진행했고, 점심 먹고 3시간여 충북 청소년지도자들 대상으로 정책협의회 및 역량 강화 교육이 있었다. 밤에는 길위의청년학교 연구회를 진행했다. 돌아보니 이날 모니터로 얼굴 보면서 만났던 이들은 서울, 경기, 충청 등에 거주하는 분들이다. 내가 사는 지역 분들은 모두 전화와 카카오톡으로 연락이 됐다. 단톡방 여러개는 알아서 돌아가고 있고 수시로 연락이 오는 전화의 건너편에 달그락과 길청 선생님들 목소리가 경쾌했다. 지리산 하늘을 잠시 보다가 여기가 내 사는 곳이 아님을 알게 됐다.


내일 밤은 미얀만 친구들을 위한 “삶을 위한 아카데미”가 진행된다. 그 일 때문에 후원하신 분들과 일정 상의하고 연락을 주고받다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사람이 존재하는 공간은 땅을 디디고 있는 발자국이 나는 곳만이 아님을 안다. 바로 가슴이 만나는 사람이 있는 곳이 내가 존재하는 곳이다. 거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기도 하다. 지리산에 있어도 가슴이 움직여 만나는 사람들은 서울에도 있고 군산과 미얀마에도 있다. 또 다른 공간에서 생각할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을 만난 느낌이다. 삶의 공간이 바뀌면 위치가 바뀌고 생각도 바뀔까? 삶의 공간은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곳일까? 그렇지 않을 거다. 시공간을 넘어서 자기 가슴이 움직이는 곳이 바로 자신이 존재하는 곳은 아닌지. 멍하게 이런 생각 하고 있는데 누군가 사무실로 들어온다. 호숫가 마을도서관 하는 최선웅 선생님이라고 인사하는데 오늘 지리산살롱에 강사로 초대되었다고. 이분 입에서 이전에 달그락에서 함께 일했던 준혁 선생님 이야기가 나오고 오래전 사회복지정보원에서 내 글을 읽었다고 했다. 반가웠는데 내 글을 읽었다고 하니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퇴근하고 밤에 숙소에 들어가면 스크립트를 써야 했다. 지리산까지 와서 몇 가지 일 처리하고 밤마다 이걸 써야 했다. 탄자니아 공무원들과 청소년 전문가들 대상으로 ‘청소년참여’에 대해서 강의를 의뢰받았다. 두어 시간 영상 강의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수락했는데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주관기관에서 번역 때문에 스크립트를 요청한 것. 어찌 됐건 일을 마쳤다. 그 순간 기분이 홀가분해진다. 이번 달은 시간이 정해진 기관 내 집중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생각이 조용해졌다


휴일이다. 현지인이 안내한 몇 곳을 다녀왔다. 휴게소에 차 놓고 노고단 올라가면 좋다고 했다. 산책할 곳을 안내해 달라고 했고, 괜찮은 코스라면서 천천히 다녀오라고 해서 갔는데 나에게는 등산이 되었다. 뱀사골 주변과 노고단 주변을 짧은 시간 산책하면서 또 다른 하늘을 만났다. 실상사에 생명·평화 글을 보면서 예전 생각에 괜히 울컥했고, 유성식당에 김치찌개 먹다가 “허기는 고기로 피로는 술로”라는 문장에 킥킥댔다. 역시나 산은 좋았다. 하늘 보면 온몸이 포근해진다. 지리산의 어떤 기를 만났는지 가슴이 너무 편안해졌다. 모르겠다. 왜 그러는지?


이곳에서 워크스테이 하면서 알게 됐다. 지역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과 이곳에서의 일의 차이는 한 가지가 달랐다. 이웃과 시민들 모임 진행과 직접적인 만남을 못 한다는 것, 그 외에 대부분의 일은 진행 되어 갔다. 공간이 바뀌니 생각이 조용해졌다. 조용해졌다는 표현이 맞다. 사무실 두 곳 오며 가며 선생님들 만나면서 관여하는 일이 잦은데 그것도 사라졌다. 온전히 그들이 전해 주는 이야기를 주제로 대화하는 나를 보게 된다. 마지막 날 11시가 다 되어 간다. 일정 살피다가 곧 10월이 된다는 것을 알고 기분이 좋아졌다. 앞으로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갈 일 때문인가? 아니었다. 일보다는 사람들이 먼저 보였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고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이 보이니 기분도 좋아졌다.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현장의 활동이 있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연구도 있다. 모두가 사람이 근본이다.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밤마다 강의 스크립트 쓰다가 마지막에 옮겨 놓은 주절거리는 레퍼토리가 그 밤에 기분과 딱 맞다.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아간다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겁니다. 상상해 보세요. 내일 출근해서 또는 학교에 가서 만나는 모든 이들이 나를 사랑해 준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해 보면 얼마나 가슴 벅찬 행복이 올라오는지.” 이 글 페북에 끄적여 놓고 사다 놓고 마실까 말까 고민한 막걸리를 꺼냈다. 두부는 마을에서 샀는데 따뜻한 물에 데웠고 편의점에서 산 두부김치 열고 혼자서 홀짝였다. 황토방 안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곳에서 막걸리 넘어가는 소리만 들린다. 




사람이 보였다


‘순이네흙집’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첫날 길 찾느라 애먹은 것은 머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사장님이 친동생 온 것처럼 너무 친절히 대해 주셨다. 비수기 밥도 안 해준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틀이나 아침, 저녁 식사를 정성스레 차려 주셨다. 더 해주고 싶었지만, 행사가 계속 있다고 했다. 면민 체육대회 한다면서 토요일 시간 되면 운동장에 점심 먹으러 오라고 하셨고 주먹밥 남았다면서 가져다주시기도 했다. 인터넷 되는 방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원래 예약했던 방에서 유일하게 인터넷 되는 큰 방을 쓰게 해 주셨다. 좋은 분 만나서 황토집에서 편안했다.


마지막 날 센터의 자유 선생님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센터장님과 선생님들 인사 나누었다. 역시나 하늘은 높았고 파랬다. 사람이 존재하는 공간은 눈에 보이는 곳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공간은 땅을 거점으로 하지 않는다. 대화하고 얼굴을 볼 수 있는 공간적 개념은 넘어선 지 오래다. 일하는 장소도 마찬가지다. 집이건 어디건 그 어느 공간에서라도 자신이 꿈꾸는 본질적인 일을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공간이 일터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사람은 그 어디에서나 연결되어 있고 행하는 모든 일은 그 연결의 강도와 굵기 지속성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내 앞에 50센티도 안 되는 곳에 앉아서 대화해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보다도 더 멀리 있을 수도 있다.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내 바로 앞에서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애틋한 관계도 있다. 일하는 공간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지리산에서 몸으로 경험한 며칠이었다. 


내가 존재하고 싶은 공간은 일하는 곳이 아닌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이 존재하는 곳과 연결이 되어 있는지가 관건이다. 이 바닥에서 활동가로 활동한다는 것은 그 공간에서 가슴으로 만나는 그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삶은 간다. 어떻게든 간다. 그 지나가는 곳에 길목 요소요소에 발을 디디고 있는 공간을 뛰어넘어 사람을 사람으로 만나는 또 다른 차원의 무수한 공간을 볼 뿐이다. 지리산에서 전국을 볼 수 있는 이유다.





글쓴 사람. 정건희 (청소년자치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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