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썩 통신

[2022 (봄) 지리산 워크스테이] #2-5 이거면 충분하지 않나?

지리산이음
2022-06-28


워크스테이 마지막 날, 이음의 담당자 자유는 우리에게 숙제를 주었다. 마무리 회고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사진 세 장을 골라오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깨달음이랄까 소감이 느린 사람이라 대충 뭉뚱그려 말할 수 있는 사진을 가져갔더랬다. 그래서 후기는 각잡고 고른 사진으로 각잡고 적어보려 한다. 글주변이 없어 잘 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1. 들썩(공간)에 대한 이야기


들썩의 야외 테이블에서 바라본 지리산 풍경



내게는 거의 포기한 것이나 다름 없는 꿈이 있다. 40대에 디지털 노마드가 되어 정원에 둘러싸인 집에서 일하는 것인데, 주거지에 대한 가치관이 짝꿍과 맞지 않아 그냥 내가 양보했다(물론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렇다보니 워크스테이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팀회의 안건에 올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신청서 옆에 지리산 사진을 띄워두고 염원하다시피 타자를 두드렸다.


그런 내가 최종 선정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했을까. 산내면에 도착한 월요일, 비 예보가 있던 날이라 산 위에는 물안개가 뽀얗게 껴 있었다. 그마저도 참 좋았다. 원체 낯가림이 심한 터라, 조금은 가리워진 산의 모습이 차라리 편했다. 과장을 보태보자면 산이 배려를 베풀고 있다는 기분도 들었다. 하여간 그만큼 좋았다.


사진은 날이 개기 시작한 수요일의 풍경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구름이 바람을 타고 흘러가는 것 처럼 보인다. 그 바람을 맞으며 일을 하고 있으면 사실 여러 방해를 받는다. 화단에 날아든 나비의 움직임이나 몰래 내 뒤를 지나가던 길고양이를 눈으로 쫓게 되기도 하고, 갑자기 들이친 뜨거운 햇살에 열이 오르기도, 빠르게 달려가는 하얀 소형트럭의 소리에 집중이 흐트러지기도 한다. 이것도 마냥 좋다. 이런 걸 바라고 온 거였다.




2. 마을에 대한 이야기


해질무렵 실상사의 단청



나는 철학으로써 불교를 좋아한다. 우리 인간도 그저 우주에 태어났다 사라지는 만물 중 하나에 불과하고, 그러니 너와 나와 세상 모든 존재가 별 다름이 없고, 그러니 마음 괴로워하며 애쓸 필요 없다는 가르침을 좋아한다(야매일지도…) ‘감당 못하겠다!’고 느낄 때 대충 이런 생각을 하면 차분해진다. 그리고 잠시동안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애틋해진다.


산내면은 굳이 이를 되새기지 않아도 사랑스럽게 보이는 곳이었다. 숙소 여여재를 나서면 바로 펼쳐지는 논의 풍경에서 자연을 존중하는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고, 사장님이 보리수와 블루베리를 따다 주었을 때는 사람을 존중하는 자연의 품을 느꼈다. 일하는데 옷에 붙은 이름 모를 벌레와, 다가오지는 않지만 가만히 앉아 사료를 기다리는 길고양이와, 가물어 바닥이 드러난 계곡의 줄기와, 알록달록 울타리 너머 아이들이 가로지르는 학교 운동장과, 집나간 아기오리를 찾는 안타깝지만 귀여운 전단에서도,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진 마을의 공기가 묻어났다.


산내면에서 하루를 보내다 보면, 실상사의 타종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시간이 있다. 아무리 일이 바빠도 머릿 속을 맴도는 듯한 그 소리가 들리면 절로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꼭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 제동을 거는 것 같기도 하고, 속세의 중생에게 너무 아등바등 하지 말라고 어떤 신호를 보내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다시금 실감할 수 있어,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수요일 즈음인가, 퇴근 후 같은 팀 닻별과 함께 실상사를 찾았다. 마침 7시가 타종 시간이라, 주변을 둘러보던 중에 몸 속까지 울리는 종소리를 생생하게 경험했다. 문득, 점점 퍼져 나가는 그 소리가 지리산의 등성이를 달려 산내면을 비잉 감싸는 상상을 했다. 산내면 사람들에게 지리산이 소중하듯, 지리산도 산내면을 소중히 하는구나 생각했다. 흠, 나는 너무 꿈 속에 사는걸까?




3. 나의 소감에 대한 이야기


실상사 안의 작은 대나무 숲에서 발견한 죽순(초점이 나가서 아쉽다)



같은 날, 태어나 죽순을 처음 보았다. 항상 식재료로 손질되어 있는 것만 봐서 신기했다. 무엇보다 땅을 깨고 오도카니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사진에서도 보이지만 말 그대로 땅을 ‘깨고’ 나와있었기 때문이다. 죽순은 땅 속에서 4~5년간 발달 과정을 거치고 나온다는데, 단단하고 도톰한 흙을 깰 만큼 꼼꼼히 준비했구나. 괜히 나와 비교되어 주눅들었다.


 “넌 너무 이상적이야.”


이런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신나는 노래(자자의 버스안에서) 속 가사와는 다르게, 내게 이런 말을 할 때의 사람들은 사뭇 진지했다. 맥락을 짚어보면 결국 내가 까탈스럽거나 뜬구름 잡는다는 이야기.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최근에 들어서야 이를 거름삼고, 스스로를 알아가고 있다. 덕분에 전보다 나를 긍정하게 되기는 했지만, 확신을 갖고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을 보면 초라함을 느끼곤 한다. 그렇다고 죽순에게까지 자격지심을 갖다니, 나란 사람….


그런데 집에 돌아와 사진들을 주욱 살펴보니, 워크스테이에서 나도 꽤 열심히 땅을 깨고 두드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나는 호기심은 많지만 극 I형에다 쉽게 불안해해서 환경의 변화나 새로운 도전에 덜컥 겁부터 먹는 사람인데, 워크스테이는 그런 나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일이 가득했다. 환경이야 내가 먼저 헐레벌떡 달려들었으니 아무렇지 않았다쳐도, 그 외에 것들은 내겐 모두 도전이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너무 사소한 것도 있어 부끄러우니 어떤 것들인지 특정하지는 않겠다).


내가 성장한 것일까, 아니면 그만큼 지리산이 편안했던 걸까? 답이 없는 질문인데다 크게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다. 즐거운 4박 5일이었고, 나는 또 나를 조금 배웠다. 자유, 소금, 꾸베, 그냥, 혜민, 울림, 미애…상냥한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닻별과는 돈독해졌다. 이거면 충분하지 않나? 자전거를 타고 즐겼던 지리산의 풍경과 바람이 벌써 그립다.


산 씀.



글쓴 사람. 산 (한국성폭력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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