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원사업명 2022 작은변화 공모지원사업 조사/콘텐츠 분야
2. 활동지역 남원
3. 활동가(단체)명 김양오
4. 선정사업명 소리보살 ‘이화중선’을 찾아서
5. 선정사업 계획 ※사업계획서 요약
남원 사람들이 잊고 있는 지역의 소중한 순간을 찾아내 의미를 되새기고 알리는 일들을 해오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대, 이화중선이라는 남원 권번 출신의 여성 소리꾼이 있었습니다. 판소리로 중생을 구제한다고 ‘소리보살’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그녀가 잊혀지기 전에 흩어져 있는 기억과 자료들을 한데 모아보고자 합니다.
6. 활동평가
자료 조사를 다음 두 가지 측면으로 진행했다.
- 이화중선을 중심으로 한 판소리 명창들과 후원자들에 관한 조사.
- 이화중선이 활동하던 일제강점기 수탈, 강제징용에 대한 조사와 현장 취재.
이화중선 개인의 삶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많지 않고 대부분 중복되어 큰 수확은 없었지만 일제강점기 민중의 위로자로서 국악인들의 역할, 국악인들을 지원해 주었던 분들의 존재, 조선성악연구회의 존재를 알게 되어 큰 수확이었다.
이화중선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만난 민중들의 고통스런 삶을 쓰기 위해 식민지역사박물관, 전쟁기념관, 일본 나가사키, 후쿠오카 징용 현장, 군함도, 이화중선이 사망한 오무라만을 답사했고 쌀 수탈의 최전선이었던 군산내항을 답사했다. 현장을 답사하고 조사하면서 수탈과 강제동원의 고통을 훨씬 크게 느낄 수 있었고 작품에 반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역사동화 ‘소리 보살의 판소리 여행’이 완성되어 발간되면 청소년들에게 좋은 교육 자료가 될 것이고 남원과 전라도, 국악계에도 의미있는 책이 될 것이다.

이화중선은 일제강점기 최고의 여류명창이었다. 레코드 음반을 160장이나 냈다.
당시 최고 명창이었던 송만갑, 임방울보다 월등하게 많은 숫자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음반을 들을 수 있다. 소리 보살이라고 부를 정도로 판소리로 민중들을 울리고 웃기며 크나큰 위안을 주었던 소리꾼. 작년 11월 그 분의 넋이 내게로 와 나는 두번째 책 <백 년 동안 핀 꽃>의 주인공 최봉선을 떠나보냄과 동시에 이화중선의 넋을 맞이해야 했다.
남원 권번에 이름을 올렸으니 기생이었으며 소리꾼이었던 이화중선. 나는 지난 1년동안 그분의 삶을 추적했고 그분과 함께 활동했던 동시대 소리꾼들의 자료를 긁어모았다. 그리고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그 바닷가를 찾아 무작정 떠났다. 징용 끌려간 조선 동포들 위문 공연하러 떠났던 일본 나가사키. 풍랑으로 배가 뒤집혀 나가사키 앞바다에서 1944년 1월 1일 사망. 그 날짜가 내겐 너무나 가슴 아프게 다가왔더랬다.
이화중선이 두번이나 위문 공연을 갔던 일본. 나가사키와 후쿠오카 징용 현장을 찾아 보았다.
내 책 <도자기에 핀 눈물꽃> 과 <꿈과 마음이 담긴 집 몽심재>에 그림을 그린 김영혜 작가와 함께 했다. 이번에도 같이 작업했다.

후쿠오카 미이케 탄광. 세계문화유산에 포함되는 탄광이다. 노동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옷을 벗기고 족쇄를 채우기도 했다는 현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설명판에 조선인들이 일했다는 얘기는 전혀 없다. 후쿠오카 지역에만도 9000여명의 조선인들이 끌려와 일을 했고 수백명이 죽었지만 그들은 아무 것도 기록하지도 사죄하지도 않았다.

후쿠오카의 작은 도시 우모타시 시골 마을 공동묘지 동산 위에 세워진 이 비석은 재일동포 한분의 끈질긴 노력으로 세운 것이다. 미쓰비시 3개 회사와 지자체를 250번이나 찾아가 싸우고 설득한 결과라고 한다. 지자체는 땅을 무상으로 제공했고 미쓰비시 3개 회사는 비석 제작 비용을 댔으며 제막식 때 국회의원부터 회사 관계자 시민들이 대거 참여,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강제 징용을 인정한 행사가 되었다. 전주 출신 재일교포 우판근 선생님의 공을 잊지 않아야 한다. 한국에서 가지고 간 포와 소주로 제를 올렸다.

이화중선 명창이 돌아가신 바닷가. 이번 기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지다. 옛 지명은 나가사키현 동피저군 강상촌 적자시 앞바다. 나가사키 공연을 끝내고 저 곳에서 보이는 섬 중에 한 곳에 들어가 숙박을 하려고 배를 탔다가 풍랑에 배가 뒤집혀 함께 탔던 6명 모두 사망했다고 한다. 이화중선의 유해는 화장해서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도로가 확장될 때 무연고 묘지라고 하여 없앴다고 한다. 자손이 없었고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의 명성도 이름 석자 조차도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어진 것이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작은 섬이 있다. 그곳인가?
한국에서 준비해 간 포와 소주로 제를 올리고 '이화중선'을 쓰기 위해 4월부터 열심히 배운 판소리. 쑥대머리와 아리랑을 불러 드렸다. 평생 남을 위로하는 소리만 하며 살았으나 정작 본인은 아무한테도 위로받지 못했고 지금은 무덤마저 사라져버린 가련한 분. 내 미천한 소리가 그분의 영혼께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기를 바란다.

다음 여정은 군함도다. 징용현장 중에 가장 중요한 곳. 나가사키항에서 2층짜리 여객선을 타고 30분 쯤 가야 한다. 바다 한가운데 정말 커다란 군함처럼 떠 있는 섬. 어찌 섬이 저렇게 생겼을까 의아한 곳. 나중에 간 군함도 영상 박물관에서 본 군함도 변천사 사진을 보면 군함도가 처음부터 저렇게 생기지는 않았다. 그냥 평범한 산처럼 생긴 섬이었는데 메이지 유신 때 하나하나 건물이 들어오고 탄광이 개발되면서 저렇게 자연의 모습은 90%가 없어지고 고층 아파트와 외벽때문에 군함 모양이 된 것이다. 눈에 보이는 군함도는 빙산의 일각이다. 지하에 어마어마한 탄광이 있기 때문이다. 깊이 606미터까지 들어가고 바닷속에 있는 면적도 매우 넓다. 그 탄광에서 캐낸 석탄이 모두 군수산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가장 험한 곳에서 일을 한 사람들이 바로 조선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전혀 기록하지도 않은 채 군함도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렸다. 군함도에서 해설해 주는 사람은 남자 노인이다. 차분한 목소리로 미소를 지으며 잘 나가던 군함도 사진을 보여주면서 해설을 하고 일본 관광객(우리 둘 빼고 모두)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박수를 쳤다. 일본말을 거의 못 알아듣지만 코리아, 조선 이런 단어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

나가사키항으로 나와서 버스 타고 20분정도 달려가 군함도 영상 박물관도 갔다. 입장료가 비싼 편이지만 어떻게 홍보하나 가 본 것. 입구에 군함도 캐릭터 인형부터 다양한 개릭터 상품들을 팔고 있었고 2,3층에는 군함도 아파트 내부도 재현해 놓고 사진과 영상으로 많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 강제징용관련 자료는 없다. 조선인 500~800여 명이 군함도로 끌려왔다(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의 추정치) 그중 1925년-1945년 사이 군함도 하시마 탄광에서 사망한 한국인과 중국인 136명. 그 이후에 후유증으로 죽거나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훨씬 더 많다.
일본에 갔다 와서 바로 군산 내항을 찾아갔다. 조선의 엄청난 쌀이 군산내항의 뜬부두에서 수천톤급 일본 기선에 실려 일본으로 간 현장을 보기 위해서다. 뜬부두는 서해안의 밀물과 썰물에도 지장을 받지 않고 큰 배를 댈 수 있게 만든 물에 떠 있는 콘크리트 다리다. 모두 6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3개만 남아 있다. 항구 안쪽에는 전국에서 기차에 싣고 온 쌀들이 모였던 그 철길이 그대로 남아 있다. 군산항에는 가마니에 담긴 쌀이 정말 산더미처럼 쌓아 있었다. 그런 사진들은 식민지 역사박물관에 가면 많다. 그 많은 쌀 중에 조선인들에게 가는 쌀은 10퍼센트나 됐을까? 당시 사람들은 농사는 훨씬 더 많이 짓고 바닷가 간척해서 농지 만들고 저수지까지 만들면서 고생했지만 더 혹독하게 굶주렸다. 모두 빼앗겼기 때문이다.
이런 수탈의 역사를 이번 동화에 다 담을 것이다.
글 | 김양오
Ⅰ. ‘소리 보살 이화중선의 판소리 여행’ 작품 기획서
Ⅱ. 이 책을 쓰게 된 계기
Ⅲ. 책의 구성
Ⅳ. 이화중선은 누구인가?
Ⅴ. 이화중선 소리에 대한 당시의 평가
Ⅵ. 이화중선이 참여한 ‘조선성악연구회’
Ⅶ. 참고 문헌
Ⅷ. 작품에 등장할 일제강점기 시,공간 배경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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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원사업명 2022 작은변화 공모지원사업 조사/콘텐츠 분야
2. 활동지역 남원
3. 활동가(단체)명 김양오
4. 선정사업명 소리보살 ‘이화중선’을 찾아서
5. 선정사업 계획 ※사업계획서 요약
남원 사람들이 잊고 있는 지역의 소중한 순간을 찾아내 의미를 되새기고 알리는 일들을 해오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대, 이화중선이라는 남원 권번 출신의 여성 소리꾼이 있었습니다. 판소리로 중생을 구제한다고 ‘소리보살’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그녀가 잊혀지기 전에 흩어져 있는 기억과 자료들을 한데 모아보고자 합니다.
6. 활동평가
자료 조사를 다음 두 가지 측면으로 진행했다.
이화중선 개인의 삶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많지 않고 대부분 중복되어 큰 수확은 없었지만 일제강점기 민중의 위로자로서 국악인들의 역할, 국악인들을 지원해 주었던 분들의 존재, 조선성악연구회의 존재를 알게 되어 큰 수확이었다.
이화중선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만난 민중들의 고통스런 삶을 쓰기 위해 식민지역사박물관, 전쟁기념관, 일본 나가사키, 후쿠오카 징용 현장, 군함도, 이화중선이 사망한 오무라만을 답사했고 쌀 수탈의 최전선이었던 군산내항을 답사했다. 현장을 답사하고 조사하면서 수탈과 강제동원의 고통을 훨씬 크게 느낄 수 있었고 작품에 반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역사동화 ‘소리 보살의 판소리 여행’이 완성되어 발간되면 청소년들에게 좋은 교육 자료가 될 것이고 남원과 전라도, 국악계에도 의미있는 책이 될 것이다.
이화중선은 일제강점기 최고의 여류명창이었다. 레코드 음반을 160장이나 냈다.
당시 최고 명창이었던 송만갑, 임방울보다 월등하게 많은 숫자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음반을 들을 수 있다. 소리 보살이라고 부를 정도로 판소리로 민중들을 울리고 웃기며 크나큰 위안을 주었던 소리꾼. 작년 11월 그 분의 넋이 내게로 와 나는 두번째 책 <백 년 동안 핀 꽃>의 주인공 최봉선을 떠나보냄과 동시에 이화중선의 넋을 맞이해야 했다.
남원 권번에 이름을 올렸으니 기생이었으며 소리꾼이었던 이화중선. 나는 지난 1년동안 그분의 삶을 추적했고 그분과 함께 활동했던 동시대 소리꾼들의 자료를 긁어모았다. 그리고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그 바닷가를 찾아 무작정 떠났다. 징용 끌려간 조선 동포들 위문 공연하러 떠났던 일본 나가사키. 풍랑으로 배가 뒤집혀 나가사키 앞바다에서 1944년 1월 1일 사망. 그 날짜가 내겐 너무나 가슴 아프게 다가왔더랬다.
이화중선이 두번이나 위문 공연을 갔던 일본. 나가사키와 후쿠오카 징용 현장을 찾아 보았다.
내 책 <도자기에 핀 눈물꽃> 과 <꿈과 마음이 담긴 집 몽심재>에 그림을 그린 김영혜 작가와 함께 했다. 이번에도 같이 작업했다.
후쿠오카 미이케 탄광. 세계문화유산에 포함되는 탄광이다. 노동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옷을 벗기고 족쇄를 채우기도 했다는 현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설명판에 조선인들이 일했다는 얘기는 전혀 없다. 후쿠오카 지역에만도 9000여명의 조선인들이 끌려와 일을 했고 수백명이 죽었지만 그들은 아무 것도 기록하지도 사죄하지도 않았다.
후쿠오카의 작은 도시 우모타시 시골 마을 공동묘지 동산 위에 세워진 이 비석은 재일동포 한분의 끈질긴 노력으로 세운 것이다. 미쓰비시 3개 회사와 지자체를 250번이나 찾아가 싸우고 설득한 결과라고 한다. 지자체는 땅을 무상으로 제공했고 미쓰비시 3개 회사는 비석 제작 비용을 댔으며 제막식 때 국회의원부터 회사 관계자 시민들이 대거 참여,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강제 징용을 인정한 행사가 되었다. 전주 출신 재일교포 우판근 선생님의 공을 잊지 않아야 한다. 한국에서 가지고 간 포와 소주로 제를 올렸다.
이화중선 명창이 돌아가신 바닷가. 이번 기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지다. 옛 지명은 나가사키현 동피저군 강상촌 적자시 앞바다. 나가사키 공연을 끝내고 저 곳에서 보이는 섬 중에 한 곳에 들어가 숙박을 하려고 배를 탔다가 풍랑에 배가 뒤집혀 함께 탔던 6명 모두 사망했다고 한다. 이화중선의 유해는 화장해서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도로가 확장될 때 무연고 묘지라고 하여 없앴다고 한다. 자손이 없었고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의 명성도 이름 석자 조차도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어진 것이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작은 섬이 있다. 그곳인가?
한국에서 준비해 간 포와 소주로 제를 올리고 '이화중선'을 쓰기 위해 4월부터 열심히 배운 판소리. 쑥대머리와 아리랑을 불러 드렸다. 평생 남을 위로하는 소리만 하며 살았으나 정작 본인은 아무한테도 위로받지 못했고 지금은 무덤마저 사라져버린 가련한 분. 내 미천한 소리가 그분의 영혼께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기를 바란다.
다음 여정은 군함도다. 징용현장 중에 가장 중요한 곳. 나가사키항에서 2층짜리 여객선을 타고 30분 쯤 가야 한다. 바다 한가운데 정말 커다란 군함처럼 떠 있는 섬. 어찌 섬이 저렇게 생겼을까 의아한 곳. 나중에 간 군함도 영상 박물관에서 본 군함도 변천사 사진을 보면 군함도가 처음부터 저렇게 생기지는 않았다. 그냥 평범한 산처럼 생긴 섬이었는데 메이지 유신 때 하나하나 건물이 들어오고 탄광이 개발되면서 저렇게 자연의 모습은 90%가 없어지고 고층 아파트와 외벽때문에 군함 모양이 된 것이다. 눈에 보이는 군함도는 빙산의 일각이다. 지하에 어마어마한 탄광이 있기 때문이다. 깊이 606미터까지 들어가고 바닷속에 있는 면적도 매우 넓다. 그 탄광에서 캐낸 석탄이 모두 군수산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가장 험한 곳에서 일을 한 사람들이 바로 조선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전혀 기록하지도 않은 채 군함도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렸다. 군함도에서 해설해 주는 사람은 남자 노인이다. 차분한 목소리로 미소를 지으며 잘 나가던 군함도 사진을 보여주면서 해설을 하고 일본 관광객(우리 둘 빼고 모두)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박수를 쳤다. 일본말을 거의 못 알아듣지만 코리아, 조선 이런 단어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
나가사키항으로 나와서 버스 타고 20분정도 달려가 군함도 영상 박물관도 갔다. 입장료가 비싼 편이지만 어떻게 홍보하나 가 본 것. 입구에 군함도 캐릭터 인형부터 다양한 개릭터 상품들을 팔고 있었고 2,3층에는 군함도 아파트 내부도 재현해 놓고 사진과 영상으로 많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 강제징용관련 자료는 없다. 조선인 500~800여 명이 군함도로 끌려왔다(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의 추정치) 그중 1925년-1945년 사이 군함도 하시마 탄광에서 사망한 한국인과 중국인 136명. 그 이후에 후유증으로 죽거나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훨씬 더 많다.
일본에 갔다 와서 바로 군산 내항을 찾아갔다. 조선의 엄청난 쌀이 군산내항의 뜬부두에서 수천톤급 일본 기선에 실려 일본으로 간 현장을 보기 위해서다. 뜬부두는 서해안의 밀물과 썰물에도 지장을 받지 않고 큰 배를 댈 수 있게 만든 물에 떠 있는 콘크리트 다리다. 모두 6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3개만 남아 있다. 항구 안쪽에는 전국에서 기차에 싣고 온 쌀들이 모였던 그 철길이 그대로 남아 있다. 군산항에는 가마니에 담긴 쌀이 정말 산더미처럼 쌓아 있었다. 그런 사진들은 식민지 역사박물관에 가면 많다. 그 많은 쌀 중에 조선인들에게 가는 쌀은 10퍼센트나 됐을까? 당시 사람들은 농사는 훨씬 더 많이 짓고 바닷가 간척해서 농지 만들고 저수지까지 만들면서 고생했지만 더 혹독하게 굶주렸다. 모두 빼앗겼기 때문이다.
이런 수탈의 역사를 이번 동화에 다 담을 것이다.
글 | 김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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