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이 가는 길에 질문이 온다, “탈핵이 뭐예요?”
: 탈핵 비움 실천가 청명 인터뷰
진행 / 자유
글 / 푸른
걷기를 예찬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걸음으로써 다른 리듬 속에 몸담고 시간, 공간, 타자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했다. 걷기는 세계 속에 자신의 자리를 회복하고, 자신의 저력에 대한 믿음을 되찾는 과정이라고.
스스로 ‘탈핵 비움 실천가’라 소개하는 청명은 이 ‘걷기’라는 가장 소박하지만 가장 저력 있는 방법으로 세상을 만난다. 2016년부터 탈핵 메시지를 담은 몸자보를 두르고 방방곡곡 누비는 활동가 청명.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청명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사계절 옷이며 생필품을 모두 담은 36리터 배낭이 그의 살림 전부지만, 그의 삶은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는 보부상의 요술 보따리 같다. 산내에서 청명을 만나 그의 삶과 실천, 바람에 대해 조금이나마 들어볼 수 있었다.

인터뷰 현장에서 만난 청명과 푸른 (사진 : 자유)
별빛 같은 어린 시절
“원래 고향은 충북 괴산이에요. 괴산군 청안면 효근리, 거기서도 외딴 저 꼭대기로 올라가야 되는 그런 집에서 살았어요. 어려운 환경이었었죠.”
먹을 것도 풍족하지 않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때 호롱불을 켜고 살았지만, 가난하다는 체감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압도한 것은 아니었다. 작은 창틈으로 쏟아지는 별빛, 밭에 나가 담배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농사를 기록하는 심부름, 누에 옆에 자면서 누에 크는 것을 관찰하던 것, 공책과 연필을 받으려고 달리기 1등을 놓치지 않던 일, 학교 마치면 집에 돌아와 풀 베고 소죽을 끓여 먹이던 일상은 더없이 행복한 추억으로 남았다.
“불빛이라는 게 없었어요. 그런 어둠에 수없이 쏟아지는 별이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조그만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그 별빛이 너무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때로는 듬성듬성 구름이 가는 길에 껴주듯이 뜬 별이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너무 많아서 이 별이 어둠을 막 몰아내는 것 같더라고요. 그 별을 바라본 기억을 잊을 수 없어요. … 힘들었던 것도 견딘 것보다는 사실 제게 좋은 추억이었죠.”
중학생 청명은 학교에서 빌려주는 <쿼바디스>, <노인과 바다>, <폭풍의 언덕> 같은 고전에 푹 빠졌다. 교과서가 아닌 책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흥분과 설렘으로 가득 찬 시절을 보냈다. 집에서는 날마다 농사와 집안일 심부름하느라 책볼 짬도 나지 않았기에, 학교만 가면 열심히 책을 파고들었다.

새만금신공항 기본계획 취소판결을 촉구하는 '새, 사람 행진단' 순례 현장 (사진 제공 : 청명)
공순이가 아니라 장.미.영!
청명은 농부를 꿈꿨지만, 엄마는 ‘엄마처럼 살지말고, 도시로 나가 돈을 벌라’며 말렸다. 결국 청주에 있는 산업체 고등학교인 양백여자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7~80년대에는 주로 방직공장 내에 ‘산업체 부설학교’라는 것이 활발히 설립됐다. 육성회비 같은 것이 없어 돈 걱정을 덜 수 있고, 고등학교 학력도 따면서 공장 근무를 통해서 돈을 벌 수도 있었다.
“학교는 안 보내준다고 하는데 그러면 산업체 학교라도 가자 싶었죠. 집에서 나가 살면서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누군지 찾아가기 시작했어요. 날 장미영이라고 안 하고 ‘공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부른 애들은 대부분 대학생 남성이었어요. 남성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산업체로 와서 바로 주임을 따요. 여성들은 흔히 대학을 가던 시절이 아니니까, 여성 노동자들을 ‘공순이’라고 막 부르는 거죠. 그전에는 제 이름이 소중한 줄 몰랐는데, 공순이라 부르지 말라고 엄청나게 싸웠어요.”
학교 수업을 들으면서 하루 8시간을 근무하고, 수시로 4시간 가까이 잔업을 해야 했다. 때로는 학교 가는 시간을 빼서 잔업을 하기도 했다. 부푼 꿈을 안고 들어간 학교에서 하고 싶었던 공부는커녕, 밤낮으로 생산량에 매달려야 하는 생활이 너무 갑갑했다.
“1학년 때 첫 달은 제가 월급으로 받은 돈도 찢어버렸어요. 돈이 되게 귀한 시기였잖아요. 근데도 그런 구조와 생활이 너무 싫어서 돈을 다 찢어버리고 박차고 나갔어요. 공부를 너무 하고 싶었는데, 이 ‘돈’ 때문에 내가 학교에 왔구나 싶었어요. 박차고 나왔지만, 막상 갈 곳이 없어 또 돌아갔죠. 다음 날 출근을 했더니, 반장 언니가 제가 찢은 돈을 다 붙여놨다 주더라고요.”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풍부한 감수성, 타오르는 지적 호기심과 부조리한 사회에 저항하는 태도, 인간의 존엄에 대해 끊임없이 캐묻는 자세. 청명이 타고난 기질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소설 <빨강머리 앤> 주인공 앤 셜리가 떠올랐다. 10대 청명도 주어진 환경에 불만을 품거나 좌절하기보다, 그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으면서, 더 넓은 세상으로 달려 나가는 꿈을 키웠다.
“뭔가 사회가 부조리했어요. 부모님은 열심히 일을 하는데, 하는 것마다 안 되고, 가족의 구조도, 남녀의 구조나 일하는 구조도 이상했어요. 그리고 엄마는 맨날 자식들 못 먹여서 슬퍼하는 거예요. 제가 학교에 있을 때, 엄마가 왔어요. 근데 엄마 손등이 막 갈라진 거예요. 찬물로 빨래하고 그랬을 때니까요. 그런 손으로 돈을 좀 달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때 한 달에 12만 원 벌 때였거든요. 엄마한테 그 돈을 주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가난했었구나.’ 비로소 그때 알았어요.”
2학년 때부터는 학교에 다니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이 일에 반드시 참여해 구조에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라는 마음이 생겼다. 87년에는 산업체 부설학교의 열악한 노동 조건과 면학 환경 등에 대한 문제를 고발하는 데모가 일어났다. 청명도 실을 끊고 정문으로 나갔다. 데모에 나갔다는 이유로 현장(근무) 점수가 0점으로 처리되기도 했다.
고2에 만난 선생님 한 분은 청명을 분노에서 실천으로 한 발짝 나아가도록 등을 밀어주셨다. 반항기가 심했던 시절, 청명의 기질을 억누르기보다 다독이고 북돋워 주며 학교를 끝까지 마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청명은 그 시기에 처음으로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게 우리 잘못이 아니라’라는 메시지를 접했다고 기억한다.
“그 선생님처럼 자꾸 나를 살리려는 도움의 손길들이 있었어요. 이 학교가 개신교 학교였어요. 그래서 나를 위해서 울면서 기도하길래 반항심 많은 저는 ‘기도를 멈춰라. 나를 위해서 기도하지 마라. 신이 있다면 이렇게 살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그랬어요. 저는 불합리한 일들, 사람을 막 대하는 일이 너무 싫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명은 같은 회사에 사무직으로 취직했다. 거기서도 역시나 남성 직원들의 커피를 타야 한다거나, 고분고분하게 굴어야 하는 등의 또 다른 차별이 있었다.
“커피, 프림, 설탕 통을 다 세팅해놨어요. 알아서 마시라고. 그리고 커피 타는 일에 나는 손을 뗐죠. 그들이 이걸 시키는 게 왜 나쁜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당시에는 페미니즘을 몰랐죠.”
부조리한 사회의 면면을 ‘세상은 원래 그렇잖아.’하면서 넘기지 않고,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좀 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멈춰 묻는 사람들 덕분에 세상이 조금씩 좋은 쪽으로 옮겨간다고 믿는다. 청명은 그렇게 묻기를 쉬지 않는 사람이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난이 너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라에서는 가난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우리 시골도 ‘이제 잘 살아야 된다’는 말을 너무 많이 쓰는 거예요. 도대체 지금 사는 게 뭐가 그렇게 못 산다고 그렇게 표현을 할까 싶었어요. 가난은 그냥 겪는 것일 뿐인데, 가난은 나쁘고, 가난을 벗어나서 부자만을 쫓아야 하는 것처럼 사회가 생각을 심어준다는 생각이 들었죠.”
좌절의 30대, 세월호가 연 길
그런 청명에게 깊은 시련이 찾아온 건, 30대에 들어섰을 무렵이다.
“스물한 살 때인가부터 노동운동을 했어요. 평등한 사회를 위해서라면 이 한목숨 다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허탈하더라고요. 죽기 살기로 싸웠는데 그런 세상이 오지 않으니까요. 좌절감에 빠져서 더이상 살아갈 의욕이 안 났어요.”
하지만 절망할 틈도 없이 삶이 굴러갔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생계를 위해 더욱더 자본주의 시스템에 발맞출 수밖에 없었다. 아스팔트 틈을 비집고 살아내는 풀처럼, 청명은 열심히 버티고 살아냈다. 공부를 하고, 언어치료사로 일했다.
“제가 지금까지 언어 치료사로 25년을 일했더라고요. 언어 치료 일하는 것도 굉장히 좋아했어요. 아이마다 다 사례가 다른데, 그 원인을 찾고 어떻게 접근할지 연구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무엇을 하든 ‘돈 계산’이 순수한 기쁨을 방해하는 것 같아 마음 한편은 편치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낸 덕분에 내 집이 생겼고, 빚도 갚았다. 역시, 여전히 청명은 팍팍한 환경에서도 ‘기쁨’을 발굴하고 있었다.
“죽을 생각을 했던 제가, 그 생각을 멈춘 게 세월호 때예요. 노동운동이나 활동을 전혀 하지 않고, 언어치료 일과 공부만 집중했던 시기였어요. 근데 세월호 사고를 보면서 이 사회의 기본이 무너졌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거예요. 다시 사회로 나가서 목소리를 내야겠구나 생각했죠.”

산을 탈 때에도 제2의 살갗이 된 몸자보와 함께한다. (사진 : 넉넉)
순례는 내 운명, 순례는 내 운동
청명이 살아온 발자국 따라, 자연스럽게 순례 이야기로 넘어갔다. 세월호 진실을 알리는 순례가 그녀의 첫 순례였다. 인생의 두 번째 순례는 딸에게서 이어받은 거였다.
2016년, 청명의 딸은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 현장에서 연대하며 탈핵 공부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세월호, 경주 지진 같은 연이은 재난과 오랜 투쟁 현장에 몸담으며 딸이 지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청명은 “이제 엄마가 나갈 테니, 넌 좀 쉬어라.” 하며 탈핵을 알리는 순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순례에 참여하는 방식이었다가, 혼자서도 순례를 떠나기 시작했다. 눈뜨면 몸자보를 메고 일단 집을 나섰다. 가까운 곳을 걸어 다니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멀리 나갈 때도 있었다. 거의 10년째 순례를 이어오면서 순례는 청명이 운동하는 방식이자, 일상 그 자체로 자리 잡았다. 주 4일 근무라면, 주 3일은 순례하는 식이었다.
“지난달에는 속초의 어느 홈리스 공간에 밥 봉사를 갔어요. 거기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제 몸에 붙은 몸자보를 보고 ‘어디쯤 걷고 있어요?’, ‘뭐 하는 사람이에요?’ 이런 걸 물어보시거든요. 제가 먼저 ‘탈핵하세요!’ 하지 않아도, 먼저 질문이 오는 게 좋더라고요.”
목소리 높이지 않아도, 강요하지 않아도, 예상치 못한 타인들과의 대화가 트이는 경험이 좋았다. 심지어 탈핵을 주제로 질문을 걸어오니, 청명은 “운동은 멀리 있지 않았다. 내가 나타나는 것이 운동”이었다고 말한다.
“보통 이런 사회운동을 하면, 그 사람들끼리 만나는 경우가 많은데, 순례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스쳐 갈 수 있거든요. 어떤 현장에 가 보면, 그 주변에도 다른 이슈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아요. 예를 들면 속초에 갔을 때도 설악산 케이블카 문제, 홍천 양수발전소 문제, 삼척 석탄 화력 발전 문제 등등을 알게 되고, 거기에 연대를 갈 수 있죠. 조금씩이라도 그 문제에 참여할 수 있어요.”
순례의 좋은 점을 줄줄 읊는 청명의 눈이 커지고, 미소도 점점 더 활짝 피었다. 사회 운동을 하다 보면 자꾸만 ‘반대’, ‘철회’, ‘규탄’ 같은 부정어들을 마주하게 되면서 지치는 어려움이 있다. 분명,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시작한 일인데 계속 싸움만 하는 것 같아 지치게 되는 순간들이. 그런데 이렇게 설레는 얼굴로, 새로운 세상을 활짝 여는 반가운 얼굴로 운동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고맙고 반가운 일이다.
청명은 그저 여러 세계 사이, 마을 사이, 사람 사이, 인간과 동물 사이, 여러 상황과 사회문제들 사이를 미소 띤 얼굴로 조용히 걸어 들어가 또 다른 길로 향해 가는 담백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저절로 열리게 한다. 순례는 참 청명다운 방법이다.
2023년 여름에는 친구 부부와 함께 몽블랑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한국에서처럼 신문과 몸자보, 피켓을 준비해 갔다. 영어를 잘할 줄 아는 건 아니었지만, ‘사람들과 반드시 연결될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다. 바티칸, 몽블랑 일대 같은 상징적인 여행지에서 춤을 추고, 피켓을 들어 탈핵 메시지를 알렸다.
실제로 많은 외국인이 몸자보를 보고 먼저 말을 걸어왔다. 한국보다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사람이 많았다. 몸자보를 멘 청명을 사진 찍어가고, SNS에 공유하며 응원을 보냈다. 이 경험으로 강의 요청이 오기도 하고, 소모임이 만들어지거나 다른 단체와 연결되기도 했다.
“운동가로서 대단한 액션을 기획한 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하던 것처럼 그대로 여행했을 뿐인데 큰 반향이 있었어요. 그렇게 관심받고, 탈핵 메시지도 알리니까 너무너무 신났어요.”
더 많은 균열이 필요해
순례길에서도 나름의 어려움은 있지 않을까 물었다. 청명은 걸어야 비로소 보이는, 많은 생명에 대해 이야기했다.
“도로는 항상 깨끗하지만 우리가 걷는 가장자리는 온갖 쓰레기들이 바람에 쓸려와 있어요. 그중 하나가 조류예요. 특히 작은 새들이 엄청나게 죽어 있어요. 새를 묻어준 일이 많아요. 그럴 때, 미처 보지 못한 비인간들의 사회를 생각하게 돼요. 같이 운동하고 순례하는 사람 중에서도 산이 깎이는 건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작은 새의 죽음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경우들이 있거든요. 앞으로 운동은 인간들이 좋은 세상을 넘어서, 더욱 모든 생명이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청명이 생각하는 모든 생명에게 좋은 세상이 어떤 것일지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청명은 모두가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탈권력’ 세상이라고 답했다.
“세상에는 원래 존재 자체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차이가 ‘권력적 차이’로 변질되고, 줄 세우는 거예요. 인간과 비인간, 나이나 경력도 그저 차이일 뿐인데, 사회가 거기에 권력을 부여하는 거죠. 나이를 포함해 모든 속성은 변하는데, 마치 변하지 않는 것처럼 힘을 행사해요. 운동이 이런 권력화된 사회를 해체하고, 탈권력 시스템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 짓는 울타리를 과감히 깨 나가는 연대를 하고 싶어요.”

길 위의 동료들과 함께 목소리를 낸다. (사진 제공 : 청명)
비워서 더욱 충만하다
청명의 커다란 꿈과 작은 실천은 이뿐만이 아니다. 청명은 원래 자신을 ‘탈핵 비움 실천가’라고 소개하곤 한다. 그러니 ‘비움’에 대해서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덜 소유하고 덜 소비하려면 적어도 안정된 주거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면, 밭이라도 있어야 먹거리 자급자족이 가능할 테고, 불안정한 상황에서 예측 불가능한 일들을 맞닥뜨릴 때 그것이 더 큰 소비로 이어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순례가 일상인 청명이 구상하는 ‘비움’ 생활은 어떤 것일지 더 궁금해졌다.
“밭에서 먹거리를 키우는 것만이 자급자족은 아니에요. 이를테면 요즘은 먹을 것이 넘쳐나잖아요. 어디 가서 얻어와도 충분히 얻을 수 있어요. 저는 좀 자유롭게 생각해요. ‘반드시 깨끗한 옷을 입어야겠어.’라든지 ‘내 땅에서 길러내는 걸 먹어야겠어.’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 거죠. 소유나 정착에 집착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내는 것이 충분히 자급자족이 될 수 있어요. 땅이나 물건을 소유하지 않아도, 마인드를 전환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요. 어떤 상황이든 지금의 상황을 좀 더 스스로 윤택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차이는 엄청나죠.”
청명은 줄곧 ‘비움’을 전파하며, 본인의 살림 역시 간소하게 줄여왔다. 냉장고도 여름 3개월간만 사용하고 있다. 언어치료사 일도 주 6일 근무에서 5일, 4일, 3일 점차 줄여 지금은 주 1일만 근무하는 형태를 만들었다. 보험도 오래 전에 해지했고, 소득도 소비도 줄여나갔다. 줄인 만큼을 청명 본인의 힘으로 채워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비운 만큼, 삶의 주도권을 되찾고 있는 셈이다.
“비움이라는 게 다 버리는 게 아니에요. 나를 축소하는 것도 아니고요. 내가 주도하는 삶을 위해 꼭 필요한 걸 채우는 방식이죠. 지금 조금 있는 짐이 옛날에 가지고 있던 것들보다 훨씬 윤택해요. 가장 질 좋고, 나를 빛나게 하는 것들로 나를 채우는 거예요.”
지금 청명의 짐은 36리터 배낭이 전부다. 들으면서도 쉽게 상상이 안 갔지만, 인터뷰를 마치고 청명의 집에 들렀을 때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한 평짜리 청명의 방은 마치 손님이 머문 방처럼, 아무런 가구 없이 가지런히 개어진 이불과 잘 싸놓은 배낭이 전부였다. 청명은 항상 이런 생활을 유지한다고 했다.

탈핵 '비움' 실천가 청명의 간소한 방. 주인이지만 손님처럼 매일 36리터 배낭에 모든 짐을 싼다. (사진 : 자유)
다가오는 10월, 비움·탈핵·연대의 삶으로
“남편과 딸도 제가 도울 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알아서 살라고 했어요. 저에게 보탬이 될 필요도 없고요. 서로 곁에 꼭 머물러야 한다거나, 도움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도 자유로워지기로 했어요. 빚도 다 갚았고, 아이도 자라서 성인이 됐어요. 이제 이 집도 남편에게 헌정하고 싶어요. 그리고 더 많은 걸 내려놓으려고 해요.”
그가 앞으로 살아갈 방향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탈핵, 비움, 연대. 위험한 에너지에 기대는 성장 시스템에서 벗어나고, 적정한 소비와 생산의 균형을 찾으며, 인간과 비인간을 아우르는 연대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처한 상황이나 가진 자본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삶을 주도하겠다는 다짐은 가족을 비롯한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9월 이후로는 이 세 가지에 집중하려고 해요. 진짜 너무 희망차요.”라고 말하는 청명의 눈은 설렘과 환희로 가득 차 보였다. 그의 비움이나 탈핵 운동, 순례가 힘겨워 보이기보다 자연스럽고 반짝여 보이는 것은 아마 청명의 그런 눈과 밝은 웃음 때문일 거다.
“지리산이라서 더 의도하지 않아도 풍족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꼭 지리산이어야만 하는 건 아니예요. ‘지금 여기’의 삶이 주는 충만함을 느끼려고 하는 거죠. 아주 오래 전부터 연습해 온 삶이에요. 자급자족하는 삶이요. 제 기준으로 그 연습을 마치는 게 이번 9월 말이에요.”
그래서 청명은 다시 길을 떠난다. 또 한 번 새로운 마음으로. 더욱더 세상을 향해 자신을 열어두겠다고 선언했다. 보는 우리야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지금의 청명이 만들어지기까지 스스로 단련하는 과정이 있었으니, 앞으로는 한층 더 깊고 넓어진 내면으로 순례를 떠나게 되지 않을까. 비운 만큼 더 가볍고 맑아질 청명의 얼굴이 그려졌다.
딸은 엄마가 주목받는 행색을 한 것도, 사람들의 시선도 부담스럽고 싫어할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엄마의 삶을 적극 존중하고, 지지하는 관계가 됐다. 엄마의 ‘냉장고 없는 삶’을 블로그에 실어주겠다거나, 엄마 활동에 필요한 웹자보 제작을 도와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끝으로 청명은 탈핵을 이야기하지만, 탈핵만이 답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세상에 더 큰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앞으로 그 상상력을 더 키우고 발휘하는 것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고. “즐겁게 사는 길에는 수만 가지 경우의 수가 있고, 그걸 찾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라고 했다. 청명이 말한 상상력은 평화를 바라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힘 아닐까? 우리도 청명처럼 자신을 믿고, 기쁘게 살아갈 용기를 가진다면, 그 기쁜 세상은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르겠다.

'지금 여기'의 삶이 주는 충만함을 누리는 청명. 지리산에 올랐다. (사진 : 넉넉)
** 인터뷰 일시 : 2025년 8월 5일
글쓴이 : 푸른
내 이름도 별명도 살고 싶은 모습도 '푸른'. 나는 따뜻하거나 뜨거운 사람.
어린이의 벗 되어 살고 싶다. 어린이 해방을 꿈꾸며 산청에 살고 있다.
청명이 가는 길에 질문이 온다, “탈핵이 뭐예요?”
: 탈핵 비움 실천가 청명 인터뷰
진행 / 자유
글 / 푸른
걷기를 예찬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걸음으로써 다른 리듬 속에 몸담고 시간, 공간, 타자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했다. 걷기는 세계 속에 자신의 자리를 회복하고, 자신의 저력에 대한 믿음을 되찾는 과정이라고.
스스로 ‘탈핵 비움 실천가’라 소개하는 청명은 이 ‘걷기’라는 가장 소박하지만 가장 저력 있는 방법으로 세상을 만난다. 2016년부터 탈핵 메시지를 담은 몸자보를 두르고 방방곡곡 누비는 활동가 청명.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청명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사계절 옷이며 생필품을 모두 담은 36리터 배낭이 그의 살림 전부지만, 그의 삶은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는 보부상의 요술 보따리 같다. 산내에서 청명을 만나 그의 삶과 실천, 바람에 대해 조금이나마 들어볼 수 있었다.
인터뷰 현장에서 만난 청명과 푸른 (사진 : 자유)
별빛 같은 어린 시절
“원래 고향은 충북 괴산이에요. 괴산군 청안면 효근리, 거기서도 외딴 저 꼭대기로 올라가야 되는 그런 집에서 살았어요. 어려운 환경이었었죠.”
먹을 것도 풍족하지 않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때 호롱불을 켜고 살았지만, 가난하다는 체감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압도한 것은 아니었다. 작은 창틈으로 쏟아지는 별빛, 밭에 나가 담배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농사를 기록하는 심부름, 누에 옆에 자면서 누에 크는 것을 관찰하던 것, 공책과 연필을 받으려고 달리기 1등을 놓치지 않던 일, 학교 마치면 집에 돌아와 풀 베고 소죽을 끓여 먹이던 일상은 더없이 행복한 추억으로 남았다.
“불빛이라는 게 없었어요. 그런 어둠에 수없이 쏟아지는 별이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조그만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그 별빛이 너무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때로는 듬성듬성 구름이 가는 길에 껴주듯이 뜬 별이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너무 많아서 이 별이 어둠을 막 몰아내는 것 같더라고요. 그 별을 바라본 기억을 잊을 수 없어요. … 힘들었던 것도 견딘 것보다는 사실 제게 좋은 추억이었죠.”
중학생 청명은 학교에서 빌려주는 <쿼바디스>, <노인과 바다>, <폭풍의 언덕> 같은 고전에 푹 빠졌다. 교과서가 아닌 책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흥분과 설렘으로 가득 찬 시절을 보냈다. 집에서는 날마다 농사와 집안일 심부름하느라 책볼 짬도 나지 않았기에, 학교만 가면 열심히 책을 파고들었다.
새만금신공항 기본계획 취소판결을 촉구하는 '새, 사람 행진단' 순례 현장 (사진 제공 : 청명)
공순이가 아니라 장.미.영!
청명은 농부를 꿈꿨지만, 엄마는 ‘엄마처럼 살지말고, 도시로 나가 돈을 벌라’며 말렸다. 결국 청주에 있는 산업체 고등학교인 양백여자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7~80년대에는 주로 방직공장 내에 ‘산업체 부설학교’라는 것이 활발히 설립됐다. 육성회비 같은 것이 없어 돈 걱정을 덜 수 있고, 고등학교 학력도 따면서 공장 근무를 통해서 돈을 벌 수도 있었다.
“학교는 안 보내준다고 하는데 그러면 산업체 학교라도 가자 싶었죠. 집에서 나가 살면서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누군지 찾아가기 시작했어요. 날 장미영이라고 안 하고 ‘공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부른 애들은 대부분 대학생 남성이었어요. 남성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산업체로 와서 바로 주임을 따요. 여성들은 흔히 대학을 가던 시절이 아니니까, 여성 노동자들을 ‘공순이’라고 막 부르는 거죠. 그전에는 제 이름이 소중한 줄 몰랐는데, 공순이라 부르지 말라고 엄청나게 싸웠어요.”
학교 수업을 들으면서 하루 8시간을 근무하고, 수시로 4시간 가까이 잔업을 해야 했다. 때로는 학교 가는 시간을 빼서 잔업을 하기도 했다. 부푼 꿈을 안고 들어간 학교에서 하고 싶었던 공부는커녕, 밤낮으로 생산량에 매달려야 하는 생활이 너무 갑갑했다.
“1학년 때 첫 달은 제가 월급으로 받은 돈도 찢어버렸어요. 돈이 되게 귀한 시기였잖아요. 근데도 그런 구조와 생활이 너무 싫어서 돈을 다 찢어버리고 박차고 나갔어요. 공부를 너무 하고 싶었는데, 이 ‘돈’ 때문에 내가 학교에 왔구나 싶었어요. 박차고 나왔지만, 막상 갈 곳이 없어 또 돌아갔죠. 다음 날 출근을 했더니, 반장 언니가 제가 찢은 돈을 다 붙여놨다 주더라고요.”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풍부한 감수성, 타오르는 지적 호기심과 부조리한 사회에 저항하는 태도, 인간의 존엄에 대해 끊임없이 캐묻는 자세. 청명이 타고난 기질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소설 <빨강머리 앤> 주인공 앤 셜리가 떠올랐다. 10대 청명도 주어진 환경에 불만을 품거나 좌절하기보다, 그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으면서, 더 넓은 세상으로 달려 나가는 꿈을 키웠다.
“뭔가 사회가 부조리했어요. 부모님은 열심히 일을 하는데, 하는 것마다 안 되고, 가족의 구조도, 남녀의 구조나 일하는 구조도 이상했어요. 그리고 엄마는 맨날 자식들 못 먹여서 슬퍼하는 거예요. 제가 학교에 있을 때, 엄마가 왔어요. 근데 엄마 손등이 막 갈라진 거예요. 찬물로 빨래하고 그랬을 때니까요. 그런 손으로 돈을 좀 달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때 한 달에 12만 원 벌 때였거든요. 엄마한테 그 돈을 주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가난했었구나.’ 비로소 그때 알았어요.”
2학년 때부터는 학교에 다니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이 일에 반드시 참여해 구조에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라는 마음이 생겼다. 87년에는 산업체 부설학교의 열악한 노동 조건과 면학 환경 등에 대한 문제를 고발하는 데모가 일어났다. 청명도 실을 끊고 정문으로 나갔다. 데모에 나갔다는 이유로 현장(근무) 점수가 0점으로 처리되기도 했다.
고2에 만난 선생님 한 분은 청명을 분노에서 실천으로 한 발짝 나아가도록 등을 밀어주셨다. 반항기가 심했던 시절, 청명의 기질을 억누르기보다 다독이고 북돋워 주며 학교를 끝까지 마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청명은 그 시기에 처음으로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게 우리 잘못이 아니라’라는 메시지를 접했다고 기억한다.
“그 선생님처럼 자꾸 나를 살리려는 도움의 손길들이 있었어요. 이 학교가 개신교 학교였어요. 그래서 나를 위해서 울면서 기도하길래 반항심 많은 저는 ‘기도를 멈춰라. 나를 위해서 기도하지 마라. 신이 있다면 이렇게 살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그랬어요. 저는 불합리한 일들, 사람을 막 대하는 일이 너무 싫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명은 같은 회사에 사무직으로 취직했다. 거기서도 역시나 남성 직원들의 커피를 타야 한다거나, 고분고분하게 굴어야 하는 등의 또 다른 차별이 있었다.
“커피, 프림, 설탕 통을 다 세팅해놨어요. 알아서 마시라고. 그리고 커피 타는 일에 나는 손을 뗐죠. 그들이 이걸 시키는 게 왜 나쁜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당시에는 페미니즘을 몰랐죠.”
부조리한 사회의 면면을 ‘세상은 원래 그렇잖아.’하면서 넘기지 않고,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좀 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멈춰 묻는 사람들 덕분에 세상이 조금씩 좋은 쪽으로 옮겨간다고 믿는다. 청명은 그렇게 묻기를 쉬지 않는 사람이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난이 너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라에서는 가난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우리 시골도 ‘이제 잘 살아야 된다’는 말을 너무 많이 쓰는 거예요. 도대체 지금 사는 게 뭐가 그렇게 못 산다고 그렇게 표현을 할까 싶었어요. 가난은 그냥 겪는 것일 뿐인데, 가난은 나쁘고, 가난을 벗어나서 부자만을 쫓아야 하는 것처럼 사회가 생각을 심어준다는 생각이 들었죠.”
좌절의 30대, 세월호가 연 길
그런 청명에게 깊은 시련이 찾아온 건, 30대에 들어섰을 무렵이다.
“스물한 살 때인가부터 노동운동을 했어요. 평등한 사회를 위해서라면 이 한목숨 다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허탈하더라고요. 죽기 살기로 싸웠는데 그런 세상이 오지 않으니까요. 좌절감에 빠져서 더이상 살아갈 의욕이 안 났어요.”
하지만 절망할 틈도 없이 삶이 굴러갔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생계를 위해 더욱더 자본주의 시스템에 발맞출 수밖에 없었다. 아스팔트 틈을 비집고 살아내는 풀처럼, 청명은 열심히 버티고 살아냈다. 공부를 하고, 언어치료사로 일했다.
“제가 지금까지 언어 치료사로 25년을 일했더라고요. 언어 치료 일하는 것도 굉장히 좋아했어요. 아이마다 다 사례가 다른데, 그 원인을 찾고 어떻게 접근할지 연구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무엇을 하든 ‘돈 계산’이 순수한 기쁨을 방해하는 것 같아 마음 한편은 편치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낸 덕분에 내 집이 생겼고, 빚도 갚았다. 역시, 여전히 청명은 팍팍한 환경에서도 ‘기쁨’을 발굴하고 있었다.
“죽을 생각을 했던 제가, 그 생각을 멈춘 게 세월호 때예요. 노동운동이나 활동을 전혀 하지 않고, 언어치료 일과 공부만 집중했던 시기였어요. 근데 세월호 사고를 보면서 이 사회의 기본이 무너졌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거예요. 다시 사회로 나가서 목소리를 내야겠구나 생각했죠.”
산을 탈 때에도 제2의 살갗이 된 몸자보와 함께한다. (사진 : 넉넉)
순례는 내 운명, 순례는 내 운동
청명이 살아온 발자국 따라, 자연스럽게 순례 이야기로 넘어갔다. 세월호 진실을 알리는 순례가 그녀의 첫 순례였다. 인생의 두 번째 순례는 딸에게서 이어받은 거였다.
2016년, 청명의 딸은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 현장에서 연대하며 탈핵 공부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세월호, 경주 지진 같은 연이은 재난과 오랜 투쟁 현장에 몸담으며 딸이 지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청명은 “이제 엄마가 나갈 테니, 넌 좀 쉬어라.” 하며 탈핵을 알리는 순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순례에 참여하는 방식이었다가, 혼자서도 순례를 떠나기 시작했다. 눈뜨면 몸자보를 메고 일단 집을 나섰다. 가까운 곳을 걸어 다니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멀리 나갈 때도 있었다. 거의 10년째 순례를 이어오면서 순례는 청명이 운동하는 방식이자, 일상 그 자체로 자리 잡았다. 주 4일 근무라면, 주 3일은 순례하는 식이었다.
“지난달에는 속초의 어느 홈리스 공간에 밥 봉사를 갔어요. 거기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제 몸에 붙은 몸자보를 보고 ‘어디쯤 걷고 있어요?’, ‘뭐 하는 사람이에요?’ 이런 걸 물어보시거든요. 제가 먼저 ‘탈핵하세요!’ 하지 않아도, 먼저 질문이 오는 게 좋더라고요.”
목소리 높이지 않아도, 강요하지 않아도, 예상치 못한 타인들과의 대화가 트이는 경험이 좋았다. 심지어 탈핵을 주제로 질문을 걸어오니, 청명은 “운동은 멀리 있지 않았다. 내가 나타나는 것이 운동”이었다고 말한다.
“보통 이런 사회운동을 하면, 그 사람들끼리 만나는 경우가 많은데, 순례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스쳐 갈 수 있거든요. 어떤 현장에 가 보면, 그 주변에도 다른 이슈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아요. 예를 들면 속초에 갔을 때도 설악산 케이블카 문제, 홍천 양수발전소 문제, 삼척 석탄 화력 발전 문제 등등을 알게 되고, 거기에 연대를 갈 수 있죠. 조금씩이라도 그 문제에 참여할 수 있어요.”
순례의 좋은 점을 줄줄 읊는 청명의 눈이 커지고, 미소도 점점 더 활짝 피었다. 사회 운동을 하다 보면 자꾸만 ‘반대’, ‘철회’, ‘규탄’ 같은 부정어들을 마주하게 되면서 지치는 어려움이 있다. 분명,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시작한 일인데 계속 싸움만 하는 것 같아 지치게 되는 순간들이. 그런데 이렇게 설레는 얼굴로, 새로운 세상을 활짝 여는 반가운 얼굴로 운동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고맙고 반가운 일이다.
청명은 그저 여러 세계 사이, 마을 사이, 사람 사이, 인간과 동물 사이, 여러 상황과 사회문제들 사이를 미소 띤 얼굴로 조용히 걸어 들어가 또 다른 길로 향해 가는 담백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저절로 열리게 한다. 순례는 참 청명다운 방법이다.
2023년 여름에는 친구 부부와 함께 몽블랑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한국에서처럼 신문과 몸자보, 피켓을 준비해 갔다. 영어를 잘할 줄 아는 건 아니었지만, ‘사람들과 반드시 연결될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다. 바티칸, 몽블랑 일대 같은 상징적인 여행지에서 춤을 추고, 피켓을 들어 탈핵 메시지를 알렸다.
실제로 많은 외국인이 몸자보를 보고 먼저 말을 걸어왔다. 한국보다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사람이 많았다. 몸자보를 멘 청명을 사진 찍어가고, SNS에 공유하며 응원을 보냈다. 이 경험으로 강의 요청이 오기도 하고, 소모임이 만들어지거나 다른 단체와 연결되기도 했다.
“운동가로서 대단한 액션을 기획한 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하던 것처럼 그대로 여행했을 뿐인데 큰 반향이 있었어요. 그렇게 관심받고, 탈핵 메시지도 알리니까 너무너무 신났어요.”
더 많은 균열이 필요해
순례길에서도 나름의 어려움은 있지 않을까 물었다. 청명은 걸어야 비로소 보이는, 많은 생명에 대해 이야기했다.
“도로는 항상 깨끗하지만 우리가 걷는 가장자리는 온갖 쓰레기들이 바람에 쓸려와 있어요. 그중 하나가 조류예요. 특히 작은 새들이 엄청나게 죽어 있어요. 새를 묻어준 일이 많아요. 그럴 때, 미처 보지 못한 비인간들의 사회를 생각하게 돼요. 같이 운동하고 순례하는 사람 중에서도 산이 깎이는 건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작은 새의 죽음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경우들이 있거든요. 앞으로 운동은 인간들이 좋은 세상을 넘어서, 더욱 모든 생명이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청명이 생각하는 모든 생명에게 좋은 세상이 어떤 것일지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청명은 모두가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탈권력’ 세상이라고 답했다.
“세상에는 원래 존재 자체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차이가 ‘권력적 차이’로 변질되고, 줄 세우는 거예요. 인간과 비인간, 나이나 경력도 그저 차이일 뿐인데, 사회가 거기에 권력을 부여하는 거죠. 나이를 포함해 모든 속성은 변하는데, 마치 변하지 않는 것처럼 힘을 행사해요. 운동이 이런 권력화된 사회를 해체하고, 탈권력 시스템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 짓는 울타리를 과감히 깨 나가는 연대를 하고 싶어요.”
길 위의 동료들과 함께 목소리를 낸다. (사진 제공 : 청명)
비워서 더욱 충만하다
청명의 커다란 꿈과 작은 실천은 이뿐만이 아니다. 청명은 원래 자신을 ‘탈핵 비움 실천가’라고 소개하곤 한다. 그러니 ‘비움’에 대해서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덜 소유하고 덜 소비하려면 적어도 안정된 주거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면, 밭이라도 있어야 먹거리 자급자족이 가능할 테고, 불안정한 상황에서 예측 불가능한 일들을 맞닥뜨릴 때 그것이 더 큰 소비로 이어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순례가 일상인 청명이 구상하는 ‘비움’ 생활은 어떤 것일지 더 궁금해졌다.
“밭에서 먹거리를 키우는 것만이 자급자족은 아니에요. 이를테면 요즘은 먹을 것이 넘쳐나잖아요. 어디 가서 얻어와도 충분히 얻을 수 있어요. 저는 좀 자유롭게 생각해요. ‘반드시 깨끗한 옷을 입어야겠어.’라든지 ‘내 땅에서 길러내는 걸 먹어야겠어.’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 거죠. 소유나 정착에 집착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내는 것이 충분히 자급자족이 될 수 있어요. 땅이나 물건을 소유하지 않아도, 마인드를 전환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요. 어떤 상황이든 지금의 상황을 좀 더 스스로 윤택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차이는 엄청나죠.”
청명은 줄곧 ‘비움’을 전파하며, 본인의 살림 역시 간소하게 줄여왔다. 냉장고도 여름 3개월간만 사용하고 있다. 언어치료사 일도 주 6일 근무에서 5일, 4일, 3일 점차 줄여 지금은 주 1일만 근무하는 형태를 만들었다. 보험도 오래 전에 해지했고, 소득도 소비도 줄여나갔다. 줄인 만큼을 청명 본인의 힘으로 채워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비운 만큼, 삶의 주도권을 되찾고 있는 셈이다.
“비움이라는 게 다 버리는 게 아니에요. 나를 축소하는 것도 아니고요. 내가 주도하는 삶을 위해 꼭 필요한 걸 채우는 방식이죠. 지금 조금 있는 짐이 옛날에 가지고 있던 것들보다 훨씬 윤택해요. 가장 질 좋고, 나를 빛나게 하는 것들로 나를 채우는 거예요.”
지금 청명의 짐은 36리터 배낭이 전부다. 들으면서도 쉽게 상상이 안 갔지만, 인터뷰를 마치고 청명의 집에 들렀을 때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한 평짜리 청명의 방은 마치 손님이 머문 방처럼, 아무런 가구 없이 가지런히 개어진 이불과 잘 싸놓은 배낭이 전부였다. 청명은 항상 이런 생활을 유지한다고 했다.
탈핵 '비움' 실천가 청명의 간소한 방. 주인이지만 손님처럼 매일 36리터 배낭에 모든 짐을 싼다. (사진 : 자유)
다가오는 10월, 비움·탈핵·연대의 삶으로
“남편과 딸도 제가 도울 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알아서 살라고 했어요. 저에게 보탬이 될 필요도 없고요. 서로 곁에 꼭 머물러야 한다거나, 도움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도 자유로워지기로 했어요. 빚도 다 갚았고, 아이도 자라서 성인이 됐어요. 이제 이 집도 남편에게 헌정하고 싶어요. 그리고 더 많은 걸 내려놓으려고 해요.”
그가 앞으로 살아갈 방향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탈핵, 비움, 연대. 위험한 에너지에 기대는 성장 시스템에서 벗어나고, 적정한 소비와 생산의 균형을 찾으며, 인간과 비인간을 아우르는 연대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처한 상황이나 가진 자본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삶을 주도하겠다는 다짐은 가족을 비롯한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9월 이후로는 이 세 가지에 집중하려고 해요. 진짜 너무 희망차요.”라고 말하는 청명의 눈은 설렘과 환희로 가득 차 보였다. 그의 비움이나 탈핵 운동, 순례가 힘겨워 보이기보다 자연스럽고 반짝여 보이는 것은 아마 청명의 그런 눈과 밝은 웃음 때문일 거다.
“지리산이라서 더 의도하지 않아도 풍족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꼭 지리산이어야만 하는 건 아니예요. ‘지금 여기’의 삶이 주는 충만함을 느끼려고 하는 거죠. 아주 오래 전부터 연습해 온 삶이에요. 자급자족하는 삶이요. 제 기준으로 그 연습을 마치는 게 이번 9월 말이에요.”
그래서 청명은 다시 길을 떠난다. 또 한 번 새로운 마음으로. 더욱더 세상을 향해 자신을 열어두겠다고 선언했다. 보는 우리야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지금의 청명이 만들어지기까지 스스로 단련하는 과정이 있었으니, 앞으로는 한층 더 깊고 넓어진 내면으로 순례를 떠나게 되지 않을까. 비운 만큼 더 가볍고 맑아질 청명의 얼굴이 그려졌다.
딸은 엄마가 주목받는 행색을 한 것도, 사람들의 시선도 부담스럽고 싫어할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엄마의 삶을 적극 존중하고, 지지하는 관계가 됐다. 엄마의 ‘냉장고 없는 삶’을 블로그에 실어주겠다거나, 엄마 활동에 필요한 웹자보 제작을 도와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끝으로 청명은 탈핵을 이야기하지만, 탈핵만이 답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세상에 더 큰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앞으로 그 상상력을 더 키우고 발휘하는 것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고. “즐겁게 사는 길에는 수만 가지 경우의 수가 있고, 그걸 찾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라고 했다. 청명이 말한 상상력은 평화를 바라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힘 아닐까? 우리도 청명처럼 자신을 믿고, 기쁘게 살아갈 용기를 가진다면, 그 기쁜 세상은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르겠다.
'지금 여기'의 삶이 주는 충만함을 누리는 청명. 지리산에 올랐다. (사진 : 넉넉)
** 인터뷰 일시 : 2025년 8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