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내人터뷰>는 지리산의 품 안에 자리 잡은 마을, 남원시 산내면에 사는 이웃들의 진솔한 삶의 모양을 담습니다.
|

도시를 떠나 작은학교로
20년의 세월. 카톡 프사가 ‘산내에서 가장 잘생긴 삼촌’에서 ‘가장 잘생겼던 삼촌’으로 바뀌는 데 필요한 시간. 13년 동안 몸담았던 작은학교를 떠나,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 대나무밭에 둘러싸인 텃밭과 마당이 있는 집을 장만했고, 은은한 온기와 평안이 넘치는 일상을 알게 되었다.
물론 한형민씨는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마을 이곳저곳을 다니며 티 안나는 일들을 처리하느라 매일 분주하다. 공식적으로는 실상사 인드라망 공동체에 속한 활동가로 목금토 공방의 사무실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또 상당한 시간과 품을 들여 토종밀이며 토종감자, 옥수수같은 종자를 심어 텃밭을 일구고, 이웃과 나누는 일도 하고 있으며, 틈틈이 마을에서 고장난 자전거를 비롯, 소형 전기기기며, 생활용품들을 받아 수리해주는 자전거 작업장도 챙기는 중이다.
그 뿐인가. 얼마 전부터 뜻을 같이 하는 마을 사람들과 산내를 끼고 도는 람천 살리기 모임을 시작했고, 수년 전부터 산내와 주변 마을의 구성원들을 연결해주는 장터이자 자발적 중심축이 되어온 살래장 밴드의 운영자 역할을 여전히 하고 있다. 이쯤이면 산내에서 가장 ‘부지런히 사는 삼촌’이라 할 만하다.
한형민 씨가 서울을 떠나 산내로 들어온 것은 2006년이었다. 대학 때는 카톨릭 학생회에서 활동을 했고, 법륜스님이 이끈 정토회 활동도 참여했을 만큼 함께 살아가는 삶에 관심이 유독 많았던 청년이었다.
“처음 산내에 내려왔을 때는 3년만 있어보자 했어요. 그런데 제 성향이 쉽게 변화를 추구하거나 새로운 모험을 찾아 떠나는 걸 좋아하지는 않더라구요. 있는 자리에서 꾸준히 이것저것 하다 보니 어느새 20년이 됐네요.”
처음 작은학교 교사로 발을 들인 건 선배의 소개 덕분이었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하고 싶었고, 경쟁하며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 도시살이를 벗어난 대안 공간을 찾고 있던 중이라 반갑게 산내로 내려왔고,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자청했다. 수학 전공자로써 처음에는 수학을 가르치면서 농사 과목도 맡았다. 물론 새파란 이십대 초보 농사 선생의 앞길은 순탄치 않아서 매번 헛발길질이었고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학교 아이들과의 더불어살이도 녹록하지 않았다.

작은학교는 그에게 단순한 직장이 아니었다. 아이들과 함께 살고 부대끼면서 온갖 것을 새롭게 배우는 곳이었다. 역부족인 자신에게 실망하고 동료 교사들과 학생들과의 갈등도 버겁다고 느낄 즈음, 3년, 5년 단위로 주어지는 안식년 제도를 이용해 잠시 쉬었고, 숨을 고른 후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작은학교가 실상사 옆에서 하황 산기슭으로 옮겨가면서 마을과의 접점이 약해진 것이 아쉽기도 했고, 학교에서만 지내다보니 삶의 반경이 제한적이라 답답하기도 했지만 10년이 넘는 세월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들과 보내는 매일의 일상이 바빴고, 언제나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었으며, 그 안에서 배우고 깨우치는 것들도 많았다.
“제가 원래 원칙과 기본을 중시하는 꼬장꼬장한 성격이라 제가 힘든 것 이상으로 애들도 힘들었을 거예요. 작은학교에서 나와 바깥에서 새로운 길들을 모색하는 세월을 보내면서 졸업생들이 기억하는 강성 원칙주의자의 모습을 제 스스로 인정할 수 있게 되었죠. 그러면서 저도 좀 유연해지고, 주변과 타협하고 어울리려고 노력을 많이 기울이게 된 것 같아요. 뭐 여전히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 텃밭을 일구다
그리고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된 짝꿍 한나씨를 만나 가족이 되었다. 실상사 공양간의 노보살님, 입석보살님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렇게 부르신다고. “어이, 쌍딩이!“
2014년 인드라망 대학의 1기생으로 들어 온 한나씨는 성향도 성격도 형민씨와 많이 달랐지만, 가치관과 지향점이 누구보다 잘 맞았고, 몇 년 동안 친구로 지내며 가까워지다 어느새 평생의 길동무가 되었다. 세심하고 성실한 만큼 걱정도 압박감도 잘 느끼는 형민씨라면, 좀 더 큰 그림을 보며 만사를 여유있게 대하는 성격의 한나씨가 있어서 두 사람은 기특하고 슬기롭게 함께살이를 하고 있는 중이다.
“제가 소출도 안 나는 토종 씨앗들을 심고는 혼자 밭에서 씨름하고 있는 걸 보며 짝꿍이 맨날 툴툴거려요. 그래도 몇 년전부터 키우고 있는 남원토종 감자는 꽤 맛있다는 평을 듣고 있고 제법 수확량도 돼서 인제는 좀 어깨를 펴고 있죠. 하하”
좀 더 넓은 공동체 속에서 살아보기로 결정하고 작은학교를 그만둔 지 6년째, 동료 교사들과 아이들과의 관계가 숙제의 중심이었던 공간에서, 산내 안팎의 여러 영역에서 활동하는 요 몇 년 동안 오히려 마을 살이의 어려움을 더 체감하고 있다. 불편한 관계를 피할 수 있는 도시에 비해, 마을 이웃으로 끊임없이 마주치고, 공동의 일을 도모하고 해결해야 하는 시골 공동체에서는 사람과의 관계가 제일 큰 배움의 장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마을로, 더 넓은 이웃에게로
“사람과의 관계가 제일 어려운 숙제 같아요. 갈등이 생기면 회피할 수 없고, 어떻게든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쉽지 않아서 가슴앓이도 꽤 했죠. 그런데 갈등을 해결하려하지 않고, 견디며, 상황이 바뀌고 관점이 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과정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요. 스스로에 대한 기대나 사람들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더라도 다른 눈으로 바라보려는 노력도 필요한 것 같고요. ”
보이는 것처럼 늘 평안하고 웃음이 넘치는 삶만은 아니었다. 학교 선생님에서 한생명에 속한 활동가로 넓어진 영역에서 일하며 일련의 상황들을 처리해내느라 스트레스와 압박감에 시달렸고, 힘든 마음은 고스란히 몸으로 싸움터를 옮겨와 몇 년 전부터 여기저기 몸이 무너지기 시작해서 한동안은 도시를 오가며 치료를 받아야 했다.
다만 그 과정은 스스로에겐 약이 된 시간이기도 했다. 늘 이웃과 공동체의 안녕을 향해있던 시선을 안으로 돌려서, 상처받고 무너진 스스로를 돌보고 살피는 것에 좀 더 집중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조금씩 좋아지는 몸을 따라 의욕과 활기가 도는 요즘에는 다시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들도 우후죽순처럼 고개를 들고 있다.
“생각해보니 40대가 된 지금 이 순간들이 내 삶에서 가장 바쁘고 활동적으로 살아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더라고요. 이웃이나 공동체에 좀 더 참여하고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많이 하고 싶은 때이기도 하고요. 제가 하는 일이 마을의 여러 틈새를 찾아서 소소하게 메우는 역할이라면 그것도 나름 재미있고 보람이 있어요.”

벽이 있는 곳에 틈이 있다
수 년 전에 부모님도 서울을 떠나 아들이 있는 산내에 정착하시면서 형민씨는 뭔가 더 어엿한 시골 사람의 모양새가 되었다. 물론 칠순을 넘은 아버지는 아직도 시골살이에 적응하시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이곳은 ‘칠십대가 뿌리를 새로 내리기에는 애매한’ 환경이기도 하고. 사실 청년에게도, 어린 자녀가 있는 가족에게도, 은퇴 후 새로운 귀촌의 삶을 시작한 이들에게도 각자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만만찮은 곳이 시골살이가 아니던가. 그럴수록 투덜대며 불평거리를 찾기보다는, 있는 자리에서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고 소용이 될 수 있는 일을 살피는 틈새꾼의 역할을 형민씨는 기꺼이 자청하고자 한다.
요즘에는 산내와 주변 마을을 연결하여 ‘재활용센터’를 건립하고자 하는 구상을 마을의 여러 동료들과 하고 있다. 자전거 수리점이나 살림꽃 공방, 나눔꽃과 같은 산내의 작은 재활용 공간을 묶어서 여럿이 공간을 활용하면서 보다 창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종합공간이 있다면 좋겠다는 누군가의 제안에서 비롯된 아이디어이다.
“그런데 산내는 규모가 너무 작고 위치가 외진 곳이라 인월과 같이 다른 지역에서도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재활용센터를 만들면 어떨까 싶어요. 산내를 넘어 이 지역 공동체 전체가 함께 참여하고 누릴 수 있는 방식을 고민중입니다.”
이렇게 많은 일을 도모하고 참여하고 꾸려가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걸까? 되는 일보다 안되는 일이 많은 시골살이와 공동체의 살림에서 좌절과 고립감을 느끼는 일이 어디 없겠는가?
세상과 사람에 대한 믿음, 우리 모두가 선의를 가지고 각자의 손을 뻗어 세상에 내민다면 좀 더 너그럽고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라는 불교의 가치관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살아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매일 인드라망 공동체 식구들과 나누는 공부 모임이나, 간간히 참석하는 몸 살림이며, 혼자 몰두하는 텃밭 가꾸기를 자양분으로 삼아서.
늘 웃고 있는 반달눈이 그를 한때 ‘산내에서 가장 잘생긴 삼촌’으로 만들었지만 타고난 천성이 소심하고 수줍음이 많아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 자리에 언제나 편안함을 느낀다는 형민씨. 그러니 어디에서고 형민씨가 모임에서 큰소리로 사람들을 이끄는 모습을 찾아보긴 어렵다. 벌어진 틈을 찾는 일에도, 메우는 일에도 촉수가 발달한, 지도자보다는 조력자의 자리가 편안한 사람이라니, 이 소란스러운 관종의 시대에, 각자도생의 세상에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그러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형민씨를 만난다면, 조용한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기로 하자. 박수도 인사도 좋지만 가장 좋은 응원은, 받은 도움을 조건 없이 다른 누군가에게 돌려주는 것. 동참의 의미에 잠시 마음을 기울여보자.
진행 / 자유
글 / 이덕임
사진 / 한형민 제공
인터뷰어 | 이덕임
살 곳을 찾아 지구 곳곳을 떠돌다 2005년에 지리산 산내에 정착했다. 지금까지 약 30여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텃밭과 꽃밭 가꾸기, 이웃과 산책하기를 본업만큼 좋아하는 뼛속까지 시골 생활자이다.
※ 이 인터뷰는 브라이언임팩트의 지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도시를 떠나 작은학교로
20년의 세월. 카톡 프사가 ‘산내에서 가장 잘생긴 삼촌’에서 ‘가장 잘생겼던 삼촌’으로 바뀌는 데 필요한 시간. 13년 동안 몸담았던 작은학교를 떠나,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 대나무밭에 둘러싸인 텃밭과 마당이 있는 집을 장만했고, 은은한 온기와 평안이 넘치는 일상을 알게 되었다.
물론 한형민씨는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마을 이곳저곳을 다니며 티 안나는 일들을 처리하느라 매일 분주하다. 공식적으로는 실상사 인드라망 공동체에 속한 활동가로 목금토 공방의 사무실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또 상당한 시간과 품을 들여 토종밀이며 토종감자, 옥수수같은 종자를 심어 텃밭을 일구고, 이웃과 나누는 일도 하고 있으며, 틈틈이 마을에서 고장난 자전거를 비롯, 소형 전기기기며, 생활용품들을 받아 수리해주는 자전거 작업장도 챙기는 중이다.
그 뿐인가. 얼마 전부터 뜻을 같이 하는 마을 사람들과 산내를 끼고 도는 람천 살리기 모임을 시작했고, 수년 전부터 산내와 주변 마을의 구성원들을 연결해주는 장터이자 자발적 중심축이 되어온 살래장 밴드의 운영자 역할을 여전히 하고 있다. 이쯤이면 산내에서 가장 ‘부지런히 사는 삼촌’이라 할 만하다.
한형민 씨가 서울을 떠나 산내로 들어온 것은 2006년이었다. 대학 때는 카톨릭 학생회에서 활동을 했고, 법륜스님이 이끈 정토회 활동도 참여했을 만큼 함께 살아가는 삶에 관심이 유독 많았던 청년이었다.
“처음 산내에 내려왔을 때는 3년만 있어보자 했어요. 그런데 제 성향이 쉽게 변화를 추구하거나 새로운 모험을 찾아 떠나는 걸 좋아하지는 않더라구요. 있는 자리에서 꾸준히 이것저것 하다 보니 어느새 20년이 됐네요.”
처음 작은학교 교사로 발을 들인 건 선배의 소개 덕분이었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하고 싶었고, 경쟁하며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 도시살이를 벗어난 대안 공간을 찾고 있던 중이라 반갑게 산내로 내려왔고,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자청했다. 수학 전공자로써 처음에는 수학을 가르치면서 농사 과목도 맡았다. 물론 새파란 이십대 초보 농사 선생의 앞길은 순탄치 않아서 매번 헛발길질이었고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학교 아이들과의 더불어살이도 녹록하지 않았다.
작은학교는 그에게 단순한 직장이 아니었다. 아이들과 함께 살고 부대끼면서 온갖 것을 새롭게 배우는 곳이었다. 역부족인 자신에게 실망하고 동료 교사들과 학생들과의 갈등도 버겁다고 느낄 즈음, 3년, 5년 단위로 주어지는 안식년 제도를 이용해 잠시 쉬었고, 숨을 고른 후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작은학교가 실상사 옆에서 하황 산기슭으로 옮겨가면서 마을과의 접점이 약해진 것이 아쉽기도 했고, 학교에서만 지내다보니 삶의 반경이 제한적이라 답답하기도 했지만 10년이 넘는 세월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들과 보내는 매일의 일상이 바빴고, 언제나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었으며, 그 안에서 배우고 깨우치는 것들도 많았다.
“제가 원래 원칙과 기본을 중시하는 꼬장꼬장한 성격이라 제가 힘든 것 이상으로 애들도 힘들었을 거예요. 작은학교에서 나와 바깥에서 새로운 길들을 모색하는 세월을 보내면서 졸업생들이 기억하는 강성 원칙주의자의 모습을 제 스스로 인정할 수 있게 되었죠. 그러면서 저도 좀 유연해지고, 주변과 타협하고 어울리려고 노력을 많이 기울이게 된 것 같아요. 뭐 여전히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 텃밭을 일구다
그리고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된 짝꿍 한나씨를 만나 가족이 되었다. 실상사 공양간의 노보살님, 입석보살님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렇게 부르신다고. “어이, 쌍딩이!“
2014년 인드라망 대학의 1기생으로 들어 온 한나씨는 성향도 성격도 형민씨와 많이 달랐지만, 가치관과 지향점이 누구보다 잘 맞았고, 몇 년 동안 친구로 지내며 가까워지다 어느새 평생의 길동무가 되었다. 세심하고 성실한 만큼 걱정도 압박감도 잘 느끼는 형민씨라면, 좀 더 큰 그림을 보며 만사를 여유있게 대하는 성격의 한나씨가 있어서 두 사람은 기특하고 슬기롭게 함께살이를 하고 있는 중이다.
“제가 소출도 안 나는 토종 씨앗들을 심고는 혼자 밭에서 씨름하고 있는 걸 보며 짝꿍이 맨날 툴툴거려요. 그래도 몇 년전부터 키우고 있는 남원토종 감자는 꽤 맛있다는 평을 듣고 있고 제법 수확량도 돼서 인제는 좀 어깨를 펴고 있죠. 하하”
좀 더 넓은 공동체 속에서 살아보기로 결정하고 작은학교를 그만둔 지 6년째, 동료 교사들과 아이들과의 관계가 숙제의 중심이었던 공간에서, 산내 안팎의 여러 영역에서 활동하는 요 몇 년 동안 오히려 마을 살이의 어려움을 더 체감하고 있다. 불편한 관계를 피할 수 있는 도시에 비해, 마을 이웃으로 끊임없이 마주치고, 공동의 일을 도모하고 해결해야 하는 시골 공동체에서는 사람과의 관계가 제일 큰 배움의 장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마을로, 더 넓은 이웃에게로
“사람과의 관계가 제일 어려운 숙제 같아요. 갈등이 생기면 회피할 수 없고, 어떻게든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쉽지 않아서 가슴앓이도 꽤 했죠. 그런데 갈등을 해결하려하지 않고, 견디며, 상황이 바뀌고 관점이 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과정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요. 스스로에 대한 기대나 사람들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더라도 다른 눈으로 바라보려는 노력도 필요한 것 같고요. ”
보이는 것처럼 늘 평안하고 웃음이 넘치는 삶만은 아니었다. 학교 선생님에서 한생명에 속한 활동가로 넓어진 영역에서 일하며 일련의 상황들을 처리해내느라 스트레스와 압박감에 시달렸고, 힘든 마음은 고스란히 몸으로 싸움터를 옮겨와 몇 년 전부터 여기저기 몸이 무너지기 시작해서 한동안은 도시를 오가며 치료를 받아야 했다.
다만 그 과정은 스스로에겐 약이 된 시간이기도 했다. 늘 이웃과 공동체의 안녕을 향해있던 시선을 안으로 돌려서, 상처받고 무너진 스스로를 돌보고 살피는 것에 좀 더 집중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조금씩 좋아지는 몸을 따라 의욕과 활기가 도는 요즘에는 다시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들도 우후죽순처럼 고개를 들고 있다.
“생각해보니 40대가 된 지금 이 순간들이 내 삶에서 가장 바쁘고 활동적으로 살아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더라고요. 이웃이나 공동체에 좀 더 참여하고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많이 하고 싶은 때이기도 하고요. 제가 하는 일이 마을의 여러 틈새를 찾아서 소소하게 메우는 역할이라면 그것도 나름 재미있고 보람이 있어요.”
벽이 있는 곳에 틈이 있다
수 년 전에 부모님도 서울을 떠나 아들이 있는 산내에 정착하시면서 형민씨는 뭔가 더 어엿한 시골 사람의 모양새가 되었다. 물론 칠순을 넘은 아버지는 아직도 시골살이에 적응하시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이곳은 ‘칠십대가 뿌리를 새로 내리기에는 애매한’ 환경이기도 하고. 사실 청년에게도, 어린 자녀가 있는 가족에게도, 은퇴 후 새로운 귀촌의 삶을 시작한 이들에게도 각자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만만찮은 곳이 시골살이가 아니던가. 그럴수록 투덜대며 불평거리를 찾기보다는, 있는 자리에서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고 소용이 될 수 있는 일을 살피는 틈새꾼의 역할을 형민씨는 기꺼이 자청하고자 한다.
요즘에는 산내와 주변 마을을 연결하여 ‘재활용센터’를 건립하고자 하는 구상을 마을의 여러 동료들과 하고 있다. 자전거 수리점이나 살림꽃 공방, 나눔꽃과 같은 산내의 작은 재활용 공간을 묶어서 여럿이 공간을 활용하면서 보다 창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종합공간이 있다면 좋겠다는 누군가의 제안에서 비롯된 아이디어이다.
“그런데 산내는 규모가 너무 작고 위치가 외진 곳이라 인월과 같이 다른 지역에서도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재활용센터를 만들면 어떨까 싶어요. 산내를 넘어 이 지역 공동체 전체가 함께 참여하고 누릴 수 있는 방식을 고민중입니다.”
이렇게 많은 일을 도모하고 참여하고 꾸려가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걸까? 되는 일보다 안되는 일이 많은 시골살이와 공동체의 살림에서 좌절과 고립감을 느끼는 일이 어디 없겠는가?
세상과 사람에 대한 믿음, 우리 모두가 선의를 가지고 각자의 손을 뻗어 세상에 내민다면 좀 더 너그럽고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라는 불교의 가치관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살아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매일 인드라망 공동체 식구들과 나누는 공부 모임이나, 간간히 참석하는 몸 살림이며, 혼자 몰두하는 텃밭 가꾸기를 자양분으로 삼아서.
늘 웃고 있는 반달눈이 그를 한때 ‘산내에서 가장 잘생긴 삼촌’으로 만들었지만 타고난 천성이 소심하고 수줍음이 많아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 자리에 언제나 편안함을 느낀다는 형민씨. 그러니 어디에서고 형민씨가 모임에서 큰소리로 사람들을 이끄는 모습을 찾아보긴 어렵다. 벌어진 틈을 찾는 일에도, 메우는 일에도 촉수가 발달한, 지도자보다는 조력자의 자리가 편안한 사람이라니, 이 소란스러운 관종의 시대에, 각자도생의 세상에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그러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형민씨를 만난다면, 조용한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기로 하자. 박수도 인사도 좋지만 가장 좋은 응원은, 받은 도움을 조건 없이 다른 누군가에게 돌려주는 것. 동참의 의미에 잠시 마음을 기울여보자.
진행 / 자유
글 / 이덕임
사진 / 한형민 제공
※ 이 인터뷰는 브라이언임팩트의 지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