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수해 그 이후 - 여는 말
통행이 통제된 도로가 여전히 많았다. 아직 상수도가 복구되지 않았다는 마을도 있었다. 가까운 산과 언덕 곳곳에 산사태로 흘러내린 붉은 흙이 조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 장화에 목장갑, 흙투성이 옷차림을 하고 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는 것이 특별하지 않은 시기였다. 폭우로 삶의 터전이 엉망이 된 이웃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경남 산청 의료복지 사회적 협동조합(이하 산청 의료사협)’과 함께 복구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시기에 단체 ‘그늘과 언덕’은 ‘지리산이음’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지금 어떤 형태로든 기록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은 아마 2020년 구례 수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경험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산청 수해 복구를 응원하며 엿새동안 산청에 식사를 챙겨 준 하동 HAB(Happy All Beings)의 수진이 수해 복구 활동의 과정을 누군가 기록해야 할 것 같은데 산청 사람들은 그럴 여력도 정신도 없을 것 같아 자료를 모아 정리중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늘과 언덕’은 급히 ‘산청 의료사협’과 논의하여 수해와 그 복구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정하고 기록활동가를 섭외했다. 다행히 가장 가까운 이웃인 하동과 함양에서 수진과 자야, 두 분의 기록활동가가 기꺼이 기록작업을 맡아 주셨다. ‘지리산이음’과 ‘산청 의료사협’이 지원하고 ‘그늘과 언덕’이 주관단체로 진행하는 산청의 수해와 그 회복과 복구의 기록은 그렇게 시작했다. 이 기록을 읽는 이들에게 당시 기준으로 ‘현재의 목소리’를 ‘사실적’으로 전달하여 재난을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가 당사자 또는 이웃으로서 해야 할 역할들을 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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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살아 돌아온 거, 그게 젤 기쁘더라고예”
신안면 상정마을 박창웅 농부 인터뷰
글/ 자야

산청군 신안면 상정마을로 귀농해 멜론과 토종파를 키우는 박창웅 농부.
새벽에 일어나면 풀베기부터 한다. 몇 시간 동안 속옷이 흠뻑 젖도록 예초기를 돌리고 낫질을 하는데도 하우스 한 동의 풀을 정리하는 데 며칠씩 걸린다.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주렁주렁 열린 멜론들이 탐스럽게 익어가던 그의 하우스는, 현재 5개 동 전부 열대우림처럼 변해 있다. 지난 7월 19일, 상정마을 인근 제방이 무너지면서 작물들은 죄 쓸려나가고 대신 그 자리를 풀들이 차지한 탓이다. 그나마 하우스 골조가 멀쩡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농장이 마을에서 좀 떨어져 있기 때문. 하지만 이를 위안으로 삼기엔 피해가 너무 컸다.
“올해 처음으로 멜론을 한살림에 납품하기로 계약을 했다고예. 전량 다 해달라고 해서 익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며칠 뒤에 따면 되겠구나, 그라고 있었는데 참말로……”
산청군 신안면 상정마을에서 17년째 농사를 짓고 있다는 박창웅(65) 씨를 만나러 간 9월 중순 어느 날, 그는 이제 막 풀 작업을 마친 하우스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올해 멜론은 끝났으니 먹고살려면 배추와 무라도 심어야 한다”고 말하는 그의 등 너머로 푸릇푸릇한 아기 배추들로 빼곡한 모종판이 보였다.
멜론 쓸려나간 자리에 배추 모종을 심다
오랫동안 부산에서 살던 박창웅 씨는 2008년에 산청군으로 이주했다. 시골로 내려온 사연이 그리 근사하지는 않다. 1988년에 후배를 도와주려고 시작한 일이 사기를 당하면서 16억이라는 큰 빚으로 이어졌고, 그것을 갚느라 돈과 사람에 지칠 대로 지쳐 도망치듯 도시를 빠져나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귀농이 충동적인 결정은 아니었다. 2천년대 초반부터 농사에 관심과 열정을 갖게 된 그는 2003년 경상대학교에 들어가 ‘농학’을 공부하는 등 나름의 준비를 했고, 그 과정에서 유기농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또 귀농과 동시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지금껏 한결같이 농부와 연구자의 길을 동시에 걸어왔다.
“첫 선생님을 잘 만난기라. 그분 영향으로 ‘농업은 곧 생명’이라는 가치관을 갖게 됐고 인간이라면 한번 도전해볼 만한 일이라 생각했지예. 큰 뜻을 품고 농사를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못 먹을 거면 땅에 치지 말자, 그 원칙 하나는 어떻게든 지켰다 아입니까. 지금도 유기농과 육묘는 계속 연구하고 있어요. 공부는 끝이 없는 기라예.”
이십 년간 빚을 갚느라 가난했던 그는 얼마 안 되는 잔고에 딱 맞추어 이곳 상정마을로 들어왔고, 몇 년 후에 비로소 빚을 완전히 청산했다. 당시에는 그도 주변 농가들처럼 딸기를 키우고 있었다. 시설을 들이는 대신 땅에 두둑을 올려 짓는 전통적인 ‘토경재배’로 딸기를 생산했는데, 유기농 인증받은 지 3년째 되는 해에 잔류농약이 검출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알고 보니 비가 좀 많이 내리면 물과 함께 다른 농가의 흙이 쓸려 들어오는 게 원인이었다. 작물을 바꾼다고 이런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날씨가 아무리 더워도 하우스 차단기를 내리는 등 대처를 하고는 있지만, 저지대에서 유기농이나 무농약으로 농사짓는 것은 여전히 고되고 신경이 많이 쓰이는 일일 수밖에 없다.
“딸기 농사는 여름철이 한가한 편이라 노느니 취미 삼아 해보자 싶어 멜론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마침 산청엔 멜론 농가가 별로 없으니까 경쟁력이 있겠다 해서 본격적으로 달려든 거라. 또 지는 토종작물에 관심이 많아요. 한국인이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 여기 상능에서는 멜론 천 평, 저짝에 있는 후천마을에서는 토종파 천 평, 그렇게 무농약으로 농사를 짓고 있지예.”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은 늘 교차하며 온다던가. 올해부터 멜론 전량을 한살림에 납품한다는 계약을 성사시키고 나서 “이제야 농사로 돈 좀 버나 보다” 싶어 들떴던 마음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애지중지 키워온 황금빛 멜론들이 수확 직전 물에 휩쓸려가고 말았다. (이보다는 덜하나 후천마을에서 키우던 토종파도 침수 피해를 입었다.) 산청에 폭우가 쏟아진 7월 19일, 신안면에서도 상정을 포함한 몇몇 마을의 피해가 유난히 컸던 이유는 양천강 제방 곳곳이 터졌기 때문이다. 그날 오이를 따다가 순식간에 물이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바람에 급하게 하우스를 나왔다는 박창웅 씨는 “저 밑에서부터 물이 막 밀려드는 것을 보고서는 끌고 나온 오이 구루마를 내던져삤다”고 했다.
“우선은 급한 마음에 개들 목줄부터 풀어주고 고양이들은 안 보여서 그냥 차를 탔는데 발판까지 물이 차서 시동이 안 걸리는 거라예. 몇 번 시도한 끝에 겨우 빠져나와 언덕 위로 대피해서 보니까 한 시간도 안 돼서 하우스가 다 잠기고 전봇대까지 차오르더라고.”
망연자실한 그를 일으켜 세운 지역 사람들


물이 빠지고 드러난 농장 모습. 곳곳이 쓰레기와 토사로 뒤덮여 있다. (이하 사진들은 박창웅 농부 제공)
다음 날 아침에 와보니 뼈대만 남은 하우스는 토사로 덮여 있고 창고 겸 농막으로 사용해온 컨테이너는 남의 밭에 처박혀 있었다. 얼마 전 아내를 위해 새로 지은 작은 농막 역시나 온통 물에 불어 엉망이 된 상태였다. 하룻밤을 모텔에서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온 박창웅 씨 부부는 그 처참한 장면 앞에서 말을 잃었다. 아내는 하우스 앞에 주저앉아 울기만 했고, 남편은 그런 아내를 위로할 수조차 없어 먼 산만 바라보았다.
삶의 기반이 폐허가 되어버렸다고 해서 망연자실한 상태로 계속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그는 먼저 거주 공간을 손보기 시작했다. 귀농 전 오랫동안 건설업에 종사했을 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건설업 사업증을 보유하고 있는 그에게는 다행히 기술이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던 탓일까. 그는 일하던 중에 다리를 다쳐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그의 말마따나 “엎친 데 덮친” 격이자 “눈앞이 다시 한번 캄캄해지는” 순간이었다.
“열흘 정도 입원하고 나왔는데 막막하데예. 몸이 성치 않으니까 한다고 하는데도 복구가 금방 안 되는기라. 그러다 하루는 목발 짚고 절뚝이면서 밥을 먹으러 가다가 의료사협 김명철 원장님을 만났다고. 그분이 날 보고 좀 어떠십니까 묻길래 이러저러하다고 상황을 얘기했더니, 아니 그런 걸 왜 지금 말하냐면서 얼른 사람 보내줄게요, 그러시는 거라.”
그다음 날, 그이 혼자 애쓰던 현장에는 산청의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과 주민 모임 <그늘과언덕>에서 조직한 자원봉사자들이 몰려왔다. 장정들 여럿이 달라붙으니 농막 안에서 물 먹은 채 방치되어 있던 무거운 세간들이 하나씩 밖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복구 작업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버릴 것과 씻어서 다시 사용할 것을 가리는 일이며 도배 장판을 새로 하는 일이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다. 그 이후로도 자원봉사 활동은 며칠 더 이어져 그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
“의료사협이니 그늘과언덕 같은 산청의 시민단체에서 정말 많이 도와줘서 이 정도나마 복구가 되고 배추 모종도 심고 할 수 있는 거라예. 우리 다 ‘목화장터’에서 알게 된 사람들 아입니까. 사실 여기 처음 와서는 시골이라는 데가 외지인이 들아와 살기에는 참 힘든 곳이구나 했지요. 텃세와 배척이 심해서 떠나고 싶을 때도 많았고. 그런데 목화장터에만 나가면 기분이 좋은 거라. 아무나 오라카라 하고 누가 오든 배려를 해주니까. 시골에 이리 좋은 모임과 단체가 있다는 게 너무 반가워서 3년 동안 내가 키우는 멜론 하고 토종파 하고 짊어지고 목화장터에 빠짐없이 나갔다고. 농사짓다 보면 시간이 없을 때가 많지만 그날만큼은 놀러 간다, 소풍 간다는 생각으로다가 그리했는데 이번에도 그분들 도움을 이리 받았으니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목화장터’에서 동료 농민들과 함께한 박창웅 씨(맨 오른쪽).
보상보다 절실한 것은 ‘잊히지 않는’ 것
수해를 입었다고 하면 바깥사람 열에 아홉은 ‘보상’을 궁금해하며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작 피해 당사자들은 본인들이 받게 될 보상금 액수나 지급 시기에 대해 알지 못한다. 자치단체에서 하는 피해조사에 응하면서도, 이것이 실제 입은 손실을 온전히 보전할 만큼의 보상으로 이어지리라 생각하는 사람 또한 많지 않다. 농민들 사이에서 “주면 좋고 안 줘도 할 수 없다”거나 “주는 대로 받아야지 별수 있겠나” 식의, 포기와 냉소가 조금씩 뒤섞인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박창웅 농부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에 가장 큰 피해를 본 멜론은 물론 토종파도 보험 대상이 아니어서 사실상 나라에서 주는 ‘재난지원금’ 외에는 기댈 수 있는 자원이 없는데도 “그런 거엔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농작물 외에도 보유하고 있던 건설 자재들이 다 쓸려가서 피해액이 몇억 규모로 상당히 큰데 얼마 안 되는 지원금으로 그게 메꿔지겠냐는 의미다.
“나는 예전에 빚 때문에 식겁했던 사람이라 농사지으면서는 빚을 하나도 안 졌다고요. 그런데 지금은 뭐 어쩔 수 있나, 융자를 받아야지. 그것도 자격이 돼야 받는 거라서 안 주면 어쩔 수 없고. 융자받으면 내년 농사에 필요한 멜론 씨앗부터 사야지예. 무농약은 무조건 씨앗부터 시작해야지 시장에서 파는 모종은 약을 엄청 쳐서 안 되는기라. 약 안 친 씨앗은 비싸요. 약을 한 씨앗이 한 봉다리에 삼사천 원이라면 안 한 건 십오만 원 이상이라.”
어찌어찌 융자를 받아 내년 농사는 준비한다고 쳐도 당장 생활은 어떻게 꾸려가야 할까. 아내가 일을 다니고 자신도 짬짬이 일당벌이로 ‘노가다’를 뛰고 있다는 그는 “그렇게밖에 더하겠는교”라고 탄식하면서도 ‘스스로 일어서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스스로 일어서는 데는 돈보다도 지속적인 ‘관심’이 더 큰 도움과 희망이 된다고도 덧붙였다. 절망 가운데서도 삶을 이어가기 위해 애쓰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음을 잊지 말아 달라고.
“자빠져서 아프다고 잉잉대는 것보담은 얼른 일어나서 파스라도 바르는 게 낫다 아입니까. 나는 옛날에 하도 큰일을 당해서 그런가, 힘들긴 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겠다 싶더라고. 몇십억 되는 빚을 이십삼 년 만에 갚았는데 앞으로 일이 년 더 고생 못 하겠나 싶고. 다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잊지는 않으면 좋겠다는 거라예. 그것만으로도 힘이 되니까.”
그래도 산청은 살 만하고 삶은 계속된다
얼마 전 도배 장판을 새로 했다는 농막은 아직 어수선한 분위기다. “정리할 여력이 없어 집 안이 엉망”이라는 그는, 장롱을 못 쓰게 되어 새로 주문한 ‘비키니 옷장’이 엊그제 도착했다며 “이제 이불과 옷을 하나씩 정리해 넣으면 좀 낫겠제” 한다. 농막 주변에는 7월 19일에 목줄을 풀어주었다는 세 마리 개가 어슬렁대며 그의 사소한 기척 하나하나에 세심하게 반응하고, 어디선가 소리도 없이 나타난 고양이 한 마리는 일순간 풀쩍 뛰어올라 그의 품에 안겨 갸르릉 소리를 내고 있다. 마침 초가을의 맑은 햇살이 내리쬐어서인가. 그 풍경만 뚝 떼 내어 보자면 언제 수해가 있었나 싶게 평화로워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다.
“다 잃었지만 그래도 기쁜 건 얘들이 다 살아왔다는 거지예. 개 세 마리는 하우스 지붕에 올라가 있다가 물이 빠지면서 내려왔고, 고양이 다섯 마리는 며칠 안 보이더니 여드레 만에 나타났어요. 에미 ‘꼬물이’가 삐쩍 마른 몰골로 새끼 네 마리를 데리고 저쪽에서 걸어오는데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농사는 생명을 짓고 살리는 일이잖아요. 내가 그런 일을 하니까 얘들도 죽지 않고 다 살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농장에서 함께 지내는 반려견과 반려묘. 박창웅 농부는 모든 게 쓸려간 물난리에도 이들이 살아남은 것이 가장 기쁘다 했다.
모두 여덟 마리의 개와 고양이가 다 살아 그의 곁을 맴돌듯, 올해는 어이없이 날려버린 농사도 내년부터는 그 시작과 중간과 끝이 전부 온전할 것이라 그는 믿고 있다. 그리하여 다시 목화장터에 나가 멜론과 토종파를 팔면서 오가는 사람들과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리라는 것도. 박창웅 농부가 이런 믿음을 갖게 되기까지는 어려운 중에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준 많은 이들이 있었다. 살면서 겪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큰일이 지나간 후에 “그래도 산청이 살 만한 곳”이라 그가 생각하게 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쉽게 허물어지지 않을 그 믿음 속에서 그의 일상과 삶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 위 원고는 9월 중순에 이루어진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박창웅 농부님께 요즘 근황을 여쭤보니 “배추를 열심히 키우고 있다”며 사진을 보내주셨습니다.

글쓴이_ 자야
함양에 산 지 17년째. 새벽 산책과 새 관찰, 지치지 않을 정도의 텃밭일, 읽고 쓰고 노래하는 것, 용기 있고 다정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일을 좋아한다.
※ 이 인터뷰는 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브라이언임팩트, 지리산이음의 지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산청, 수해 그 이후 - 여는 말
통행이 통제된 도로가 여전히 많았다. 아직 상수도가 복구되지 않았다는 마을도 있었다. 가까운 산과 언덕 곳곳에 산사태로 흘러내린 붉은 흙이 조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 장화에 목장갑, 흙투성이 옷차림을 하고 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는 것이 특별하지 않은 시기였다.
폭우로 삶의 터전이 엉망이 된 이웃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경남 산청 의료복지 사회적 협동조합(이하 산청 의료사협)’과 함께 복구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시기에 단체 ‘그늘과 언덕’은 ‘지리산이음’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지금 어떤 형태로든 기록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은 아마 2020년 구례 수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경험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산청 수해 복구를 응원하며 엿새동안 산청에 식사를 챙겨 준 하동 HAB(Happy All Beings)의 수진이 수해 복구 활동의 과정을 누군가 기록해야 할 것 같은데 산청 사람들은 그럴 여력도 정신도 없을 것 같아 자료를 모아 정리중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늘과 언덕’은 급히 ‘산청 의료사협’과 논의하여 수해와 그 복구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정하고 기록활동가를 섭외했다. 다행히 가장 가까운 이웃인 하동과 함양에서 수진과 자야, 두 분의 기록활동가가 기꺼이 기록작업을 맡아 주셨다. ‘지리산이음’과 ‘산청 의료사협’이 지원하고 ‘그늘과 언덕’이 주관단체로 진행하는 산청의 수해와 그 회복과 복구의 기록은 그렇게 시작했다. 이 기록을 읽는 이들에게 당시 기준으로 ‘현재의 목소리’를 ‘사실적’으로 전달하여 재난을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가 당사자 또는 이웃으로서 해야 할 역할들을 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애들 살아 돌아온 거, 그게 젤 기쁘더라고예”
신안면 상정마을 박창웅 농부 인터뷰
글/ 자야
산청군 신안면 상정마을로 귀농해 멜론과 토종파를 키우는 박창웅 농부.
새벽에 일어나면 풀베기부터 한다. 몇 시간 동안 속옷이 흠뻑 젖도록 예초기를 돌리고 낫질을 하는데도 하우스 한 동의 풀을 정리하는 데 며칠씩 걸린다.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주렁주렁 열린 멜론들이 탐스럽게 익어가던 그의 하우스는, 현재 5개 동 전부 열대우림처럼 변해 있다. 지난 7월 19일, 상정마을 인근 제방이 무너지면서 작물들은 죄 쓸려나가고 대신 그 자리를 풀들이 차지한 탓이다. 그나마 하우스 골조가 멀쩡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농장이 마을에서 좀 떨어져 있기 때문. 하지만 이를 위안으로 삼기엔 피해가 너무 컸다.
“올해 처음으로 멜론을 한살림에 납품하기로 계약을 했다고예. 전량 다 해달라고 해서 익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며칠 뒤에 따면 되겠구나, 그라고 있었는데 참말로……”
산청군 신안면 상정마을에서 17년째 농사를 짓고 있다는 박창웅(65) 씨를 만나러 간 9월 중순 어느 날, 그는 이제 막 풀 작업을 마친 하우스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올해 멜론은 끝났으니 먹고살려면 배추와 무라도 심어야 한다”고 말하는 그의 등 너머로 푸릇푸릇한 아기 배추들로 빼곡한 모종판이 보였다.
멜론 쓸려나간 자리에 배추 모종을 심다
오랫동안 부산에서 살던 박창웅 씨는 2008년에 산청군으로 이주했다. 시골로 내려온 사연이 그리 근사하지는 않다. 1988년에 후배를 도와주려고 시작한 일이 사기를 당하면서 16억이라는 큰 빚으로 이어졌고, 그것을 갚느라 돈과 사람에 지칠 대로 지쳐 도망치듯 도시를 빠져나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귀농이 충동적인 결정은 아니었다. 2천년대 초반부터 농사에 관심과 열정을 갖게 된 그는 2003년 경상대학교에 들어가 ‘농학’을 공부하는 등 나름의 준비를 했고, 그 과정에서 유기농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또 귀농과 동시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지금껏 한결같이 농부와 연구자의 길을 동시에 걸어왔다.
“첫 선생님을 잘 만난기라. 그분 영향으로 ‘농업은 곧 생명’이라는 가치관을 갖게 됐고 인간이라면 한번 도전해볼 만한 일이라 생각했지예. 큰 뜻을 품고 농사를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못 먹을 거면 땅에 치지 말자, 그 원칙 하나는 어떻게든 지켰다 아입니까. 지금도 유기농과 육묘는 계속 연구하고 있어요. 공부는 끝이 없는 기라예.”
이십 년간 빚을 갚느라 가난했던 그는 얼마 안 되는 잔고에 딱 맞추어 이곳 상정마을로 들어왔고, 몇 년 후에 비로소 빚을 완전히 청산했다. 당시에는 그도 주변 농가들처럼 딸기를 키우고 있었다. 시설을 들이는 대신 땅에 두둑을 올려 짓는 전통적인 ‘토경재배’로 딸기를 생산했는데, 유기농 인증받은 지 3년째 되는 해에 잔류농약이 검출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알고 보니 비가 좀 많이 내리면 물과 함께 다른 농가의 흙이 쓸려 들어오는 게 원인이었다. 작물을 바꾼다고 이런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날씨가 아무리 더워도 하우스 차단기를 내리는 등 대처를 하고는 있지만, 저지대에서 유기농이나 무농약으로 농사짓는 것은 여전히 고되고 신경이 많이 쓰이는 일일 수밖에 없다.
“딸기 농사는 여름철이 한가한 편이라 노느니 취미 삼아 해보자 싶어 멜론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마침 산청엔 멜론 농가가 별로 없으니까 경쟁력이 있겠다 해서 본격적으로 달려든 거라. 또 지는 토종작물에 관심이 많아요. 한국인이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 여기 상능에서는 멜론 천 평, 저짝에 있는 후천마을에서는 토종파 천 평, 그렇게 무농약으로 농사를 짓고 있지예.”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은 늘 교차하며 온다던가. 올해부터 멜론 전량을 한살림에 납품한다는 계약을 성사시키고 나서 “이제야 농사로 돈 좀 버나 보다” 싶어 들떴던 마음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애지중지 키워온 황금빛 멜론들이 수확 직전 물에 휩쓸려가고 말았다. (이보다는 덜하나 후천마을에서 키우던 토종파도 침수 피해를 입었다.) 산청에 폭우가 쏟아진 7월 19일, 신안면에서도 상정을 포함한 몇몇 마을의 피해가 유난히 컸던 이유는 양천강 제방 곳곳이 터졌기 때문이다. 그날 오이를 따다가 순식간에 물이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바람에 급하게 하우스를 나왔다는 박창웅 씨는 “저 밑에서부터 물이 막 밀려드는 것을 보고서는 끌고 나온 오이 구루마를 내던져삤다”고 했다.
“우선은 급한 마음에 개들 목줄부터 풀어주고 고양이들은 안 보여서 그냥 차를 탔는데 발판까지 물이 차서 시동이 안 걸리는 거라예. 몇 번 시도한 끝에 겨우 빠져나와 언덕 위로 대피해서 보니까 한 시간도 안 돼서 하우스가 다 잠기고 전봇대까지 차오르더라고.”
망연자실한 그를 일으켜 세운 지역 사람들
물이 빠지고 드러난 농장 모습. 곳곳이 쓰레기와 토사로 뒤덮여 있다. (이하 사진들은 박창웅 농부 제공)
다음 날 아침에 와보니 뼈대만 남은 하우스는 토사로 덮여 있고 창고 겸 농막으로 사용해온 컨테이너는 남의 밭에 처박혀 있었다. 얼마 전 아내를 위해 새로 지은 작은 농막 역시나 온통 물에 불어 엉망이 된 상태였다. 하룻밤을 모텔에서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온 박창웅 씨 부부는 그 처참한 장면 앞에서 말을 잃었다. 아내는 하우스 앞에 주저앉아 울기만 했고, 남편은 그런 아내를 위로할 수조차 없어 먼 산만 바라보았다.
삶의 기반이 폐허가 되어버렸다고 해서 망연자실한 상태로 계속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그는 먼저 거주 공간을 손보기 시작했다. 귀농 전 오랫동안 건설업에 종사했을 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건설업 사업증을 보유하고 있는 그에게는 다행히 기술이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던 탓일까. 그는 일하던 중에 다리를 다쳐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그의 말마따나 “엎친 데 덮친” 격이자 “눈앞이 다시 한번 캄캄해지는” 순간이었다.
“열흘 정도 입원하고 나왔는데 막막하데예. 몸이 성치 않으니까 한다고 하는데도 복구가 금방 안 되는기라. 그러다 하루는 목발 짚고 절뚝이면서 밥을 먹으러 가다가 의료사협 김명철 원장님을 만났다고. 그분이 날 보고 좀 어떠십니까 묻길래 이러저러하다고 상황을 얘기했더니, 아니 그런 걸 왜 지금 말하냐면서 얼른 사람 보내줄게요, 그러시는 거라.”
그다음 날, 그이 혼자 애쓰던 현장에는 산청의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과 주민 모임 <그늘과언덕>에서 조직한 자원봉사자들이 몰려왔다. 장정들 여럿이 달라붙으니 농막 안에서 물 먹은 채 방치되어 있던 무거운 세간들이 하나씩 밖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복구 작업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버릴 것과 씻어서 다시 사용할 것을 가리는 일이며 도배 장판을 새로 하는 일이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다. 그 이후로도 자원봉사 활동은 며칠 더 이어져 그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
“의료사협이니 그늘과언덕 같은 산청의 시민단체에서 정말 많이 도와줘서 이 정도나마 복구가 되고 배추 모종도 심고 할 수 있는 거라예. 우리 다 ‘목화장터’에서 알게 된 사람들 아입니까. 사실 여기 처음 와서는 시골이라는 데가 외지인이 들아와 살기에는 참 힘든 곳이구나 했지요. 텃세와 배척이 심해서 떠나고 싶을 때도 많았고. 그런데 목화장터에만 나가면 기분이 좋은 거라. 아무나 오라카라 하고 누가 오든 배려를 해주니까. 시골에 이리 좋은 모임과 단체가 있다는 게 너무 반가워서 3년 동안 내가 키우는 멜론 하고 토종파 하고 짊어지고 목화장터에 빠짐없이 나갔다고. 농사짓다 보면 시간이 없을 때가 많지만 그날만큼은 놀러 간다, 소풍 간다는 생각으로다가 그리했는데 이번에도 그분들 도움을 이리 받았으니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목화장터’에서 동료 농민들과 함께한 박창웅 씨(맨 오른쪽).
보상보다 절실한 것은 ‘잊히지 않는’ 것
수해를 입었다고 하면 바깥사람 열에 아홉은 ‘보상’을 궁금해하며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작 피해 당사자들은 본인들이 받게 될 보상금 액수나 지급 시기에 대해 알지 못한다. 자치단체에서 하는 피해조사에 응하면서도, 이것이 실제 입은 손실을 온전히 보전할 만큼의 보상으로 이어지리라 생각하는 사람 또한 많지 않다. 농민들 사이에서 “주면 좋고 안 줘도 할 수 없다”거나 “주는 대로 받아야지 별수 있겠나” 식의, 포기와 냉소가 조금씩 뒤섞인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박창웅 농부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에 가장 큰 피해를 본 멜론은 물론 토종파도 보험 대상이 아니어서 사실상 나라에서 주는 ‘재난지원금’ 외에는 기댈 수 있는 자원이 없는데도 “그런 거엔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농작물 외에도 보유하고 있던 건설 자재들이 다 쓸려가서 피해액이 몇억 규모로 상당히 큰데 얼마 안 되는 지원금으로 그게 메꿔지겠냐는 의미다.
“나는 예전에 빚 때문에 식겁했던 사람이라 농사지으면서는 빚을 하나도 안 졌다고요. 그런데 지금은 뭐 어쩔 수 있나, 융자를 받아야지. 그것도 자격이 돼야 받는 거라서 안 주면 어쩔 수 없고. 융자받으면 내년 농사에 필요한 멜론 씨앗부터 사야지예. 무농약은 무조건 씨앗부터 시작해야지 시장에서 파는 모종은 약을 엄청 쳐서 안 되는기라. 약 안 친 씨앗은 비싸요. 약을 한 씨앗이 한 봉다리에 삼사천 원이라면 안 한 건 십오만 원 이상이라.”
어찌어찌 융자를 받아 내년 농사는 준비한다고 쳐도 당장 생활은 어떻게 꾸려가야 할까. 아내가 일을 다니고 자신도 짬짬이 일당벌이로 ‘노가다’를 뛰고 있다는 그는 “그렇게밖에 더하겠는교”라고 탄식하면서도 ‘스스로 일어서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스스로 일어서는 데는 돈보다도 지속적인 ‘관심’이 더 큰 도움과 희망이 된다고도 덧붙였다. 절망 가운데서도 삶을 이어가기 위해 애쓰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음을 잊지 말아 달라고.
“자빠져서 아프다고 잉잉대는 것보담은 얼른 일어나서 파스라도 바르는 게 낫다 아입니까. 나는 옛날에 하도 큰일을 당해서 그런가, 힘들긴 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겠다 싶더라고. 몇십억 되는 빚을 이십삼 년 만에 갚았는데 앞으로 일이 년 더 고생 못 하겠나 싶고. 다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잊지는 않으면 좋겠다는 거라예. 그것만으로도 힘이 되니까.”
그래도 산청은 살 만하고 삶은 계속된다
얼마 전 도배 장판을 새로 했다는 농막은 아직 어수선한 분위기다. “정리할 여력이 없어 집 안이 엉망”이라는 그는, 장롱을 못 쓰게 되어 새로 주문한 ‘비키니 옷장’이 엊그제 도착했다며 “이제 이불과 옷을 하나씩 정리해 넣으면 좀 낫겠제” 한다. 농막 주변에는 7월 19일에 목줄을 풀어주었다는 세 마리 개가 어슬렁대며 그의 사소한 기척 하나하나에 세심하게 반응하고, 어디선가 소리도 없이 나타난 고양이 한 마리는 일순간 풀쩍 뛰어올라 그의 품에 안겨 갸르릉 소리를 내고 있다. 마침 초가을의 맑은 햇살이 내리쬐어서인가. 그 풍경만 뚝 떼 내어 보자면 언제 수해가 있었나 싶게 평화로워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다.
“다 잃었지만 그래도 기쁜 건 얘들이 다 살아왔다는 거지예. 개 세 마리는 하우스 지붕에 올라가 있다가 물이 빠지면서 내려왔고, 고양이 다섯 마리는 며칠 안 보이더니 여드레 만에 나타났어요. 에미 ‘꼬물이’가 삐쩍 마른 몰골로 새끼 네 마리를 데리고 저쪽에서 걸어오는데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농사는 생명을 짓고 살리는 일이잖아요. 내가 그런 일을 하니까 얘들도 죽지 않고 다 살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농장에서 함께 지내는 반려견과 반려묘. 박창웅 농부는 모든 게 쓸려간 물난리에도 이들이 살아남은 것이 가장 기쁘다 했다.
모두 여덟 마리의 개와 고양이가 다 살아 그의 곁을 맴돌듯, 올해는 어이없이 날려버린 농사도 내년부터는 그 시작과 중간과 끝이 전부 온전할 것이라 그는 믿고 있다. 그리하여 다시 목화장터에 나가 멜론과 토종파를 팔면서 오가는 사람들과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리라는 것도. 박창웅 농부가 이런 믿음을 갖게 되기까지는 어려운 중에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준 많은 이들이 있었다. 살면서 겪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큰일이 지나간 후에 “그래도 산청이 살 만한 곳”이라 그가 생각하게 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쉽게 허물어지지 않을 그 믿음 속에서 그의 일상과 삶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 위 원고는 9월 중순에 이루어진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박창웅 농부님께 요즘 근황을 여쭤보니 “배추를 열심히 키우고 있다”며 사진을 보내주셨습니다.
※ 이 인터뷰는 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브라이언임팩트, 지리산이음의 지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