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수해 그 이후 - 여는 말
통행이 통제된 도로가 여전히 많았다. 아직 상수도가 복구되지 않았다는 마을도 있었다. 가까운 산과 언덕 곳곳에 산사태로 흘러내린 붉은 흙이 조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 장화에 목장갑, 흙투성이 옷차림을 하고 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는 것이 특별하지 않은 시기였다. 폭우로 삶의 터전이 엉망이 된 이웃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경남 산청 의료복지 사회적 협동조합(이하 산청 의료사협)’과 함께 복구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시기에 단체 ‘그늘과 언덕’은 ‘지리산이음’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지금 어떤 형태로든 기록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은 아마 2020년 구례 수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경험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산청 수해 복구를 응원하며 엿새동안 산청에 식사를 챙겨 준 하동 HAB(Happy All Beings)의 수진이 수해 복구 활동의 과정을 누군가 기록해야 할 것 같은데 산청 사람들은 그럴 여력도 정신도 없을 것 같아 자료를 모아 정리중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늘과 언덕’은 급히 ‘산청 의료사협’과 논의하여 수해와 그 복구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정하고 기록활동가를 섭외했다. 다행히 가장 가까운 이웃인 하동과 함양에서 수진과 자야, 두 분의 기록활동가가 기꺼이 기록작업을 맡아 주셨다. ‘지리산이음’과 ‘산청 의료사협’이 지원하고 ‘그늘과 언덕’이 주관단체로 진행하는 산청의 수해와 그 회복과 복구의 기록은 그렇게 시작했다. 이 기록을 읽는 이들에게 당시 기준으로 ‘현재의 목소리’를 ‘사실적’으로 전달하여 재난을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가 당사자 또는 이웃으로서 해야 할 역할들을 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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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생각하면 벌받겠다’ 싶어서,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
단성면 구산마을 딸기 농부 정현옥 인터뷰
글/ 자야
지난 9월 16일, 농부는 ‘마침내’ 딸기 모종을 하우스에 옮겨 심었다. 농막 한 채와 하우스 9개 동이 물에 잠기는 것을 보며 급하게 대피한 이후 꼭 두 달만이었다. 여태까지 심어온 ‘금실’ 품종은 구할 수 없어 대신 ‘설향’을 심었다. 하우스 복구가 아직 덜 끝나는 바람에 규모도 6개 동으로 축소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하는 수 없다고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시시때때로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나 분주하게 일할 때는 괜찮은 것 같다가도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이 오면 머릿속이 텅 비며 멍해지곤 한다. 그러다가는 불현듯 눈물이 차오르고 가슴이 쿵쾅거린다. 통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벌써 몇 달째 이어지고 있는지. 모종이 심기고 하우스 안은 다시 푸르러졌으나 정현옥(57) 농부의 일상은 여전히 뒤틀린 문짝처럼 여기저기서 삐거덕거리며 신음을 토해낸다.

구산마을에서 남편과 <우리두리농장>을 운영하며 딸기를 키우는 정현옥 농부.
농사에 ‘올인’한 인생 2막, 꽃길 대신 위기가
“며칠 전부터 몸이 이상한 거예요. 왼쪽이 감각이 없고 너무 가렵더라고요. 팔은 움직이는데 만져보면 무감각하고 배하고 등을 꼬집어봐도 아무 느낌이 없고. 안 되겠다 싶어서 엊그제 처음으로 면에 있는 병원엘 갔어요. 내 생각엔 물집만 없지 딱 대상포진인 거라. 의사 선생님도 그러더라고요. 대상포진 전조 증상 같다고. 약 받아와 먹고 있는데 차도가 없으면 큰 병원에 가봐야 하나 어쩌나 싶네요.”
산청군 단성면 구산마을.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남사예담촌이 멀지 않은 이 마을에서, 정현옥 씨는 남편과 함께 5년째 딸기 농사를 짓고 있다. 이곳에 자리를 잡기 전에는 본가가 있는 진주 대평에서 역시나 딸기 농사를 지었고, 그전에는 경기도에 살면서 30년 넘게 직장생활을 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몸져눕는 바람에 직장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인생 2막’을 열어젖힌 그이에게, 농사는 갑작스럽기는 해도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성장기 내내 부모님이 농사짓는 것을 보며 자란 그의 몸은 흙과 접촉할 때의 기분이 얼마나 근사한지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흙을 만지거나 밟는 거를 좋아했어요. 할머니하고 고구마 캐고 무시 캐고 하는 게 너무 즐거웠고요. 그때는 흙이 참 부드러웠던 거 같은데 다시 농사짓는다고 만져본 흙은 다르더라고. 대평 하우스를 동생에게 맡기고 여기 구산으로 넘어와 처음 딸기 할 때는 고설(*땅에서 1미터가량 높이에 시설을 설치하여 작물을 재배하는 방식)이 아닌 토경(*땅에 심어 작물을 키우는 재배법)으로 했거든요. 논 자리였던 곳이라 비만 오면 물이 안 빠져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또 그때만 해도 친환경으로 짓는다고 해싸서 땅속이 온통 두더지 길인 거라. 안 되겠다 싶어 시설로 바꾸는 바람에 돈이 많이 들었죠. 직장 다니며 삼십 년 번 돈을 ‘올인’하고도 모자라 빚도 적잖게 졌어요. 50대 아줌마치고는 배포가 좀 많이 컸던 거지.”
중년의 나이에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시설 농사에 뛰어든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현옥 씨에게는 의지와 열정이, 그리고 계획이 있었다. 대평에 살 때만 해도 직장 일을 놓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던 남편 또한 구산에서는 농사일에만 전념하겠다고 결정함으로써 아내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2천3백여 평 규모의 <우리두리농장>은 문을 열었고, 초기 몇 년은 큰 부침 없이 순탄하게 흘러갔다.
그런데 작년 8월 비 내리던 어느 날 저녁, 기계실로 쓰고 있던 하우스에 벼락이 내리쳐 불이 나면서 첫 번째 위기가 찾아온다. 기계실이란 각 하우스의 온도 조절부터 양액과 물의 공급, 차광과 개폐기 작동 등을 관리하는 온갖 기계와 장비들이 설치된 곳으로, 여기에 불이 났다는 것은 곧 경제적 손실이 적지 않음을 의미한다.
“아저씨는 무슨 교육 받으러 가고 나 혼자 농장에 있다가 잠깐 볼일이 있어 나갔는데 그사이에 벼락이 쳤나 봐요. 이웃 농장에 계신 분이 하우스 차단기 내리러 나왔다가 까만 연기가 나는 걸 보고 119에 신고했다 카더라고. 대평 남동생이 어떻게 알고 전화를 해줘서 얼른 집에 돌아왔어요. 그랬더니 진짜로 불자동차가 있고 하우스는 홀라당 타버린 거야. 다리가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죠. 하필이면 기계실이 다 타버리는 바람에 못해도 이삼 억은 손해를 봤어요. 그때는 보험을 잊어삐고 안 들어놔서 손해가 더 컸지. 다행히 지하수 배관이 안 타서 일단 딸기에 물부터 주고, 그러고 나서 저 둑에 가서 삼일 밤낮을 울었어요.”

작년 8월, 기계실로 쓰던 하우스에 불이나 큰 피해를 입었다. (이하 사진들은 정현옥 농부 제공)
‘화재’로 삼 일 울고 다시 일어난 지 일 년 만에 ‘수해’ 입어
그 후 정현옥 씨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버티고 버티다 정 견딜 수 없을 때만 처방받아 온 수면제는 아직 끊지 못한 상태다. 올해 봄, 건강한 딸기 모종 12만 주를 구해다 키우며 작년의 손실을 어느 정도는 메꿀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어보기도 했으나, 이는 지난여름 수해가 나면서 물과 함께 쓸려 내려가고 말았다. 화재 사고 일 년 만에 혹독한 물난리를 겪을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산청군민이라면 이제는 잊을 수 없는 ‘그날’이 된 7월 19일. 신안면의 양천강뿐 아니라 단성면을 흐르는 남사천 일대에서도 여러 군데 제방이 터졌다. 정현옥 씨에 따르면 “점심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논만 잠긴” 정도였던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농막 앞길에까지 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다음부터는 다른 수해 피해자들이 증언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 펼쳐진다. 다급한 대피와 길 위에서의 고립, 걱정과 불안에 뜬눈으로 지새운 밤.
“개 두 마리를 모닝에 태워 빠져나왔어요. 개천이 넘치는데 그 작은 차로 빠져나오려니 무섭더라고요. 찻길로 나오긴 했는데 여기저기 토사가 쌓이고 나무가 쓰러져서 다 막혀 있는 거예요.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돌고 돌다가 겨우 원지 큰길로 나가서 대평 동생네로 갔죠. 그런데 뒤따라 올 줄 알았던 아저씨가 안 오는 거라. 전화를 하니까 개 한 마리가 안 보여서 찾다가 시꺼먼 황토물이 밀려와서 농장 꼭대기에 있는 작은 농막으로 피했대요. 이제 비가 그치고 물이 빠지고 있으니까 괜찮다면서 자기는 거기 있겠다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우스가 다 잠기고 엉망이 됐다는 거예요. 그때 내가 거짓말! 하고 소리쳤는데 다음날 와보니까 남편 말이 사실이더라고요. 우리 농장 너머 제방 가까운 쪽에 농가가 두 군데 더 있거든요. 한 집은 하우스 3개 동, 또 한 집은 8개 동 이렇게 농사를 짓는데, 그게 물에 쓸리면서 우리 농장으로 다 밀려왔어요. 그 하우스들은 뼈대까지 다 무너졌죠. 우리는 하우스 방향이 달라서 물이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그나마 (골조는) 살아남았고.”


올해 7월 폭우 직후부터 복구 전까지의 농장 모습.
쓰레기와 토사로 뒤덮인 농장을 빠져나와 정현옥 씨는 차를 타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물이 빠지면서 드러난 풍경은 참담했다. 하우스들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이 망가졌거나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위태로운 상태였고, 남사로 이어지는 큰길 가 전봇대 또한 모조리 쓰러져 있었다. 강가에는 떠밀려온 농자재들로 가득했는데, 그중엔 <우리두리농장>의 점적호스와 파레트, 물통과 뜯지 않은 상토 포대도 보였다. 거의 다 화재 이후 새로 장만한 것들이었다.
“그걸 보니까 내 재산이 여기 다 있구나, 싶더라고. 아깝지만 저거 건진다고 설쳤으면 우리도 떠내려갔겠죠. 낮이니까 그래도 다행이었지 밤에 그 사달이 났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도 들대예.”
“고만 딱 죽고 싶어도 봉사자들이 틈을 안 주더라고”
몸도 마음도 무기력한 상태였지만 보험이라도 제대로 타려면 증거를 남겨야 해서 우선은 사진을 찍고 동영상도 촬영했다. 좀 있으니 소식을 들은 고향 친구들에게서 전화가 쏟아졌다. 마침 일요일이라 집에서 쉰다며 컵라면에 수박에 이런저런 생필품을 싸 들고 직접 달려온 이들도 여럿이었다. 하지만 평상마저 떠내려간 농장에는 찾아온 이들을 앉힐 데 하나 없었다. 또 “나부터도 뭘 먼저 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나서” 돕겠다고 나선 이들을 오히려 만류하며 “같이 컵라면 끓여 먹고 김밥 먹으면서 그렇게 첫날을 보냈”다.
이튿날에는 면사무소 직원이 찾아와 피해 현황을 조사 중이니 빨리 면에 와서 피해 신고서를 작성하라 했다. 여전히 사방이 막혀 있던 터라 통행이 자유롭지 않을 때였다. 겨우 길이 뚫리면서 수해 이후 처음으로 면에 나가 신고서를 써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일부러 신안면 청현 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 일대 피해가 아주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그래도 상황이 어떤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청현으로 통하는 다리를 딱 건너는 순간 트라우마 생길 거 같아서 남편한테 그랬어요. 빨리 돌아가자고. 내가 우리 농장 엉망진창 된 거 보고도 안 울었거든요? 그런데 그 많은 하우스들이 다 쓰러지고 엎어진 걸 보니까… 진짜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지는데 눈물이 막 쏟아지는 거예요. 저 농가들이 다 어떻게 견딜까, 앞으로 어떻게 살까 싶어서. (임시주거지인) 여관에 가서도 그 장면이 계속 생각나서 밤새 통곡을 했어요.”
보험금에 재난지원금을 다 받는다고 해도 원상복구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정현옥 씨는 며칠을 시름시름 앓았다. 이러다 하나뿐인 자식에게 빚을 떠넘기게 되는 건 아닌가 걱정이 앞섰고, “화재 이후 불면증에 코로나에 턱 디스크까지 와서 겨우겨우 버텼는데 왜 또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려워 화도 났다. <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의료사협)>에서 문자가 날아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수해로 인해 봉사 인력이 필요한 농가는 신청하라’는 내용이 찍혀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청서를 작성하자 다음 날부터 농장에 봉사자들이 찾아왔다. 대개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었다. 아무 조건 없이 남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보면서, 정현옥 씨는 마음에 드리웠던 먹구름이 조금씩 걷히는 느낌을 받았다. 봉사자들이 가고 나면 다시 무기력과 우울감 속으로 침잠했지만, 그 증세가 더 깊어지기 전에 또 다른 봉사자들이 곁에 다가와 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올려 주었다.


자원봉사자들과 군인들이 하우스 안에 쌓인 토사와 쓰레기를 치우고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하루는 봉사자들이 오고 또 하루는 군인들이 오고 그렇게 번갈아서 계속 와주니까 막말로 죽지도 못하겠더라고요. 죽을 틈을 줘야 말이지. 수백 명이 생판 모르는 나를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일해 줬는데 혹여라도 내가 죽을 생각하면 벼락 맞겠다, 싶더라고요. 거기다 내 형편을 아는 친구들은 반찬에 속옷에 작업복에 바리바리 싸 오고 봉투에 돈까지 넣어서 주고, 걔들이 가면 그다음은 동네 아지매들이 걱정된다고 와서 들여다보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저를 살린 거예요. 이번에 진짜 신세를 너무 많이 져서 그거 갚으려면 살아야겠더라고.”
수해 입었다고 설마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겠냐는 말은, 직접 당해보지 않은 이들만 쉽게 던질 수 있다. “다들 쉬쉬해서 그렇지 신안면에서는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정현옥 농부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한다. 단지 물질적인 피해만이 문제는 아니다. 재난은 사람의 마음에 구멍을 내고 혼까지 앗아간다는 것을, 그이 또한 이번에 절감했다. 다행히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들 덕분에 정신 줄을 꽉 움켜쥔 그이는 차근차근 이후의 삶을 준비하며 먼저 ‘보험’ 공부를 시작했다.
허점 많은 보험과 지원에 서로 입 다무는 농민들
농민들이 대개 그렇듯, 정현옥 씨 역시 보험을 들어놓고도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용어가 생소한 데다 내용도 복잡하여 한 번 읽어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약관을 반복해서 읽고 모르는 건 전화로 물어봤다는 정현옥 씨는 “유실된 것에 비해서 보상이 너무 적다는 게 재해보험의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한다. 하우스 골조와 같은 구조체 보상은 그나마 낫지만, 내부 시설의 경우 보상액이 적거나 아예 보상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게 많다는 것. 정현옥 씨의 사례만 봐도 하우스 안에 설치된 양액기와 환풍기, 무인방제기, 베드 등의 보상 한도는 6천만 원인데, 이는 그이가 계산한 실제 피해액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서 보험은 농협의 ‘농작물재해보험’으로 가입 농협에 따라 약관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모종 심는 베드도 철제 부분만 보상이 되지 다른 건 안 돼요. 또 바닥재며 상자며 모종 포트도 다 안 되고. 딸기 농사에서는 모종이 중요한데 그것도 정식한 후에 떠내려간 것만 보상이 되지, 정식 이전에 피해 본 건 아예 해당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 농민들이 죽겠다 하니까 군에서 특별기금 식으로 해서 새로 심는 모종값의 일부를 지원한 거죠. 그치만 전에 심었던 모종값은 이미 마이너스인 거라. 또 보험금은 보통 후지급이잖아요. 우리도 하우스 복구하는 데 필요한 건 다 외상과 융자로 했어요. 하루라도 빨리 모종을 심어야 하는데 어떡해요. 일단 빌려서라도 해야지.”

‘외상’과 ‘융자’로 재건한 하우스.
남의 돈과 노동으로 시설을 복구해서 모종은 심어놨지만, 이마저도 평년의 70퍼센트 수준이어서 수확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은 감소할 수밖에 없다. 또 가까운 미래에 보험금이 지급되어도 이번에 새로 진 빚을 다 갚을 만큼은 안 된다. 보험 외 믿을 건 지자체에서 지급하는 재난지원금이 유일한데 얼마 전 통장에 찍힌 금액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지자체의 재난 정책과 복구 계획이 무엇이고 피해 산정의 정확한 기준은 무엇인지 공유되지 않은 탓에 이를 둘러싼 잡음이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게 오히려 더 큰 문제라 할까.
“농민들이 지원금에 대해 말을 안 해요. 딱 봐도 저 사람보다 내가 더 피해가 심한데 돈을 덜 받았어, 그러면 마음이 상하잖아요. 서로 그걸 아니까 그냥 입을 다무는 거예요. 심지어 소규모로 하거나 경영체 등록이 안 되어 있는 사람들은 거의 받는 게 없다고 보면 돼요. 거기에 보험까지 안 들었다? 그러면 진짜 끝이죠. 망하는 거예요. 이번에 나는 농민들한테 재해보험과 지자체의 재난 지원에 대해 교육하는 게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농협 재해보험은 국가에서 90퍼센트를 지원하기 때문에 농민들에게 도움이 많이 되거든요. 그런데 나이 많은 분들은 몰라서 못 들어요. 과거에 보험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안 됐기 때문에 필요없다고 생각해서 안 들고, 또 들어도 약관 같은 거를 잘 모르니까 내가 어떤 상황일 때 얼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거라. (지자체의) 재난지원도 그렇죠. 농민들이 명확한 기준이나 내용을 몰라요. 모르니까 불만과 갈등이 생기는 거고.”
농사를 좋아하지만 계속할 수 있을지는 고민돼
느지막이 농사에 뛰어든 이후 예상치 못한 위기를 연달아 맞닥뜨리면서 몸은 상하고 마음에도 멍이 들었지만, 그이는 대를 이어 딸기 농부로 살아간다는 데 은근한 자부심이 있다. 돌아보면 어린 시절 부모님을 비롯한 동네 어른들이 “따뜻한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수막시설로 딸기를 키워 일본으로 수출하”던 장면이 눈이 선하다. 당시에는 그게 ‘신식’ 재배법이어서 조명을 많이 받았고, 마을 주민 모두가 이를 뿌듯해했다고 한다. 또 또래들보다 일찍 취업에 성공해 집에서 독립하기 전까지 저녁마다 식구들과 둘러앉아 딸기 상자를 접던 것도, 그이에겐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좋은 기억과 추억에만 의지해 농사를 이어갈 순 없다. 전업 농부에게 농사란 지금의 나와 가족을 먹여 살리는 생존수단일 뿐 아니라 미래의 더 나은 삶을 향한 꿈이기도 하기에, 정현옥 농부는 “농사를 계속해도 될지, 과연 할 수 있을지 고민”이라고 고백한다.
“모종을 심었으니 올해는 어떻게든 해야죠. 이번에 도와준 사람들 생각하면 당장 그만둘 수도 없어요. 친구들한테 그랬거든요. 딸기로든 뭐로든 꼭 보답하겠다고. 그리고 돈 생기면 진짜 제일 먼저 의료사협에 기부하고 싶어요. 침 맞으러 다니다 5만 원 내고 조합에만 가입했지 그동안 아무것도 한 게 없어서 미안하더라고요.”
올해가 지나고 나면 그다음은 어떻게 할지 아직 계획이 없다. 어쩌면 이것이 그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인지도 모른다. 한 점 불꽃에도 화들짝 놀라고 작은 빗소리 하나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된 농부는 그렇게 ‘지금’에만 충실하며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다. 어제를 돌아보면 괴롭고 내일을 내다보면 막막하니 다만 오늘 하루 무탈하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정현옥 씨의 이런 마음이 그 어떤 기도보다도 간절하게 느껴진다.
** 위 내용은 10월 15일에 진행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 정현옥 농부님은 최근 몸이 많이 좋아지셨다며 현재 이주노동자분들과 열심히 딸기를 키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글쓴이_ 자야
함양에 산 지 17년째. 새벽 산책과 새 관찰, 지치지 않을 정도의 텃밭일, 읽고 쓰고 노래하는 것, 용기 있고 다정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일을 좋아한다.
※ 이 인터뷰는 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브라이언임팩트, 지리산이음의 지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산청, 수해 그 이후 - 여는 말
통행이 통제된 도로가 여전히 많았다. 아직 상수도가 복구되지 않았다는 마을도 있었다. 가까운 산과 언덕 곳곳에 산사태로 흘러내린 붉은 흙이 조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 장화에 목장갑, 흙투성이 옷차림을 하고 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는 것이 특별하지 않은 시기였다.
폭우로 삶의 터전이 엉망이 된 이웃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경남 산청 의료복지 사회적 협동조합(이하 산청 의료사협)’과 함께 복구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시기에 단체 ‘그늘과 언덕’은 ‘지리산이음’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지금 어떤 형태로든 기록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은 아마 2020년 구례 수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경험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산청 수해 복구를 응원하며 엿새동안 산청에 식사를 챙겨 준 하동 HAB(Happy All Beings)의 수진이 수해 복구 활동의 과정을 누군가 기록해야 할 것 같은데 산청 사람들은 그럴 여력도 정신도 없을 것 같아 자료를 모아 정리중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늘과 언덕’은 급히 ‘산청 의료사협’과 논의하여 수해와 그 복구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정하고 기록활동가를 섭외했다. 다행히 가장 가까운 이웃인 하동과 함양에서 수진과 자야, 두 분의 기록활동가가 기꺼이 기록작업을 맡아 주셨다. ‘지리산이음’과 ‘산청 의료사협’이 지원하고 ‘그늘과 언덕’이 주관단체로 진행하는 산청의 수해와 그 회복과 복구의 기록은 그렇게 시작했다. 이 기록을 읽는 이들에게 당시 기준으로 ‘현재의 목소리’를 ‘사실적’으로 전달하여 재난을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가 당사자 또는 이웃으로서 해야 할 역할들을 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죽을 생각하면 벌받겠다’ 싶어서,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
단성면 구산마을 딸기 농부 정현옥 인터뷰
글/ 자야
지난 9월 16일, 농부는 ‘마침내’ 딸기 모종을 하우스에 옮겨 심었다. 농막 한 채와 하우스 9개 동이 물에 잠기는 것을 보며 급하게 대피한 이후 꼭 두 달만이었다. 여태까지 심어온 ‘금실’ 품종은 구할 수 없어 대신 ‘설향’을 심었다. 하우스 복구가 아직 덜 끝나는 바람에 규모도 6개 동으로 축소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하는 수 없다고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시시때때로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나 분주하게 일할 때는 괜찮은 것 같다가도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이 오면 머릿속이 텅 비며 멍해지곤 한다. 그러다가는 불현듯 눈물이 차오르고 가슴이 쿵쾅거린다. 통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벌써 몇 달째 이어지고 있는지. 모종이 심기고 하우스 안은 다시 푸르러졌으나 정현옥(57) 농부의 일상은 여전히 뒤틀린 문짝처럼 여기저기서 삐거덕거리며 신음을 토해낸다.
구산마을에서 남편과 <우리두리농장>을 운영하며 딸기를 키우는 정현옥 농부.
농사에 ‘올인’한 인생 2막, 꽃길 대신 위기가
“며칠 전부터 몸이 이상한 거예요. 왼쪽이 감각이 없고 너무 가렵더라고요. 팔은 움직이는데 만져보면 무감각하고 배하고 등을 꼬집어봐도 아무 느낌이 없고. 안 되겠다 싶어서 엊그제 처음으로 면에 있는 병원엘 갔어요. 내 생각엔 물집만 없지 딱 대상포진인 거라. 의사 선생님도 그러더라고요. 대상포진 전조 증상 같다고. 약 받아와 먹고 있는데 차도가 없으면 큰 병원에 가봐야 하나 어쩌나 싶네요.”
산청군 단성면 구산마을.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남사예담촌이 멀지 않은 이 마을에서, 정현옥 씨는 남편과 함께 5년째 딸기 농사를 짓고 있다. 이곳에 자리를 잡기 전에는 본가가 있는 진주 대평에서 역시나 딸기 농사를 지었고, 그전에는 경기도에 살면서 30년 넘게 직장생활을 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몸져눕는 바람에 직장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인생 2막’을 열어젖힌 그이에게, 농사는 갑작스럽기는 해도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성장기 내내 부모님이 농사짓는 것을 보며 자란 그의 몸은 흙과 접촉할 때의 기분이 얼마나 근사한지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흙을 만지거나 밟는 거를 좋아했어요. 할머니하고 고구마 캐고 무시 캐고 하는 게 너무 즐거웠고요. 그때는 흙이 참 부드러웠던 거 같은데 다시 농사짓는다고 만져본 흙은 다르더라고. 대평 하우스를 동생에게 맡기고 여기 구산으로 넘어와 처음 딸기 할 때는 고설(*땅에서 1미터가량 높이에 시설을 설치하여 작물을 재배하는 방식)이 아닌 토경(*땅에 심어 작물을 키우는 재배법)으로 했거든요. 논 자리였던 곳이라 비만 오면 물이 안 빠져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또 그때만 해도 친환경으로 짓는다고 해싸서 땅속이 온통 두더지 길인 거라. 안 되겠다 싶어 시설로 바꾸는 바람에 돈이 많이 들었죠. 직장 다니며 삼십 년 번 돈을 ‘올인’하고도 모자라 빚도 적잖게 졌어요. 50대 아줌마치고는 배포가 좀 많이 컸던 거지.”
중년의 나이에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시설 농사에 뛰어든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현옥 씨에게는 의지와 열정이, 그리고 계획이 있었다. 대평에 살 때만 해도 직장 일을 놓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던 남편 또한 구산에서는 농사일에만 전념하겠다고 결정함으로써 아내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2천3백여 평 규모의 <우리두리농장>은 문을 열었고, 초기 몇 년은 큰 부침 없이 순탄하게 흘러갔다.
그런데 작년 8월 비 내리던 어느 날 저녁, 기계실로 쓰고 있던 하우스에 벼락이 내리쳐 불이 나면서 첫 번째 위기가 찾아온다. 기계실이란 각 하우스의 온도 조절부터 양액과 물의 공급, 차광과 개폐기 작동 등을 관리하는 온갖 기계와 장비들이 설치된 곳으로, 여기에 불이 났다는 것은 곧 경제적 손실이 적지 않음을 의미한다.
“아저씨는 무슨 교육 받으러 가고 나 혼자 농장에 있다가 잠깐 볼일이 있어 나갔는데 그사이에 벼락이 쳤나 봐요. 이웃 농장에 계신 분이 하우스 차단기 내리러 나왔다가 까만 연기가 나는 걸 보고 119에 신고했다 카더라고. 대평 남동생이 어떻게 알고 전화를 해줘서 얼른 집에 돌아왔어요. 그랬더니 진짜로 불자동차가 있고 하우스는 홀라당 타버린 거야. 다리가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죠. 하필이면 기계실이 다 타버리는 바람에 못해도 이삼 억은 손해를 봤어요. 그때는 보험을 잊어삐고 안 들어놔서 손해가 더 컸지. 다행히 지하수 배관이 안 타서 일단 딸기에 물부터 주고, 그러고 나서 저 둑에 가서 삼일 밤낮을 울었어요.”
작년 8월, 기계실로 쓰던 하우스에 불이나 큰 피해를 입었다. (이하 사진들은 정현옥 농부 제공)
‘화재’로 삼 일 울고 다시 일어난 지 일 년 만에 ‘수해’ 입어
그 후 정현옥 씨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버티고 버티다 정 견딜 수 없을 때만 처방받아 온 수면제는 아직 끊지 못한 상태다. 올해 봄, 건강한 딸기 모종 12만 주를 구해다 키우며 작년의 손실을 어느 정도는 메꿀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어보기도 했으나, 이는 지난여름 수해가 나면서 물과 함께 쓸려 내려가고 말았다. 화재 사고 일 년 만에 혹독한 물난리를 겪을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산청군민이라면 이제는 잊을 수 없는 ‘그날’이 된 7월 19일. 신안면의 양천강뿐 아니라 단성면을 흐르는 남사천 일대에서도 여러 군데 제방이 터졌다. 정현옥 씨에 따르면 “점심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논만 잠긴” 정도였던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농막 앞길에까지 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다음부터는 다른 수해 피해자들이 증언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 펼쳐진다. 다급한 대피와 길 위에서의 고립, 걱정과 불안에 뜬눈으로 지새운 밤.
“개 두 마리를 모닝에 태워 빠져나왔어요. 개천이 넘치는데 그 작은 차로 빠져나오려니 무섭더라고요. 찻길로 나오긴 했는데 여기저기 토사가 쌓이고 나무가 쓰러져서 다 막혀 있는 거예요.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돌고 돌다가 겨우 원지 큰길로 나가서 대평 동생네로 갔죠. 그런데 뒤따라 올 줄 알았던 아저씨가 안 오는 거라. 전화를 하니까 개 한 마리가 안 보여서 찾다가 시꺼먼 황토물이 밀려와서 농장 꼭대기에 있는 작은 농막으로 피했대요. 이제 비가 그치고 물이 빠지고 있으니까 괜찮다면서 자기는 거기 있겠다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우스가 다 잠기고 엉망이 됐다는 거예요. 그때 내가 거짓말! 하고 소리쳤는데 다음날 와보니까 남편 말이 사실이더라고요. 우리 농장 너머 제방 가까운 쪽에 농가가 두 군데 더 있거든요. 한 집은 하우스 3개 동, 또 한 집은 8개 동 이렇게 농사를 짓는데, 그게 물에 쓸리면서 우리 농장으로 다 밀려왔어요. 그 하우스들은 뼈대까지 다 무너졌죠. 우리는 하우스 방향이 달라서 물이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그나마 (골조는) 살아남았고.”
올해 7월 폭우 직후부터 복구 전까지의 농장 모습.
쓰레기와 토사로 뒤덮인 농장을 빠져나와 정현옥 씨는 차를 타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물이 빠지면서 드러난 풍경은 참담했다. 하우스들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이 망가졌거나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위태로운 상태였고, 남사로 이어지는 큰길 가 전봇대 또한 모조리 쓰러져 있었다. 강가에는 떠밀려온 농자재들로 가득했는데, 그중엔 <우리두리농장>의 점적호스와 파레트, 물통과 뜯지 않은 상토 포대도 보였다. 거의 다 화재 이후 새로 장만한 것들이었다.
“그걸 보니까 내 재산이 여기 다 있구나, 싶더라고. 아깝지만 저거 건진다고 설쳤으면 우리도 떠내려갔겠죠. 낮이니까 그래도 다행이었지 밤에 그 사달이 났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도 들대예.”
“고만 딱 죽고 싶어도 봉사자들이 틈을 안 주더라고”
몸도 마음도 무기력한 상태였지만 보험이라도 제대로 타려면 증거를 남겨야 해서 우선은 사진을 찍고 동영상도 촬영했다. 좀 있으니 소식을 들은 고향 친구들에게서 전화가 쏟아졌다. 마침 일요일이라 집에서 쉰다며 컵라면에 수박에 이런저런 생필품을 싸 들고 직접 달려온 이들도 여럿이었다. 하지만 평상마저 떠내려간 농장에는 찾아온 이들을 앉힐 데 하나 없었다. 또 “나부터도 뭘 먼저 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나서” 돕겠다고 나선 이들을 오히려 만류하며 “같이 컵라면 끓여 먹고 김밥 먹으면서 그렇게 첫날을 보냈”다.
이튿날에는 면사무소 직원이 찾아와 피해 현황을 조사 중이니 빨리 면에 와서 피해 신고서를 작성하라 했다. 여전히 사방이 막혀 있던 터라 통행이 자유롭지 않을 때였다. 겨우 길이 뚫리면서 수해 이후 처음으로 면에 나가 신고서를 써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일부러 신안면 청현 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 일대 피해가 아주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그래도 상황이 어떤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청현으로 통하는 다리를 딱 건너는 순간 트라우마 생길 거 같아서 남편한테 그랬어요. 빨리 돌아가자고. 내가 우리 농장 엉망진창 된 거 보고도 안 울었거든요? 그런데 그 많은 하우스들이 다 쓰러지고 엎어진 걸 보니까… 진짜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지는데 눈물이 막 쏟아지는 거예요. 저 농가들이 다 어떻게 견딜까, 앞으로 어떻게 살까 싶어서. (임시주거지인) 여관에 가서도 그 장면이 계속 생각나서 밤새 통곡을 했어요.”
보험금에 재난지원금을 다 받는다고 해도 원상복구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정현옥 씨는 며칠을 시름시름 앓았다. 이러다 하나뿐인 자식에게 빚을 떠넘기게 되는 건 아닌가 걱정이 앞섰고, “화재 이후 불면증에 코로나에 턱 디스크까지 와서 겨우겨우 버텼는데 왜 또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려워 화도 났다. <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의료사협)>에서 문자가 날아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수해로 인해 봉사 인력이 필요한 농가는 신청하라’는 내용이 찍혀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청서를 작성하자 다음 날부터 농장에 봉사자들이 찾아왔다. 대개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었다. 아무 조건 없이 남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보면서, 정현옥 씨는 마음에 드리웠던 먹구름이 조금씩 걷히는 느낌을 받았다. 봉사자들이 가고 나면 다시 무기력과 우울감 속으로 침잠했지만, 그 증세가 더 깊어지기 전에 또 다른 봉사자들이 곁에 다가와 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올려 주었다.
자원봉사자들과 군인들이 하우스 안에 쌓인 토사와 쓰레기를 치우고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하루는 봉사자들이 오고 또 하루는 군인들이 오고 그렇게 번갈아서 계속 와주니까 막말로 죽지도 못하겠더라고요. 죽을 틈을 줘야 말이지. 수백 명이 생판 모르는 나를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일해 줬는데 혹여라도 내가 죽을 생각하면 벼락 맞겠다, 싶더라고요. 거기다 내 형편을 아는 친구들은 반찬에 속옷에 작업복에 바리바리 싸 오고 봉투에 돈까지 넣어서 주고, 걔들이 가면 그다음은 동네 아지매들이 걱정된다고 와서 들여다보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저를 살린 거예요. 이번에 진짜 신세를 너무 많이 져서 그거 갚으려면 살아야겠더라고.”
수해 입었다고 설마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겠냐는 말은, 직접 당해보지 않은 이들만 쉽게 던질 수 있다. “다들 쉬쉬해서 그렇지 신안면에서는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정현옥 농부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한다. 단지 물질적인 피해만이 문제는 아니다. 재난은 사람의 마음에 구멍을 내고 혼까지 앗아간다는 것을, 그이 또한 이번에 절감했다. 다행히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들 덕분에 정신 줄을 꽉 움켜쥔 그이는 차근차근 이후의 삶을 준비하며 먼저 ‘보험’ 공부를 시작했다.
허점 많은 보험과 지원에 서로 입 다무는 농민들
농민들이 대개 그렇듯, 정현옥 씨 역시 보험을 들어놓고도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용어가 생소한 데다 내용도 복잡하여 한 번 읽어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약관을 반복해서 읽고 모르는 건 전화로 물어봤다는 정현옥 씨는 “유실된 것에 비해서 보상이 너무 적다는 게 재해보험의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한다. 하우스 골조와 같은 구조체 보상은 그나마 낫지만, 내부 시설의 경우 보상액이 적거나 아예 보상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게 많다는 것. 정현옥 씨의 사례만 봐도 하우스 안에 설치된 양액기와 환풍기, 무인방제기, 베드 등의 보상 한도는 6천만 원인데, 이는 그이가 계산한 실제 피해액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서 보험은 농협의 ‘농작물재해보험’으로 가입 농협에 따라 약관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모종 심는 베드도 철제 부분만 보상이 되지 다른 건 안 돼요. 또 바닥재며 상자며 모종 포트도 다 안 되고. 딸기 농사에서는 모종이 중요한데 그것도 정식한 후에 떠내려간 것만 보상이 되지, 정식 이전에 피해 본 건 아예 해당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 농민들이 죽겠다 하니까 군에서 특별기금 식으로 해서 새로 심는 모종값의 일부를 지원한 거죠. 그치만 전에 심었던 모종값은 이미 마이너스인 거라. 또 보험금은 보통 후지급이잖아요. 우리도 하우스 복구하는 데 필요한 건 다 외상과 융자로 했어요. 하루라도 빨리 모종을 심어야 하는데 어떡해요. 일단 빌려서라도 해야지.”
‘외상’과 ‘융자’로 재건한 하우스.
남의 돈과 노동으로 시설을 복구해서 모종은 심어놨지만, 이마저도 평년의 70퍼센트 수준이어서 수확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은 감소할 수밖에 없다. 또 가까운 미래에 보험금이 지급되어도 이번에 새로 진 빚을 다 갚을 만큼은 안 된다. 보험 외 믿을 건 지자체에서 지급하는 재난지원금이 유일한데 얼마 전 통장에 찍힌 금액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지자체의 재난 정책과 복구 계획이 무엇이고 피해 산정의 정확한 기준은 무엇인지 공유되지 않은 탓에 이를 둘러싼 잡음이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게 오히려 더 큰 문제라 할까.
“농민들이 지원금에 대해 말을 안 해요. 딱 봐도 저 사람보다 내가 더 피해가 심한데 돈을 덜 받았어, 그러면 마음이 상하잖아요. 서로 그걸 아니까 그냥 입을 다무는 거예요. 심지어 소규모로 하거나 경영체 등록이 안 되어 있는 사람들은 거의 받는 게 없다고 보면 돼요. 거기에 보험까지 안 들었다? 그러면 진짜 끝이죠. 망하는 거예요. 이번에 나는 농민들한테 재해보험과 지자체의 재난 지원에 대해 교육하는 게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농협 재해보험은 국가에서 90퍼센트를 지원하기 때문에 농민들에게 도움이 많이 되거든요. 그런데 나이 많은 분들은 몰라서 못 들어요. 과거에 보험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안 됐기 때문에 필요없다고 생각해서 안 들고, 또 들어도 약관 같은 거를 잘 모르니까 내가 어떤 상황일 때 얼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거라. (지자체의) 재난지원도 그렇죠. 농민들이 명확한 기준이나 내용을 몰라요. 모르니까 불만과 갈등이 생기는 거고.”
농사를 좋아하지만 계속할 수 있을지는 고민돼
느지막이 농사에 뛰어든 이후 예상치 못한 위기를 연달아 맞닥뜨리면서 몸은 상하고 마음에도 멍이 들었지만, 그이는 대를 이어 딸기 농부로 살아간다는 데 은근한 자부심이 있다. 돌아보면 어린 시절 부모님을 비롯한 동네 어른들이 “따뜻한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수막시설로 딸기를 키워 일본으로 수출하”던 장면이 눈이 선하다. 당시에는 그게 ‘신식’ 재배법이어서 조명을 많이 받았고, 마을 주민 모두가 이를 뿌듯해했다고 한다. 또 또래들보다 일찍 취업에 성공해 집에서 독립하기 전까지 저녁마다 식구들과 둘러앉아 딸기 상자를 접던 것도, 그이에겐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좋은 기억과 추억에만 의지해 농사를 이어갈 순 없다. 전업 농부에게 농사란 지금의 나와 가족을 먹여 살리는 생존수단일 뿐 아니라 미래의 더 나은 삶을 향한 꿈이기도 하기에, 정현옥 농부는 “농사를 계속해도 될지, 과연 할 수 있을지 고민”이라고 고백한다.
“모종을 심었으니 올해는 어떻게든 해야죠. 이번에 도와준 사람들 생각하면 당장 그만둘 수도 없어요. 친구들한테 그랬거든요. 딸기로든 뭐로든 꼭 보답하겠다고. 그리고 돈 생기면 진짜 제일 먼저 의료사협에 기부하고 싶어요. 침 맞으러 다니다 5만 원 내고 조합에만 가입했지 그동안 아무것도 한 게 없어서 미안하더라고요.”
올해가 지나고 나면 그다음은 어떻게 할지 아직 계획이 없다. 어쩌면 이것이 그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인지도 모른다. 한 점 불꽃에도 화들짝 놀라고 작은 빗소리 하나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된 농부는 그렇게 ‘지금’에만 충실하며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다. 어제를 돌아보면 괴롭고 내일을 내다보면 막막하니 다만 오늘 하루 무탈하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정현옥 씨의 이런 마음이 그 어떤 기도보다도 간절하게 느껴진다.
** 위 내용은 10월 15일에 진행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 정현옥 농부님은 최근 몸이 많이 좋아지셨다며 현재 이주노동자분들과 열심히 딸기를 키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 이 인터뷰는 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브라이언임팩트, 지리산이음의 지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