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수해 그 이후 - 여는 말
통행이 통제된 도로가 여전히 많았다. 아직 상수도가 복구되지 않았다는 마을도 있었다. 가까운 산과 언덕 곳곳에 산사태로 흘러내린 붉은 흙이 조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 장화에 목장갑, 흙투성이 옷차림을 하고 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는 것이 특별하지 않은 시기였다. 폭우로 삶의 터전이 엉망이 된 이웃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경남 산청 의료복지 사회적 협동조합(이하 산청 의료사협)’과 함께 복구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시기에 단체 ‘그늘과 언덕’은 ‘지리산이음’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지금 어떤 형태로든 기록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은 아마 2020년 구례 수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경험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산청 수해 복구를 응원하며 엿새동안 산청에 식사를 챙겨 준 하동 HAB(Happy All Beings)의 수진이 수해 복구 활동의 과정을 누군가 기록해야 할 것 같은데 산청 사람들은 그럴 여력도 정신도 없을 것 같아 자료를 모아 정리중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늘과 언덕’은 급히 ‘산청 의료사협’과 논의하여 수해와 그 복구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정하고 기록활동가를 섭외했다. 다행히 가장 가까운 이웃인 하동과 함양에서 수진과 자야, 두 분의 기록활동가가 기꺼이 기록작업을 맡아 주셨다. ‘지리산이음’과 ‘산청 의료사협’이 지원하고 ‘그늘과 언덕’이 주관단체로 진행하는 산청의 수해와 그 회복과 복구의 기록은 그렇게 시작했다. 이 기록을 읽는 이들에게 당시 기준으로 ‘현재의 목소리’를 ‘사실적’으로 전달하여 재난을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가 당사자 또는 이웃으로서 해야 할 역할들을 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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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에 대처하는 길은 ‘각자도생’ 아닌 ‘함께하는’ 것
단성면 청계에서 공동농사 짓는 성두환 · 홍혁기 농부
글/ 자야
혈연이나 학연이 아닌 ‘친환경’을 연결고리로 함께 농사지으며 공동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나누는 농부들이 있다. 일찍이 산청에 들어와 단성면 청계에 터를 닦고 20년 넘게 친환경으로 공동농사를 이어가고 있는 성두환(58) 씨와, 6년 전 생비량면으로 귀농해 농사를 짓다가 올해부터 청계 공동농장에 합류한 홍혁기(52) 씨가 그 주인공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2021년 10월, 홍혁기 농부가 그해 여름에 결성된 <산청로컬푸드사회적협동조합(이하 협동조합)>을 방문하면서 이루어졌다.
“제가 직접 키운 오이를 들고 무작정 협동조합으로 찾아가서 물었어요. 나 이런 작물을 키우는데 판로가 없다, 어떡하면 좋겠냐. 그랬더니 우리한테 물건을 내면 매장에 진열할 수 있다고 해서 그때 바로 가입하고 성두환 대표님도 만나게 됐죠.” (홍)
생비량면 상능마을에서 아스파라거스를 비롯해 다양한 채소를 키우던 홍혁기 씨는 친환경 농사 선배면서 협동조합의 1차생산자 대표인 성두환 씨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이를 계기로 청계에 있는 8천여 평의 공동농장에서 생강, 감자, 당근, 대파, 양배추 등의 작물을 키우며 고락을 같이하는 사이가 되었다. 올여름 수해 이후 언제 끝날지 모를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지만,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서 이 정도나마 견딜 수 있는 것 같다”고 두 사람은 입을 모아 말한다.

청계리 공동농장에서 인터뷰 중인 홍혁기(왼), 성두환(오) 농부.
홍혁기 농부가 말하는 ‘그날’ :
“핸드폰 후라시 켜고 무조건 걸을 수 있는 데만 찾아다녔죠”
큰 재해나 불운을 경험한 사람들을 피해 정도에 따라 ‘줄 세우기’ 하는 것이 무례함을 모르지 않음에도, 홍혁기 농부의 사정을 듣다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몇 곱절은 커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산청 전역에 폭우가 쏟아진 7월 19일. 그의 삶의 기반이었던 상능마을은 산사태와 땅밀림 현상으로 주저앉으면서 ‘복구 불가능’ 판정을 받았다. 주택이고 논밭이고 할 것 없이 마을 전체가 통째로 사라져버렸기에, 그에 기대어 살아가던 이들은 이제 돌아갈 데가 없다. ‘출입금지’ 표지판이 세워진 진입로에서 올려다보면, 40일 전 그날 그 순간에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마을은 여전히 모든 게 내려앉고 엉겨 붙은 모습 그대로다.
“상능에 3천 평 되는 농장이 있었어요. 저와 집사람과 처형, 이렇게 서이서 농사를 지어 왔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없어진 거예요. 지난주에 가보니까 전부 풀밭이 돼 있더라고요. 한동안은 계속 멍했죠. 지금은 이렇게 청계에 나와서 복구 작업이라도 하고 움직이니까 사는 거지, 여기마저 없었다면 여태 그냥 멍한 상태일 거예요.”
산청군 내에서도 상능마을은 뉴스와 신문 등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았고, 그 중심엔 홍혁기 씨가 있었다. 산사태가 발생한 날 저녁, 이장의 대피 안내 방송을 놓쳤거나 즉시 탈출하지 못해 고립된 주민들을 이끌고 이미 붕괴가 시작된 마을을 빠져나오는 데 그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바로 눈앞에서 전봇대가 무너지고 옹벽이 펑펑 터지는데” 두렵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는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 품고서 사람들을 추슬러 점점 어두워지는 빗길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집은 법평마을에 있지만 농번기에는 상능마을 농장에서 먹고 자고 하며 지내거든요. 7월에도 거의 농장에 있었어요. 그러다 19일 전날부터 비가 많이 와서 집은 괜찮나 싶어 그쪽으로 가고 있는데 상능에서 법평 가는 길들이 전부 물에 잠겼더라고요. 하는 수 없이 다시 농장으로 돌아와 5시 좀 넘어 이른 저녁을 먹고 앉아서 티브이를 보는데 갑자기 쿵 하고 돌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밖에 나갔더니 하우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요. 땅이 뒤틀리니까 그 압력에 파이프들이 조리개에서 터지는 소리였던 거죠. 하우스 두 군데에서 계속 탁탁, 하는 소리가 나니까 집사람이 그래요. 이거 산사태 징후 같다고. 그럼 일단 마을을 빠져나가야 하니까 집사람한테 준비하라고 하고 저는 차부터 빼놓자 싶어서 나갔는데, 뭐 이미 저 아래는 무너지고 있더라고요. 차를 뺄 수 없어서 119에 연락했죠. 산사태가 나는 것 같으니 구조 좀 해달라. 그때 이웃에 사는 어르신들이 우리 집 쪽으로 오시면서 하는 말이 지진 났다고, 밭에 금이 막 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직전에 이장님이 대피하라는 방송을 하긴 했어요. 그런데 마을 입구 가까운 데 사는 분들은 빨리 빠져나갔지만, 안쪽에 계신 분들은 그러질 못한 겁니다. 두 번째 마을 방송을 듣고 나오셨는데 집 앞쪽이 무너져 있으니까 내려가지 못하고 우리 농장 쪽으로 오신 거예요. 어르신 다섯 분에 저와 처랑 처형 이렇게 총 여덟 명이 말하자면 고립이 된 거였어요. 사방에서 다 쓰러지고 엎어지고 난린데 우리는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이었죠. 그때까지는 전화가 돼서 여기저기 통화를 했어요. 그때마다 여기로 가라 저기로 가라 하는데 길이 사라져서 앞으로도 옆으로도 뒤로도 못 가겠더라고요. 산사태는 나고 있지 땅은 밀려서 내려오지 어떻게 가냐고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고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하니까, 일단 저는 땅이 갈라진 곳을 건너려면 필요할 것 같아서 사다리를 챙겼어요. 집사람은 음료랑 빵을 조금 챙겼고요. 그러고는 다 같이 걷기 시작했죠. 전기가 나가서 깜깜하니까 제 핸드폰 후라시 불빛 하나만 보고 걸었어요. 계획도 뭣도 없이 그냥 마을 입구 방향만 염두에 두고 어디든 걸을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닌 겁니다.”


처참하게 무너지고 내려앉은 상능마을(왼)과 홍혁기 농부의 하우스들(오). (이하 사진은 홍혁기 농부 제공)
일행이 대개 고령의 어르신들이라 혹여 탈진이라도 할까 봐 중간중간 준비해온 물과 빵을 나눠 먹으며 그들은 계속 걸었다. 가던 길이 막히면 “빠꾸해서 다른 길을 찾아” 걷고 또 걷길 네 시간째. 평소엔 걸어서 십 분이면 될 마을주차장에 무사히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생비량면 청년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해 어르신들을 임시숙소인 복지관으로 모셔 달라 부탁한 홍혁기 씨는, 문이 잠겨 집 안에 갇혀 있던 할머니 한 분을 구조하기 위해 그 밤에 119대원과 두 차례나 더 마을을 오가기도 했다. 고립된 마을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그 할머니는 무사히 구조되어, 현재는 다른 주민들과 함께 면에 있는 모텔에서 기거 중이다.
성두환 농부가 말하는 그날 ‘이후’ :
“먹고살려면 어떡해요,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지!”
상능마을만큼은 아니지만 성두환 농부의 오래된 공동농장이 자리한 청계리도 피해를 면하지는 못했다. 7월 19일에 오전부터 고추 세우는 작업을 하다가 장화 위로 빠르게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대피를 생각했다는 그는 “도랑이 넘치기 직전에 차를 끌고 나와 물에 잠겨 끊긴 길을 피해 돌고 돌아 겨우 원지에 있는 집에 도착했다.” 농장과 가까운 진자마을에 거주하는 장모님이 “흙탕물이 쏟아진다”며 전화를 한 건 늦은 점심을 먹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그는 얼른 수저를 놓고 다시 차에 올라탔지만, 원지에서 청계로 들어가는 길은 이미 다 막혀 있었다.
“진자마을로 못 들어가니까 다시 원지로 돌아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길이 없는 거야. 방금 지나온 곳이 바로 침수돼버리니까. 한 서너 시간을 헤매다가 겨우 집에 왔어요. 다행히 장모님네는 무사했지만, 그 앞에 있는 우리 농장은 엉망이 됐죠. 친환경으로 농사를 하니까 모종을 다 직접 키워서 하는데 그 육묘장이 죄 물에 쓸려간 거예요. 이 정자 앞에 있던 컨테이너도 10미터나 밀려서 저 하우스 꼭대기에 올라가 있고. 우리 공동농장은 여기 말고도 밭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피해를 안 본 데가 없어요.”
복구 작업을 하려면 먼저 뒤죽박죽된 근거지를 치우고 정리해야 해서 급한 대로 자원봉사 대원들의 손을 빌렸다. 또 수도와 전기를 살리는 일은 귀농 전 도시에서 관련 업무에 종사했던 홍혁기 농부가 맡아 하나씩 해결했고, 그 사이 성두환 농부는 고장 난 기계들을 수리하러 다니느라 바빴다. 그 와중에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작물들은 살려야 했기에, 어느 날은 토사로 뒤덮인 밭을 헤집어 당근을 캐고 또 어느 날은 양배추에 묻은 “뻘(개흙)”을 부지런히 씻어냈다.

수해 이후 청계농장에 나와 수습 중인 두 사람.
“수습할 수 있는 것부터 먼저 하고 상황을 보니까, 지금 당한 것도 당한 거지만 앞으로 먹고살 일이 갑갑한 거라. 그래서 바로 가을 농사 준비를 시작했죠. 토사를 한꺼번에 다 걷어내긴 어려우니까 일단 무랑 배추랑 쪽파 같은 작물 심을 밭부터 정비하고 파종 준비하고 하다 보니 한 달이 후딱 가더라고요. 처음 며칠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그 이후엔 그래도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렇지도 않았던 거 같애. 그냥 막 움직인 거지 체계적으로 어떻게 해야겠다 이런 계획을 갖고 한 게 아니었던 거라. 이제부터는 더 정신을 바짝 차려야죠. 두세 달 이후부터는 정상적인 수입이 나야만 우리도 먹고사니까. 혁기 씨나 나나 올해는 진짜 잘해 보겠다고 1월에 육묘부터 시작해서 풀로 뺑뺑이 쳤거든요. 원래 8월엔 좀 쉬어야 하는데 7월에 그 사태가 났으니 쉴 수가 있나. 다시 농번기가 온 거나 마찬가지예요. 우리 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지만 그래도 잘 추슬러야죠.”
긴급지원 대신 대출 권하는 지자체
공동농장 중 대파와 고추 등은 재해보험에 가입되어 있어 걱정이 좀 덜하다. 하지만 주 작물인 생강은 보험 대상 품목이 아니어서 아예 가입을 못 했다. “종잣값 정도는 지자체가 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이 있지만 “확신할 순 없다”고 성두환 농부는 말한다.
올해부터 공동농사에 합류했으나 생계의 무게중심이 어디까지나 상능마을의 개인 농장에 있던 홍혁기 농부의 상황은 더 암담하다. 하우스며 작물은 물론이고 농기계와 저온창고와 건조기까지 싹 다 무용지물이 돼 버린 데다 농토 자체를 잃었기 때문이다. 마치 귀농 전으로 돌아가 농지부터 알아봐야 하는, 그야말로 맨땅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할까. ‘지원과 보상’에 대한 말들이 허다하지만 정작 피해 당사자는 무엇이 언제 어느 정도로 보상될지 알 수 없다. 궁금하고 애가 타서 군청에 물어봐도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다.
“괜히 얘기해서 뒤탈이 나면 어쩌나, 공무원들은 그래서 조심스러워하는 거 같아요. 그것도 이해는 하지만 아무 얘기를 안 해주니까 우린 너무 답답한 거죠. 또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고 공고는 띄워놨는데 그것대로 안 되는 것도 많더라고요. 예를 들어 주거지가 사라지고 없는 경우 보증금과 월세를 지원한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월세만 지원하더라, 그런 얘기가 들려요. 당사자한테 들은 얘긴데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죠. 저는 집은 괜찮지만 지금 당장 제일 큰 문제는 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그동안 아스파라거스를 하우스 시설과 노지 둘 다 했거든요. 하우스에서는 12월부터 5월까지 작물이 나오고 6월부터는 노지에서 나오니까 일 년에 비는 달이 거의 없었어요. 시설과 노지의 순환 구조가 나름 안정적이어서 농사로 먹고살 정도는 됐었는데 그게 한순간에 깨진 거죠.” (홍)
두 사람 모두 농사를 다시 시작하고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긴급자금’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들어오는 돈은 없는데 가을 농사를 위해 밭 만들고 종자 사고 모종 키워 정식하는 모든 일에는 다 돈이 나간다는 것. 농기계 수리 비용도 일정 금액을 지원한다고는 하지만 일단은 자기 돈을 들여서 한 다음에 보상을 받는 식이라 부담이 크다. 이에 대해 성두환 농부는 “현금이 예년보다 따따블로 들어가는데 돈 나오는 데는 없다”고 탄식한다. 농부들 처지에서는 수습이 된 다음에 지원해주는 것은 너무 늦다. “그땐 숨을 좀 쉴 만할 때고 가장 숨통이 막히는 건 오히려 지금”이라는 얘기.
홍혁기 씨 또한 농부들의 긴급자금 요청에 ‘무이자 농협 대출’을 내미는 지자체의 대응이 안일하다고 지적한다. 아무리 ‘무이자’여도 대출은 빚일 뿐이다. 게다가 그 빚이 아무에게나 허용되는 것도 아니다. 일시상환이 가능하다고 증명된 이에게만 대출이 승인되기에 이미 농협 빚이 있거나 믿을 만한 담보가 없는 이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조차 없다.
“농사꾼이 빚을 얻는 건 쉬운데 갚기가 너무 어려워. 빚만 청산해도 살기가 편해요. 그런데 자꾸 빚을 내라니까 한숨만 나오는 거지.” (성)
“상능마을만 봐도 그래요. 이주단지를 만든다고는 하지만 부지 선정하고 매입하는 데만도 최소 몇 년이고, 또 거기다 집 지으려면 각자 융자를 내야 해요. 다 고령의 어르신들이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누가 빚내서 그걸 하려 들겠어요? 이재민 된 것도 서러운데 주민이고 농부고 다 빚쟁이로 만들라카니까 그게 화나는 거죠.” (홍)
농사도 재해도 ‘공공’의 시스템과 목소리로 풀어가야
현재 청계 공동농장을 꾸려가는 인원은 모두 다섯 명이다. 여기엔 홍혁기 농부뿐 아니라 상능마을에서 같이 손발 맞추어 농사를 지어온 그의 아내와 처형도 포함되어 있다. 남자들은 기계를 다루거나 힘쓰는 일 위주로 하고 여자들은 포장과 운반을 담당하는데, “이렇게 서로 근기에 맞는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공동농사의 장점”이다.
귀농 초기인 20년 전부터 적게는 친구와 둘이, 많게는 네댓 명이 계속 친환경 공동농장을 시도해 왔다는 성두환 씨는 그 결과 얻은 가장 큰 자산으로 “만 평에 가까운 비옥한 땅”을 꼽는다. 한창때는 공동농장 외에 따로 농사를 짓기도 했으나 나이가 들수록 혼자 일하는 것의 한계를 느껴 지금은 오롯이 공동농사에만 힘을 쏟고 있다고.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든든한 배경이 되어준 것 역시나 뜻 맞는 농사꾼들이 공동으로 조직한 <산청로컬푸드사회적협동조합>이었다.
“협동조합이 생기면서 안정적인 판로가 확보되니까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먹고살겠다는 꿈이 헛되지만은 않구나 싶었죠. 혼자 하면요, 농사짓는 것도 판매하는 것도 너무 힘들어요. 사실 나는 올가을을 되게 기대했어요. 이제 비로소 생산과 판매에서 어느 정도 시스템이 갖춰졌기 때문에 정말 빛나는 시간이 올 거라고 봤거든. 이렇게 큰 사태가 생길 줄은 몰랐던 거지. 그래도 다행히 다른 시스템은 그대로고 생산기반만 흔들린 거니까 이걸 빨리 회복하는 방향으로 가야죠.” (성)

‘선진지견학’에 나선 <산청로컬푸드사회적협동조합> 사람들. 성두환(오른쪽에서 세 번째), 홍혁기(왼쪽에서 세 번째) 농부의 모습도 보인다.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게 어디 농사에만 필요할까. 재해가 일상화될수록 그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롭고 안정적인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만약 어떤 사회에 ‘각자도생만이 살길’이라는 믿음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면, 이는 곧 그 사회를 떠받치는 기반이 허약하고 위태롭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피해조사도 그렇고 보상도 그렇고, 농부들 입장을 백 퍼센트 반영하진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현실성 있는 기준이 필요한데 그렇지 못하니까 더 절망스러운 거죠. 그 기준이나 정보를 속 시원히 공개하는 것도 아니고, 또 소위 말하는 윗사람들이 공동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니까 지금 전부 각자 알아서 살길 찾아보겠다고 애쓰는 거 아니겠어요?” (홍)
“관의 정책이나 제도가 부족하면 시민단체들이라도 공동대책위 같은 거 꾸려서 함께 목소리를 내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죠. 사실상 농민들 개개인이 그런 걸 나서서 하기는 어려우니까.” (성)
‘극복’은 없어, 다시 농사를 짓겠다는 마음뿐
공동농장에서 땀 흘리며 노동할 수 있기에 “정신줄을 완전히 놓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 홍혁기 씨는, 이참에 개인 농장도 청계 쪽으로 옮겨볼까 생각 중이다. 그동안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준 아스파라거스는 농사지은 지 4년 차에 첫 수확이 가능하기에, 지금부터 땅 임대해 부지런히 준비해도 눈에 보이는 결실을 손에 쥐기까지는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농부에게 기다림과 인내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라지만, 지난 노고를 무로 돌리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처지에서는 견뎌야 하는 그 시간이 너무나 아득하고 야속하기만 하다.
“사람들이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거냐고 묻는데 저는 모르겠어요. 극복한다든가 이겨낸다든가 그런 단어가 제 머릿속에 없어요. 답도 없고요. 그냥 내가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 있는 거죠. 계획도 구체적으로는 말하기 어렵고, 그냥 다시 준비해서 농사를 지을 거다, 뭐 그 정도로밖에 말할 수 없겠네요.” (홍)
성두환 농부 역시 “농사를 잘 지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다. “행정기관 쫓아다니며 진 빼느니 차라리 그 에너지를 농사에 쏟는 게 낫다”고 보는 그는, 물거품으로 변할 수 있는 희망이나 기대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신과 같은 ‘땅의 사람들’과 연대하고 협력하는 길을 걷고 싶어 한다. 가장 가깝게는 지금 함께 농장을 꾸려가는 이들을 포함한 협동조합원들과. 더 나아가서는 한 해에 산불과 수해라는 큰 고난을 연이어 겪고서도 고군분투하며 농사를 계속 짓고자 하는 산청의 모든 농민과. 그리고 이 땅 어딘가에 고통받는 이들이 있음을 잊지 않고 몸으로 마음으로 물질로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이를 모를 시민들과.
“올 하반기엔 빛나는 시간을 맞이할” 거라던 믿음은 꺾였지만, 그래도 신음과 비명으로 가득했던 여름은 가고 가을이 찾아왔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상처 입은 들판에 노란 물이 들고, 성두환 홍혁기 농부가 발 딛고 선 공동농장에도 가을 작물들이 푸르게 푸르게 자라날 것이다. 그걸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 잠시나마 그늘이 걷히고 잔잔한 미소가 번져갈 수 있기를. 그처럼 작고 사사로운 기쁨이 하나둘 쌓여 그들의 삶에 다시 빛이 들고 희망의 노래가 흐르기를 바랄 뿐이다.

수해 전에 찍은 사진 속에서 두 농부가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 위 내용은 8월 말에 진행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 두 분이 전해오신 소식에 따르면, 지금 현재 청계농장에는 가을 출하를 목표로 심은 당근, 양배추, 배추, 무, 쪽파 등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합니다. 내년 봄 정식을 위해 대파 씨앗도 파종했다 하고요. 그동안 틈틈이 해온 하우스 철거 일도 어느덧 마무리되고 있다니, 앞으로는 청계농장이 더욱 단단하고 풍요로워지길 기대합니다.

글쓴이_ 자야
함양에 산 지 17년째. 새벽 산책과 새 관찰, 지치지 않을 정도의 텃밭일, 읽고 쓰고 노래하는 것, 용기 있고 다정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일을 좋아한다.
※ 이 인터뷰는 '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브라이언임팩트', '지리산이음'의 지원과 '그늘과언덕' 주관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산청, 수해 그 이후 - 여는 말
통행이 통제된 도로가 여전히 많았다. 아직 상수도가 복구되지 않았다는 마을도 있었다. 가까운 산과 언덕 곳곳에 산사태로 흘러내린 붉은 흙이 조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 장화에 목장갑, 흙투성이 옷차림을 하고 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는 것이 특별하지 않은 시기였다.
폭우로 삶의 터전이 엉망이 된 이웃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경남 산청 의료복지 사회적 협동조합(이하 산청 의료사협)’과 함께 복구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시기에 단체 ‘그늘과 언덕’은 ‘지리산이음’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지금 어떤 형태로든 기록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은 아마 2020년 구례 수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경험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산청 수해 복구를 응원하며 엿새동안 산청에 식사를 챙겨 준 하동 HAB(Happy All Beings)의 수진이 수해 복구 활동의 과정을 누군가 기록해야 할 것 같은데 산청 사람들은 그럴 여력도 정신도 없을 것 같아 자료를 모아 정리중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늘과 언덕’은 급히 ‘산청 의료사협’과 논의하여 수해와 그 복구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정하고 기록활동가를 섭외했다. 다행히 가장 가까운 이웃인 하동과 함양에서 수진과 자야, 두 분의 기록활동가가 기꺼이 기록작업을 맡아 주셨다. ‘지리산이음’과 ‘산청 의료사협’이 지원하고 ‘그늘과 언덕’이 주관단체로 진행하는 산청의 수해와 그 회복과 복구의 기록은 그렇게 시작했다. 이 기록을 읽는 이들에게 당시 기준으로 ‘현재의 목소리’를 ‘사실적’으로 전달하여 재난을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가 당사자 또는 이웃으로서 해야 할 역할들을 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재난에 대처하는 길은 ‘각자도생’ 아닌 ‘함께하는’ 것
단성면 청계에서 공동농사 짓는 성두환 · 홍혁기 농부
글/ 자야
혈연이나 학연이 아닌 ‘친환경’을 연결고리로 함께 농사지으며 공동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나누는 농부들이 있다. 일찍이 산청에 들어와 단성면 청계에 터를 닦고 20년 넘게 친환경으로 공동농사를 이어가고 있는 성두환(58) 씨와, 6년 전 생비량면으로 귀농해 농사를 짓다가 올해부터 청계 공동농장에 합류한 홍혁기(52) 씨가 그 주인공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2021년 10월, 홍혁기 농부가 그해 여름에 결성된 <산청로컬푸드사회적협동조합(이하 협동조합)>을 방문하면서 이루어졌다.
“제가 직접 키운 오이를 들고 무작정 협동조합으로 찾아가서 물었어요. 나 이런 작물을 키우는데 판로가 없다, 어떡하면 좋겠냐. 그랬더니 우리한테 물건을 내면 매장에 진열할 수 있다고 해서 그때 바로 가입하고 성두환 대표님도 만나게 됐죠.” (홍)
생비량면 상능마을에서 아스파라거스를 비롯해 다양한 채소를 키우던 홍혁기 씨는 친환경 농사 선배면서 협동조합의 1차생산자 대표인 성두환 씨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이를 계기로 청계에 있는 8천여 평의 공동농장에서 생강, 감자, 당근, 대파, 양배추 등의 작물을 키우며 고락을 같이하는 사이가 되었다. 올여름 수해 이후 언제 끝날지 모를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지만,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서 이 정도나마 견딜 수 있는 것 같다”고 두 사람은 입을 모아 말한다.
청계리 공동농장에서 인터뷰 중인 홍혁기(왼), 성두환(오) 농부.
홍혁기 농부가 말하는 ‘그날’ :
“핸드폰 후라시 켜고 무조건 걸을 수 있는 데만 찾아다녔죠”
큰 재해나 불운을 경험한 사람들을 피해 정도에 따라 ‘줄 세우기’ 하는 것이 무례함을 모르지 않음에도, 홍혁기 농부의 사정을 듣다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몇 곱절은 커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산청 전역에 폭우가 쏟아진 7월 19일. 그의 삶의 기반이었던 상능마을은 산사태와 땅밀림 현상으로 주저앉으면서 ‘복구 불가능’ 판정을 받았다. 주택이고 논밭이고 할 것 없이 마을 전체가 통째로 사라져버렸기에, 그에 기대어 살아가던 이들은 이제 돌아갈 데가 없다. ‘출입금지’ 표지판이 세워진 진입로에서 올려다보면, 40일 전 그날 그 순간에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마을은 여전히 모든 게 내려앉고 엉겨 붙은 모습 그대로다.
“상능에 3천 평 되는 농장이 있었어요. 저와 집사람과 처형, 이렇게 서이서 농사를 지어 왔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없어진 거예요. 지난주에 가보니까 전부 풀밭이 돼 있더라고요. 한동안은 계속 멍했죠. 지금은 이렇게 청계에 나와서 복구 작업이라도 하고 움직이니까 사는 거지, 여기마저 없었다면 여태 그냥 멍한 상태일 거예요.”
산청군 내에서도 상능마을은 뉴스와 신문 등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았고, 그 중심엔 홍혁기 씨가 있었다. 산사태가 발생한 날 저녁, 이장의 대피 안내 방송을 놓쳤거나 즉시 탈출하지 못해 고립된 주민들을 이끌고 이미 붕괴가 시작된 마을을 빠져나오는 데 그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바로 눈앞에서 전봇대가 무너지고 옹벽이 펑펑 터지는데” 두렵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는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 품고서 사람들을 추슬러 점점 어두워지는 빗길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집은 법평마을에 있지만 농번기에는 상능마을 농장에서 먹고 자고 하며 지내거든요. 7월에도 거의 농장에 있었어요. 그러다 19일 전날부터 비가 많이 와서 집은 괜찮나 싶어 그쪽으로 가고 있는데 상능에서 법평 가는 길들이 전부 물에 잠겼더라고요. 하는 수 없이 다시 농장으로 돌아와 5시 좀 넘어 이른 저녁을 먹고 앉아서 티브이를 보는데 갑자기 쿵 하고 돌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밖에 나갔더니 하우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요. 땅이 뒤틀리니까 그 압력에 파이프들이 조리개에서 터지는 소리였던 거죠. 하우스 두 군데에서 계속 탁탁, 하는 소리가 나니까 집사람이 그래요. 이거 산사태 징후 같다고. 그럼 일단 마을을 빠져나가야 하니까 집사람한테 준비하라고 하고 저는 차부터 빼놓자 싶어서 나갔는데, 뭐 이미 저 아래는 무너지고 있더라고요. 차를 뺄 수 없어서 119에 연락했죠. 산사태가 나는 것 같으니 구조 좀 해달라. 그때 이웃에 사는 어르신들이 우리 집 쪽으로 오시면서 하는 말이 지진 났다고, 밭에 금이 막 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직전에 이장님이 대피하라는 방송을 하긴 했어요. 그런데 마을 입구 가까운 데 사는 분들은 빨리 빠져나갔지만, 안쪽에 계신 분들은 그러질 못한 겁니다. 두 번째 마을 방송을 듣고 나오셨는데 집 앞쪽이 무너져 있으니까 내려가지 못하고 우리 농장 쪽으로 오신 거예요. 어르신 다섯 분에 저와 처랑 처형 이렇게 총 여덟 명이 말하자면 고립이 된 거였어요. 사방에서 다 쓰러지고 엎어지고 난린데 우리는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이었죠. 그때까지는 전화가 돼서 여기저기 통화를 했어요. 그때마다 여기로 가라 저기로 가라 하는데 길이 사라져서 앞으로도 옆으로도 뒤로도 못 가겠더라고요. 산사태는 나고 있지 땅은 밀려서 내려오지 어떻게 가냐고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고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하니까, 일단 저는 땅이 갈라진 곳을 건너려면 필요할 것 같아서 사다리를 챙겼어요. 집사람은 음료랑 빵을 조금 챙겼고요. 그러고는 다 같이 걷기 시작했죠. 전기가 나가서 깜깜하니까 제 핸드폰 후라시 불빛 하나만 보고 걸었어요. 계획도 뭣도 없이 그냥 마을 입구 방향만 염두에 두고 어디든 걸을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닌 겁니다.”
처참하게 무너지고 내려앉은 상능마을(왼)과 홍혁기 농부의 하우스들(오). (이하 사진은 홍혁기 농부 제공)
일행이 대개 고령의 어르신들이라 혹여 탈진이라도 할까 봐 중간중간 준비해온 물과 빵을 나눠 먹으며 그들은 계속 걸었다. 가던 길이 막히면 “빠꾸해서 다른 길을 찾아” 걷고 또 걷길 네 시간째. 평소엔 걸어서 십 분이면 될 마을주차장에 무사히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생비량면 청년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해 어르신들을 임시숙소인 복지관으로 모셔 달라 부탁한 홍혁기 씨는, 문이 잠겨 집 안에 갇혀 있던 할머니 한 분을 구조하기 위해 그 밤에 119대원과 두 차례나 더 마을을 오가기도 했다. 고립된 마을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그 할머니는 무사히 구조되어, 현재는 다른 주민들과 함께 면에 있는 모텔에서 기거 중이다.
성두환 농부가 말하는 그날 ‘이후’ :
“먹고살려면 어떡해요,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지!”
상능마을만큼은 아니지만 성두환 농부의 오래된 공동농장이 자리한 청계리도 피해를 면하지는 못했다. 7월 19일에 오전부터 고추 세우는 작업을 하다가 장화 위로 빠르게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대피를 생각했다는 그는 “도랑이 넘치기 직전에 차를 끌고 나와 물에 잠겨 끊긴 길을 피해 돌고 돌아 겨우 원지에 있는 집에 도착했다.” 농장과 가까운 진자마을에 거주하는 장모님이 “흙탕물이 쏟아진다”며 전화를 한 건 늦은 점심을 먹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그는 얼른 수저를 놓고 다시 차에 올라탔지만, 원지에서 청계로 들어가는 길은 이미 다 막혀 있었다.
“진자마을로 못 들어가니까 다시 원지로 돌아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길이 없는 거야. 방금 지나온 곳이 바로 침수돼버리니까. 한 서너 시간을 헤매다가 겨우 집에 왔어요. 다행히 장모님네는 무사했지만, 그 앞에 있는 우리 농장은 엉망이 됐죠. 친환경으로 농사를 하니까 모종을 다 직접 키워서 하는데 그 육묘장이 죄 물에 쓸려간 거예요. 이 정자 앞에 있던 컨테이너도 10미터나 밀려서 저 하우스 꼭대기에 올라가 있고. 우리 공동농장은 여기 말고도 밭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피해를 안 본 데가 없어요.”
복구 작업을 하려면 먼저 뒤죽박죽된 근거지를 치우고 정리해야 해서 급한 대로 자원봉사 대원들의 손을 빌렸다. 또 수도와 전기를 살리는 일은 귀농 전 도시에서 관련 업무에 종사했던 홍혁기 농부가 맡아 하나씩 해결했고, 그 사이 성두환 농부는 고장 난 기계들을 수리하러 다니느라 바빴다. 그 와중에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작물들은 살려야 했기에, 어느 날은 토사로 뒤덮인 밭을 헤집어 당근을 캐고 또 어느 날은 양배추에 묻은 “뻘(개흙)”을 부지런히 씻어냈다.
수해 이후 청계농장에 나와 수습 중인 두 사람.
“수습할 수 있는 것부터 먼저 하고 상황을 보니까, 지금 당한 것도 당한 거지만 앞으로 먹고살 일이 갑갑한 거라. 그래서 바로 가을 농사 준비를 시작했죠. 토사를 한꺼번에 다 걷어내긴 어려우니까 일단 무랑 배추랑 쪽파 같은 작물 심을 밭부터 정비하고 파종 준비하고 하다 보니 한 달이 후딱 가더라고요. 처음 며칠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그 이후엔 그래도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렇지도 않았던 거 같애. 그냥 막 움직인 거지 체계적으로 어떻게 해야겠다 이런 계획을 갖고 한 게 아니었던 거라. 이제부터는 더 정신을 바짝 차려야죠. 두세 달 이후부터는 정상적인 수입이 나야만 우리도 먹고사니까. 혁기 씨나 나나 올해는 진짜 잘해 보겠다고 1월에 육묘부터 시작해서 풀로 뺑뺑이 쳤거든요. 원래 8월엔 좀 쉬어야 하는데 7월에 그 사태가 났으니 쉴 수가 있나. 다시 농번기가 온 거나 마찬가지예요. 우리 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지만 그래도 잘 추슬러야죠.”
긴급지원 대신 대출 권하는 지자체
공동농장 중 대파와 고추 등은 재해보험에 가입되어 있어 걱정이 좀 덜하다. 하지만 주 작물인 생강은 보험 대상 품목이 아니어서 아예 가입을 못 했다. “종잣값 정도는 지자체가 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이 있지만 “확신할 순 없다”고 성두환 농부는 말한다.
올해부터 공동농사에 합류했으나 생계의 무게중심이 어디까지나 상능마을의 개인 농장에 있던 홍혁기 농부의 상황은 더 암담하다. 하우스며 작물은 물론이고 농기계와 저온창고와 건조기까지 싹 다 무용지물이 돼 버린 데다 농토 자체를 잃었기 때문이다. 마치 귀농 전으로 돌아가 농지부터 알아봐야 하는, 그야말로 맨땅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할까. ‘지원과 보상’에 대한 말들이 허다하지만 정작 피해 당사자는 무엇이 언제 어느 정도로 보상될지 알 수 없다. 궁금하고 애가 타서 군청에 물어봐도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다.
“괜히 얘기해서 뒤탈이 나면 어쩌나, 공무원들은 그래서 조심스러워하는 거 같아요. 그것도 이해는 하지만 아무 얘기를 안 해주니까 우린 너무 답답한 거죠. 또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고 공고는 띄워놨는데 그것대로 안 되는 것도 많더라고요. 예를 들어 주거지가 사라지고 없는 경우 보증금과 월세를 지원한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월세만 지원하더라, 그런 얘기가 들려요. 당사자한테 들은 얘긴데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죠. 저는 집은 괜찮지만 지금 당장 제일 큰 문제는 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그동안 아스파라거스를 하우스 시설과 노지 둘 다 했거든요. 하우스에서는 12월부터 5월까지 작물이 나오고 6월부터는 노지에서 나오니까 일 년에 비는 달이 거의 없었어요. 시설과 노지의 순환 구조가 나름 안정적이어서 농사로 먹고살 정도는 됐었는데 그게 한순간에 깨진 거죠.” (홍)
두 사람 모두 농사를 다시 시작하고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긴급자금’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들어오는 돈은 없는데 가을 농사를 위해 밭 만들고 종자 사고 모종 키워 정식하는 모든 일에는 다 돈이 나간다는 것. 농기계 수리 비용도 일정 금액을 지원한다고는 하지만 일단은 자기 돈을 들여서 한 다음에 보상을 받는 식이라 부담이 크다. 이에 대해 성두환 농부는 “현금이 예년보다 따따블로 들어가는데 돈 나오는 데는 없다”고 탄식한다. 농부들 처지에서는 수습이 된 다음에 지원해주는 것은 너무 늦다. “그땐 숨을 좀 쉴 만할 때고 가장 숨통이 막히는 건 오히려 지금”이라는 얘기.
홍혁기 씨 또한 농부들의 긴급자금 요청에 ‘무이자 농협 대출’을 내미는 지자체의 대응이 안일하다고 지적한다. 아무리 ‘무이자’여도 대출은 빚일 뿐이다. 게다가 그 빚이 아무에게나 허용되는 것도 아니다. 일시상환이 가능하다고 증명된 이에게만 대출이 승인되기에 이미 농협 빚이 있거나 믿을 만한 담보가 없는 이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조차 없다.
“농사꾼이 빚을 얻는 건 쉬운데 갚기가 너무 어려워. 빚만 청산해도 살기가 편해요. 그런데 자꾸 빚을 내라니까 한숨만 나오는 거지.” (성)
“상능마을만 봐도 그래요. 이주단지를 만든다고는 하지만 부지 선정하고 매입하는 데만도 최소 몇 년이고, 또 거기다 집 지으려면 각자 융자를 내야 해요. 다 고령의 어르신들이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누가 빚내서 그걸 하려 들겠어요? 이재민 된 것도 서러운데 주민이고 농부고 다 빚쟁이로 만들라카니까 그게 화나는 거죠.” (홍)
농사도 재해도 ‘공공’의 시스템과 목소리로 풀어가야
현재 청계 공동농장을 꾸려가는 인원은 모두 다섯 명이다. 여기엔 홍혁기 농부뿐 아니라 상능마을에서 같이 손발 맞추어 농사를 지어온 그의 아내와 처형도 포함되어 있다. 남자들은 기계를 다루거나 힘쓰는 일 위주로 하고 여자들은 포장과 운반을 담당하는데, “이렇게 서로 근기에 맞는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공동농사의 장점”이다.
귀농 초기인 20년 전부터 적게는 친구와 둘이, 많게는 네댓 명이 계속 친환경 공동농장을 시도해 왔다는 성두환 씨는 그 결과 얻은 가장 큰 자산으로 “만 평에 가까운 비옥한 땅”을 꼽는다. 한창때는 공동농장 외에 따로 농사를 짓기도 했으나 나이가 들수록 혼자 일하는 것의 한계를 느껴 지금은 오롯이 공동농사에만 힘을 쏟고 있다고.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든든한 배경이 되어준 것 역시나 뜻 맞는 농사꾼들이 공동으로 조직한 <산청로컬푸드사회적협동조합>이었다.
“협동조합이 생기면서 안정적인 판로가 확보되니까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먹고살겠다는 꿈이 헛되지만은 않구나 싶었죠. 혼자 하면요, 농사짓는 것도 판매하는 것도 너무 힘들어요. 사실 나는 올가을을 되게 기대했어요. 이제 비로소 생산과 판매에서 어느 정도 시스템이 갖춰졌기 때문에 정말 빛나는 시간이 올 거라고 봤거든. 이렇게 큰 사태가 생길 줄은 몰랐던 거지. 그래도 다행히 다른 시스템은 그대로고 생산기반만 흔들린 거니까 이걸 빨리 회복하는 방향으로 가야죠.” (성)
‘선진지견학’에 나선 <산청로컬푸드사회적협동조합> 사람들. 성두환(오른쪽에서 세 번째), 홍혁기(왼쪽에서 세 번째) 농부의 모습도 보인다.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게 어디 농사에만 필요할까. 재해가 일상화될수록 그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롭고 안정적인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만약 어떤 사회에 ‘각자도생만이 살길’이라는 믿음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면, 이는 곧 그 사회를 떠받치는 기반이 허약하고 위태롭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피해조사도 그렇고 보상도 그렇고, 농부들 입장을 백 퍼센트 반영하진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현실성 있는 기준이 필요한데 그렇지 못하니까 더 절망스러운 거죠. 그 기준이나 정보를 속 시원히 공개하는 것도 아니고, 또 소위 말하는 윗사람들이 공동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니까 지금 전부 각자 알아서 살길 찾아보겠다고 애쓰는 거 아니겠어요?” (홍)
“관의 정책이나 제도가 부족하면 시민단체들이라도 공동대책위 같은 거 꾸려서 함께 목소리를 내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죠. 사실상 농민들 개개인이 그런 걸 나서서 하기는 어려우니까.” (성)
‘극복’은 없어, 다시 농사를 짓겠다는 마음뿐
공동농장에서 땀 흘리며 노동할 수 있기에 “정신줄을 완전히 놓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 홍혁기 씨는, 이참에 개인 농장도 청계 쪽으로 옮겨볼까 생각 중이다. 그동안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준 아스파라거스는 농사지은 지 4년 차에 첫 수확이 가능하기에, 지금부터 땅 임대해 부지런히 준비해도 눈에 보이는 결실을 손에 쥐기까지는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농부에게 기다림과 인내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라지만, 지난 노고를 무로 돌리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처지에서는 견뎌야 하는 그 시간이 너무나 아득하고 야속하기만 하다.
“사람들이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거냐고 묻는데 저는 모르겠어요. 극복한다든가 이겨낸다든가 그런 단어가 제 머릿속에 없어요. 답도 없고요. 그냥 내가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 있는 거죠. 계획도 구체적으로는 말하기 어렵고, 그냥 다시 준비해서 농사를 지을 거다, 뭐 그 정도로밖에 말할 수 없겠네요.” (홍)
성두환 농부 역시 “농사를 잘 지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다. “행정기관 쫓아다니며 진 빼느니 차라리 그 에너지를 농사에 쏟는 게 낫다”고 보는 그는, 물거품으로 변할 수 있는 희망이나 기대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신과 같은 ‘땅의 사람들’과 연대하고 협력하는 길을 걷고 싶어 한다. 가장 가깝게는 지금 함께 농장을 꾸려가는 이들을 포함한 협동조합원들과. 더 나아가서는 한 해에 산불과 수해라는 큰 고난을 연이어 겪고서도 고군분투하며 농사를 계속 짓고자 하는 산청의 모든 농민과. 그리고 이 땅 어딘가에 고통받는 이들이 있음을 잊지 않고 몸으로 마음으로 물질로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이를 모를 시민들과.
“올 하반기엔 빛나는 시간을 맞이할” 거라던 믿음은 꺾였지만, 그래도 신음과 비명으로 가득했던 여름은 가고 가을이 찾아왔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상처 입은 들판에 노란 물이 들고, 성두환 홍혁기 농부가 발 딛고 선 공동농장에도 가을 작물들이 푸르게 푸르게 자라날 것이다. 그걸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 잠시나마 그늘이 걷히고 잔잔한 미소가 번져갈 수 있기를. 그처럼 작고 사사로운 기쁨이 하나둘 쌓여 그들의 삶에 다시 빛이 들고 희망의 노래가 흐르기를 바랄 뿐이다.
수해 전에 찍은 사진 속에서 두 농부가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 위 내용은 8월 말에 진행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 두 분이 전해오신 소식에 따르면, 지금 현재 청계농장에는 가을 출하를 목표로 심은 당근, 양배추, 배추, 무, 쪽파 등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합니다. 내년 봄 정식을 위해 대파 씨앗도 파종했다 하고요. 그동안 틈틈이 해온 하우스 철거 일도 어느덧 마무리되고 있다니, 앞으로는 청계농장이 더욱 단단하고 풍요로워지길 기대합니다.
※ 이 인터뷰는 '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브라이언임팩트', '지리산이음'의 지원과 '그늘과언덕' 주관으로 진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