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수해 그 이후 - 여는 말
통행이 통제된 도로가 여전히 많았다. 아직 상수도가 복구되지 않았다는 마을도 있었다. 가까운 산과 언덕 곳곳에 산사태로 흘러내린 붉은 흙이 조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 장화에 목장갑, 흙투성이 옷차림을 하고 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는 것이 특별하지 않은 시기였다. 폭우로 삶의 터전이 엉망이 된 이웃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경남 산청 의료복지 사회적 협동조합(이하 산청 의료사협)’과 함께 복구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시기에 단체 ‘그늘과 언덕’은 ‘지리산이음’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지금 어떤 형태로든 기록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은 아마 2020년 구례 수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경험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산청 수해 복구를 응원하며 엿새동안 산청에 식사를 챙겨 준 하동 HAB(Happy All Beings)의 수진이 수해 복구 활동의 과정을 누군가 기록해야 할 것 같은데 산청 사람들은 그럴 여력도 정신도 없을 것 같아 자료를 모아 정리중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늘과 언덕’은 급히 ‘산청 의료사협’과 논의하여 수해와 그 복구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정하고 기록활동가를 섭외했다. 다행히 가장 가까운 이웃인 하동과 함양에서 수진과 자야, 두 분의 기록활동가가 기꺼이 기록작업을 맡아 주셨다. ‘지리산이음’과 ‘산청 의료사협’이 지원하고 ‘그늘과 언덕’이 주관단체로 진행하는 산청의 수해와 그 회복과 복구의 기록은 그렇게 시작했다. 이 기록을 읽는 이들에게 당시 기준으로 ‘현재의 목소리’를 ‘사실적’으로 전달하여 재난을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가 당사자 또는 이웃으로서 해야 할 역할들을 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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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앞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하동에 사는 이웃, 정수진
글 / 정수진
어느새 겨울이 찾아왔다. 푸르렀던 나뭇잎도 모두 지고 풀과 작물로 무성했던 텃밭도 가을걷이를 거쳐 황량해졌다.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을 계획했던 새해가 엊그제 같은데 또 다시 새로운 해를 맞을 준비하고 있다.
올 해는 계획에도, 예상에도 없던 일이 일어났다. 바로 산청과 합천, 하동에 일어난 집중 폭우와 수해. 7월 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고 많은 분들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고 셀 수 없이 많은 하우스와 농가가 침수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나섰다. 먼저 수해를 겪은 구례에서 봉사자들이 손을 보태러 산청으로 달려왔고 하동에서 온 봉사자들은 봉사자와 수해민을 위한 저녁식사를 차려 나누었다. 그 사이 ‘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의료사협‘)’과 산청 주민모임 ‘그늘과언덕’의 활동가들이 ‘의료사협’ 조합원들을 시작으로 피해 상황을 조사하는 한편 수해 복구 봉사자들을 모집하는 채팅방을 개설해 피해를 입은 주민과 농가에 연결하고 봉사를 진행했다.
초기에는 산청과 구례 그리고 하동의 봉사자로 시작했으나 점차 소식이 알려져 함양, 남원 등 지리산으로 연결된 이웃지역의 봉사자가 다녀갔고 가까이로는 진주와 사천, 합천에서부터 멀리 광주, 부산, 대구, 서울, 세종 등 전국에서 온 개인 봉사자와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들이 뒤이어 손길을 보탰다.
7월 25일에 시작했던 수해복구 봉사는 9월 13일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51일간 30개 농가에 44회 봉사했으며 전국에서 530명(누적 집계)의 봉사자가 다녀갔다.
재난은 호러인데 극복은 드라마처럼
봉사자와 수해민을 위한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때, 매일 신기한 장면을 마주했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땀범벅에 흙투성이가 되어 식사를 하러 온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모습(처참한 현장을 직접 보고 왔으니 다들 절망적인 마음일거라 생각했다.). 그들을 보며 한 친구가 이야기했다. “재난은 호러인데 극복은 드라마”라고.
멋지고도 대단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흔하고도 익숙해서 바람처럼 흩어져버리기 쉽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참 귀하다. 무심한 일상 속에서도 다정한 마음이 오가고 그 사이에서 어느덧 선한 마음이 싹튼다. 그런 순간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쉬워 기록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기록 활동을 통해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재난을 어떻게든 작게나마 준비하고 싶기도 했다.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일면식도 없는 농민과 수해민을 도우러 산청까지 찾아와 봉사를 하는 걸까?’라는 궁금함을 안고 8명의 봉사자를 만났다.
피해 농가와 봉사자의 다리가 되어주었던 ‘의료사협’과 ‘그늘과언덕’의 송한나님과 강영경님, 수해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온 구례의 상글님, 힘들지만 ‘밥은 먹고 하자’며 봉사자의 저녁 식사를 준비한 하동의 김정준님, 더불어 사는 삶의 힘을 믿고 봉사한 진주의 박희란님, 봉사를 통해 삶의 테두리를 확장해간 산청간디고등학교 채효영, 권다정 학생, 지역민으로서의 책임감으로 봉사 현장을 지킨 산청의 김창수님을 만나 이야기를 청했다. 더불어 정식으로 인터뷰를 하지는 못했지만 짧게 만나 이야기를 나눈 12명의 봉사자들의 소감과 ‘의료사협’과 ‘그늘과언덕’이 자원봉사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의 답변 중 일부를 이 글에 실었다.
멋지고도 대단한 이유로 봉사를 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인터뷰를 통해 만난 봉사자들에게서는 한결같이 ‘대단하지 않은 일’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누군가는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지 않는 게 더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고 ‘눈에 보이니 안 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지나칠 수 없었다.’라고 하기도 했다. ‘기후위기는 제쳐 두고 한 사람이 밭을 가꾼 마음이 안쓰러워서 봉사를 했다.’, ‘상대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봉사를 하니 내가 참 좋더라.’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오히려 자신이 했던 작은 일이 인터뷰에 실려서 부끄럽다고 주저하는 봉사자들을 만나며 재난 복구의 과정은 어쩌면 각자의 안에 잠들어있던 ‘선한 마음’이라는 씨앗이 싹트는 기회였던 것은 아닐지 생각하기도 했다.


흙투성이, 땀범벅이지만 환하게 밝은 봉사자들 (사진제공: 김창수님(왼쪽), 강영경(오른쪽))
커뮤니티를 돌보는 사람들
“사람이 정말 많이 필요한 일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되지?’ 생각하며 산청군 자원봉사센터를 알아보니 당시에는 정보가 없더라고요. 군에서 당장은 봉사자를 모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생각했어요. 큰 규모의 복구를 하는데 모든 인력이 투입되어 있는 것 같았거든요.”
“구례에서 며칠간 봉사를 와주어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죠. ‘민간 차원에서 도움이 필요할 텐데, 그러지 않고서는 힘들 텐데’ 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봉사안내자, 봉사자를 돕는 봉사자들-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 햇살과 한나’ 인터뷰 중)
재난의 규모가 클수록 공적 역할은 기반 시설(전기, 수도, 도로, 대규모 산사태 등) 복구에 우선 투입되기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공백 혹은 시차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번 수해 때 공적 역할의 공백을 메운 것은 산청의 지역 활동가들이었다. 활동가들은 재난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이웃들의 안부를 묻고 일손이 필요한 곳을 직접 찾아 나섰다. 수해를 입은 집과 농가를 방문해 피해 상황을 확인한 후 사람들을 모으고 봉사를 진행하는 한편 재난 상황을 온라인과 언론에 알려 봉사가 지속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또한 ‘봉사자를 위한 숙소’를 마련해 장기 봉사자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봉사할 수 있도록 돕고 주민 커뮤니티 ‘그늘과언덕’이 운영하는 카페 ‘남다른 이유’에서는 ‘까치밥’(감을 수확할 때 다 따지 않고 까치가 먹을 수 있도록 남겨두는 감. 까치밥을 선결제해 기부하면 누구든 필요할 때 음료를 마실 수 있다.)으로 기부금을 받아 봉사 현장에 새참을 지원하기도 했다.

‘남다른 이유’로 선결제 기부된 까치밥. 봉사자들의 새참으로 쓰였다. (사진제공: 김정준님)
지역 활동가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고 운영한 이번 활동은 단순히 ‘수해복구 봉사’를 넘어 의도치 않게 산청이라는 지역의 커뮤니티를 소개하는 장이 되기도 했다.
- 수해복구라기 보다는 좋은 곳에 머물며 좋은 사람들을 만나 함께 일한 것 같아요.
- 지역 커뮤니티 안에서 돌봄이 실현되고 있는 것 같아요.
- 땅 알아보려고요. 여기에 살고 싶습니다. 하하하
- 산청지역의 네트워크가 돋보였습니다. 피해농가와 지역민의 유대감이 남달라보였어요.
- 산청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봉사 후 참여한 분들과 나눈 이야기도 기억에 남습니다.
- 건강한 커뮤니티의 힘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 연대의 힘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모범 사례라 생각합니다. 타 지역에도 많이 전해지길 바랍니다.
- 지역에 건강한 시민사회가 있다는 게 재난상황에서 더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의료사협’과 ‘그늘과언덕’이 자원봉사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의 답변 중 일부)
봉사를 준비한 산청의 활동가들은 전국에서 온 봉사자들을 진심으로 환대했다. 고마운 마음을 진심을 담아 전하고 잠자리와 먹거리를 살피고 돌아가는 길을 배웅하면서. 봉사자들은 봉사를 하러 왔다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갔다. 자발적으로 커뮤니티를 돌보는 지역의 사람들을.
함께 모여 놀던 사람들이 '활동가'가 된다.
‘지역 활동가’라니. 왠지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요원’같은 느낌이 드는 단어지만 알고 보면 그들은 우리 주변에서 늘 마주치는 ‘이웃’들이었다. 넉넉하게 수확한 텃밭 작물을 나누어 먹거나 이웃의 아이를 잠깐 돌봐주고 함께 모여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나누는 이웃들. ‘남다른 이유’ 카페를 아지트 삼아 음악회와 돌잔치를 열며 기쁨도 아픔도 함께 나누는 사람들. 지역민들이 만든 장터 ‘목화장터’에서 새로운 이웃을 만나고 오랜만에 만난 이웃의 안부를 묻던 산청의 사람들은 재난이 일어나자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할까 말까’ 고민하는 게 아니라 ‘뭘 할까?’ 고민하며 각자의 역할을 찾아 행동했다. 함께 모여 놀던 시간은 아마 이 때를 위해 서로의 합을 맞추는 시간이었으리라. 꼼꼼한 사람, 사람을 잘 챙기는 사람, 요리를 잘 하는 사람, 몸 쓰는 일을 잘 하는 사람, 농민들과 인연이 있는 사람, 언론과 인연이 있는 사람, 봉사자들을 위해 자기의 공간을 내어 줄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해나갔다. 돌아보니 그들은 이웃이자 친구이자 '활동가'였다.

봉사가 끝난 뒤 피해 농가를 다시 방문한 활동가 강영경님 (사진제공: 강영경)

친구들과 함께 봉사에 참여한 산청 간디고등학교 1학년 권다정 학생 (사진제공: 권다정)
경주 지진과 구례 수해 때의 일을 기록하고 다음 재난을 대비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현관앞비상배낭’ 윤정임 대표는 지난 10월 21일 열린 ‘재난 회복을 위한 현장의 목소리’ 주민토론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6,5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던 1995년 일본 한신아와지 대지진 당시 피해 주민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에게 구조되었나요?’ 라고요. 이 질문에 주민들 중 98%가 스스로나 이웃이 구조했다고 답했습니다.”
(자기 자신 39,1%, 지인 31,5%, 가족 24,6%, 통행인 2.9% 정부에게 구조된 경우는 1.9%에 그쳤다.)
덧붙여 공식, 비공식적인 교류로 형성된 지역의 커뮤니티는 재난 상황에 즉각적이고 유연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대응해 서로를 돕는다고 이야기 했다. 이렇게 맺어진 관계는 재난 발생 후 부정적인 기억을 새로운 기억으로 전환시키며 커뮤니티를 치유하는 한편 다음에 일어날지 모르는 재난을 대응하는 역량을 키운다고도 했다.
재난 앞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를 재난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일은 ‘이웃’이 되는 일 아닐까? 같은 지역에 살고 있지만 서로 모르면 이웃이라 할 수 없다. 어느 인터뷰이의 이야기처럼 좋은 이웃으로 사는 것이 늘 쉽지만은 않다. 그렇지만 때로 생각이 달라 불편하더라도 부러 만나 얼굴을 익히고 안부도 묻는 서로의 안전망이 되자. 그리고 만약 재난이 다시 찾아온다면 마음 다해 이웃을 돕고 기꺼이 도움을 받자. 재난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서로를 돕는 일을 통해 마음속에 있던 선한 씨앗을 싹틔워 각자의 모양대로 피어나는 아름다운 숲을 이루자.
뜨거웠던 여름. 510명의 작은 손이 산청과 합천, 하동에 모였다가 흩어졌다. 비록 피해 농가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을지라도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손을 보태는 작은 마음들이 그들에게 위안이 되었기를 바란다.
산청 수해 복구 기록 작업 덕분에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같은 지역에서 살아가는 이웃들의 힘과 전국에서 온 봉사자들을 보며 가슴 벅찰 만큼 감사하기도 했던 반면 지역민을 촘촘하게 살피지 않는 공공의 역할이 아쉽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이렇게 하는 거다!’ 라고 알리고 싶었다. 이번 산청 수해복구의 과정이 많은 지역 커뮤니티에게 알려진다면 좋겠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어쩌면 다시 올 재난을 대비해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더 자주 만나 울고 웃자.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신 한나와 햇살, 상글, 정준, 희란, 효영, 다정, 창수님께 감사를 전한다. 전국에서 다녀간 수많은 봉사자들에게도.
글쓴이_ 정수진
하동으로 이주한 지 4년이 되었습니다. 겨울이 오면 남편과 함께 인도와 네팔에서 NGO 활동가로 살아가고, 꽃피는 봄이 오면 하동으로 돌아와 민박집을 엽니다. 텃밭을 가꾸고 이웃 농부들의 농산물이 잘 쓰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요리하고 나누어 먹습니다.
※ 이 인터뷰는 '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브라이언임팩트', '지리산이음'의 지원과 '그늘과언덕' 주관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산청, 수해 그 이후 - 여는 말
통행이 통제된 도로가 여전히 많았다. 아직 상수도가 복구되지 않았다는 마을도 있었다. 가까운 산과 언덕 곳곳에 산사태로 흘러내린 붉은 흙이 조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 장화에 목장갑, 흙투성이 옷차림을 하고 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는 것이 특별하지 않은 시기였다.
폭우로 삶의 터전이 엉망이 된 이웃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경남 산청 의료복지 사회적 협동조합(이하 산청 의료사협)’과 함께 복구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시기에 단체 ‘그늘과 언덕’은 ‘지리산이음’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지금 어떤 형태로든 기록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은 아마 2020년 구례 수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경험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산청 수해 복구를 응원하며 엿새동안 산청에 식사를 챙겨 준 하동 HAB(Happy All Beings)의 수진이 수해 복구 활동의 과정을 누군가 기록해야 할 것 같은데 산청 사람들은 그럴 여력도 정신도 없을 것 같아 자료를 모아 정리중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늘과 언덕’은 급히 ‘산청 의료사협’과 논의하여 수해와 그 복구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정하고 기록활동가를 섭외했다. 다행히 가장 가까운 이웃인 하동과 함양에서 수진과 자야, 두 분의 기록활동가가 기꺼이 기록작업을 맡아 주셨다. ‘지리산이음’과 ‘산청 의료사협’이 지원하고 ‘그늘과 언덕’이 주관단체로 진행하는 산청의 수해와 그 회복과 복구의 기록은 그렇게 시작했다. 이 기록을 읽는 이들에게 당시 기준으로 ‘현재의 목소리’를 ‘사실적’으로 전달하여 재난을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가 당사자 또는 이웃으로서 해야 할 역할들을 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재난 앞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하동에 사는 이웃, 정수진
글 / 정수진
어느새 겨울이 찾아왔다. 푸르렀던 나뭇잎도 모두 지고 풀과 작물로 무성했던 텃밭도 가을걷이를 거쳐 황량해졌다.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을 계획했던 새해가 엊그제 같은데 또 다시 새로운 해를 맞을 준비하고 있다.
올 해는 계획에도, 예상에도 없던 일이 일어났다. 바로 산청과 합천, 하동에 일어난 집중 폭우와 수해. 7월 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고 많은 분들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고 셀 수 없이 많은 하우스와 농가가 침수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나섰다. 먼저 수해를 겪은 구례에서 봉사자들이 손을 보태러 산청으로 달려왔고 하동에서 온 봉사자들은 봉사자와 수해민을 위한 저녁식사를 차려 나누었다. 그 사이 ‘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의료사협‘)’과 산청 주민모임 ‘그늘과언덕’의 활동가들이 ‘의료사협’ 조합원들을 시작으로 피해 상황을 조사하는 한편 수해 복구 봉사자들을 모집하는 채팅방을 개설해 피해를 입은 주민과 농가에 연결하고 봉사를 진행했다.
초기에는 산청과 구례 그리고 하동의 봉사자로 시작했으나 점차 소식이 알려져 함양, 남원 등 지리산으로 연결된 이웃지역의 봉사자가 다녀갔고 가까이로는 진주와 사천, 합천에서부터 멀리 광주, 부산, 대구, 서울, 세종 등 전국에서 온 개인 봉사자와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들이 뒤이어 손길을 보탰다.
7월 25일에 시작했던 수해복구 봉사는 9월 13일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51일간 30개 농가에 44회 봉사했으며 전국에서 530명(누적 집계)의 봉사자가 다녀갔다.
재난은 호러인데 극복은 드라마처럼
봉사자와 수해민을 위한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때, 매일 신기한 장면을 마주했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땀범벅에 흙투성이가 되어 식사를 하러 온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모습(처참한 현장을 직접 보고 왔으니 다들 절망적인 마음일거라 생각했다.). 그들을 보며 한 친구가 이야기했다. “재난은 호러인데 극복은 드라마”라고.
멋지고도 대단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흔하고도 익숙해서 바람처럼 흩어져버리기 쉽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참 귀하다. 무심한 일상 속에서도 다정한 마음이 오가고 그 사이에서 어느덧 선한 마음이 싹튼다. 그런 순간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쉬워 기록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기록 활동을 통해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재난을 어떻게든 작게나마 준비하고 싶기도 했다.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일면식도 없는 농민과 수해민을 도우러 산청까지 찾아와 봉사를 하는 걸까?’라는 궁금함을 안고 8명의 봉사자를 만났다.
피해 농가와 봉사자의 다리가 되어주었던 ‘의료사협’과 ‘그늘과언덕’의 송한나님과 강영경님, 수해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온 구례의 상글님, 힘들지만 ‘밥은 먹고 하자’며 봉사자의 저녁 식사를 준비한 하동의 김정준님, 더불어 사는 삶의 힘을 믿고 봉사한 진주의 박희란님, 봉사를 통해 삶의 테두리를 확장해간 산청간디고등학교 채효영, 권다정 학생, 지역민으로서의 책임감으로 봉사 현장을 지킨 산청의 김창수님을 만나 이야기를 청했다. 더불어 정식으로 인터뷰를 하지는 못했지만 짧게 만나 이야기를 나눈 12명의 봉사자들의 소감과 ‘의료사협’과 ‘그늘과언덕’이 자원봉사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의 답변 중 일부를 이 글에 실었다.
멋지고도 대단한 이유로 봉사를 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인터뷰를 통해 만난 봉사자들에게서는 한결같이 ‘대단하지 않은 일’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누군가는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지 않는 게 더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고 ‘눈에 보이니 안 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지나칠 수 없었다.’라고 하기도 했다. ‘기후위기는 제쳐 두고 한 사람이 밭을 가꾼 마음이 안쓰러워서 봉사를 했다.’, ‘상대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봉사를 하니 내가 참 좋더라.’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오히려 자신이 했던 작은 일이 인터뷰에 실려서 부끄럽다고 주저하는 봉사자들을 만나며 재난 복구의 과정은 어쩌면 각자의 안에 잠들어있던 ‘선한 마음’이라는 씨앗이 싹트는 기회였던 것은 아닐지 생각하기도 했다.
흙투성이, 땀범벅이지만 환하게 밝은 봉사자들 (사진제공: 김창수님(왼쪽), 강영경(오른쪽))
커뮤니티를 돌보는 사람들
재난의 규모가 클수록 공적 역할은 기반 시설(전기, 수도, 도로, 대규모 산사태 등) 복구에 우선 투입되기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공백 혹은 시차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번 수해 때 공적 역할의 공백을 메운 것은 산청의 지역 활동가들이었다. 활동가들은 재난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이웃들의 안부를 묻고 일손이 필요한 곳을 직접 찾아 나섰다. 수해를 입은 집과 농가를 방문해 피해 상황을 확인한 후 사람들을 모으고 봉사를 진행하는 한편 재난 상황을 온라인과 언론에 알려 봉사가 지속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또한 ‘봉사자를 위한 숙소’를 마련해 장기 봉사자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봉사할 수 있도록 돕고 주민 커뮤니티 ‘그늘과언덕’이 운영하는 카페 ‘남다른 이유’에서는 ‘까치밥’(감을 수확할 때 다 따지 않고 까치가 먹을 수 있도록 남겨두는 감. 까치밥을 선결제해 기부하면 누구든 필요할 때 음료를 마실 수 있다.)으로 기부금을 받아 봉사 현장에 새참을 지원하기도 했다.
‘남다른 이유’로 선결제 기부된 까치밥. 봉사자들의 새참으로 쓰였다. (사진제공: 김정준님)
지역 활동가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고 운영한 이번 활동은 단순히 ‘수해복구 봉사’를 넘어 의도치 않게 산청이라는 지역의 커뮤니티를 소개하는 장이 되기도 했다.
봉사를 준비한 산청의 활동가들은 전국에서 온 봉사자들을 진심으로 환대했다. 고마운 마음을 진심을 담아 전하고 잠자리와 먹거리를 살피고 돌아가는 길을 배웅하면서. 봉사자들은 봉사를 하러 왔다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갔다. 자발적으로 커뮤니티를 돌보는 지역의 사람들을.
함께 모여 놀던 사람들이 '활동가'가 된다.
‘지역 활동가’라니. 왠지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요원’같은 느낌이 드는 단어지만 알고 보면 그들은 우리 주변에서 늘 마주치는 ‘이웃’들이었다. 넉넉하게 수확한 텃밭 작물을 나누어 먹거나 이웃의 아이를 잠깐 돌봐주고 함께 모여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나누는 이웃들. ‘남다른 이유’ 카페를 아지트 삼아 음악회와 돌잔치를 열며 기쁨도 아픔도 함께 나누는 사람들. 지역민들이 만든 장터 ‘목화장터’에서 새로운 이웃을 만나고 오랜만에 만난 이웃의 안부를 묻던 산청의 사람들은 재난이 일어나자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할까 말까’ 고민하는 게 아니라 ‘뭘 할까?’ 고민하며 각자의 역할을 찾아 행동했다. 함께 모여 놀던 시간은 아마 이 때를 위해 서로의 합을 맞추는 시간이었으리라. 꼼꼼한 사람, 사람을 잘 챙기는 사람, 요리를 잘 하는 사람, 몸 쓰는 일을 잘 하는 사람, 농민들과 인연이 있는 사람, 언론과 인연이 있는 사람, 봉사자들을 위해 자기의 공간을 내어 줄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해나갔다. 돌아보니 그들은 이웃이자 친구이자 '활동가'였다.
봉사가 끝난 뒤 피해 농가를 다시 방문한 활동가 강영경님 (사진제공: 강영경)
친구들과 함께 봉사에 참여한 산청 간디고등학교 1학년 권다정 학생 (사진제공: 권다정)
경주 지진과 구례 수해 때의 일을 기록하고 다음 재난을 대비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현관앞비상배낭’ 윤정임 대표는 지난 10월 21일 열린 ‘재난 회복을 위한 현장의 목소리’ 주민토론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덧붙여 공식, 비공식적인 교류로 형성된 지역의 커뮤니티는 재난 상황에 즉각적이고 유연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대응해 서로를 돕는다고 이야기 했다. 이렇게 맺어진 관계는 재난 발생 후 부정적인 기억을 새로운 기억으로 전환시키며 커뮤니티를 치유하는 한편 다음에 일어날지 모르는 재난을 대응하는 역량을 키운다고도 했다.
재난 앞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를 재난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일은 ‘이웃’이 되는 일 아닐까? 같은 지역에 살고 있지만 서로 모르면 이웃이라 할 수 없다. 어느 인터뷰이의 이야기처럼 좋은 이웃으로 사는 것이 늘 쉽지만은 않다. 그렇지만 때로 생각이 달라 불편하더라도 부러 만나 얼굴을 익히고 안부도 묻는 서로의 안전망이 되자. 그리고 만약 재난이 다시 찾아온다면 마음 다해 이웃을 돕고 기꺼이 도움을 받자. 재난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서로를 돕는 일을 통해 마음속에 있던 선한 씨앗을 싹틔워 각자의 모양대로 피어나는 아름다운 숲을 이루자.
뜨거웠던 여름. 510명의 작은 손이 산청과 합천, 하동에 모였다가 흩어졌다. 비록 피해 농가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을지라도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손을 보태는 작은 마음들이 그들에게 위안이 되었기를 바란다.
산청 수해 복구 기록 작업 덕분에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같은 지역에서 살아가는 이웃들의 힘과 전국에서 온 봉사자들을 보며 가슴 벅찰 만큼 감사하기도 했던 반면 지역민을 촘촘하게 살피지 않는 공공의 역할이 아쉽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이렇게 하는 거다!’ 라고 알리고 싶었다. 이번 산청 수해복구의 과정이 많은 지역 커뮤니티에게 알려진다면 좋겠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어쩌면 다시 올 재난을 대비해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더 자주 만나 울고 웃자.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신 한나와 햇살, 상글, 정준, 희란, 효영, 다정, 창수님께 감사를 전한다. 전국에서 다녀간 수많은 봉사자들에게도.
※ 이 인터뷰는 '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브라이언임팩트', '지리산이음'의 지원과 '그늘과언덕' 주관으로 진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