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산포럼은 더 나은 세상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지리산에 모여 변화에 관한 아이디어, 사례, 경험, 계획 등을 공유하고 사회 의제를 토론하면서 자유롭게 교류하는 축제형 포럼입니다.
2015년, '세상을 보는 색다른 100가지 생각'을 주제로 지리산포럼이 시작되었습니다. 2022년에는 '10년 후 OO'을 주제로 하여 우리의 10년 후에 대해 여러 시선으로 바라본 이야기를 나눠주실 분들을 지리산에 초대해보려 합니다.
지리산포럼2022 [더 알아보기]
한국의 능력주의와 민주주의 위기
2022년 10월 1일 (토) 오전 10시, 작은변화베이스캠프 들썩
: 공정 담론과 사회적 혐오의 바탕에 한국 특유의 능력주의가 있음을 밝히고, 그것이 불평등 및 민주주의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분석합니다. 그동안 사회적으로 유통되어온 여러 담론들, 예컨대 세대 담론이나 세습사회 담론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한국의 사회적 문제를 극복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박권일 / 작가, 사회비평가
기자로 일하다 미디어사회학자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능력주의>, <축제와 탈진>,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88만원 세대> 등을 책을 썼습니다. 역동적으로 보이는 한국 사회의 변하지 않는 구조에 관심이 많습니다.

ⓒ 지리산이음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단어, '공정'
‘공정’은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단어 중 하나다. 서울도시철도공사나 인천국제공항의 정규직화에 대한 반발부터 사회 고위층 정치인들의 세습 문제까지 ‘공정’에 관한 여러 문제들이 끝없는 정치적 논쟁의 씨앗이 되었다. 과연 우리 한국 사회가 정말로 정의와 공정을 지향해서 이러한 논란이 나온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이번 시간을 통해 알아보려 한다.
능력주의에 찬성하는 한국인들
공정과 짝을 이루는 능력주의에 대한 개념 정리로 시작하고자 한다. 능력주의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의 번역어로,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능력 또는 공적에 따른 지배를 뜻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능력과 노력에 따른 응분의 보상체계’이자, ‘능력과 노력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은 정당하다’는 이데올로기로서 불평등을 바라보거나 수용하게 만드는 특정한 관점을 가리키는 신조어라고 할 수 있다. 능력주의라는 단어는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1958년에 쓴 SF소설 『능력주의의 발흥(The Rise of The Meritocracy)』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저자는 가정환경의 영향이나 지위 세습을 차단하고 철저하게 지능과 노력에 따라 자원이 분배되는 소설 속 가상의 미래 영국을 풍자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중들은 이 소설이 등장하자마자 아이러니하게도 대중들은 이 소설이 등장하자마자 정반대의 의미로 수용했다.
한국 역시도 마이클 영 시대와 다를 바 없이 여전히 능력주의를 찬성하는 것이 대세다. 이를 잘 보여준 것이 서울도시철도공사 사태, 인천국제공항공사 사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과정에서 엄청난 사회적 갈등이 일어났으며, 정권의 지지율이 떨어질 정도로 반발이 심했다. 이 반발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시험도 안 보고 입사한 비정규직들이 감히 정규직이 되는 것이 불공정이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상식일까? 호주 같은 경우는 육체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가치 매김이 한국에 비해 굉장히 높다. 노동에 대한 격차가 적은 사회라는 뜻이다. 한국은 특히 고시와 같은 인증 시험을 통과한 사람과 통과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 엄청난 사회적 격차가 있으며, 이에 항의를 하거나 차별에 대해 저항하면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열심히 하지 그랬냐'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런 상황이 과연 당연하고 정의로운지 질문하고 싶다.
존 롤스가 말하는 정의
이런 상황은 당연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고 대답한 사람이 있다. 다들 아는 <정의론>의 존 롤스다. 그는 "불평등한 보상이 정당하려면 재능, 노력, 기여에 따른 보상의 윤리적 타당성이 증명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롤스는 재능에 따른 보상도, 노력에 따른 보상도, 심지어 기여에 따른 보상도 모두 정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재능의 경우, 이미 주어진 재능은 개인에게 속한 것이지만 각자의 재능이 차이나는 상황 자체는 단지 우연적인 사건에 불과하기 때문에 개인은 그 재능의 배분에 대한 자격까지 가질 수는 없다. 노력의 경우, 노력이 순전히 개인의 의지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노력하기 더 쉬운 것이 현실이며 좋은 가정환경 또한 노력하기 좋은 조건을 만든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재능과 좋은 가정환경은 그저 우연의 산물일 뿐이기 때문에 노력에 따른 보상은 정당하지 않다. 기여의 경우에는 조금 더 복잡하다. 한계생산력설에 의하면 특정 요소, 예컨대 노동력과 생산설비 등이 어떤 생산물에 얼마만큼 기여했는지를 측정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순환논증이며 결국 수학적으로 틀렸음이 증명되었다. 특정한 사람의 기여가 결과에 미친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에 대한 보상도 계산할 수 없다. 롤스는 "개인이 그의 노동에 의해 기여하는 것은 그의 기술에 대한 기업의 수요에 따라 달라지며 나아가서 이것은 다시 그 기업의 생산물에 대한 수요에 따라 달라진다." 고 말한다.
그래도 롤스는 재능은 성공의 변수 중 하나라고 보았다. 대니얼 F. 챔블리스는 다르게 보았다. 대니얼 F. 챔블리스에 따르면 일반적인 짐작과 달리 수영선수로 성공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기초 신체능력, 즉 근력과 심폐지구력의 한계치는 매우 낮고 선수 간 두드러지게 차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대신 기후가 온난한 곳에서 훈련 받을 수 있는지, 부모로부터 충분한 뒷바라지를 받는지, 전문가로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는지 여부가 더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연구의 결론이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운동의 유형과 해당 종목에서 활약하는 프로 선수들의 인종과 출신 계층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발견되었다. 왜 유명한 흑인 골프 선수는 많지 않을까? 골프를 훈련하려면 경제적 여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운동 실력뿐 아니라 차별적인 기회가 재능을 펼치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변수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정의'라고 쉽게 이야기하지만, 여기에는 정답이 없다.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것은 '부정의'다. 건물주가 지나치게 많은 돈을 빨아들일 때, 우리는 그걸 특권이라고 말하고 시정을 요청한다.
과도한 불평등은 왜 오류인가
수학적으로도 과도한 불평등은 오류라는 근거가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솔로는 인류 전체의 생산성 성장을 요소 분석했다. 전체 생산성이 어떤 요소로 되어 있는지 직접 분석한 결과, 20%는 노동력, 자본, 기술 등의 영향으로 설명이 된다. 이것들은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기본적 요소다. 반면에 나머지 80%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연구의 한계에 봉착해서 고민한 끝에 솔로는 '잔차' 개념을 통해 기술 중심 경제성장론을 열어 젖힌다. 80%의 미지수는 인류 전체가 같이 발전시킨 공동 유산으로서의 기술 혁신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하버드 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엔지니어와 20세기에 하버드 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엔지니어를 비교할 때 생산성이 100배 차이 난다면 이는 두 사람의 능력이 100배 차이나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이는 100년 사이 일어난 인류 전체의 기술 혁신 때문이다. 억만장자들의 기여와 능력이 그들의 성공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 지리산이음
불공정은 죽어도 못 참지만 불평등은 기꺼이 참는 나라
데이터로 드러나듯이 한국처럼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 왜 촛불시민들은 왜 '불평등'에 반대하는 촛불을 조직하지 않을까?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모두 성취했을 뿐 아니라, 부패한 현직 대통령을 탄핵시킨 정의로운 시민들이, 왜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집단행동에는 잘 나서지 않을까? 간단한 답변과 복잡한 답변이 있겠지만, 간단하게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한국인은 불공정은 죽어도 못 참지만, 불평등은 기꺼이 참기 때문이다. 흔히 한국 사람들을 두고 "배고픈 건 참는데 배 아픈 건 못 참는다"고 한다. 한국은 선진자본주의 사회 중에서 가장 불평등을 선호하는 나라이고 지구상에서 가장 능력주의에 경도된 사회 중 하나다. 시민에게 ‘불평등’에 대해 물어보면 대부분의 조사에서 “한국은 소득차이가 너무 크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런 수치를 가지고 한국인의 분배적 정의 관념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자칫 ‘한국인은 평등한 분배를 좋아한다’는 오해를 할 수도 있겠으나 조금만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지면 전혀 다른 대답이 나온다.
MZ세대가 유독 능력주의에 경도되어 있다는 편견이 많지만 「한국사회 공정성 인식 조사 보고서」(한국리서치, 2018)에 따르면 한국인의 공정성 가치관에는 세대별로 큰 차이가 없다. 한국 사람들 중 다수는 분배에 있어 산술적 평등을 추구하기보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분배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수의 차이는 클수록 좋다'는 입장은 66%에 이른다.
타인을 믿지 않는 나라
영국의 싱크탱크 레가툼 연구소에서는 매년 경제적 기반, 통치지배구조, 개인의 자유, 교육, 건강과 사회자본, 건강 수준, 행복 수준 등 9개 분야를 분석해 각국의 삶의 질을 평가하는 '레가툼 번영지수(Legatum Prosperity Index)'를 발표한다. 2021년 보고서에서 한국은 사회 자본에 대해서 167개국 중 147위를 기록했으며, ‘제도에 대한 신뢰’, ‘개인 간 신뢰’ 등의 주요 영역에서도 최하위권이다. 한국 사회자본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가운데 38위로, 매년 ‘붙박이 꼴찌’다. 한국인의 ‘사회적 고립도’ 역시 34.1%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한국은 다른 사람과 공적기구에 대한 신뢰 지수가 아주 낮은 나라다. ‘타인을 믿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바탕으로 산출하는 신뢰도는 26%로, OECD 회원국 평균치인 36%보다 10%p나 낮다. (OECD 한눈에 보는 사회상(Society at a Glance), 2016) 낮은 사회적 신뢰는 각자도생의 태도를 강화하고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한국은 전형적인 '저신뢰사회'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은 소방관 정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가 기구와 공직자를 불신한다. 그중 국회, 검찰, 언론에 대한 신뢰도는 유독 낮아 그래프로 환산하면 난생처음 만난 사람보다 못 믿는다. 한국인은 회사나 상사의 상벌·평가 시스템도 불신한다. 이렇다 보니 한국인은 자질과 능력, 업무성과에 따라 보상 격차를 크게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보다 중요한 가치로 ‘근무태도’를 놓는다. 업무 성과에 대한 평가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야근을 많이 하는 등의 '근면성실'을 차등 보상의 최우선 기준으로 놓게 된다.
경제 수준은 올라가도 관용과 신뢰도는 제자리 걸음
다른 나라들의 경우 응답자의 지위, 계층, 계급에 따라 능력주의 성향에 차이가 보이는 반면 한국은 응답자의 정치 성향, 계층의식, 학력 등이 능력주의를 선호하는 성향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세계가치관조사(World Values Survey, WVS)의 결과에서도 한국인의 이러한 성향이 드러난다. 세계가치관조사는 전통적 가치, 세속 합리적 가치, 생존적 가치, 자기표현 가치라는 4개의 핵심가치로 각 국가의 가치관을 분석한다. 이 넷 중 핵심은 자기표현 가치에 있다. 친족관계와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유대와 관용, 자유를 향한 열망, 타자에 대한 신뢰, 인류 전체의 문제에 지대한 관심이 자기표현 가치의 속성이다.
세계가치관조사는 산업화와 경제 성장이라는 사회구조적 변화가 사람들의 가치관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적 예측에 바탕한 국제적 조사이다. 일반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룬 국가에서는 경제적 풍요로부터 삶의 질 쪽으로, 먹고 사는 문제에서 추상적이고 성찰적이며 삶의 질에 관련된 의제, 나 자신이 아닌 타인과 지구에 대한 의제로 시민들의 관심이 옮겨간다는 것이다.
보통 '잘 살게' 되면 사회 전체의 관용과 신뢰도가 함께 올라간다. 그러나 세계가치관조사에서 드러난 한국의 특성은 다르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지 않다. GDP로 대변되는 경제 수준이 올라가도, 소수자와 이방인에 대한 관용은 지나치게 적으며 사회적 신뢰나 관용 수준 역시 경제 수준과 비례해 향상되지 않는다. 대만과 중국이 경제 성장으로 자기표현 가치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자기표현 가치가 가장 낮은 나라가 되었다.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가 세계가치관조사 자료를 활용해 52개 국가의 관용성 수준을 평가한 자료에 따르면 '자녀에게 관용성을 가르쳐야 한다'는 응답은 45.3%로 52위를 기록했다. ‘나와 다르거나 나보다 못한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의식을 자녀에게 가르치겠다’는 응답이 52개 국가 중 꼴찌라는 것이며, 비약하자면 '공부 못하고 못 사는 애랑 놀지 말아라' 라고 가르치겠다는 뜻이다.
노력에 따라 소득에 차이가 나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세계가치관조사에 항상 포함되는 질문 중에는 ‘소득 평등(income equality)’에 대한 가치관을 측정하는 문항이 있다. 보통 이러한 질문을 받으면 규범적 편향이 나타나기 때문에 세계 대다수의 나라에서 평등에 대한 찬성이 불평등에 대한 찬성보다 높게 나타난다. 남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답변에 체크하는 것이다. 한편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 응답자들은 소득 불평등에 대해 압도적으로 찬성한다.
2010년에 진행된 6차 세계가치관조사의 결과를 주요 국가만 모아서 보면 다음과 같다.
- 독일: 평등에 찬성 (이하 '평등') 57.7%, 불평등에 찬성 (이하 '불평등') 14.6%
- 중국: 평등 52.7%, 불평등 25.8%
- 스웨덴: 평등 42.7%, 불평등 30.6%
- 미국: 평등 29.6%, 불평등 36.2%
- 일본: 평등 28.6%, 불평등 25.1%
- 한국: 평등 23.5%, 불평등 58.7%
2020년 진행한 7차 조사에 따르면 평등에 찬성하는 응답자는 12.4%, 불평등에 찬성하는 응답자는 64.8%로 더 극단적인 수치를 기록한다.
불평등에 대한 선호는 민주주의의 성장을 방해한다
한국인들은 '가치의 위계서열이 명확‘하다. 즉 ‘합리적 선택’이 무엇인지 알기 쉽고, 그래서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맹렬히 질주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대안적 삶의 모델은 제시되기 어렵다. 한국 사람들은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게임 <동물의 숲>을 해도 공장식 축산을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계절마다 잡히는 물고기들을 전부 모으면 업적이 축적되는데, 한국 사람들은 이걸 못 기다리고 해킹프로그램을 돌려서 사계절에 잡히는 모든 물고기를 수집한다는 것이다. 효율성과 가성비, 순위에 집착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생태 위기에 대해 고민하기도 어렵다. 한국 사람들의 자부심과 달리 민주주의의 수준 역시 지체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 모든 특성들은 비슷한 경제 수준의 국가들에 비해 유독 낮은 자기표현 가치라는 지표로 수렴되고 있다.
세계가치관조사를 통해 분석하는 자기표현 가치 수준은 형식적 민주주의(formal democracy)와 효과적 민주주의(effective democracy)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형식적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가 표면적·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민주주의를 뜻하며, 효과적 민주주의는 더 나아가 민주주의가 제도로 존재할 뿐 아니라 개인들이 일상에서 자유를 충분히 누리고 평등하게 존중되는 민주주의를 뜻한다.
이코노미스트에서 측정하는 민주주의 지수(EIU Democracy Index)에서 한국은 2020년 기준 현재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나, 해당 분류의 23개국 가운데에서는 최하위를 기록했다. 2021년 기준으로는 16위로 변동되었으나 여전히 하위권이다. 최근 15년 동안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 최하위 또는 ‘결함 있는 민주주의 국가’ 최상위를 시계추처럼 오가고 있으며, 사실상 민주주의의 수준이 지체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세계가치관조사를 고안한 정치사회학자 로널드 잉글하트(Ronald Inglehart)와 크리스찬 웰젤(Christian Welzel)의 이론을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룬 국가에서는 국민들의 자기표현 가치가 향상하고 이는 대중의 집단 행동으로 이어지며, 엘리트들의 부정부패가 개선되고 결과적으로 효과적 민주주의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한국은 예외적으로 촛불시위로 대표되는 대중의 집단행동만 강한 사회다. 자기표현의 가치가 올라가는 단계가 생략된 것이다. 이에 더해 대중의 집단행동이 강함에도 엘리트 고결성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낮은 자기표현 가치 외에도 능력주의 원칙, 즉 불평등에 대한 강한 선호는 민주주의의 심화, 특히 사회경제적 민주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 예상된다.
우리는 '공정하고 거대한 불평등'을 원하는가?
한국의 능력주의 풍조에도 역사문화적인 배경이 있다. 한국이 오늘날과 같이 능력주의에 기울게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 남한 사회에서 '디폴트값'으로 학습되고 심화된 반공주의에 외환위기 이후 지배 담론이 된 시장주의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불평등에 대한 집단 해법이 필요하다는 담론이 생겨나기 전에 개별 해법, 즉 각자도생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억울하면 출세해라' 식의 사고를 내면화하게 된 것이다.
각자도생, 개인의 생존을 우선시하는 사회 분위기의 결과로 한국 능력주의에는 두 개의 두드러지는 특성이 나타난다. 하나는 '시험주의'다. 공무원 선발 시험인 '고시' 뿐만 아니라 대학입학시험, 민간 대기업의 공채시험, 언론사의 입사시험 등 비유적인 의미의 '고시'들은 '성공'한 개인들의 지대 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다른 하나는 혐오하고 멸시하는 능력주의다. 세계 어디에서나 사회에 숨은 혐오가 지적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특히 '이백충'(월 소득이 200만원 이하임을 비하하는 은어), '휴거'(특정 임대아파트에 거주함을 비하하는 은어), '빌거'(아파트가 아닌 빌라 형태의 건물에 거주함을 비하하는 은어)처럼 사회경제적·계급차별적 혐오표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오늘날 한국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대표 감정을 두 개 고른다면, 하나는 혐오이고 다른 하나는 울분이다. 이중 울분은 독일과 한국에서 공중보건의 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는 감정이다. 울분에는 '답답하고 분한 마음'이라는 사전적인 의미가 있으나, 통일 후 동독 사람들이 겪은 심리 문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확장되어 ‘울분’(embitterment)과 ‘외상 후 울분장애’(PTED)라는 개념이 사용되었다. 부당하게 당했다,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감정이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울분장애의 개념을 국내에 알린 한창수 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역사에서 울분과 가장 유사한 감정인 ‘한(恨)’은 “부당함에 희생되었다는 감각, 응축되고 결정화된 회한의 감정“을 이른다.
지금까지 알아본 한국인의 가치관에 대한 통계적 사실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한국 사람들은 특권의 불평등에 분노하여 그것을 없애려는 게 아니라 '특권에 접근할 기회의 불평등'에 분노하며 특권은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 이 경향은 고정관념과 다르게 계층, 세대, 이념까지도 초월해 나타난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보상과 처벌이 공정한지 일일이 촉각을 기울이게 되는 상황은 사람들을 만성적이고 지속적인 울분 상태로 몰고 간다.
데이터에 따르면 한국사람들이 원하는 건 단 하나, ‘공정하고 거대한 불평등'이다. 특권은 커야 하고, 공정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애초에 불평등이 크지 않다면 공정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기 어렵다. 예를 들면, 도토리 10개를 찾은 사람과 우연 또는 편법을 통해 도토리 11개를 얻은 사람이 있다면 전자는 맹렬한 박탈감을 느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가 11개가 아니라 100개, 또는 1000개를 우연히, 부당하게 얻었다면 그 자체로 갈등이 빚어지게 된다. 나아가 100개나 1000개를 얻기 위해 부패와 편법이 일어나기 때문에 불평등이 클수록 공정이나 정의를 달성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울분사회의 울분은 만성화된 증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사회에 대한 기대, 정의관 자체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 불평등에 대한 관용을 수정해야 한다. 사회적 질환으로서의 울분은 능력주의와 결합해 사회적 불신을 강화하고 민주주의 기반을 침식할 수밖에 없다. 결국 능력주의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으며, 능력주의에 대한 대안 모색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
발제 | 박권일
기록 및 정리 | 김누리
사진 | 지리산이음
지리산포럼은 더 나은 세상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지리산에 모여 변화에 관한 아이디어, 사례, 경험, 계획 등을 공유하고 사회 의제를 토론하면서 자유롭게 교류하는 축제형 포럼입니다.
2015년, '세상을 보는 색다른 100가지 생각'을 주제로 지리산포럼이 시작되었습니다. 2022년에는 '10년 후 OO'을 주제로 하여 우리의 10년 후에 대해 여러 시선으로 바라본 이야기를 나눠주실 분들을 지리산에 초대해보려 합니다.
지리산포럼2022 [더 알아보기]
한국의 능력주의와 민주주의 위기
2022년 10월 1일 (토) 오전 10시, 작은변화베이스캠프 들썩
: 공정 담론과 사회적 혐오의 바탕에 한국 특유의 능력주의가 있음을 밝히고, 그것이 불평등 및 민주주의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분석합니다. 그동안 사회적으로 유통되어온 여러 담론들, 예컨대 세대 담론이나 세습사회 담론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한국의 사회적 문제를 극복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박권일 / 작가, 사회비평가
기자로 일하다 미디어사회학자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능력주의>, <축제와 탈진>,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88만원 세대> 등을 책을 썼습니다. 역동적으로 보이는 한국 사회의 변하지 않는 구조에 관심이 많습니다.
ⓒ 지리산이음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단어, '공정'
‘공정’은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단어 중 하나다. 서울도시철도공사나 인천국제공항의 정규직화에 대한 반발부터 사회 고위층 정치인들의 세습 문제까지 ‘공정’에 관한 여러 문제들이 끝없는 정치적 논쟁의 씨앗이 되었다. 과연 우리 한국 사회가 정말로 정의와 공정을 지향해서 이러한 논란이 나온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이번 시간을 통해 알아보려 한다.
능력주의에 찬성하는 한국인들
공정과 짝을 이루는 능력주의에 대한 개념 정리로 시작하고자 한다. 능력주의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의 번역어로,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능력 또는 공적에 따른 지배를 뜻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능력과 노력에 따른 응분의 보상체계’이자, ‘능력과 노력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은 정당하다’는 이데올로기로서 불평등을 바라보거나 수용하게 만드는 특정한 관점을 가리키는 신조어라고 할 수 있다. 능력주의라는 단어는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1958년에 쓴 SF소설 『능력주의의 발흥(The Rise of The Meritocracy)』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저자는 가정환경의 영향이나 지위 세습을 차단하고 철저하게 지능과 노력에 따라 자원이 분배되는 소설 속 가상의 미래 영국을 풍자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중들은 이 소설이 등장하자마자 아이러니하게도 대중들은 이 소설이 등장하자마자 정반대의 의미로 수용했다.
한국 역시도 마이클 영 시대와 다를 바 없이 여전히 능력주의를 찬성하는 것이 대세다. 이를 잘 보여준 것이 서울도시철도공사 사태, 인천국제공항공사 사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과정에서 엄청난 사회적 갈등이 일어났으며, 정권의 지지율이 떨어질 정도로 반발이 심했다. 이 반발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시험도 안 보고 입사한 비정규직들이 감히 정규직이 되는 것이 불공정이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상식일까? 호주 같은 경우는 육체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가치 매김이 한국에 비해 굉장히 높다. 노동에 대한 격차가 적은 사회라는 뜻이다. 한국은 특히 고시와 같은 인증 시험을 통과한 사람과 통과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 엄청난 사회적 격차가 있으며, 이에 항의를 하거나 차별에 대해 저항하면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열심히 하지 그랬냐'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런 상황이 과연 당연하고 정의로운지 질문하고 싶다.
존 롤스가 말하는 정의
이런 상황은 당연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고 대답한 사람이 있다. 다들 아는 <정의론>의 존 롤스다. 그는 "불평등한 보상이 정당하려면 재능, 노력, 기여에 따른 보상의 윤리적 타당성이 증명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롤스는 재능에 따른 보상도, 노력에 따른 보상도, 심지어 기여에 따른 보상도 모두 정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재능의 경우, 이미 주어진 재능은 개인에게 속한 것이지만 각자의 재능이 차이나는 상황 자체는 단지 우연적인 사건에 불과하기 때문에 개인은 그 재능의 배분에 대한 자격까지 가질 수는 없다. 노력의 경우, 노력이 순전히 개인의 의지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노력하기 더 쉬운 것이 현실이며 좋은 가정환경 또한 노력하기 좋은 조건을 만든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재능과 좋은 가정환경은 그저 우연의 산물일 뿐이기 때문에 노력에 따른 보상은 정당하지 않다. 기여의 경우에는 조금 더 복잡하다. 한계생산력설에 의하면 특정 요소, 예컨대 노동력과 생산설비 등이 어떤 생산물에 얼마만큼 기여했는지를 측정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순환논증이며 결국 수학적으로 틀렸음이 증명되었다. 특정한 사람의 기여가 결과에 미친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에 대한 보상도 계산할 수 없다. 롤스는 "개인이 그의 노동에 의해 기여하는 것은 그의 기술에 대한 기업의 수요에 따라 달라지며 나아가서 이것은 다시 그 기업의 생산물에 대한 수요에 따라 달라진다." 고 말한다.
그래도 롤스는 재능은 성공의 변수 중 하나라고 보았다. 대니얼 F. 챔블리스는 다르게 보았다. 대니얼 F. 챔블리스에 따르면 일반적인 짐작과 달리 수영선수로 성공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기초 신체능력, 즉 근력과 심폐지구력의 한계치는 매우 낮고 선수 간 두드러지게 차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대신 기후가 온난한 곳에서 훈련 받을 수 있는지, 부모로부터 충분한 뒷바라지를 받는지, 전문가로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는지 여부가 더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연구의 결론이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운동의 유형과 해당 종목에서 활약하는 프로 선수들의 인종과 출신 계층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발견되었다. 왜 유명한 흑인 골프 선수는 많지 않을까? 골프를 훈련하려면 경제적 여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운동 실력뿐 아니라 차별적인 기회가 재능을 펼치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변수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정의'라고 쉽게 이야기하지만, 여기에는 정답이 없다.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것은 '부정의'다. 건물주가 지나치게 많은 돈을 빨아들일 때, 우리는 그걸 특권이라고 말하고 시정을 요청한다.
과도한 불평등은 왜 오류인가
수학적으로도 과도한 불평등은 오류라는 근거가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솔로는 인류 전체의 생산성 성장을 요소 분석했다. 전체 생산성이 어떤 요소로 되어 있는지 직접 분석한 결과, 20%는 노동력, 자본, 기술 등의 영향으로 설명이 된다. 이것들은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기본적 요소다. 반면에 나머지 80%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연구의 한계에 봉착해서 고민한 끝에 솔로는 '잔차' 개념을 통해 기술 중심 경제성장론을 열어 젖힌다. 80%의 미지수는 인류 전체가 같이 발전시킨 공동 유산으로서의 기술 혁신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하버드 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엔지니어와 20세기에 하버드 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엔지니어를 비교할 때 생산성이 100배 차이 난다면 이는 두 사람의 능력이 100배 차이나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이는 100년 사이 일어난 인류 전체의 기술 혁신 때문이다. 억만장자들의 기여와 능력이 그들의 성공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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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정은 죽어도 못 참지만 불평등은 기꺼이 참는 나라
데이터로 드러나듯이 한국처럼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 왜 촛불시민들은 왜 '불평등'에 반대하는 촛불을 조직하지 않을까?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모두 성취했을 뿐 아니라, 부패한 현직 대통령을 탄핵시킨 정의로운 시민들이, 왜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집단행동에는 잘 나서지 않을까? 간단한 답변과 복잡한 답변이 있겠지만, 간단하게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한국인은 불공정은 죽어도 못 참지만, 불평등은 기꺼이 참기 때문이다. 흔히 한국 사람들을 두고 "배고픈 건 참는데 배 아픈 건 못 참는다"고 한다. 한국은 선진자본주의 사회 중에서 가장 불평등을 선호하는 나라이고 지구상에서 가장 능력주의에 경도된 사회 중 하나다. 시민에게 ‘불평등’에 대해 물어보면 대부분의 조사에서 “한국은 소득차이가 너무 크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런 수치를 가지고 한국인의 분배적 정의 관념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자칫 ‘한국인은 평등한 분배를 좋아한다’는 오해를 할 수도 있겠으나 조금만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지면 전혀 다른 대답이 나온다.
MZ세대가 유독 능력주의에 경도되어 있다는 편견이 많지만 「한국사회 공정성 인식 조사 보고서」(한국리서치, 2018)에 따르면 한국인의 공정성 가치관에는 세대별로 큰 차이가 없다. 한국 사람들 중 다수는 분배에 있어 산술적 평등을 추구하기보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분배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수의 차이는 클수록 좋다'는 입장은 66%에 이른다.
타인을 믿지 않는 나라
영국의 싱크탱크 레가툼 연구소에서는 매년 경제적 기반, 통치지배구조, 개인의 자유, 교육, 건강과 사회자본, 건강 수준, 행복 수준 등 9개 분야를 분석해 각국의 삶의 질을 평가하는 '레가툼 번영지수(Legatum Prosperity Index)'를 발표한다. 2021년 보고서에서 한국은 사회 자본에 대해서 167개국 중 147위를 기록했으며, ‘제도에 대한 신뢰’, ‘개인 간 신뢰’ 등의 주요 영역에서도 최하위권이다. 한국 사회자본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가운데 38위로, 매년 ‘붙박이 꼴찌’다. 한국인의 ‘사회적 고립도’ 역시 34.1%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한국은 다른 사람과 공적기구에 대한 신뢰 지수가 아주 낮은 나라다. ‘타인을 믿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바탕으로 산출하는 신뢰도는 26%로, OECD 회원국 평균치인 36%보다 10%p나 낮다. (OECD 한눈에 보는 사회상(Society at a Glance), 2016) 낮은 사회적 신뢰는 각자도생의 태도를 강화하고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한국은 전형적인 '저신뢰사회'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은 소방관 정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가 기구와 공직자를 불신한다. 그중 국회, 검찰, 언론에 대한 신뢰도는 유독 낮아 그래프로 환산하면 난생처음 만난 사람보다 못 믿는다. 한국인은 회사나 상사의 상벌·평가 시스템도 불신한다. 이렇다 보니 한국인은 자질과 능력, 업무성과에 따라 보상 격차를 크게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보다 중요한 가치로 ‘근무태도’를 놓는다. 업무 성과에 대한 평가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야근을 많이 하는 등의 '근면성실'을 차등 보상의 최우선 기준으로 놓게 된다.
경제 수준은 올라가도 관용과 신뢰도는 제자리 걸음
다른 나라들의 경우 응답자의 지위, 계층, 계급에 따라 능력주의 성향에 차이가 보이는 반면 한국은 응답자의 정치 성향, 계층의식, 학력 등이 능력주의를 선호하는 성향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세계가치관조사(World Values Survey, WVS)의 결과에서도 한국인의 이러한 성향이 드러난다. 세계가치관조사는 전통적 가치, 세속 합리적 가치, 생존적 가치, 자기표현 가치라는 4개의 핵심가치로 각 국가의 가치관을 분석한다. 이 넷 중 핵심은 자기표현 가치에 있다. 친족관계와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유대와 관용, 자유를 향한 열망, 타자에 대한 신뢰, 인류 전체의 문제에 지대한 관심이 자기표현 가치의 속성이다.
세계가치관조사는 산업화와 경제 성장이라는 사회구조적 변화가 사람들의 가치관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적 예측에 바탕한 국제적 조사이다. 일반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룬 국가에서는 경제적 풍요로부터 삶의 질 쪽으로, 먹고 사는 문제에서 추상적이고 성찰적이며 삶의 질에 관련된 의제, 나 자신이 아닌 타인과 지구에 대한 의제로 시민들의 관심이 옮겨간다는 것이다.
보통 '잘 살게' 되면 사회 전체의 관용과 신뢰도가 함께 올라간다. 그러나 세계가치관조사에서 드러난 한국의 특성은 다르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지 않다. GDP로 대변되는 경제 수준이 올라가도, 소수자와 이방인에 대한 관용은 지나치게 적으며 사회적 신뢰나 관용 수준 역시 경제 수준과 비례해 향상되지 않는다. 대만과 중국이 경제 성장으로 자기표현 가치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자기표현 가치가 가장 낮은 나라가 되었다.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가 세계가치관조사 자료를 활용해 52개 국가의 관용성 수준을 평가한 자료에 따르면 '자녀에게 관용성을 가르쳐야 한다'는 응답은 45.3%로 52위를 기록했다. ‘나와 다르거나 나보다 못한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의식을 자녀에게 가르치겠다’는 응답이 52개 국가 중 꼴찌라는 것이며, 비약하자면 '공부 못하고 못 사는 애랑 놀지 말아라' 라고 가르치겠다는 뜻이다.
노력에 따라 소득에 차이가 나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세계가치관조사에 항상 포함되는 질문 중에는 ‘소득 평등(income equality)’에 대한 가치관을 측정하는 문항이 있다. 보통 이러한 질문을 받으면 규범적 편향이 나타나기 때문에 세계 대다수의 나라에서 평등에 대한 찬성이 불평등에 대한 찬성보다 높게 나타난다. 남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답변에 체크하는 것이다. 한편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 응답자들은 소득 불평등에 대해 압도적으로 찬성한다.
2010년에 진행된 6차 세계가치관조사의 결과를 주요 국가만 모아서 보면 다음과 같다.
2020년 진행한 7차 조사에 따르면 평등에 찬성하는 응답자는 12.4%, 불평등에 찬성하는 응답자는 64.8%로 더 극단적인 수치를 기록한다.
불평등에 대한 선호는 민주주의의 성장을 방해한다
한국인들은 '가치의 위계서열이 명확‘하다. 즉 ‘합리적 선택’이 무엇인지 알기 쉽고, 그래서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맹렬히 질주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대안적 삶의 모델은 제시되기 어렵다. 한국 사람들은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게임 <동물의 숲>을 해도 공장식 축산을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계절마다 잡히는 물고기들을 전부 모으면 업적이 축적되는데, 한국 사람들은 이걸 못 기다리고 해킹프로그램을 돌려서 사계절에 잡히는 모든 물고기를 수집한다는 것이다. 효율성과 가성비, 순위에 집착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생태 위기에 대해 고민하기도 어렵다. 한국 사람들의 자부심과 달리 민주주의의 수준 역시 지체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 모든 특성들은 비슷한 경제 수준의 국가들에 비해 유독 낮은 자기표현 가치라는 지표로 수렴되고 있다.
세계가치관조사를 통해 분석하는 자기표현 가치 수준은 형식적 민주주의(formal democracy)와 효과적 민주주의(effective democracy)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형식적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가 표면적·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민주주의를 뜻하며, 효과적 민주주의는 더 나아가 민주주의가 제도로 존재할 뿐 아니라 개인들이 일상에서 자유를 충분히 누리고 평등하게 존중되는 민주주의를 뜻한다.
이코노미스트에서 측정하는 민주주의 지수(EIU Democracy Index)에서 한국은 2020년 기준 현재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나, 해당 분류의 23개국 가운데에서는 최하위를 기록했다. 2021년 기준으로는 16위로 변동되었으나 여전히 하위권이다. 최근 15년 동안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 최하위 또는 ‘결함 있는 민주주의 국가’ 최상위를 시계추처럼 오가고 있으며, 사실상 민주주의의 수준이 지체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세계가치관조사를 고안한 정치사회학자 로널드 잉글하트(Ronald Inglehart)와 크리스찬 웰젤(Christian Welzel)의 이론을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룬 국가에서는 국민들의 자기표현 가치가 향상하고 이는 대중의 집단 행동으로 이어지며, 엘리트들의 부정부패가 개선되고 결과적으로 효과적 민주주의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한국은 예외적으로 촛불시위로 대표되는 대중의 집단행동만 강한 사회다. 자기표현의 가치가 올라가는 단계가 생략된 것이다. 이에 더해 대중의 집단행동이 강함에도 엘리트 고결성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낮은 자기표현 가치 외에도 능력주의 원칙, 즉 불평등에 대한 강한 선호는 민주주의의 심화, 특히 사회경제적 민주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 예상된다.
우리는 '공정하고 거대한 불평등'을 원하는가?
한국의 능력주의 풍조에도 역사문화적인 배경이 있다. 한국이 오늘날과 같이 능력주의에 기울게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 남한 사회에서 '디폴트값'으로 학습되고 심화된 반공주의에 외환위기 이후 지배 담론이 된 시장주의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불평등에 대한 집단 해법이 필요하다는 담론이 생겨나기 전에 개별 해법, 즉 각자도생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억울하면 출세해라' 식의 사고를 내면화하게 된 것이다.
각자도생, 개인의 생존을 우선시하는 사회 분위기의 결과로 한국 능력주의에는 두 개의 두드러지는 특성이 나타난다. 하나는 '시험주의'다. 공무원 선발 시험인 '고시' 뿐만 아니라 대학입학시험, 민간 대기업의 공채시험, 언론사의 입사시험 등 비유적인 의미의 '고시'들은 '성공'한 개인들의 지대 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다른 하나는 혐오하고 멸시하는 능력주의다. 세계 어디에서나 사회에 숨은 혐오가 지적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특히 '이백충'(월 소득이 200만원 이하임을 비하하는 은어), '휴거'(특정 임대아파트에 거주함을 비하하는 은어), '빌거'(아파트가 아닌 빌라 형태의 건물에 거주함을 비하하는 은어)처럼 사회경제적·계급차별적 혐오표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오늘날 한국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대표 감정을 두 개 고른다면, 하나는 혐오이고 다른 하나는 울분이다. 이중 울분은 독일과 한국에서 공중보건의 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는 감정이다. 울분에는 '답답하고 분한 마음'이라는 사전적인 의미가 있으나, 통일 후 동독 사람들이 겪은 심리 문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확장되어 ‘울분’(embitterment)과 ‘외상 후 울분장애’(PTED)라는 개념이 사용되었다. 부당하게 당했다,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감정이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울분장애의 개념을 국내에 알린 한창수 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역사에서 울분과 가장 유사한 감정인 ‘한(恨)’은 “부당함에 희생되었다는 감각, 응축되고 결정화된 회한의 감정“을 이른다.
지금까지 알아본 한국인의 가치관에 대한 통계적 사실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한국 사람들은 특권의 불평등에 분노하여 그것을 없애려는 게 아니라 '특권에 접근할 기회의 불평등'에 분노하며 특권은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 이 경향은 고정관념과 다르게 계층, 세대, 이념까지도 초월해 나타난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보상과 처벌이 공정한지 일일이 촉각을 기울이게 되는 상황은 사람들을 만성적이고 지속적인 울분 상태로 몰고 간다.
데이터에 따르면 한국사람들이 원하는 건 단 하나, ‘공정하고 거대한 불평등'이다. 특권은 커야 하고, 공정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애초에 불평등이 크지 않다면 공정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기 어렵다. 예를 들면, 도토리 10개를 찾은 사람과 우연 또는 편법을 통해 도토리 11개를 얻은 사람이 있다면 전자는 맹렬한 박탈감을 느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가 11개가 아니라 100개, 또는 1000개를 우연히, 부당하게 얻었다면 그 자체로 갈등이 빚어지게 된다. 나아가 100개나 1000개를 얻기 위해 부패와 편법이 일어나기 때문에 불평등이 클수록 공정이나 정의를 달성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울분사회의 울분은 만성화된 증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사회에 대한 기대, 정의관 자체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 불평등에 대한 관용을 수정해야 한다. 사회적 질환으로서의 울분은 능력주의와 결합해 사회적 불신을 강화하고 민주주의 기반을 침식할 수밖에 없다. 결국 능력주의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으며, 능력주의에 대한 대안 모색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
발제 | 박권일
기록 및 정리 | 김누리
사진 | 지리산이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