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장 오르지 않고 에둘러 가는 길. 봉우리가 아닌 마을을 만나는 길. 높이가 아닌 거리를 헤아리는 길. 3개도 5개 시군 21개 읍면 120여개 마을을 잇는 285km의 장거리 도보길. 지리산 둘레길이 열렸다. 이상윤 ‘사단법인 숲길’ 상임이사는 지리산 둘레길의 시작을 이렇게 회고했다.
"지리산 둘레길은 성찰과 순례의 길입니다. 바로 그 성찰과 순례에 대한 염원이 지리산을 에두르게 했을 테고요. 그 선언의 암묵적인 힘 덕분에 둘레길도, 그 길을 걷는 사람들도 묵묵히 버텨올 수 있었을 겁니다."
성찰과 순례의 길
사진출처 : 사단법인 숲길 페이스북
2008년 4월 27일, 남원 산내에서 함양 휴천에 이르는 시범 구간이 개통되었다. 시범 구간이 개통되자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깎아지른 산비탈의 다랑이 논이 신기했고 조막손 같은 고사리도 반가웠다. 삼만 오천 원이면 아랫목에 몸을 누일 수 있고 스무 가지가 넘는 반찬으로 가득 찬 아침상을 받을 수 있는 시골민박은 경제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만족도가 높았다. 성찰과 회고를 목표로 했던 순례의 길에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1년 기준, 전체 300km(285km)당 약 30만 명의 사람들이 다녀가도록 디자인 된 길이에요. 그런데 ‘1박2일’ 방송이 나가자 그 해 추석연휴에 12만 명이 70km를 다녀갔어요. 마음이 무거웠죠. 둘레길이 단순히 관광지로 변질되지나 않을까, 개발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흉물로 전락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습니다."
사단법인 숲길 이상윤 상임이사
시범 구간 개통 후 전 구간을 개통하기까지 4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개별 구간 조성이 완료되면 곧 전체 구간을 개통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1년 정도 묵혀 두었다. 그 사이 초반의 거품은 걷혔다. 인위적인 조정 기간을 거친 셈이었다. 전체 구간이 개통된 것은 2012년 5월 27일의 일. 개통식이 열린 구례군 밤재에, 최초의 지리산 둘레길 전 구간 완주자인 ‘지리산 둘레길 이음단’이 등장했다.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첫 완주의 기회를 잡은 1기 이음단은 15박 16일 동안 지리산을 에두르는 팔백오십 리 길을 걸으며 마을과 마을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왜 이토록 지리산 둘레길에 열광했던 것일까.
“자기(돌아)보기죠.” 이상윤 이사의 해답이다. 전체 구간이 개통된 후 개별 구간을 치고 빠지는 방문자 보다는 전 구간을 걷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리산 둘레길이 성찰과 순례의 길이라는 제 옷을 찾아 입고 있었다. 방문자들이 원한 것은 지리산의 아름다운 풍광만이 아니었다. 투박한 손으로 냉수 사발을 내미는 산골의 할머니, 외양간에 매어있는 소, 오종종하게 쌓아올린 돌담 등, 자연에게 말을 걸고,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모든 것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 속에서 나를 돌아보는 것, 그것은 기적과 같은 체험이었다. 지리산 둘레길 이음단의 목표는 둘레길을 홍보하고 모니터링 하는 것이었지만 정작 그들은 에둘러가는 길 위에서 자신을 돌아봐야 했다.
전 구간 개통, 그리고 지리산 이음단
2기 이음단의 공식 명칭은 지리산 둘레길 청년 이음단이다. 실업상태에 있거나 취업준비중인 청년들이 지리산에서 다시 희망을 찾고자 모였다. 이들은 참가비를 지원받는 대신 하동, 구례, 남원, 함양, 산청 등 5개 시군의 날, 그 마을로 들어가 잔치를 벌였다. 청년이 노래하니 이장님이 답가를 하고 청년이 춤을 추니 할미의 어깨가 들썩인다. 마을 농악단과 청년 이음단이 하나가 되어 북을 치고 장단을 맞춘다. 비로소 우리 속의 유전자가 서로를 흔들어 깨운다. 순례의 길은 화합의 길이 된다.
그러나 갈증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지리산 둘레길은 순례의 길이라는 본연의 자세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마을과 마을을 잇는 그 길 위에서 사람들은 정녕 마을을 만났을까. 나는 정말 그 마을을 ‘알게’ 된 걸까. 갈증이 생겼으니 목을 축여야 했다. 길이 열렸으니 만나야 했다. 둘레길은 ‘길’ 이자 ‘공간’이어야 했다. 그 길은 만남의 장, 축제의 장이 되어야 했다.
올해 지리산이음단은 세월호 참사 추모를 위해 무기한 연기상태이다.
둘레길을 잇는 마을에서 지금껏 살아오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려고 해요. 그 이야기들이 예술가에 의해 구체화 되는 거죠. 서랍 깊숙이 보관되어 있던 사진 한 장이 전시 될 수도 있고, 고개 너머 시집온 할머니의 사연이 조각물로 형상화 될 수도 있어요. 그곳의, 그분들의 역사를 담아낼 마을 미술관, 마을 박물관이 있었으면 해요.
우리는 길 위에서 마을을, 나를 만났을까
지리산 아트 프로젝트의 출발은 갈증에 대한 목축임이었고 질문에 대한 답 찾기였다. 복권기금 7천만 원을 종자돈으로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남원의 실상사와 산청의 성심원이 역할을 자청했다. 예술가들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창작 활동을 한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대신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베이스캠프 격의 실상사와 성심원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면 그 때 마을의 빈 공간으로 들어갈 계획이다. 환쟁이와 글쟁이가 마을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만나니 그들의 이야기는 예술이 되고 역사가 된다.
대전시립미술관에서 현대사 관련 전시를 관람한 적이 있는데 유신달력을 만들어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꼼꼼히 기록해 놓았더군요. 예술품의 전달력이란 이런 거구나 싶었죠. 부산 산복도로 프로젝트에선 가능성을 봤어요. 기억 속의 마을을 되살린다면, 지금은 사유화된 정자와 우물을 기억해낸다면, ‘함께’ 살았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면 용서와 화해가 갈등을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된 거죠.
사진출처 : 사단법인 숲길 페이스북
마을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합의를 이끌어 내는 과정과 방법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지역에 이미 욕구를 가지고 있는 잠재 예술가들과 레지던스 예술가 사이의 조화를 꾀하는 일도 중요하다. 텃새를 존중하되 최소한의 관리를 위해 철새를 이용하자는 것이 프로젝트 추진위의 생각이다. 텃새들 간의 네트워킹에 철새들이 투입되는 것이다. 또한 관람자의 욕구와 지역 예술가의 목표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간극은 과정을 중시하는 태도로써 메운다. 창작 과정을 공개하여 그것을 하나의 볼거리로 만드는 방법도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레지던스 예술가로 내려왔던 이들이 마을에 정착하여 마을의 주민이 된다. 지리산 자락에 살고 있는 지역 예술가들이 결합한다. 고향을 떠났던 지리산 출신의 예술가들이 다시 지리산으로 모여든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있다.
오래된 우물에서 길어 올린 너와 나의 기억
"프로젝트 자체의 성과보다는 지리산 아트 프로젝트가 하나의 파장이자 단초가 된다면 좋겠어요. 지나친 성과 때문에 마을이 관람지처럼 되는 것은 경계합니다. 자발성이 배제된 프로젝트는 의미가 없으니까요."
이상윤 상임이사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지리산 둘레길의 유지와 보수 문제이다. 신규 사업에 대한 투자는 후하나 기존사업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이 약해지는 관행도 한 몫을 한다. 이 이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일본 구마노고도에서 교훈을 얻었다. 구마노고도는 관광부의 관리 하에 지역의 어린이들과 주민들이 어울려 순례길을 정비한다. 관리하되 손상시키지 않고 우리의 아버지가 그러하였듯 나도 마을의 주민으로서 구마노고도를 돌보고 가꾼다. 이상윤 이사 역시 둘레길의 유지 및 보수를 자원봉사자를 통해 해결하기 위해 남원시와 조율중이다. 견고함에 대한 우려가 없지 않지만 시도해 보려고 한다. 지역에 대한 자긍심은 마을 주민들의 자발성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스스로 돌보고 가꾸는 둘레길을 고대하며
지리산 둘레길은 더 이상 앞만 보고 가는 길이 아니다. 둘러보고 돌아보는 길이며 배려하고 마음을 나누는 길이다. 앞선 이들의 발자취를 쫓아 뒤따를 이들의 발걸음을 안내하는 길이다. 그리하여 지리산의 삶이 문화가 되고 역사가 되는 길이다. 때문에 이상윤 이사의 당부는 더욱 간절하기만 하다.
"지리산 둘레길 이용객 여러분, 제발 지역민들 배려해 주시고요, 동네 어르신들 보면 깍듯한 인사도 부탁드립니다. 지리산 관련 공부하고 오시면 더욱 많은 것들이 보입니다."
저기, 고개 넘어, 길 위에서 길을 묻는 이들이 보인다. 묵묵히 주어진 길을 가는 이들이 보인다. 에둘러 가는 그 발걸음은 어느덧 너와 내가 꿈꾸는 바로 그 길이 된다.
About The Author
똥폼 (세상똥폼 여든까지! 가끔은 예술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여 행복하다. 백살까지 건강하게 책보며 살고 싶은 철들긴 글러먹은 욕.심.쟁.이)
<지리산 이음>에서 함양, 남원, 하동, 산청, 구례 등 지리산권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있는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들, 지리산권의 사람들이 지역을 기반으로 벌이고 있는 새롭고 재미있는 실험들을 찾아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리산권의 여러 커뮤니티들이 서로를 확인하고 연결되어 관계를 맺어가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곧장 오르지 않고 에둘러 가는 길. 봉우리가 아닌 마을을 만나는 길. 높이가 아닌 거리를 헤아리는 길. 3개도 5개 시군 21개 읍면 120여개 마을을 잇는 285km의 장거리 도보길. 지리산 둘레길이 열렸다. 이상윤 ‘사단법인 숲길’ 상임이사는 지리산 둘레길의 시작을 이렇게 회고했다.
성찰과 순례의 길
사진출처 : 사단법인 숲길 페이스북
2008년 4월 27일, 남원 산내에서 함양 휴천에 이르는 시범 구간이 개통되었다. 시범 구간이 개통되자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깎아지른 산비탈의 다랑이 논이 신기했고 조막손 같은 고사리도 반가웠다. 삼만 오천 원이면 아랫목에 몸을 누일 수 있고 스무 가지가 넘는 반찬으로 가득 찬 아침상을 받을 수 있는 시골민박은 경제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만족도가 높았다. 성찰과 회고를 목표로 했던 순례의 길에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단법인 숲길 이상윤 상임이사
시범 구간 개통 후 전 구간을 개통하기까지 4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개별 구간 조성이 완료되면 곧 전체 구간을 개통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1년 정도 묵혀 두었다. 그 사이 초반의 거품은 걷혔다. 인위적인 조정 기간을 거친 셈이었다. 전체 구간이 개통된 것은 2012년 5월 27일의 일. 개통식이 열린 구례군 밤재에, 최초의 지리산 둘레길 전 구간 완주자인 ‘지리산 둘레길 이음단’이 등장했다.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첫 완주의 기회를 잡은 1기 이음단은 15박 16일 동안 지리산을 에두르는 팔백오십 리 길을 걸으며 마을과 마을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왜 이토록 지리산 둘레길에 열광했던 것일까.
“자기(돌아)보기죠.” 이상윤 이사의 해답이다. 전체 구간이 개통된 후 개별 구간을 치고 빠지는 방문자 보다는 전 구간을 걷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리산 둘레길이 성찰과 순례의 길이라는 제 옷을 찾아 입고 있었다. 방문자들이 원한 것은 지리산의 아름다운 풍광만이 아니었다. 투박한 손으로 냉수 사발을 내미는 산골의 할머니, 외양간에 매어있는 소, 오종종하게 쌓아올린 돌담 등, 자연에게 말을 걸고,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모든 것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 속에서 나를 돌아보는 것, 그것은 기적과 같은 체험이었다. 지리산 둘레길 이음단의 목표는 둘레길을 홍보하고 모니터링 하는 것이었지만 정작 그들은 에둘러가는 길 위에서 자신을 돌아봐야 했다.
전 구간 개통, 그리고 지리산 이음단
2기 이음단의 공식 명칭은 지리산 둘레길 청년 이음단이다. 실업상태에 있거나 취업준비중인 청년들이 지리산에서 다시 희망을 찾고자 모였다. 이들은 참가비를 지원받는 대신 하동, 구례, 남원, 함양, 산청 등 5개 시군의 날, 그 마을로 들어가 잔치를 벌였다. 청년이 노래하니 이장님이 답가를 하고 청년이 춤을 추니 할미의 어깨가 들썩인다. 마을 농악단과 청년 이음단이 하나가 되어 북을 치고 장단을 맞춘다. 비로소 우리 속의 유전자가 서로를 흔들어 깨운다. 순례의 길은 화합의 길이 된다.
그러나 갈증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지리산 둘레길은 순례의 길이라는 본연의 자세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마을과 마을을 잇는 그 길 위에서 사람들은 정녕 마을을 만났을까. 나는 정말 그 마을을 ‘알게’ 된 걸까. 갈증이 생겼으니 목을 축여야 했다. 길이 열렸으니 만나야 했다. 둘레길은 ‘길’ 이자 ‘공간’이어야 했다. 그 길은 만남의 장, 축제의 장이 되어야 했다.
올해 지리산이음단은 세월호 참사 추모를 위해 무기한 연기상태이다.
둘레길을 잇는 마을에서 지금껏 살아오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려고 해요. 그 이야기들이 예술가에 의해 구체화 되는 거죠. 서랍 깊숙이 보관되어 있던 사진 한 장이 전시 될 수도 있고, 고개 너머 시집온 할머니의 사연이 조각물로 형상화 될 수도 있어요. 그곳의, 그분들의 역사를 담아낼 마을 미술관, 마을 박물관이 있었으면 해요.
우리는 길 위에서 마을을, 나를 만났을까
지리산 아트 프로젝트의 출발은 갈증에 대한 목축임이었고 질문에 대한 답 찾기였다. 복권기금 7천만 원을 종자돈으로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남원의 실상사와 산청의 성심원이 역할을 자청했다. 예술가들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창작 활동을 한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대신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베이스캠프 격의 실상사와 성심원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면 그 때 마을의 빈 공간으로 들어갈 계획이다. 환쟁이와 글쟁이가 마을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만나니 그들의 이야기는 예술이 되고 역사가 된다.
대전시립미술관에서 현대사 관련 전시를 관람한 적이 있는데 유신달력을 만들어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꼼꼼히 기록해 놓았더군요. 예술품의 전달력이란 이런 거구나 싶었죠. 부산 산복도로 프로젝트에선 가능성을 봤어요. 기억 속의 마을을 되살린다면, 지금은 사유화된 정자와 우물을 기억해낸다면, ‘함께’ 살았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면 용서와 화해가 갈등을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된 거죠.
사진출처 : 사단법인 숲길 페이스북
마을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합의를 이끌어 내는 과정과 방법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지역에 이미 욕구를 가지고 있는 잠재 예술가들과 레지던스 예술가 사이의 조화를 꾀하는 일도 중요하다. 텃새를 존중하되 최소한의 관리를 위해 철새를 이용하자는 것이 프로젝트 추진위의 생각이다. 텃새들 간의 네트워킹에 철새들이 투입되는 것이다. 또한 관람자의 욕구와 지역 예술가의 목표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간극은 과정을 중시하는 태도로써 메운다. 창작 과정을 공개하여 그것을 하나의 볼거리로 만드는 방법도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레지던스 예술가로 내려왔던 이들이 마을에 정착하여 마을의 주민이 된다. 지리산 자락에 살고 있는 지역 예술가들이 결합한다. 고향을 떠났던 지리산 출신의 예술가들이 다시 지리산으로 모여든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있다.
오래된 우물에서 길어 올린 너와 나의 기억
이상윤 상임이사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지리산 둘레길의 유지와 보수 문제이다. 신규 사업에 대한 투자는 후하나 기존사업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이 약해지는 관행도 한 몫을 한다. 이 이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일본 구마노고도에서 교훈을 얻었다. 구마노고도는 관광부의 관리 하에 지역의 어린이들과 주민들이 어울려 순례길을 정비한다. 관리하되 손상시키지 않고 우리의 아버지가 그러하였듯 나도 마을의 주민으로서 구마노고도를 돌보고 가꾼다. 이상윤 이사 역시 둘레길의 유지 및 보수를 자원봉사자를 통해 해결하기 위해 남원시와 조율중이다. 견고함에 대한 우려가 없지 않지만 시도해 보려고 한다. 지역에 대한 자긍심은 마을 주민들의 자발성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스스로 돌보고 가꾸는 둘레길을 고대하며
지리산 둘레길은 더 이상 앞만 보고 가는 길이 아니다. 둘러보고 돌아보는 길이며 배려하고 마음을 나누는 길이다. 앞선 이들의 발자취를 쫓아 뒤따를 이들의 발걸음을 안내하는 길이다. 그리하여 지리산의 삶이 문화가 되고 역사가 되는 길이다. 때문에 이상윤 이사의 당부는 더욱 간절하기만 하다.
저기, 고개 넘어, 길 위에서 길을 묻는 이들이 보인다. 묵묵히 주어진 길을 가는 이들이 보인다. 에둘러 가는 그 발걸음은 어느덧 너와 내가 꿈꾸는 바로 그 길이 된다.
About The Author
똥폼 (세상똥폼 여든까지! 가끔은 예술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여 행복하다. 백살까지 건강하게 책보며 살고 싶은 철들긴 글러먹은 욕.심.쟁.이)
<지리산 이음>에서 함양, 남원, 하동, 산청, 구례 등 지리산권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있는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들, 지리산권의 사람들이 지역을 기반으로 벌이고 있는 새롭고 재미있는 실험들을 찾아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리산권의 여러 커뮤니티들이 서로를 확인하고 연결되어 관계를 맺어가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