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움터 정경 1
생태 뒷간을 만든다. 배설물로 헛된 물을 낭비하지 않고 흐르는 물을 더럽히지도 않을, 무엇보다 그 배설물이 다시 밭의 작물을 키우게 될, 똥이 곧 밥임을 상기시키는 오늘의 생태 건축 수업은 생태뒷간 만들기
// 정경 2
마을 이 곳 저 곳을 살피고 마을 지도를 만든다.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고 기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마다의 방식으로 마을의 주민을 만난다. 교문 밖에서 펼쳐지는 오늘의 수업은 지역읽기 수업
// 정경 3
집밥을 만든다. 콩조림, 콩나물무침, 멸치조림에, 마당에서 함께 뜯은 쑥으로 끓인 도다리 쑥국. 살림관 가득, 배움터 가득 퍼지는 쑥 향, 봄 냄새 가득한 살림모임
// 정경 4
자연치유력을 믿는 사람들이 모여 몸의 균형을 잡는다. 종합적이고 전인적인 치료와 생태적 삶을 바탕으로 건강한 삶을 꿈꾸는, 의료서비스의 소비자가 아니라 스스로 건강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배움의 장. 자연의학연구소
‘온 인격’을 꿈꾸는 이들의 배움터
녹색대학은 온배움터로 이름을 바꿔 새롭게 자라고 있는 중이다.
2003년 녹색대학이 문을 열었다. 가칭 ‘시민환경대학원’, ‘환경대학’ 등 대안적 대학 설립을 위한 논의가 시작된 것이 1995년의 일이었다. 2001년 초여름부터 이듬해 초봄까지 ‘녹색대학’이라는 이름의 추진체가 구성되었고 후원회원 및 발기인을 모집했다. 창립위원회가 서고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대학부지로 선정된 함양 백전중학교 리모델링 작업이 시작되었으며 공청회도 열렸다. 학교 인근에는 녹색대학의 배후마을인 청미래마을이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본격적인 개교 이전에 예비 녹색대학이 열리고 1기 신입생들은 여러 차례에 걸친 워크숍을 실시하는 등 대안적 대학 설립을 위한 준비는 꼼꼼했고 열기는 뜨거웠다.
"굉장했어요. 전문과정과 학부생 모두 합쳐 100명이 넘는 신입생이 들어왔으니까요. 이 운동장에 학생들의 숙소로 사용될 컨테이너 열 동이 들어섰습니다."
현재 ‘온배움터’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노재화 목사가 당시의 열기를 회상한다.
배움터 운영위원장 노재화 목사
학생들은 스스로 교재를 만들고 수업을 계획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계획서에 따라 강사를 요청했고 학교 측은 학생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교육의 틀을 깨는 교육이었고 그 알맹이는 신선했다. 주말이면 하동, 울산, 서울 등 각지에서 전문 과정 수강생이 모여들었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수강생은 바다를 건넜다. 수업하고 토론하고 못 다한 이야기는 뒤풀이 자리에서 계속 되었다. 숙취와 졸음을 달래가며 이튿날에도 그들의 배움은 멈출 줄 몰랐다. 녹지사(녹색의 문명과 생태, 녹색교육을 지원하고 지탱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되어 재정적 심정적 후원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개교 당시 녹지사는 2천명, 후원회원만 따지더라도 천명을 육박했다. 그만큼 대안적인 삶과 대안적인 교육에 대한 열망은 크고 간절했다.
대안 교육의 열망이 실현되는 배움터
개교한지 삼 개월 만에 갈등이 불거졌다. 녹색대학의 외부지원을 위한 사회적 기업과 학교 재정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비상대책위가 꾸러졌다. 그러나 의문점에 대한 투명한 답변은 제시되지 못했다. 이사회 체제에서 운영위원회 체제로 전환되는 사이,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고 학교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기에 이르렀다.
3기까지 20 여명의 학생이 유지되던 학부는 4기에 이르자 4,5명으로 줄어들었고 녹지사의 후원내역 또한 절반으로 감소했다. 도덕적 잣대가 엄격한 대안교육기관에서 재정 불투명은 용납되기 어려웠다.
"단순히 물질적 욕심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찌 됐든 이건 사람이 하는 일이잖아요. 아무리 훌륭한 이념일지라도 이념, 그 내면을 봤어야 했어요. 오히려 이념적으로 동의하는 건 쉬운 일이죠. 하지만 자기의 내면을 드러내고 타인의 내면을 봐주는 일에는 너무 서툴었어요. 한마디로 우리 모두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던 거죠."
그러나 이토록 혹독한 시기에도 녹색대학의 대안 교육을 위한 행보는 멈추지 않았다. 2007년 2명의 학부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4년 동안 생태적 교육과 공동체적 삶을 몸으로 실현한 영광스런 졸업생들이었다. 학교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 또한 계속되었다. 학교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야단법석 (총회)을 통해 의견을 모으고 운영위원회를 거쳐 운영방식을 결정하는 등 투명하고 민주적인 의사 결정 구조를 확립하였다.
온배움터에 걸려있는 과거 녹색대학 시절의 사진
학교 운영이 가닥을 잡아갈 즈음, 이번에는 학교의 명칭이 문제가 됐다. ‘비인가대학이므로 <대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는 경고를 매년 받아 온 터였다. 그러나 참여정부에서 이명박정부로 넘어가면서 경고는 실질적인 제재로 바뀌었다. 녹색대학은 정식으로 고발 조치 당했고 재판을 통해 벌금 300만원을 내야했다.
이에 녹색대학은 ‘온 인격 형성을 위해 조화롭고 균형 있게, 그리고 상호 보완적으로 공부한다’는 뜻의 온배움터로 이름을 바꿨다. 내부적인 성찰도 한몫을 했다. 언제부터인가 녹색대학에서 조차 공부수행능력이 아닌 입학 자격을 따지기 시작했다. 전문과정은 학부졸업생 이상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거나 고졸 출신이 전문 과정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별도의 과정을 개설해야 한다는 등 일반 대학의 관습을 무분별하게 수용하기도 하였다. 자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었다.
"공동체가 뭔지, 생태적인 삶이 어떤 것인지 책을 통해 이론적으로는 배웠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고 할까요. 또, ‘이미 우린 다 알고 있다’는 허위의식도 한 몫을 했죠. 삶과 앎이 일치하는 배움이 되지 못했던 거예요."
고통과 갈등을 딛고 다시 서는 배움터
현재 온배움터에는 4명의 기초과정 학생이 머물고 있다. 이제 그들은 컨테이너가 아닌 정식 기숙사에 머물며 생활한다. 생태건축 수업을 통해 학생들과 선생님이 함께 만든 기숙사이다. 격주 주말이면 전문과정 자연의학과 수강생들로 학교에 활력이 넘친다. 학생과 교사의 밥살림과 여가를 책임질 살림관도 세워졌다. 뜻있는 학부모의 기부로 가능한 일이었다. 운영에 보탬이 되고자 다시 학교를 찾는 이들도 늘어났다. 노재화 운영위원장을 비롯한 졸업생들이 현재 온배움터의 교사로 혹은 조교로 활동하고 있다. 녹지사의 절반 이상은 떨어져 나갔지만 아직 남아있는 300여명이 후원 회원은 여전히 큰 힘이 된다. 이들은 대부분 원년 멤버들이다.
"시골에 건물이 있는, 어른이 다니는 대안학교, 이 학교에게 이 시대가 부여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라고 느껴집니다. 힘든 시기를 오랫동안 겪어왔기 때문에 가능하면 갈등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없잖아 있어요. 계속 이런 상태여서는 안 되겠다 싶어 새로운 시선으로 학교를 바라볼 준비 중입니다. 그 일을 함께 하실 운영위원들도 새롭게 모실 계획이에요."
성장의 고통은 컸지만 그 아픔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 고통은 서로를 자라게 했고 서로가 스승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이곳은 삶을 연습하는 공간이 되었다. 병든 시대와 병든 문명 속에서 구체적 현장이 변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치료 역시 불가능하다는 ‘온배움터’의 이념은 생태문화공간을 창조할 일꾼을 양성하는 일로 현실화 되었다.
삶과 앎이 일치하는 배움터를 희망하며
// 배움터 정경 5
‘볍씨를 소독하고 야생화를 심는다.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육개장과 시루떡으로 허기를 달랜다. 기초과정, 연구과정 가리지 않고, 고수도 초보자도 구별하지 않고, 가까이 사는 사람 멀리 터를 닦은 사람 따지지 않고 한데 어울려 농사짓고 마음 닦는 신명 나는 농사모임.’
배움터를 나선다. 백전에서 병곡에 이르는 37번 지방도가 펼쳐져 있다. 한 달 전만 해도 벚꽃이 만발했을, 지금은 연두가 초록에게 한창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 이 길, 비록 지금 화려했던 그 꽃은 지고 없지만 내년이면 이 길 위에 벚꽃은 또 만발하리라. 그 길의 끝에, 피고 지는 꽃잎을 서러워하지 않는 사람들, 온인격의 조화롭고 균형 있는 성장을 꿈꾸는 사람들의 배움터, ‘온배움터’가 있다.
About The Author
똥폼 (세상똥폼 여든까지! 가끔은 예술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여 행복하다. 백살까지 건강하게 책보며 살고 싶은 철들긴 글러먹은 욕.심.쟁.이)
<지리산 이음>에서 함양, 남원, 하동, 산청, 구례 등 지리산권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있는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들, 지리산권의 사람들이 지역을 기반으로 벌이고 있는 새롭고 재미있는 실험들을 찾아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리산권의 여러 커뮤니티들이 서로를 확인하고 연결되어 관계를 맺어가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 배움터 정경 1
생태 뒷간을 만든다. 배설물로 헛된 물을 낭비하지 않고 흐르는 물을 더럽히지도 않을, 무엇보다 그 배설물이 다시 밭의 작물을 키우게 될, 똥이 곧 밥임을 상기시키는 오늘의 생태 건축 수업은 생태뒷간 만들기
// 정경 2
마을 이 곳 저 곳을 살피고 마을 지도를 만든다.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고 기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마다의 방식으로 마을의 주민을 만난다. 교문 밖에서 펼쳐지는 오늘의 수업은 지역읽기 수업
// 정경 3
집밥을 만든다. 콩조림, 콩나물무침, 멸치조림에, 마당에서 함께 뜯은 쑥으로 끓인 도다리 쑥국. 살림관 가득, 배움터 가득 퍼지는 쑥 향, 봄 냄새 가득한 살림모임
// 정경 4
자연치유력을 믿는 사람들이 모여 몸의 균형을 잡는다. 종합적이고 전인적인 치료와 생태적 삶을 바탕으로 건강한 삶을 꿈꾸는, 의료서비스의 소비자가 아니라 스스로 건강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배움의 장. 자연의학연구소
‘온 인격’을 꿈꾸는 이들의 배움터
녹색대학은 온배움터로 이름을 바꿔 새롭게 자라고 있는 중이다.
2003년 녹색대학이 문을 열었다. 가칭 ‘시민환경대학원’, ‘환경대학’ 등 대안적 대학 설립을 위한 논의가 시작된 것이 1995년의 일이었다. 2001년 초여름부터 이듬해 초봄까지 ‘녹색대학’이라는 이름의 추진체가 구성되었고 후원회원 및 발기인을 모집했다. 창립위원회가 서고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대학부지로 선정된 함양 백전중학교 리모델링 작업이 시작되었으며 공청회도 열렸다. 학교 인근에는 녹색대학의 배후마을인 청미래마을이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본격적인 개교 이전에 예비 녹색대학이 열리고 1기 신입생들은 여러 차례에 걸친 워크숍을 실시하는 등 대안적 대학 설립을 위한 준비는 꼼꼼했고 열기는 뜨거웠다.
현재 ‘온배움터’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노재화 목사가 당시의 열기를 회상한다.
배움터 운영위원장 노재화 목사
학생들은 스스로 교재를 만들고 수업을 계획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계획서에 따라 강사를 요청했고 학교 측은 학생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교육의 틀을 깨는 교육이었고 그 알맹이는 신선했다. 주말이면 하동, 울산, 서울 등 각지에서 전문 과정 수강생이 모여들었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수강생은 바다를 건넜다. 수업하고 토론하고 못 다한 이야기는 뒤풀이 자리에서 계속 되었다. 숙취와 졸음을 달래가며 이튿날에도 그들의 배움은 멈출 줄 몰랐다. 녹지사(녹색의 문명과 생태, 녹색교육을 지원하고 지탱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되어 재정적 심정적 후원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개교 당시 녹지사는 2천명, 후원회원만 따지더라도 천명을 육박했다. 그만큼 대안적인 삶과 대안적인 교육에 대한 열망은 크고 간절했다.
대안 교육의 열망이 실현되는 배움터
개교한지 삼 개월 만에 갈등이 불거졌다. 녹색대학의 외부지원을 위한 사회적 기업과 학교 재정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비상대책위가 꾸러졌다. 그러나 의문점에 대한 투명한 답변은 제시되지 못했다. 이사회 체제에서 운영위원회 체제로 전환되는 사이,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고 학교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기에 이르렀다.
3기까지 20 여명의 학생이 유지되던 학부는 4기에 이르자 4,5명으로 줄어들었고 녹지사의 후원내역 또한 절반으로 감소했다. 도덕적 잣대가 엄격한 대안교육기관에서 재정 불투명은 용납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토록 혹독한 시기에도 녹색대학의 대안 교육을 위한 행보는 멈추지 않았다. 2007년 2명의 학부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4년 동안 생태적 교육과 공동체적 삶을 몸으로 실현한 영광스런 졸업생들이었다. 학교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 또한 계속되었다. 학교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야단법석 (총회)을 통해 의견을 모으고 운영위원회를 거쳐 운영방식을 결정하는 등 투명하고 민주적인 의사 결정 구조를 확립하였다.
온배움터에 걸려있는 과거 녹색대학 시절의 사진
학교 운영이 가닥을 잡아갈 즈음, 이번에는 학교의 명칭이 문제가 됐다. ‘비인가대학이므로 <대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는 경고를 매년 받아 온 터였다. 그러나 참여정부에서 이명박정부로 넘어가면서 경고는 실질적인 제재로 바뀌었다. 녹색대학은 정식으로 고발 조치 당했고 재판을 통해 벌금 300만원을 내야했다.
이에 녹색대학은 ‘온 인격 형성을 위해 조화롭고 균형 있게, 그리고 상호 보완적으로 공부한다’는 뜻의 온배움터로 이름을 바꿨다. 내부적인 성찰도 한몫을 했다. 언제부터인가 녹색대학에서 조차 공부수행능력이 아닌 입학 자격을 따지기 시작했다. 전문과정은 학부졸업생 이상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거나 고졸 출신이 전문 과정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별도의 과정을 개설해야 한다는 등 일반 대학의 관습을 무분별하게 수용하기도 하였다. 자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었다.
고통과 갈등을 딛고 다시 서는 배움터
현재 온배움터에는 4명의 기초과정 학생이 머물고 있다. 이제 그들은 컨테이너가 아닌 정식 기숙사에 머물며 생활한다. 생태건축 수업을 통해 학생들과 선생님이 함께 만든 기숙사이다. 격주 주말이면 전문과정 자연의학과 수강생들로 학교에 활력이 넘친다. 학생과 교사의 밥살림과 여가를 책임질 살림관도 세워졌다. 뜻있는 학부모의 기부로 가능한 일이었다. 운영에 보탬이 되고자 다시 학교를 찾는 이들도 늘어났다. 노재화 운영위원장을 비롯한 졸업생들이 현재 온배움터의 교사로 혹은 조교로 활동하고 있다. 녹지사의 절반 이상은 떨어져 나갔지만 아직 남아있는 300여명이 후원 회원은 여전히 큰 힘이 된다. 이들은 대부분 원년 멤버들이다.
성장의 고통은 컸지만 그 아픔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 고통은 서로를 자라게 했고 서로가 스승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이곳은 삶을 연습하는 공간이 되었다. 병든 시대와 병든 문명 속에서 구체적 현장이 변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치료 역시 불가능하다는 ‘온배움터’의 이념은 생태문화공간을 창조할 일꾼을 양성하는 일로 현실화 되었다.
삶과 앎이 일치하는 배움터를 희망하며
// 배움터 정경 5
‘볍씨를 소독하고 야생화를 심는다.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육개장과 시루떡으로 허기를 달랜다. 기초과정, 연구과정 가리지 않고, 고수도 초보자도 구별하지 않고, 가까이 사는 사람 멀리 터를 닦은 사람 따지지 않고 한데 어울려 농사짓고 마음 닦는 신명 나는 농사모임.’
배움터를 나선다. 백전에서 병곡에 이르는 37번 지방도가 펼쳐져 있다. 한 달 전만 해도 벚꽃이 만발했을, 지금은 연두가 초록에게 한창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 이 길, 비록 지금 화려했던 그 꽃은 지고 없지만 내년이면 이 길 위에 벚꽃은 또 만발하리라. 그 길의 끝에, 피고 지는 꽃잎을 서러워하지 않는 사람들, 온인격의 조화롭고 균형 있는 성장을 꿈꾸는 사람들의 배움터, ‘온배움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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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폼 (세상똥폼 여든까지! 가끔은 예술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여 행복하다. 백살까지 건강하게 책보며 살고 싶은 철들긴 글러먹은 욕.심.쟁.이)
<지리산 이음>에서 함양, 남원, 하동, 산청, 구례 등 지리산권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있는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들, 지리산권의 사람들이 지역을 기반으로 벌이고 있는 새롭고 재미있는 실험들을 찾아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리산권의 여러 커뮤니티들이 서로를 확인하고 연결되어 관계를 맺어가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