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저 멀리 하천을 따라 움직이는 수상한 그림자가 있다. 비밀 작전을 수행 중인 특수 요원? 이라고 하기엔…….음, 행동거지가 지나치게 굼뜬다. 그렇다면 돌틈 사이 숨겨놓은 돈다발을 찾는 조직의 꼬리? 라고 하기엔 눈빛에 희번덕거림이 부족하다. 이 새벽 걷다가 두리번거리다가 멈췄다가, 또 걷다가 두리번거리고 멈추기를 반복하는 너희들, 대체 뉘기냐?
새벽녘 천변을 거니는 수상한 사람들
네, 저희는 자연놀이터 ‘그래’의 수달조사팀입니다! 수달조사팀은, ‘산내 인근 및 현지 주민들이 수달을 수달앓이하며 수달수달 쫓아다니는 모임’이랍니다. ‘자연놀이터 그래’는 다양한 동식물 서식 실태 조사와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하고 있고요, 자연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함께 나누기 위한 안내자 교육 또한 실시하고 있답니다. 각설하고, 그렇습니다. 저희는 2010년부터 현재까지, 그저 가까이서 수달 한 번 보겠다는 심정으로 끈질기게 엄천강 일대를 헤집고 다니는 ‘수상한’ 주민 모임, 맞습니다.
수달조사를 위해 야영까지 한다.
남원 산내와 인월에 근거를 둔 환경단체 ‘지리산생명연대’는 2010년 포드코리아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두 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하나는 지리산 인근의 식생태를 조사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가 수달조사였다. 북부하천에 수달이 자주 출몰한다는 정보를 듣고 덤빈 일이었다. 알고 보니 수달은 하천 생태계 피라미드 최고의 포식자로서 모든 생명체들의 공존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지표종이었다. 즉 수달을 관찰하고 보전하는 일은 수생태계를 보전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조사팀은 전북환경운동연합과 구례수달보전지역에서 수달에 관한 기초교육을 마친 후 바로 현장으로 나갔다.
“운봉부터, 중군, 산내, 마천, 휴천, 용유담에 이르기까지 40킬로미터에 이르는 북부하천 전 구간을 걸었습니다. 전 구간에 걸쳐 수달의 배설물, 발자국 등 흔적이 발견되었죠. 수달이 서식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수달조사팀 신 강씨의 설명이다.
북부 하천 전 구간을 발로 뛰다
수달의 흔적이 자주 발견되는 곳을 골라 그 중 10곳을 주요 서식처로 지정하고 순환식 조사를 시작했다. 주요 서식처 중 한 곳에 무인카메라를 설치한 후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놔두었다가 다른 서식처로 이동하는 방법이었다. 4년간 한여름과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매주 현장을 돌았다. 5년차에 접어든 올해부터는 일 년에 네 번, 그러니까 계절별로 한 차례 씩 현장을 돈다. 이와 같은 현장 답사를 통해 2011년에는 2년 간의 답사 과정을 기록한 보고서를 발표하였고 올해 초에도 간략한 형태의 보고서를 내놓은 바 있다.
수달을 조사하는 일은 무분별한 개발 사업을 암묵적으로 저지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수달서식지인 용유담에 건설예정이었던 지리산 댐이 그렇고 현재 운봉에서 진행 중인 ‘고향의 강’ 사업이 그렇다. 고향의 강 사업이 수달 서식지인 람천을 훼손하고 따라서 하천 생태계가 교란될 것을 우려해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으나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수달에 관심을 보이거나 수달 조사팀의 동선에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주민들도 없지 않다.
"운봉의 운봉교부터 수달조사를 시작했거든요. 근데 어떤 어르신이 운봉교보다 그 아래쪽인 엄계교에 더 많다는 말씀을 해 주셨어요. 또 용유담 아래쪽 문정문화마을에 지소라고, 수달이 많은 곳이 있는데 그 근방에 사시는 어르신 말씀이 모내기가 끝날 무렵이면 물소가 나타난다는 거예요. 멧돼지만큼이나 큰 물소인데 수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르신이 말씀하신 물소의 정체가 뭔지 파악하는 게 올해 수달조사팀의 내부 과제이기도 합니다."
수달을 지키는 일, 생태계를 보존하고 무분별한 개발 사업을 저지하는 일
사명감으로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새벽 가출’이 목적인 적도 있었고, 함께 먹는 도시락이 이유가 되기도 했다. 결과물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과정이 즐겁고 재미있길 바랐다. 수달조사가 대외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답변은 궁색하지만, 즐거운 과정 속에서 매년 결과물을 데이터로 축적시킨 것 자체가 즐거웠다.
수달조사는 2010년 포드코리아의 지원으로 시작한 생명연대의 프로그램이었지만 2012년 ‘아, 수달!’로 모임의 이름을 바꾼 이후에도 그리고 ‘자연놀이터 그래’의 동물모니터링 분과로 자리 잡은 지금도, 줄곧 민간사업으로 진행되었다. 단체에서 진행되는 사업은 목적지향성을 피할 수 없지만 수달조사팀처럼 사적인 회원 모임은 신선함과 즐거움이 생명이다. 최근에는 아름다운 재단의 장비지원프로그램에 당첨되기도 했고 인터넷 포털의 후원금 메뉴에서 후원금이 3배정도 늘어난 일도 있었다. 주민 대상의 체험프로그램에서는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신기함을 감추지 못한다. 즐거운 체험과 함께 수달에 관한 이해도도 높아지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수달이요? 예쁘죠. 애완용으로 키우고 싶은 생각이 들만큼 애교도 있고 친화력이 있어요. 수달이 배영하면서 물고기 먹는 모습이나 가족들이 함께 노는 모습은 정말 예뻐요. 3년 전부터는 수달과 함께 지리산 북부하천의 어류도 조사 중인데 있어야 할 개체들은 다 있는 걸로 보입니다. 물고기가 풍부하니 수달도 행복하겠죠. 지리산 북부하천은 전체적으로 건강한 생태계가 꾸려지고 있는 하천이에요."
멸종위기 야생동물을 위한 가벼운, 그러나 소중한 발걸음
사진출처 : 전라도닷컴
오늘도 수달조사팀은 어김없이 새벽녘 강가를 서성인다. 어슬렁대는 발걸음은 신중하고도 경쾌하다. 그 경쾌함이 수달과의 데이트 때문인지, 둘러앉아 나눠먹을 도시락 때문인지 아리송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수달이 헤엄치는 아름다운 강가에서 도시락을 나눠먹는 행복을 스스로에게 허한 사람들. 그들의 발걸음 덕분에 수달은 행복하고 하천은 푸르다. 자, 이제 이 수상한 사람들과 ‘수달앓이’하며 새벽가출을 감행하는 일만 남았다. 수달아, 기다려라! 내가 간다!
About The Author
똥폼 (세상똥폼 여든까지! 가끔은 예술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여 행복하다. 백살까지 건강하게 책보며 살고 싶은 철들긴 글러먹은 욕.심.쟁.이)
<지리산 이음>에서 함양, 남원, 하동, 산청, 구례 등 지리산권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있는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들, 지리산권의 사람들이 지역을 기반으로 벌이고 있는 새롭고 재미있는 실험들을 찾아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리산권의 여러 커뮤니티들이 서로를 확인하고 연결되어 관계를 맺어가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새벽녘, 저 멀리 하천을 따라 움직이는 수상한 그림자가 있다. 비밀 작전을 수행 중인 특수 요원? 이라고 하기엔…….음, 행동거지가 지나치게 굼뜬다. 그렇다면 돌틈 사이 숨겨놓은 돈다발을 찾는 조직의 꼬리? 라고 하기엔 눈빛에 희번덕거림이 부족하다. 이 새벽 걷다가 두리번거리다가 멈췄다가, 또 걷다가 두리번거리고 멈추기를 반복하는 너희들, 대체 뉘기냐?
새벽녘 천변을 거니는 수상한 사람들
네, 저희는 자연놀이터 ‘그래’의 수달조사팀입니다! 수달조사팀은, ‘산내 인근 및 현지 주민들이 수달을 수달앓이하며 수달수달 쫓아다니는 모임’이랍니다. ‘자연놀이터 그래’는 다양한 동식물 서식 실태 조사와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하고 있고요, 자연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함께 나누기 위한 안내자 교육 또한 실시하고 있답니다. 각설하고, 그렇습니다. 저희는 2010년부터 현재까지, 그저 가까이서 수달 한 번 보겠다는 심정으로 끈질기게 엄천강 일대를 헤집고 다니는 ‘수상한’ 주민 모임, 맞습니다.
수달조사를 위해 야영까지 한다.
남원 산내와 인월에 근거를 둔 환경단체 ‘지리산생명연대’는 2010년 포드코리아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두 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하나는 지리산 인근의 식생태를 조사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가 수달조사였다. 북부하천에 수달이 자주 출몰한다는 정보를 듣고 덤빈 일이었다. 알고 보니 수달은 하천 생태계 피라미드 최고의 포식자로서 모든 생명체들의 공존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지표종이었다. 즉 수달을 관찰하고 보전하는 일은 수생태계를 보전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조사팀은 전북환경운동연합과 구례수달보전지역에서 수달에 관한 기초교육을 마친 후 바로 현장으로 나갔다.
“운봉부터, 중군, 산내, 마천, 휴천, 용유담에 이르기까지 40킬로미터에 이르는 북부하천 전 구간을 걸었습니다. 전 구간에 걸쳐 수달의 배설물, 발자국 등 흔적이 발견되었죠. 수달이 서식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수달조사팀 신 강씨의 설명이다.
북부 하천 전 구간을 발로 뛰다
수달의 흔적이 자주 발견되는 곳을 골라 그 중 10곳을 주요 서식처로 지정하고 순환식 조사를 시작했다. 주요 서식처 중 한 곳에 무인카메라를 설치한 후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놔두었다가 다른 서식처로 이동하는 방법이었다. 4년간 한여름과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매주 현장을 돌았다. 5년차에 접어든 올해부터는 일 년에 네 번, 그러니까 계절별로 한 차례 씩 현장을 돈다. 이와 같은 현장 답사를 통해 2011년에는 2년 간의 답사 과정을 기록한 보고서를 발표하였고 올해 초에도 간략한 형태의 보고서를 내놓은 바 있다.
수달을 조사하는 일은 무분별한 개발 사업을 암묵적으로 저지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수달서식지인 용유담에 건설예정이었던 지리산 댐이 그렇고 현재 운봉에서 진행 중인 ‘고향의 강’ 사업이 그렇다. 고향의 강 사업이 수달 서식지인 람천을 훼손하고 따라서 하천 생태계가 교란될 것을 우려해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으나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수달에 관심을 보이거나 수달 조사팀의 동선에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주민들도 없지 않다.
수달을 지키는 일, 생태계를 보존하고 무분별한 개발 사업을 저지하는 일
사명감으로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새벽 가출’이 목적인 적도 있었고, 함께 먹는 도시락이 이유가 되기도 했다. 결과물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과정이 즐겁고 재미있길 바랐다. 수달조사가 대외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답변은 궁색하지만, 즐거운 과정 속에서 매년 결과물을 데이터로 축적시킨 것 자체가 즐거웠다.
수달조사는 2010년 포드코리아의 지원으로 시작한 생명연대의 프로그램이었지만 2012년 ‘아, 수달!’로 모임의 이름을 바꾼 이후에도 그리고 ‘자연놀이터 그래’의 동물모니터링 분과로 자리 잡은 지금도, 줄곧 민간사업으로 진행되었다. 단체에서 진행되는 사업은 목적지향성을 피할 수 없지만 수달조사팀처럼 사적인 회원 모임은 신선함과 즐거움이 생명이다. 최근에는 아름다운 재단의 장비지원프로그램에 당첨되기도 했고 인터넷 포털의 후원금 메뉴에서 후원금이 3배정도 늘어난 일도 있었다. 주민 대상의 체험프로그램에서는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신기함을 감추지 못한다. 즐거운 체험과 함께 수달에 관한 이해도도 높아지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멸종위기 야생동물을 위한 가벼운, 그러나 소중한 발걸음
사진출처 : 전라도닷컴
오늘도 수달조사팀은 어김없이 새벽녘 강가를 서성인다. 어슬렁대는 발걸음은 신중하고도 경쾌하다. 그 경쾌함이 수달과의 데이트 때문인지, 둘러앉아 나눠먹을 도시락 때문인지 아리송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수달이 헤엄치는 아름다운 강가에서 도시락을 나눠먹는 행복을 스스로에게 허한 사람들. 그들의 발걸음 덕분에 수달은 행복하고 하천은 푸르다. 자, 이제 이 수상한 사람들과 ‘수달앓이’하며 새벽가출을 감행하는 일만 남았다. 수달아, 기다려라! 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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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폼 (세상똥폼 여든까지! 가끔은 예술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여 행복하다. 백살까지 건강하게 책보며 살고 싶은 철들긴 글러먹은 욕.심.쟁.이)
<지리산 이음>에서 함양, 남원, 하동, 산청, 구례 등 지리산권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있는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들, 지리산권의 사람들이 지역을 기반으로 벌이고 있는 새롭고 재미있는 실험들을 찾아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리산권의 여러 커뮤니티들이 서로를 확인하고 연결되어 관계를 맺어가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