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밀착형 B급 교양문예지 지글스는 “지리산에서 글 쓰는 여자들”의 줄임말로, 지리산 주변에 사는 여성들의 글과 그림을 모아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지글스는 다채로운 여성들의 삶이 어우러져 하나의 멋진 작품이 되는 “패치워크 같은 잡지”를 지향합니다. 지리산 주변에 사는 여자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지역 여성들의 창작 활동을 응원하는 주민들과 독자들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언니, 글 좀 쓸래요?”
“글? 무슨 글?”
“지리산에 사는 여자들이 쓴 글 모아 책 한권 만들려고요.”
“그래? 그럼 한 번 해보지 뭐.”
깃털처럼 가벼운 그녀의 속삭임에 귀 얇은 인간 하나가 훌러덩 넘어갔다. 대단한 각오나 특별한 결심 없이 나는 그저 그녀, ‘달리’가 하는 일이기에 그러겠다고 했다. 누구는 시를 쓰고 또 다른 누구는 소설을 썼다. 농사를 짓는 촌부의 삶이 그려지기도 하고, 남편과 아들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주부의 일상이 웃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 어떤 이는 교사이기도 했고, 학생이었으며, 농부이기도 했고, 주부였다. 그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지리산에 사는 여자들이라는 점이었다.
한 번 해 보지, 뭐
글을 쓰겠다는 약속과 함께 글을 쓰고 싶어 할 만한 또 다른 친구 ‘아니카’를 소개했다. ‘아니카’는 ‘새로’를 끌어들였다. 새로는 아이들의 유아기에 도서관 모임을 함께 하며 안면을 튼 사이였다. SNS에 게재된 ‘중터아짐’의 글을 유심히 봐왔던 달리는 그녀 역시 필진으로 모셔왔다. 중터아짐은 귀농학교 동기를 통해 알고 지내던 동네 언니였다. 이럭저럭 열 댓 명의 필진이 모였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안면은 없는 이도 있었고, 이름도 얼굴도 처음인 사람도 있었다. 달리를 중심에 놓고 방사형의 그물망이 형성된 셈이었다. 그 사이 사이로 크고 작은, 혹은 질기거나 느슨한 무수한 연결고리들이 존재했을 테지만 글로, 책으로 묶일 인연은 그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근데, 뭘 쓰지?”
“희곡이나 연극에 관한 글 쓰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럴까? 그럼 그러지 뭐.”
지글스의 앞날을 위한 작당의 날. 달리, ‘자연’, ‘명심’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나의 글감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연극 선생이라는, 연극 모임의 일원이라는 객체적인 정체성의 영향이었음이 분명하지만 ‘나는 시인이 꿈이었는데요. 가끔은 소설도 쓴다고요.’ 따위의 궁시렁 보다는 ‘그래, 그럼 한 번 해보지 뭐.’ 쪽에 몸을 실었다. 처음에 원고를 요구했던 달리는, 중반엔 돈을(!) 요구했다. 재미난 일을 도모하는 터이니, 그 비용에 대한 십시일반은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졌다. “니들 글을 누가 실어주겠냐. 돈 내가며 책 내는 게 당연하지!” ‘이삭의 관찰일기’를 쓰고 있는 ‘이삭’ 언니 부군의, 서글프지만 지당하신 일갈이었다. 원고를 싣는 대신 지면세를 내는 것으로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흡사 월세였다. 아니 계간지이니 계절세여야 하나. 아무튼 필자는 자신의 글이 실릴 한 평짜리 지면을 얻는 대신 후원금을 냈고 편집자는 그 돈으로 인쇄비를 충당했다.
돈 내가며 책 내는 게 당연지사
드디어 지글스 첫 호가 나왔다. 좀처럼 오프 모임을 꾸리지 않는 달리가, 그래도 책이 나왔으니 한 번 모이자 했다. 검색 엔진을 통해 일주일 만에 습득한 프로그램으로 편집디자인을 담당한 자연과, 필진 끌어들이기부터 홍보 및 후원 따위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은 달리는 첫 호를 손에 쥔 순간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그러나 감격과 기쁨도 잠시, 잡지의 가독성에 의문을 품는 사람과 실린 글의 질적인 편차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없지 않았다.
“직업적으로 책을 만들었던 사람들 눈에는 허접스럽기 짝이 없는 결과물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평가하기 시작하면 아무도 글을 실으려 하지 않았을 테고, 여자들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글을 싣고 싶다는 첫 의도에서도 벗어났을 테죠. 내 취지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과 조율이 필요했기 때문에 창간호를 낸 직후에는 감격스러움과 더불어 씁쓸함을 느끼기도 했어요.” 창간 직 후 첫 모임에 관한 달리의 소회다.
설렘과 흥분에 휩싸인 창간 기념 모임이기보다는 삐걱대는 소음과 분위기 파악에 집중된, 약간은 긴장된 모임이었다. 자기 일이니 자기 돈을 내는 일은 쉽게 동의할 수 있었지만, 우리가 좋아서 한 결과물을 남보고 돈 주고 사라는 의견에는 이견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달리의 답변은 냉정하고도 깔끔했다. ‘돈이 없으니까요.’ 이미 독립출간물의 생태계를 경험한 다른 구성원들에게 유료배부에 대한 고민은 시대착오적인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누군가는 떨어져나가고 또 누군가가 그 자리를 메웠다.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이 어찌 편집디자인만의 탓이겠느냐만, 달리는 어쨌든 디자이너에게 여름 호를 맡겼다. 아니카와 친분이 있는 ‘전문’디자이너였다. 예상대로 쌈박한 물건이 탄생했다. 달리의 집시치마를 걸친 채 맨발로 풀밭을 거니는 자연의 하반신을 명심이 찍었다. 달리 의상, 자연 모델, 명심 촬영의 환상 궁합이었다. 해상도 좋은 사진과 맵시 있게 뽑아낸 표지 글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멤버들의 반응은 또 가지각색이었다.
“보기 좋네.”
“읽기도 좋고.”
“근데, 이거 B급 문예지 맞아?”
이거 B급 문예지 맞아?
‘보기 좋고, 읽기 좋다’는 의견과 함께, 그러나 어쩐지 B급 문예지를 표방하는 지글스의 정체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하자면 ‘우리가 이래도 되는 거야.’ 라며 휘둥그레진 눈을 껌뻑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양한 의견은 ‘조금 모자라더라도 우리 수준에 맞게, 우리가 해 보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가을 호가 나왔다. 이번에는 전문 디자이너가 잡아준 포맷에 맞춰 봄 호처럼 자연이 편집디자인을 맡았다. 달리가 의상을 내고, 유일한 청소년 필자인 ‘영’이 그 옷을 입고, 명심이 촬영한 표지는 B급스런 지글스의 정체성을 다시 확보해 주었다.
그러나 아마튜어리즘에 동의한 것도 아니요, 전문 글쓰기 집단을 표방한 일도 없는 지글스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줄타기는 계속되었다. 조금 발전적인, 어쩌면 세속적인 글쓰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과 나의 글과 타인의 글이 병렬로 이어져 있을 뿐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는 무력감도 한 몫을 했다. 지글스에 실린 다른 글을 읽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적, 정신적 노력이 필요했고 내 글이 제대로 실렸는지 확인한 후에 책을 덮어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줄타기를 넘어 널뛰기를 하고 있던 어느 날, 비 갠 뒤 문득 다가오는 능선처럼 선명하고 분명하게 마음속으로 걸어들어 오는 무엇이 있었다.
‘이것은 여,자,들,의 글쓰기이다.’
엄마를 여자로서 인식하는 일이 쉽지 않았고 여전히 여의치 않은 것처럼 나의 아이들 역시 그러리라는 점은 자명했다. 그러나 이 글쓰기가, 혹은 이 글쓰기를 위한 여자들의 쑥덕거림이 역시 여성인 내 아이들의 가슴을 적실 수 있다면, 그래서 자신을 혹은 엄마를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일에 머뭇거리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다. 줄타기와 널뛰기를 멈출 수 있었던 이 바람이 달리의 다음과 같은 원대한 희망에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다르게 살고 싶어서 내려왔는데 이 마을에서도 오피니언 리더는 역시 40대 남자더라고요. 낄만한 자리도 없고 뭘 같이 해보자고 제안 받은 일도 없었죠. 여중, 여고를 나와 여성주의 단체에서 줄 곧 일해 왔기 때문에 남자들과 같이 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면도 없지 않았어요. 관심사도 다르고요. 헌데 특히 문화 활동이나 창작 활동 같은 건 여자들이랑 하면 시너지도 크고, 무엇보다 자연스럽거든요. 여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펼칠 수 있게 동기를 부여하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보고 싶었어요.”
일 년이 지났고 4권의 지글스가 나왔다. 60페이지에 불과했던 창간호는 겨울 호에 이르러 200페이지를 육박했다. 들고 나는 사람들이 있으나 대체로 15명가량의 필진이 항시 대기 중이다. 겨울 호를 내고 지글스 일 년을 마감하는 조촐한 자리에서 누구는 지글스를 통해 얻게 된 치유의 과정을 토로하고, 누구는 자신에게 주어진 지면의 소중함을 강변하고, 또 누구는 속살거림의 간절함을 강조한다. 흡사 부흥회이며 간증의 시간이다. ‘우리는 만날 우리끼리 좋대’ 하는 통박 아닌 통박에 ‘우리끼리라도 좋아해야지, 안 그래?’ 라는 상큼한 자화자찬이 오간다. 어쩌면 이만큼의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글로 엮여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갈 우리들만의 시간.
글쓰기가 지탱 해 줄, 외롭고 고단한 삶
어느 겨울, 지리산의 추운 숲길을 혼자 걷던 달리는 생각했다. 삶은 아름답지 않다고, 삶은 외롭고 고단한 것이라고. 그리고 글은, 아름답지 않은 삶을 담담하게 바라보게 하고, 외롭고 고단한 삶을 홀로 충만하게 하는 삶의 일부라고. 나 말고도 그런 여자들이 또 있을 거라고. 달리의 예상대로 그런 여자들이 또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달리가 문득 내민 손을 덥석 잡아주었다. 지리산에서 글 쓰는 여자들을 위한 무대를 펼쳐 준 달리는 여전히, ‘재미없으면 관두겠다!’는 일관성 있는 독백을 읊조리고 있다. 글쎄, 달리, 관두는 일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을 걸요. 이제는 우리가 그 손, 쉽게 놓지 않을 테니까요!
다음은 지글스의 편집장이자 ‘문화기획 달’의 대표인 달리 (이유진) 와의 일문일답입니다.
I책을 만들 당시, 돈도, 경험도, 같이 할 사람도 없었다던데 대체 어떻게 책을 만들 작정이었나요? 뭐 특별히 믿는 구석이라도?
그냥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중간에 엎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구요. 그렇게 가볍게 덤비니 도와 줄 사람들이 생기더라고요. 같이 마음을 모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주기도 했구요. 사실 어이없는 일이죠. 책? 내가 왜? 네가 뭔데?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는 책인데 이런 생각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래서 거절당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연애할 때도 고백을 무지 많이 하는 편이였거든요. “선배 괜찮은 거 같아요. 우리 사귀죠.” 뭐 이런 식으로요. 물론 거절당하기도 했는데 그다지 상처받지 않았어요.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더라도 알아주는 걸로 충분했으니까.
재미난 일을 많이 벌이잖아요? 글쓰기 수업도 하고 가수를 모셔와 공연도 하고 꿈분석 워크숍도 하고, 지난 연말엔 사업설명회 겸 후원파티도 여셨죠? 대체 그 밤하늘의 별 같은 아이템이 달리 어디에 쏙쏙 박혀있는 겁니까?
그냥 그런 아이디어들이 떠올라요.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거든요. 그걸 실현해 보고 싶어서 그랬는지 무슨 일을 하다보면 늘 주도하는 입장이 되어 있었어요. 학급신문을 만들어도, 문집을 만들어도 편집장을 도맡아 했죠. 피곤하고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성격 탓인 것 같아요. 다행히 그런 아이디어가 실현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재미있어요.
재미란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지글스도 재미있을 때까지만 낼 거라면서요? 달리는 뭐가 재밌는데요?
그게 구현되든 안 되든,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재미있어요. 지글스도 아무 계획 없이 대충 지글스에 대해 읊어 놓은 A4용지 하나 들고 시작했어요. 근데 그게 저절로 굴러가는 거예요. 또 굳이 하자고 질척거리지 않았는데 같이 하자는 사람이 생기니 그것도 재밌죠. 사실 지글스엔, 일기나 넋두리를 공개적으로 늘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글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글들도 반복되면 달라지거든요. 이전과는 다른 것을 새롭게 해보려는 멤버들도 생기고요. 그런 변화도 참 재미나죠.
달리는 지글스의 편집장이자, 필자이기도 하죠. 달리에게 글쓰기란 뭡니까?
음, 약간 살리에르 같은 느낌이 들어요. 중고등학교 때까지 꿈이 시인이었어요. 아빠의 지인이 고은 시인의 제자였는데 그 분한테 제가 쓴 시를 편지와 함께 보냈죠. 근데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는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근데 운문 보다는 산문을 더 잘 쓰는 것 같구나’ 나는 시를 쓰고 싶은데 동봉한 편지를 보고 좋다고 하시잖아요. (웃음)이게 일종의 트라우마가 됐어요. 여성주의 단체에서 일하면서 고소장이나 진술서 쓰는 일 같은 직업적인 글쓰기만 하다 보니 늘 글쓰기에 목 말라있었지만 한편으론 자질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죠. 그래서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걸 선택했어요. 사람 모으고 그들이 재미나게 놀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주는 쪽으로요.
수지타산은 맞습니까?
판로를 고민 중이기는 해요. 더 많이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라기보다는 인건비라도 뽑을 수 있었으면 해서요. 아무래도 책을 만들면 배부도 해야 하고 발송도 해야 하니 비용이 발생하잖아요. 그런 비용을 충당할 만큼의 돈이 필요해요. 그래서 ‘문화기획 달’ 활동으로 지원을 받고 그 사업의 결과 꾸려진 돈으로 지글스를 만들까 하는 생각도 있어요.
다채로운 여성들의 삶이 어우러져 마치 하나의 조각보처럼 아름다운 작품이 되는 ‘패치워크 같은 잡지’, 지글스가 경쾌한 수레바퀴마냥 재미나게 굴러가기를, 그래서 달리가 지글스를 때려 치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제가 때려 치면 다른 사람이 편집장 하면 돼요. (웃음)
About The Author
똥폼 (세상똥폼 여든까지! 가끔은 예술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여 행복하다. 백살까지 건강하게 책보며 살고 싶은 철들긴 글러먹은 욕.심.쟁.이)
<지리산 이음>에서 함양, 남원, 하동, 산청, 구례 등 지리산권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있는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들, 지리산권의 사람들이 지역을 기반으로 벌이고 있는 새롭고 재미있는 실험들을 찾아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리산권의 여러 커뮤니티들이 서로를 확인하고 연결되어 관계를 맺어가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생활밀착형 B급 교양문예지 지글스는 “지리산에서 글 쓰는 여자들”의 줄임말로, 지리산 주변에 사는 여성들의 글과 그림을 모아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지글스는 다채로운 여성들의 삶이 어우러져 하나의 멋진 작품이 되는 “패치워크 같은 잡지”를 지향합니다. 지리산 주변에 사는 여자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지역 여성들의 창작 활동을 응원하는 주민들과 독자들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언니, 글 좀 쓸래요?”
“글? 무슨 글?”
“지리산에 사는 여자들이 쓴 글 모아 책 한권 만들려고요.”
“그래? 그럼 한 번 해보지 뭐.”
깃털처럼 가벼운 그녀의 속삭임에 귀 얇은 인간 하나가 훌러덩 넘어갔다. 대단한 각오나 특별한 결심 없이 나는 그저 그녀, ‘달리’가 하는 일이기에 그러겠다고 했다. 누구는 시를 쓰고 또 다른 누구는 소설을 썼다. 농사를 짓는 촌부의 삶이 그려지기도 하고, 남편과 아들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주부의 일상이 웃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 어떤 이는 교사이기도 했고, 학생이었으며, 농부이기도 했고, 주부였다. 그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지리산에 사는 여자들이라는 점이었다.
한 번 해 보지, 뭐
글을 쓰겠다는 약속과 함께 글을 쓰고 싶어 할 만한 또 다른 친구 ‘아니카’를 소개했다. ‘아니카’는 ‘새로’를 끌어들였다. 새로는 아이들의 유아기에 도서관 모임을 함께 하며 안면을 튼 사이였다. SNS에 게재된 ‘중터아짐’의 글을 유심히 봐왔던 달리는 그녀 역시 필진으로 모셔왔다. 중터아짐은 귀농학교 동기를 통해 알고 지내던 동네 언니였다. 이럭저럭 열 댓 명의 필진이 모였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안면은 없는 이도 있었고, 이름도 얼굴도 처음인 사람도 있었다. 달리를 중심에 놓고 방사형의 그물망이 형성된 셈이었다. 그 사이 사이로 크고 작은, 혹은 질기거나 느슨한 무수한 연결고리들이 존재했을 테지만 글로, 책으로 묶일 인연은 그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근데, 뭘 쓰지?”
“희곡이나 연극에 관한 글 쓰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럴까? 그럼 그러지 뭐.”
지글스의 앞날을 위한 작당의 날. 달리, ‘자연’, ‘명심’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나의 글감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연극 선생이라는, 연극 모임의 일원이라는 객체적인 정체성의 영향이었음이 분명하지만 ‘나는 시인이 꿈이었는데요. 가끔은 소설도 쓴다고요.’ 따위의 궁시렁 보다는 ‘그래, 그럼 한 번 해보지 뭐.’ 쪽에 몸을 실었다. 처음에 원고를 요구했던 달리는, 중반엔 돈을(!) 요구했다. 재미난 일을 도모하는 터이니, 그 비용에 대한 십시일반은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졌다. “니들 글을 누가 실어주겠냐. 돈 내가며 책 내는 게 당연하지!” ‘이삭의 관찰일기’를 쓰고 있는 ‘이삭’ 언니 부군의, 서글프지만 지당하신 일갈이었다. 원고를 싣는 대신 지면세를 내는 것으로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흡사 월세였다. 아니 계간지이니 계절세여야 하나. 아무튼 필자는 자신의 글이 실릴 한 평짜리 지면을 얻는 대신 후원금을 냈고 편집자는 그 돈으로 인쇄비를 충당했다.
돈 내가며 책 내는 게 당연지사
드디어 지글스 첫 호가 나왔다. 좀처럼 오프 모임을 꾸리지 않는 달리가, 그래도 책이 나왔으니 한 번 모이자 했다. 검색 엔진을 통해 일주일 만에 습득한 프로그램으로 편집디자인을 담당한 자연과, 필진 끌어들이기부터 홍보 및 후원 따위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은 달리는 첫 호를 손에 쥔 순간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그러나 감격과 기쁨도 잠시, 잡지의 가독성에 의문을 품는 사람과 실린 글의 질적인 편차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없지 않았다.
“직업적으로 책을 만들었던 사람들 눈에는 허접스럽기 짝이 없는 결과물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평가하기 시작하면 아무도 글을 실으려 하지 않았을 테고, 여자들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글을 싣고 싶다는 첫 의도에서도 벗어났을 테죠. 내 취지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과 조율이 필요했기 때문에 창간호를 낸 직후에는 감격스러움과 더불어 씁쓸함을 느끼기도 했어요.” 창간 직 후 첫 모임에 관한 달리의 소회다.
설렘과 흥분에 휩싸인 창간 기념 모임이기보다는 삐걱대는 소음과 분위기 파악에 집중된, 약간은 긴장된 모임이었다. 자기 일이니 자기 돈을 내는 일은 쉽게 동의할 수 있었지만, 우리가 좋아서 한 결과물을 남보고 돈 주고 사라는 의견에는 이견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달리의 답변은 냉정하고도 깔끔했다. ‘돈이 없으니까요.’ 이미 독립출간물의 생태계를 경험한 다른 구성원들에게 유료배부에 대한 고민은 시대착오적인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누군가는 떨어져나가고 또 누군가가 그 자리를 메웠다.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이 어찌 편집디자인만의 탓이겠느냐만, 달리는 어쨌든 디자이너에게 여름 호를 맡겼다. 아니카와 친분이 있는 ‘전문’디자이너였다. 예상대로 쌈박한 물건이 탄생했다. 달리의 집시치마를 걸친 채 맨발로 풀밭을 거니는 자연의 하반신을 명심이 찍었다. 달리 의상, 자연 모델, 명심 촬영의 환상 궁합이었다. 해상도 좋은 사진과 맵시 있게 뽑아낸 표지 글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멤버들의 반응은 또 가지각색이었다.
“보기 좋네.”
“읽기도 좋고.”
“근데, 이거 B급 문예지 맞아?”
이거 B급 문예지 맞아?
‘보기 좋고, 읽기 좋다’는 의견과 함께, 그러나 어쩐지 B급 문예지를 표방하는 지글스의 정체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하자면 ‘우리가 이래도 되는 거야.’ 라며 휘둥그레진 눈을 껌뻑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양한 의견은 ‘조금 모자라더라도 우리 수준에 맞게, 우리가 해 보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가을 호가 나왔다. 이번에는 전문 디자이너가 잡아준 포맷에 맞춰 봄 호처럼 자연이 편집디자인을 맡았다. 달리가 의상을 내고, 유일한 청소년 필자인 ‘영’이 그 옷을 입고, 명심이 촬영한 표지는 B급스런 지글스의 정체성을 다시 확보해 주었다.
그러나 아마튜어리즘에 동의한 것도 아니요, 전문 글쓰기 집단을 표방한 일도 없는 지글스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줄타기는 계속되었다. 조금 발전적인, 어쩌면 세속적인 글쓰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과 나의 글과 타인의 글이 병렬로 이어져 있을 뿐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는 무력감도 한 몫을 했다. 지글스에 실린 다른 글을 읽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적, 정신적 노력이 필요했고 내 글이 제대로 실렸는지 확인한 후에 책을 덮어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줄타기를 넘어 널뛰기를 하고 있던 어느 날, 비 갠 뒤 문득 다가오는 능선처럼 선명하고 분명하게 마음속으로 걸어들어 오는 무엇이 있었다.
‘이것은 여,자,들,의 글쓰기이다.’
엄마를 여자로서 인식하는 일이 쉽지 않았고 여전히 여의치 않은 것처럼 나의 아이들 역시 그러리라는 점은 자명했다. 그러나 이 글쓰기가, 혹은 이 글쓰기를 위한 여자들의 쑥덕거림이 역시 여성인 내 아이들의 가슴을 적실 수 있다면, 그래서 자신을 혹은 엄마를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일에 머뭇거리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다. 줄타기와 널뛰기를 멈출 수 있었던 이 바람이 달리의 다음과 같은 원대한 희망에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다르게 살고 싶어서 내려왔는데 이 마을에서도 오피니언 리더는 역시 40대 남자더라고요. 낄만한 자리도 없고 뭘 같이 해보자고 제안 받은 일도 없었죠. 여중, 여고를 나와 여성주의 단체에서 줄 곧 일해 왔기 때문에 남자들과 같이 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면도 없지 않았어요. 관심사도 다르고요. 헌데 특히 문화 활동이나 창작 활동 같은 건 여자들이랑 하면 시너지도 크고, 무엇보다 자연스럽거든요. 여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펼칠 수 있게 동기를 부여하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보고 싶었어요.”
일 년이 지났고 4권의 지글스가 나왔다. 60페이지에 불과했던 창간호는 겨울 호에 이르러 200페이지를 육박했다. 들고 나는 사람들이 있으나 대체로 15명가량의 필진이 항시 대기 중이다. 겨울 호를 내고 지글스 일 년을 마감하는 조촐한 자리에서 누구는 지글스를 통해 얻게 된 치유의 과정을 토로하고, 누구는 자신에게 주어진 지면의 소중함을 강변하고, 또 누구는 속살거림의 간절함을 강조한다. 흡사 부흥회이며 간증의 시간이다. ‘우리는 만날 우리끼리 좋대’ 하는 통박 아닌 통박에 ‘우리끼리라도 좋아해야지, 안 그래?’ 라는 상큼한 자화자찬이 오간다. 어쩌면 이만큼의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글로 엮여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갈 우리들만의 시간.
글쓰기가 지탱 해 줄, 외롭고 고단한 삶
어느 겨울, 지리산의 추운 숲길을 혼자 걷던 달리는 생각했다. 삶은 아름답지 않다고, 삶은 외롭고 고단한 것이라고. 그리고 글은, 아름답지 않은 삶을 담담하게 바라보게 하고, 외롭고 고단한 삶을 홀로 충만하게 하는 삶의 일부라고. 나 말고도 그런 여자들이 또 있을 거라고. 달리의 예상대로 그런 여자들이 또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달리가 문득 내민 손을 덥석 잡아주었다. 지리산에서 글 쓰는 여자들을 위한 무대를 펼쳐 준 달리는 여전히, ‘재미없으면 관두겠다!’는 일관성 있는 독백을 읊조리고 있다. 글쎄, 달리, 관두는 일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을 걸요. 이제는 우리가 그 손, 쉽게 놓지 않을 테니까요!
다음은 지글스의 편집장이자 ‘문화기획 달’의 대표인 달리 (이유진) 와의 일문일답입니다.
I책을 만들 당시, 돈도, 경험도, 같이 할 사람도 없었다던데 대체 어떻게 책을 만들 작정이었나요? 뭐 특별히 믿는 구석이라도?
그냥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중간에 엎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구요. 그렇게 가볍게 덤비니 도와 줄 사람들이 생기더라고요. 같이 마음을 모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주기도 했구요. 사실 어이없는 일이죠. 책? 내가 왜? 네가 뭔데?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는 책인데 이런 생각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래서 거절당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연애할 때도 고백을 무지 많이 하는 편이였거든요. “선배 괜찮은 거 같아요. 우리 사귀죠.” 뭐 이런 식으로요. 물론 거절당하기도 했는데 그다지 상처받지 않았어요.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더라도 알아주는 걸로 충분했으니까.
재미난 일을 많이 벌이잖아요? 글쓰기 수업도 하고 가수를 모셔와 공연도 하고 꿈분석 워크숍도 하고, 지난 연말엔 사업설명회 겸 후원파티도 여셨죠? 대체 그 밤하늘의 별 같은 아이템이 달리 어디에 쏙쏙 박혀있는 겁니까?
그냥 그런 아이디어들이 떠올라요.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거든요. 그걸 실현해 보고 싶어서 그랬는지 무슨 일을 하다보면 늘 주도하는 입장이 되어 있었어요. 학급신문을 만들어도, 문집을 만들어도 편집장을 도맡아 했죠. 피곤하고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성격 탓인 것 같아요. 다행히 그런 아이디어가 실현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재미있어요.
재미란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지글스도 재미있을 때까지만 낼 거라면서요? 달리는 뭐가 재밌는데요?
그게 구현되든 안 되든,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재미있어요. 지글스도 아무 계획 없이 대충 지글스에 대해 읊어 놓은 A4용지 하나 들고 시작했어요. 근데 그게 저절로 굴러가는 거예요. 또 굳이 하자고 질척거리지 않았는데 같이 하자는 사람이 생기니 그것도 재밌죠. 사실 지글스엔, 일기나 넋두리를 공개적으로 늘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글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글들도 반복되면 달라지거든요. 이전과는 다른 것을 새롭게 해보려는 멤버들도 생기고요. 그런 변화도 참 재미나죠.
달리는 지글스의 편집장이자, 필자이기도 하죠. 달리에게 글쓰기란 뭡니까?
음, 약간 살리에르 같은 느낌이 들어요. 중고등학교 때까지 꿈이 시인이었어요. 아빠의 지인이 고은 시인의 제자였는데 그 분한테 제가 쓴 시를 편지와 함께 보냈죠. 근데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는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근데 운문 보다는 산문을 더 잘 쓰는 것 같구나’ 나는 시를 쓰고 싶은데 동봉한 편지를 보고 좋다고 하시잖아요. (웃음)이게 일종의 트라우마가 됐어요. 여성주의 단체에서 일하면서 고소장이나 진술서 쓰는 일 같은 직업적인 글쓰기만 하다 보니 늘 글쓰기에 목 말라있었지만 한편으론 자질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죠. 그래서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걸 선택했어요. 사람 모으고 그들이 재미나게 놀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주는 쪽으로요.
수지타산은 맞습니까?
판로를 고민 중이기는 해요. 더 많이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라기보다는 인건비라도 뽑을 수 있었으면 해서요. 아무래도 책을 만들면 배부도 해야 하고 발송도 해야 하니 비용이 발생하잖아요. 그런 비용을 충당할 만큼의 돈이 필요해요. 그래서 ‘문화기획 달’ 활동으로 지원을 받고 그 사업의 결과 꾸려진 돈으로 지글스를 만들까 하는 생각도 있어요.
다채로운 여성들의 삶이 어우러져 마치 하나의 조각보처럼 아름다운 작품이 되는 ‘패치워크 같은 잡지’, 지글스가 경쾌한 수레바퀴마냥 재미나게 굴러가기를, 그래서 달리가 지글스를 때려 치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제가 때려 치면 다른 사람이 편집장 하면 돼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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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폼 (세상똥폼 여든까지! 가끔은 예술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여 행복하다. 백살까지 건강하게 책보며 살고 싶은 철들긴 글러먹은 욕.심.쟁.이)
<지리산 이음>에서 함양, 남원, 하동, 산청, 구례 등 지리산권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있는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들, 지리산권의 사람들이 지역을 기반으로 벌이고 있는 새롭고 재미있는 실험들을 찾아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리산권의 여러 커뮤니티들이 서로를 확인하고 연결되어 관계를 맺어가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