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지리산포럼에서는 막다른 길에 선 위기의 시대를 넘어 전환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코로나19와 기후위기라는 전지구적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 위기를 넘어 다음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전환은 무엇일까요? 인류의 생존방식, 우리 사회의 운영 규범과 원칙, 개인의 삶까지. 모든 분야에서 전환을 요구받고 있는 시대에 필요한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지리산포럼2021 더 알아보기 [바로가기] |
11/20 관계X전환 #2 사회의 구성원은 누구인가 : 관계의 전환과 다종간정의 생태평화 - 주윤정(서울대 인권센터) 본 프로그램에서는 기후위기와 생태위기, 6번째 멸종의 위기의 시대에 사회의 새로운 관계의 전환, 가능성, 논리, 실천, 행위자들에 대해 살펴보고, 새로운 실천 전략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
최근 '기후우울(climate grief)'과 같이 ‘생태우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생태를 연구하는 학자들 역시 사라져 가는 종을 연구하는 우울한 상황입니다. 여러분께 먼저 문학작품 한 편을 소개하고, 어떤 법과 제도가 새롭게 만들어지는지,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무엇을 실천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를 해 보면 좋겠습니다.
ⓒ 지리산이음
인간중심적 사고를 벗어나 다른 대상, 다른 존재들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죽은 이들의 뼈에서 쟁기를 끌어라』는 우리가 인간 사회 안에서 인간중심적인 방식을 넘어서서 다른 대상, 다른 존재들과 어떻게 관계 맺으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소설입니다.
폴란드는 숲이 굉장히 많은 나라입니다. 수많은 아름다운 사슴들이 마을에서 사냥으로 무참히 죽음을 당하는 것에 분노를 느끼는, 아주 특별한 감수성을 가진 할머니 두세이코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두세이코는 이런 말을 합니다.
‘동물 살해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죠. 처벌이 없으니까 아무도 사건에 대해서 알지 못해요.’처벌이 없다는 건 사슴을 죽이는 것이 정당한 행위가 아니라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올바르지 않은 행위라고 규정을 하지 못하는 것이죠. 사건도 되지도 않고 사건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니까 아예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무자비한 범죄가 지극히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행위로 여겨지고 있고 아무도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세상인 거죠.
인간의 회합과 욕망에 의해서 많은 동물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고, 인간은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폭력과 살해를 저지르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한 규범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걸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생태적인 차원, 기후위기 문제뿐만 아니라 멸종에 관한 중요한 문헌과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사회과학과 철학 연구에서도 생태적 문제의식을 갖고 새로운 이론적인 틀을 가진 논의들이 많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2017년 칙서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는 생태적인 철학을 담은 가장 혁신적인 문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생물종들을 그저 활용할 수 있는 잠재적 자원으로만 여겨서 그 고유한 가치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말은 기독교 신앙에서 인간과 동물에 대한 유대를 설정하는 방식 자체를 새롭게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면서 갖는 고유한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죠.
기후위기 시대는 새로운 기술과 기법으로 환경을 적응해나가는 기업들에게는 기회 확장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적응조차 못하고 사라져 가는 동식물들이 엄청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할 것 같습니다. 양서류, 파충류, 바다에 있는 동물들은 파악이 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척추동물을 기준으로 생물 다양성을 얘기를 하는데 사회학자로서 깊은 우울감에 빠집니다. 우리가 근대적 시민권과 산업자본주의를 통해서 번영하는 것과 동식물이 사라지는 사이클을 시각화해서 볼 때, 그 기울기가 거의 같이 가고 있다는 것은 참 고민스러운 지점이죠.
탄소 배출에서도 육식과 가축과 관련된 문제가 많은데 학자들마다 지구 상에서 야생동물이 차지하는 비율이 1%다, 3%다, 4%다 얘기를 하지만, 사실은 인간과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동물들이 전 지구를 뒤덮고 있지 다른 동물들은 정말 무참히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해방은 엄청난 기회였습니다. 교육 받지 못했던 사람들, 투표권이 없고 인간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받고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거기에 수많은 다른 생물들이 대가를 치렀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사회가 불안정하고 여러 나라들의 불행한 상황들을 보고 있으면 우울증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될 것 같고 약간의 죄의식을 갖게 되잖아요. 내가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이 사람들의 고통을 소비하는 것에 대해서.
그런데 이기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저는 내가 인간으로서 태어나서 생각하고 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고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을 더 열심히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그리고 다른 생명체에게 덜 미안한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너무 우울에 빠지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 지리산이음
어떤 법과 제도가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가
최근에는 동물권과 관련해 국제적 법적 규범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민법에서도 동물은 소유물이 아니라 제3의 지위를 갖는다는 내용이 개정안에 포함되었습니다.
아마 제노사이드라는 개념을 들어보셨을 거예요. 과거에는 인간과 인간의, 개인과 개인들 간의 살인에 대해 명확한 인과관계가 입증되는 사람들만 처벌이 대상이 됐었는데 제노사이드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정치적으로 동원돼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들에 대해서 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생겼습니다. 제노사이드라는 개념이 없었을 때는 이런 것들을 전체적인 책임이나 범죄로 규정할 수 없었는데 법학자 라카엘 렘킨이 홀로코스라는 문제를 기존의 법적 체계 내에서는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하기 위해 수많은 인종 간의 학살들을 개념화하고 국제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규범화 한 거죠.
예를 들면 대규모 어획으로 인한 해양생물체들의 소멸 문제에 대해서 국가 단위로 처벌하기가 너무 어렵죠. 국가 주도의 지자체와 결합한 개발의 주체가 국가라는 것도 문제가 있는데, 남미와 같은 곳에서는 자연을 개발하는 주체들이 대부분 다국적 기업이고 정부에서는 컬렉션 페이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규제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최근에 생태와 관련해 굉장히 중요한 입법 운동으로 에코사이드에 관한 국제규범을 정하는 논의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생명체에 대한 거대하고 심각한 파괴가 있을 때 이를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을 만들고 있습니다. 얼마나 실효성을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프랑스 혁명에서 세계 인권 선언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게 그 당시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보호해 주었겠어요.
ⓒ 지리산이음
여러 가지 새로운 실천과 사례들
데이비드 보이드의 『자연의 권리 : 세계의 운명이 걸린 법률 혁명』
자연의 권리는 자연에 법인격을 갖게 한다는 지구법학의 개념입니다. 미국에서는 환경운동가들이 나무를 주체로 소송을 한 경우도 있고, 국내에서도 설악산 산양이나 도롱뇽이 소송의 주체가 되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적격성 문제로 모두 기각되었지만 말입니다.
자연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단순히 특정한 자연물에 대한 입장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같이 공존하면서 이들이 갖고 있었던 삶의 방식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면 그 권리는 누가 주장하고 누가 책임지느냐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 대리인의 구성 방식이 공상적인 얘기가 아니라 실제 법적 체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공부하고 있는 정의의 문제나 폭력의 문제에서 굉장히 중요한 개념으로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가 있습니다. 회복적 정의는 형사법 체계 내에서 실제 피해를 본 주체들에 대한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등장했고, '한 측면에서는 처벌 위주의 정의 구현이라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가'에서 시작된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과거 사육곰 폭력에 대한 회복 과정이 실제 피해를 당한 야생동물의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거죠. 인간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방식에 적응된 사육곰은 자연으로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곰 생츄어리에서 지낼 수 있도록 돌봅니다. 쓸모도 없고 야생으로 돌려보낼 것도 아닌데 그렇게 돈을 많이 들여 돌보냐는 입장도 있겠지만 인간이 지금까지 자연에게 저질렀던 수많은 폭력을, 야생에 있어야 할 동물이 인간의 목적을 위해 감금 상태에 있었던 것을 관계를 전환해 새로운 회복적 정의를 구현하는 실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 차원의 의사결정을 보면 정말 우울하지만 곳곳에서 다른 감수성과 문제의식으로 동물과 인간이 공존해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이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새로운 실천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수는 적지만 인구의 5%가 언젠가는 15%가 될 것이고 그 15%는 세상을 바꿀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실천 방식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발제 | 주윤정
기록 및 정리 | 이경원
사진 | 하무
올해 지리산포럼에서는 막다른 길에 선 위기의 시대를 넘어 전환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코로나19와 기후위기라는 전지구적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 위기를 넘어 다음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전환은 무엇일까요? 인류의 생존방식, 우리 사회의 운영 규범과 원칙, 개인의 삶까지. 모든 분야에서 전환을 요구받고 있는 시대에 필요한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지리산포럼2021 더 알아보기 [바로가기]
11/20 관계X전환 #2
사회의 구성원은 누구인가 : 관계의 전환과 다종간정의 생태평화 - 주윤정(서울대 인권센터)
본 프로그램에서는 기후위기와 생태위기, 6번째 멸종의 위기의 시대에 사회의 새로운 관계의 전환, 가능성, 논리, 실천, 행위자들에 대해 살펴보고, 새로운 실천 전략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최근 '기후우울(climate grief)'과 같이 ‘생태우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생태를 연구하는 학자들 역시 사라져 가는 종을 연구하는 우울한 상황입니다. 여러분께 먼저 문학작품 한 편을 소개하고, 어떤 법과 제도가 새롭게 만들어지는지,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무엇을 실천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를 해 보면 좋겠습니다.
ⓒ 지리산이음
인간중심적 사고를 벗어나 다른 대상, 다른 존재들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죽은 이들의 뼈에서 쟁기를 끌어라』는 우리가 인간 사회 안에서 인간중심적인 방식을 넘어서서 다른 대상, 다른 존재들과 어떻게 관계 맺으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소설입니다.
폴란드는 숲이 굉장히 많은 나라입니다. 수많은 아름다운 사슴들이 마을에서 사냥으로 무참히 죽음을 당하는 것에 분노를 느끼는, 아주 특별한 감수성을 가진 할머니 두세이코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두세이코는 이런 말을 합니다.
‘동물 살해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죠. 처벌이 없으니까 아무도 사건에 대해서 알지 못해요.’처벌이 없다는 건 사슴을 죽이는 것이 정당한 행위가 아니라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올바르지 않은 행위라고 규정을 하지 못하는 것이죠. 사건도 되지도 않고 사건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니까 아예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무자비한 범죄가 지극히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행위로 여겨지고 있고 아무도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세상인 거죠.
인간의 회합과 욕망에 의해서 많은 동물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고, 인간은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폭력과 살해를 저지르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한 규범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걸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생태적인 차원, 기후위기 문제뿐만 아니라 멸종에 관한 중요한 문헌과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사회과학과 철학 연구에서도 생태적 문제의식을 갖고 새로운 이론적인 틀을 가진 논의들이 많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2017년 칙서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는 생태적인 철학을 담은 가장 혁신적인 문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생물종들을 그저 활용할 수 있는 잠재적 자원으로만 여겨서 그 고유한 가치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말은 기독교 신앙에서 인간과 동물에 대한 유대를 설정하는 방식 자체를 새롭게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면서 갖는 고유한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죠.
기후위기 시대는 새로운 기술과 기법으로 환경을 적응해나가는 기업들에게는 기회 확장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적응조차 못하고 사라져 가는 동식물들이 엄청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할 것 같습니다. 양서류, 파충류, 바다에 있는 동물들은 파악이 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척추동물을 기준으로 생물 다양성을 얘기를 하는데 사회학자로서 깊은 우울감에 빠집니다. 우리가 근대적 시민권과 산업자본주의를 통해서 번영하는 것과 동식물이 사라지는 사이클을 시각화해서 볼 때, 그 기울기가 거의 같이 가고 있다는 것은 참 고민스러운 지점이죠.
탄소 배출에서도 육식과 가축과 관련된 문제가 많은데 학자들마다 지구 상에서 야생동물이 차지하는 비율이 1%다, 3%다, 4%다 얘기를 하지만, 사실은 인간과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동물들이 전 지구를 뒤덮고 있지 다른 동물들은 정말 무참히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해방은 엄청난 기회였습니다. 교육 받지 못했던 사람들, 투표권이 없고 인간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받고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거기에 수많은 다른 생물들이 대가를 치렀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사회가 불안정하고 여러 나라들의 불행한 상황들을 보고 있으면 우울증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될 것 같고 약간의 죄의식을 갖게 되잖아요. 내가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이 사람들의 고통을 소비하는 것에 대해서.
그런데 이기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저는 내가 인간으로서 태어나서 생각하고 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고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을 더 열심히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그리고 다른 생명체에게 덜 미안한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너무 우울에 빠지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 지리산이음
어떤 법과 제도가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가
최근에는 동물권과 관련해 국제적 법적 규범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민법에서도 동물은 소유물이 아니라 제3의 지위를 갖는다는 내용이 개정안에 포함되었습니다.
아마 제노사이드라는 개념을 들어보셨을 거예요. 과거에는 인간과 인간의, 개인과 개인들 간의 살인에 대해 명확한 인과관계가 입증되는 사람들만 처벌이 대상이 됐었는데 제노사이드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정치적으로 동원돼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들에 대해서 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생겼습니다. 제노사이드라는 개념이 없었을 때는 이런 것들을 전체적인 책임이나 범죄로 규정할 수 없었는데 법학자 라카엘 렘킨이 홀로코스라는 문제를 기존의 법적 체계 내에서는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하기 위해 수많은 인종 간의 학살들을 개념화하고 국제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규범화 한 거죠.
예를 들면 대규모 어획으로 인한 해양생물체들의 소멸 문제에 대해서 국가 단위로 처벌하기가 너무 어렵죠. 국가 주도의 지자체와 결합한 개발의 주체가 국가라는 것도 문제가 있는데, 남미와 같은 곳에서는 자연을 개발하는 주체들이 대부분 다국적 기업이고 정부에서는 컬렉션 페이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규제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최근에 생태와 관련해 굉장히 중요한 입법 운동으로 에코사이드에 관한 국제규범을 정하는 논의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생명체에 대한 거대하고 심각한 파괴가 있을 때 이를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을 만들고 있습니다. 얼마나 실효성을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프랑스 혁명에서 세계 인권 선언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게 그 당시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보호해 주었겠어요.
ⓒ 지리산이음
여러 가지 새로운 실천과 사례들
데이비드 보이드의 『자연의 권리 : 세계의 운명이 걸린 법률 혁명』
자연의 권리는 자연에 법인격을 갖게 한다는 지구법학의 개념입니다. 미국에서는 환경운동가들이 나무를 주체로 소송을 한 경우도 있고, 국내에서도 설악산 산양이나 도롱뇽이 소송의 주체가 되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적격성 문제로 모두 기각되었지만 말입니다.
자연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단순히 특정한 자연물에 대한 입장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같이 공존하면서 이들이 갖고 있었던 삶의 방식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면 그 권리는 누가 주장하고 누가 책임지느냐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 대리인의 구성 방식이 공상적인 얘기가 아니라 실제 법적 체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공부하고 있는 정의의 문제나 폭력의 문제에서 굉장히 중요한 개념으로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가 있습니다. 회복적 정의는 형사법 체계 내에서 실제 피해를 본 주체들에 대한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등장했고, '한 측면에서는 처벌 위주의 정의 구현이라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가'에서 시작된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과거 사육곰 폭력에 대한 회복 과정이 실제 피해를 당한 야생동물의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거죠. 인간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방식에 적응된 사육곰은 자연으로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곰 생츄어리에서 지낼 수 있도록 돌봅니다. 쓸모도 없고 야생으로 돌려보낼 것도 아닌데 그렇게 돈을 많이 들여 돌보냐는 입장도 있겠지만 인간이 지금까지 자연에게 저질렀던 수많은 폭력을, 야생에 있어야 할 동물이 인간의 목적을 위해 감금 상태에 있었던 것을 관계를 전환해 새로운 회복적 정의를 구현하는 실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 차원의 의사결정을 보면 정말 우울하지만 곳곳에서 다른 감수성과 문제의식으로 동물과 인간이 공존해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이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새로운 실천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수는 적지만 인구의 5%가 언젠가는 15%가 될 것이고 그 15%는 세상을 바꿀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실천 방식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발제 | 주윤정
기록 및 정리 | 이경원
사진 | 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