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한루원에서 배 타고 썰매 타고 놀던 진짜배기 남원 사람 강경식, 남원정신을 고뇌하는 역사활동가가 되다. 남원 정신연구회 강경식 부회장 - 강경식 부회장이 내게 남원향토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강주수의 춘향영정을 보러 가자고 전화한 건 지난 8월 중순 쯤이었다. 남원시에서 남원정신연구회(회장 한병옥)의 건의를 받아들여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춘향영정을 내리고 최초의 영정인 강주수가 그린 영정으로 바꾸겠다고 최종 결정을 내린 뒤였다. 1931년 기생학교인 남원 권번의 최봉선이라는 기생이 전국의 기생들과 유지들에게 성금을 모아 진주에 살던 강주수 화백에게 춘향영정을 그리게 했다. 그 영정을 춘향사당에 봉안한 뒤 제사를 지낸 게 춘향제의 시작이다. 그런데 1939년 갑자기 친일화가 김은호의 작품으로 바뀌었고 그 뒤 여러 차례 수난을 겪은 뒤 강주수의 영정은 박물관 수장고로 김은호의 작품은 춘향사당에 지금까지 있었다. 
사진 : 친일화가 김은호의 춘향영정 (좌), 강주수의 1931년 최초의 춘향영정 (우) 김양오 : 춘향영정 문제는 언제부터 시작된 건가요? 강경식 : 2005년에 춘향영정 문제를 처음 꺼냈죠. 한병옥 선생님이 처음 주장하셨는데 그 때는 올해보다 시민단체, 종교단체들이 더 열심히 했고 결속력도 지금보다 더 좋았습니다. 하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해서 지금까지 친일화가의 영정이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김양오 : 종교단체까지 나서고 시민단체들의 결속력이 올 해보다 셌는데도 성공하지 못했다니 이해가 안 가네요. 강경식 : 김은호가 친일화가지만 작품은 모나리자 급이고 춘향이라는 이미지가 세상에 이미 그 영정으로 많이 알려져서 혼란이 온다는 의견이 너무 컸습니다. 지금도 그런 말을 하는 세력들이 있었는데 이번에 쉽게 바뀐 것은 문재인 정부의 친일청산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둬도 내년이면 청산 대상에 올라 철거될 판이었거든요. 김양오 : 최초의 영정을 그린 강주수 화백의 그림과 최봉선이라는 기생에 대해 새로 밝혀낸 사실이 있나요? 강경식 : 이번에 강주수 화백의 그림을 처음 보고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2005년 그 때는 아무도 강주수 그림을 보지 못한 상태였고 그동안 알려진 대로 형편 없는 그림인 줄 알았습니다. 이번에 수장고에 있는 것을 보기까지 아무도 이렇게 좋은 영정인 줄을 몰랐던 거에요. 이 그림을 보기 전까지는 저도 친일화가 영정을 내리고 시민들의 의견을 모아서 새로운 영정을 그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강주수의 영정을 보고는 마음이 바뀌었어요. 1919년 만세 불렀던 의기들의 모습을 담아낸 것처럼 순박하고 당차 보였죠. 김은호 그림은 곱고 화려하지만 강주수는 수수하고 평범한 당시 젊은 여인의 일상복 차림입니다. 기생 최봉선에 대해 그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며칠 동안 다 찾아보니 1931년은 서른 한 살이었고 남원에 왔을 때는 24살이었습니다. 부산에서 온 기생이더라고요. 기생들과 지역 유지들 사이에서도 정치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진주, 평양, 부산 그 외 전국 곳곳의 의기들을 찾아다니면서 성금을 모았습니다. 그 덕분에 1회 춘향제 때는 전국에서 기생들이 왔죠. 전국에서 뛰어난 기생들이 모여 제사 지내고 소리하고 가야금을 뜯으니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모였겠어요? 점점 사람이 많이 모이니 3회까지 지켜보던 일제가 4회 때부터 탄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판소리를 부르면 군가를 부르게 하고 신사참배하게 했죠. 당시 남원의 큰 신사는 광한루에서 요천 바로 건너 금암봉에 있었죠. 그렇게 춘향제를 탄압하던 일제가 친일파 김은호가 그린 춘향영정을 봉안할 때부터는 탄압을 하지 않습니다. 김은호의 춘향영정이 행진할 때 기생들 100여명이 줄을 잡고 따라가게 했고 영정을 사당에 올리는 입혼식을 성대하게 했지요. 판소리 춘향가는 1882년 일본 아사히 신문에 연재되고 1889년에는 프랑스에 유학간 조선 청년이 프랑스어로 소개하면서 일본과 서방 여러 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조선의 대표 이야기, 소설이 된 것이다. 그 뒤 일본에서는 춘향전이 연극 오페라 만화 같은 다양한 문화 상품으로 만들어졌는데 일본에서 대성공을 거둔 ‘하루카(춘향)’가 경성에서도 크게 히트를 치고 전국 순회공연을 한다. 군산에서도 공연을 했고 그 때 포스터가 군산에 여전히 남아있다. 김양오 : 1931년 봉안된 춘향영정이 1939년에 갑자기 친일화가의 작품으로 바뀐 이유가 뭘까요? 강경식 : 신협극단이 올린 ‘하루카(춘향)’가 대성공을 거두자 당시 남원 식산은행장 하야시 히게루(임번장)가 호남은행장이었던 현준호와 함께 김은호에게 ‘하루카’를 그리게 한 겁니다. 현준호는 조선총독부에서 최고 지위까지 올라갔던 사람입니다. 그 때 영정만 바꾼 게 아니고 사당 정문 이름인 ‘춘향열부사’를 ‘단심문’으로 바꾸고 대문에 일장기를 그려놓고 그 안에 한자로 ‘붉은 단’자를 써놓았습니다. 또 사당 이름이 ‘춘향각’이었는데 ‘열녀춘향사’로 바뀝니다. 그리고 ‘열녀춘향사’ 현판 밑에 자라, 토끼상도 그 때 만들어 넣었습니다. 
사진 : 향토사학자 한병옥 선생과 춘향영정 문제를 의논하는 강경식님 기나긴 장마와 폭우, 그리고 심각한 수해. 올해처럼 남원에 고통스런 여름은 없었다. 그렇게 혹독하고 길었던 여름 내내 한 마음으로 춘향 영정 철거에 몸과 마음을 바쳤던 강경식 부회장. 과연 그 분은 어떤 사람일까 몹시 궁금했다. 작년 3.1운동 100주년 기념 사업 ‘만인만북문화제’집행위원으로 함께 활동했지만 정작 이 분의 삶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양오 : 남원에서 태어나신 토박이 남원 분이시라고 알고 있는데 맞으시죠? 강경식 : 네, 저는 남원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군대 생활 5년 빼고 완전히 남원에만 있었습니다. 작년에 환갑이 지났으니 60년 가까이 남원에서 산 거죠. 예전에는 시내에 초가집이 많았는데 지금은 하나도 없어요. 특히 광한루 주변이 많이 변했죠. 광한루 앞이 공설시장이었는데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시장에 큰 불이 났어요. 벌써 50년 쯤 전이네요. 불이 나고 얼마 뒤 시장이 지금 공설시장으로 옮겨가고,그 자리에 잔디밭을 만들고 담장을 쳐서 지금처럼 만들어 간 거에요. 예전에는 광한루 누각 주위에 철책이 있어서 철책을 넘어서 놀러 다녔어요. 제가 보절면에 있는 보절 초등학교를 2학년 때까지 다니고 남원으로 이사왔는데 2학년 땐가 미술 대회 나왔다가 광한루 연못에서 배를 탔던 기억이 있어요. 그 때도 연못에 잉어가 많았어요. 보절은 산골이라 바다나 큰 강, 호수같은 걸 구경도 못 해 본 때라 어찌나 신기했는지. 연못가의 흔들리는 버드나무도 생각나고 오작교 아래로 왔다갔다 하는데 참 행복했어요. 지금은 못 올라가게 해 놓은 광한루 누각 위에서 뛰어 놀기도 했지요. 또 겨울에는 연못에 얼음이 얼어서 썰매를 탔죠. 어쩌다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게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썰매 타다 얼음이 깨져서 물에 빠지는 아이들도 있었어요. 춘향제 때 축제하기 전부터 서커스 곡마단이 넓은 터에 포장을 쳐 놓고 서커스를 했어요. 우리 집이 광한루 근처에 있어서 시골에서 친척들이 구경 와서는 우리 집에서 다 모여 잤지요. 한방에 여러 사람이 모로 누워 다들 칼잠을 잤어요. 그 때는 여관이고 여인숙이고 숙박시설이 많지도 않았지만 사람이 어찌나 많이 오던지 집집마다 다 그랬어요. 춘향제 때 하루 벌어 1년 열두 달 먹고 산다고 할 정도였죠. * 풍물계의 전설 양순용 선생님을 따라다니다 남원의 투사가 되다 김양오 : 그럼 어떤 계기로 이렇게 사회운동을 하게 되셨나요? 강경식 : 고등학교 졸업하고 하사관 지원해서 군대에 5년 있다가 나와서 이것저것 하다가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땄어요. 남원의 초창기 부동산 중개인이었죠. 부동산한 지 벌써 30년이 넘었네요. 순창 사거리에 개업을 했는데 부동산 윗층에 풍물패가 들어와 있었어요. 당시 유명한 양순용 선생님이 오셔서 강습도 하고 그랬죠. 당시 제 고향 보절면 호복동의 삼동굿이 대통령상을 받아서 보절 사람들이 임실 좌도굿의 전설적인 상쇠 양순용 선생님을 모셔 온 거에요. 부동산 사무실 윗층에 풍물패가 있으니 자연스럽게 같이 어울렸죠. 제가 가장 오래 배웠는데 기량이 안 늘어서 거의 심부름만 했어요. 음료수, 물, 술 사다 나르고 운전해 주고 잡일을 다 맡아했죠. 양순용 선생님이 저를 많이 가르치려고 무척 애를 쓰셨는데 워낙 못하니까 결국 심부름꾼만 한 거에요. 양순용! 강경식님의 입에서 양순용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나는 깜짝 놀라며 머릿 속 필름이 30년 전으로 급격히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대학에서 풍물 동아리를 했던 내게 그 이름은 가히 전설이었다. 인천에 있는 대학이었지만 우리 풍물 동아리도 양순용 선생님께 배우려고 해마다 임실로 전수를 갔었다. 하지만 나는 엄한 아버지 눈치에 한번도 전수를 못 가고 우석대학교에서 딱 한번 그분의 굿을 먼발치서 본 것이 다였고 늘 전설로 전해 들었던 이름이다. 강경식 : 그 때 전국에서 대학생들이 풍물을 배우러 왔어요. 임실이고 보절이고 얼마나 많이 오는지 말도 말아요. 그 때도 내가 잡일을 다 했죠. 양순용 선생님 기량은 정말 출충했어요. 지금도 풍물 잘 치는 사람이 많은데 아무리 쳐도 양순용 선생님같은 그런 소리가 안 나오는 것 같아요. 양순용 선생님이 치면 저절로 어깨가 움직여지고 그 소리가 좋아서 미쳐서 따라가고 그랬죠. 그러니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도 무조건 따랐죠. 늘 ‘우리 것은 푸짐한 것이야’ 그러시면서 베푸는 삶을 사셨어요. 굿도 잠깐 하는 것이 아니라 2박 3일 건립굿을 쳤고 맘에 들 때까지 치셨죠. 사람들이 다 어울려질 때까지 치셨으니까요. 늘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사신 푸근한 분이셨어요. 80년대 후반, 도시화되면서 사라졌던 풍물이 다시 살아나면서 붐을 일으켰던 시기다. 우리 가락 살리고, 우리 말과 글 살리고, 우리 옷 살리고 그런 때다. 우리 가락을 살리는 선두에 양순용 선생님이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강경식님이 있었고. 전라좌도굿을 배우러 전국에서 몰렸던 대학생들은 그 분의 굿을 배우는 것뿐 아니라 나누는 삶을 배우고 서로 연대할 수 있었던 토대를 마련했다. 농악이라는 말은 일제가 우리 가락을 농민들의 음악으로 한정시키면서 만든 말이라고 ‘풍물’이라는 말로 바꿔 쓰기 시작한 것도 그 때다. 강경식 : 그 때 풍물패들이 집회 현장만 있으면 나가서 풍물을 쳐줬어요. 그 때 맨 처음 나갔던 곳이 전교조 싸움 현장이었어요. 89년인가 전교조가 처음 생기면서 정말 많이 탄압을 받았지요. 그 때 우리 풍물패가 풍물을 쳐 주면서 힘을 보태줬지요. 나도 북을 같이 쳐주고 필요한 물건도 갖대 대고 운전도 해 주고 그랬죠. 지금은 기량 중심으로 보는데 그 때는 잘 치던 못 치던 사람들이 풍물만 쳐 주면 다 좋아했어요. 춘향제 때도 우리가 풍물을 치고 다니면 다들 좋아했어요. 다 잊혔던 것을 젊은이들이 들고 나오니 얼마나 좋겠어요. 춘향제 행사에 정식으로 초청 받은 것이 아니라 거리에서 그냥 쳤어요. 풍물 치면서 사람들이랑 같이 어깨춤도 추고 막걸리도 같이 마시고 그랬어요. 정말 흥겨웠지요. 80년대 후반에 춘향제 기간에 포장 쳐 놓고 막거리랑 파전 팔면서 기금 마련을 했는데 단체에서 술 팔고 기금 모은 것이 우리가 처음이었을 거에요. * 김양오 : 가장 기억 남는 싸움의 현장은 어떤 곳이었나요? 강경식 : 2008년인가? 수자원공사 사장하다가 내려와 시장이 된 최중근 시장이 상수도를 수자원공사에 위탁해야 한다고 했을 때 시민단체에서 반대했어요. 그때도 우리 풍물패가 함께 했지요. 공사에서 관리하면 품질도 좋고 가격도 싸진다고 했는데 외국 사례를 비교해 보니 안 그런 거에요. 공사에서 물을 관리하면 수익성을 창출할 수밖에 없어서 값이 비싸진다는 결론을 내고 싸우기 시작한 거죠. 특히 물은 공공재니까 지자체나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그 때 남원 시민 사회가 가장 단결이 잘 된 것 같아요. 전교조, 종교단체, 특히 공무원 노조에서 가장 앞장 서서 싸웠어요. 시 사업인데 공무원 노조에서 반대한 거죠. 2년 가까이 1인 릴레이 시위하고 밤에 촛불집회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결국 막아냈는데 나중에 롯데마트 입점 반대 투쟁 때는 실패해서 무척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때 제가 집행위원장이었고 시민사회단체가 많이 모였는데도 막아내지 못했어요. 
사진 : 2007년 상수도 민간위탁 반대 기자회견 현장 남원에는 특히 역사 관련 시민단체가 많이 있다. 강경식님은 그 중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와 김주열열사 기념사업회에 깊이 관여해 왔다. 동학에는 2004년 기념사업회 창립할 때부터 관여해 왔고 김주열열사 사업회에서는 얼마 전까지 회장을 맡았고 지금은 지난 7월 창립한 남원정신연구회 부회장이다. 김양오 : '남원정신'이란 무엇입니까? 강경식 :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에서 나라를 지키다 모두 함께 순절하신 만인의사의 정신, 수운 최제우와 김개남의 동학 정신, 불의에 항거한 춘향정신, 임진년 정유년 의병과 항일 의병 정신, 그리고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선 열사들의 정신이 모두 합쳐진 정신입니다. 그 중에 저는 동학 정신을 좀 더 비중있게 생각합니다. 특히 남원 동학과 전라 좌도 농민군의 대장 김개남 장군에 대한 연구가 부족해서 남원 동학이 제대로 자리매김하고 있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남원에서 농민군 7만명이 모인 동학 남원대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임실 상이암부터 남원 요천변까지 김개남을 따르는 동학군들이 끝없이 이어져 왔다니 7만명이 허튼 소리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남원 사람이다 보니까 남원에서 활동한 김개남 장군에게 끌리는 것도 있지만 사회를 완전히 변혁 시키려고 했던 강력한 정신에 더욱 끌립니다. 전봉준보다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사진 : 남원 동학 정신을 올바로 정립하고자 애쓴 강경식님 김양오 : 남원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역사와 인물이 있는데 이것을 사람들에게 좀 더 잘 알리기 위해서는 뭔가 새로운 방법을 써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는 너무 단체 회원들만의 학습에 집중된 것 같은데요. 강경식 : 춘향제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동학이나 남원성 전투, 김주열이나 이석규 열사 관련 문화 행사가 1년 내내 계속 이어져 나가야 합니다. 춘향제 하나에만 반짝 집중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역사와 인물 관련 다양한 문화 컨텐츠를 만들어서 1년 내내 공연을 펼치면 좋겠습니다. 연극이나 시극 노래 창극 그 무엇이든지 말이지요. 책도 소설이든 동화든 시집이든 다양하게 내고요. 지금처럼 토건과 건물 중심의 지원이 아닌 문화와 사람 중심의 행정 지원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들어오지 않는 공장 유치하려고 애쓰지 말고 굴뚝 없는 성장을 위해서 과감히 투자해야 합니다. * 30년동안 한번도 남원을 떠나지 않은 채 남원역사를 공부하고 발로 뛰며 역사의 현장을 지켰던 사람 
사진 : 남원성 북문의 정확한 자리를 측량해 찾아내고, 남원역의 플랫폼 받침돌들이 모두 성벽의 돌이라는 것을 밝힌 강경식님 100년 전 일제가 남원읍성을 부수고 철길을 깔고 남원역을 세워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남원성의 북문, 그 터를 찾아낸 것도 강경식님과 향토 사학자 한병옥 선생님이다. 한병옥 선생님이 구해 온 도면을 보고 줄자로 재가면서 찾아낸 북문 자리. 실제로 굴삭기가 와서 팠을 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며 고스란히 드러난 성문의 추춧돌들. 이렇게 한 자리에서 우직하니 지켜온 향토사학자와 활동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발굴이었다. 지금 그 자리는 북문과 북벽을 복원하기 위한 발굴작업이 거의 끝났다. 2025년이면 남원성의 북문이 세상에 다시 우뚝 설 예정이다. 강경식님은 말한다. 세계사를 봤을 때 역사와 문화와 뿌리를 잘 지켜나간 나라만이 튼튼한 나라로 존재하고 있다고. 그런 의미에서 북문을 찾은 것이고 동학혁명 정신을 비롯한 남원정신을 살리려고 한다고. 친일화가의 춘향 영정 철거에 만족하지 않고 올곧게 남원정신을 세워 나가려고 애쓰는 강경식님의 진지한 고민. 그것은 혼자만의 고민이어서는 안 된다. 한들거리며 곱게 피어난 코스모스에 묻힌 철길, 그 아래 피맺힌 채 죽어간 우리 선조들의 넋을 남원시민들과 우리 국민들 모두가 영원토록 잊지 말아야 다시는 그런 비참한 역사가 되돌아 오지 않기 때문이다. |
※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의 지원사업을 통해 제작된 콘텐츠입니다.
김양오의 인터뷰 남원의 인물을 만나다
10년이 넘게 남원의 역사를 공부하고 알리는 일을 해온 김양오 활동가가 남원의 시민사회 활동가들을 만납니다. '역사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는 관용구처럼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을 이어오면서 남원의 오늘을 만들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남원의 현재와 미래를 비추어보려 합니다.
광한루원에서 배 타고 썰매 타고 놀던 진짜배기 남원 사람 강경식,
남원정신을 고뇌하는 역사활동가가 되다.
남원 정신연구회 강경식 부회장
-
강경식 부회장이 내게 남원향토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강주수의 춘향영정을 보러 가자고 전화한 건 지난 8월 중순 쯤이었다. 남원시에서 남원정신연구회(회장 한병옥)의 건의를 받아들여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춘향영정을 내리고 최초의 영정인 강주수가 그린 영정으로 바꾸겠다고 최종 결정을 내린 뒤였다.
1931년 기생학교인 남원 권번의 최봉선이라는 기생이 전국의 기생들과 유지들에게 성금을 모아 진주에 살던 강주수 화백에게 춘향영정을 그리게 했다. 그 영정을 춘향사당에 봉안한 뒤 제사를 지낸 게 춘향제의 시작이다. 그런데 1939년 갑자기 친일화가 김은호의 작품으로 바뀌었고 그 뒤 여러 차례 수난을 겪은 뒤 강주수의 영정은 박물관 수장고로 김은호의 작품은 춘향사당에 지금까지 있었다.
사진 : 친일화가 김은호의 춘향영정 (좌), 강주수의 1931년 최초의 춘향영정 (우)
김양오 : 춘향영정 문제는 언제부터 시작된 건가요?
강경식 : 2005년에 춘향영정 문제를 처음 꺼냈죠. 한병옥 선생님이 처음 주장하셨는데 그 때는 올해보다 시민단체, 종교단체들이 더 열심히 했고 결속력도 지금보다 더 좋았습니다. 하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해서 지금까지 친일화가의 영정이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김양오 : 종교단체까지 나서고 시민단체들의 결속력이 올 해보다 셌는데도 성공하지 못했다니 이해가 안 가네요.
강경식 : 김은호가 친일화가지만 작품은 모나리자 급이고 춘향이라는 이미지가 세상에 이미 그 영정으로 많이 알려져서 혼란이 온다는 의견이 너무 컸습니다. 지금도 그런 말을 하는 세력들이 있었는데 이번에 쉽게 바뀐 것은 문재인 정부의 친일청산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둬도 내년이면 청산 대상에 올라 철거될 판이었거든요.
김양오 : 최초의 영정을 그린 강주수 화백의 그림과 최봉선이라는 기생에 대해 새로 밝혀낸 사실이 있나요?
강경식 : 이번에 강주수 화백의 그림을 처음 보고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2005년 그 때는 아무도 강주수 그림을 보지 못한 상태였고 그동안 알려진 대로 형편 없는 그림인 줄 알았습니다. 이번에 수장고에 있는 것을 보기까지 아무도 이렇게 좋은 영정인 줄을 몰랐던 거에요. 이 그림을 보기 전까지는 저도 친일화가 영정을 내리고 시민들의 의견을 모아서 새로운 영정을 그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강주수의 영정을 보고는 마음이 바뀌었어요. 1919년 만세 불렀던 의기들의 모습을 담아낸 것처럼 순박하고 당차 보였죠. 김은호 그림은 곱고 화려하지만 강주수는 수수하고 평범한 당시 젊은 여인의 일상복 차림입니다.
기생 최봉선에 대해 그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며칠 동안 다 찾아보니 1931년은 서른 한 살이었고 남원에 왔을 때는 24살이었습니다. 부산에서 온 기생이더라고요. 기생들과 지역 유지들 사이에서도 정치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진주, 평양, 부산 그 외 전국 곳곳의 의기들을 찾아다니면서 성금을 모았습니다. 그 덕분에 1회 춘향제 때는 전국에서 기생들이 왔죠. 전국에서 뛰어난 기생들이 모여 제사 지내고 소리하고 가야금을 뜯으니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모였겠어요? 점점 사람이 많이 모이니 3회까지 지켜보던 일제가 4회 때부터 탄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판소리를 부르면 군가를 부르게 하고 신사참배하게 했죠. 당시 남원의 큰 신사는 광한루에서 요천 바로 건너 금암봉에 있었죠. 그렇게 춘향제를 탄압하던 일제가 친일파 김은호가 그린 춘향영정을 봉안할 때부터는 탄압을 하지 않습니다. 김은호의 춘향영정이 행진할 때 기생들 100여명이 줄을 잡고 따라가게 했고 영정을 사당에 올리는 입혼식을 성대하게 했지요.
판소리 춘향가는 1882년 일본 아사히 신문에 연재되고 1889년에는 프랑스에 유학간 조선 청년이 프랑스어로 소개하면서 일본과 서방 여러 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조선의 대표 이야기, 소설이 된 것이다. 그 뒤 일본에서는 춘향전이 연극 오페라 만화 같은 다양한 문화 상품으로 만들어졌는데 일본에서 대성공을 거둔 ‘하루카(춘향)’가 경성에서도 크게 히트를 치고 전국 순회공연을 한다. 군산에서도 공연을 했고 그 때 포스터가 군산에 여전히 남아있다.
김양오 : 1931년 봉안된 춘향영정이 1939년에 갑자기 친일화가의 작품으로 바뀐 이유가 뭘까요?
강경식 : 신협극단이 올린 ‘하루카(춘향)’가 대성공을 거두자 당시 남원 식산은행장 하야시 히게루(임번장)가 호남은행장이었던 현준호와 함께 김은호에게 ‘하루카’를 그리게 한 겁니다. 현준호는 조선총독부에서 최고 지위까지 올라갔던 사람입니다.
그 때 영정만 바꾼 게 아니고 사당 정문 이름인 ‘춘향열부사’를 ‘단심문’으로 바꾸고 대문에 일장기를 그려놓고 그 안에 한자로 ‘붉은 단’자를 써놓았습니다. 또 사당 이름이 ‘춘향각’이었는데 ‘열녀춘향사’로 바뀝니다. 그리고 ‘열녀춘향사’ 현판 밑에 자라, 토끼상도 그 때 만들어 넣었습니다.
사진 : 향토사학자 한병옥 선생과 춘향영정 문제를 의논하는 강경식님
기나긴 장마와 폭우, 그리고 심각한 수해. 올해처럼 남원에 고통스런 여름은 없었다. 그렇게 혹독하고 길었던 여름 내내 한 마음으로 춘향 영정 철거에 몸과 마음을 바쳤던 강경식 부회장. 과연 그 분은 어떤 사람일까 몹시 궁금했다. 작년 3.1운동 100주년 기념 사업 ‘만인만북문화제’집행위원으로 함께 활동했지만 정작 이 분의 삶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양오 : 남원에서 태어나신 토박이 남원 분이시라고 알고 있는데 맞으시죠?
강경식 : 네, 저는 남원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군대 생활 5년 빼고 완전히 남원에만 있었습니다. 작년에 환갑이 지났으니 60년 가까이 남원에서 산 거죠.
예전에는 시내에 초가집이 많았는데 지금은 하나도 없어요. 특히 광한루 주변이 많이 변했죠. 광한루 앞이 공설시장이었는데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시장에 큰 불이 났어요. 벌써 50년 쯤 전이네요. 불이 나고 얼마 뒤 시장이 지금 공설시장으로 옮겨가고,그 자리에 잔디밭을 만들고 담장을 쳐서 지금처럼 만들어 간 거에요. 예전에는 광한루 누각 주위에 철책이 있어서 철책을 넘어서 놀러 다녔어요.
제가 보절면에 있는 보절 초등학교를 2학년 때까지 다니고 남원으로 이사왔는데 2학년 땐가 미술 대회 나왔다가 광한루 연못에서 배를 탔던 기억이 있어요. 그 때도 연못에 잉어가 많았어요. 보절은 산골이라 바다나 큰 강, 호수같은 걸 구경도 못 해 본 때라 어찌나 신기했는지. 연못가의 흔들리는 버드나무도 생각나고 오작교 아래로 왔다갔다 하는데 참 행복했어요. 지금은 못 올라가게 해 놓은 광한루 누각 위에서 뛰어 놀기도 했지요. 또 겨울에는 연못에 얼음이 얼어서 썰매를 탔죠. 어쩌다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게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썰매 타다 얼음이 깨져서 물에 빠지는 아이들도 있었어요.
춘향제 때 축제하기 전부터 서커스 곡마단이 넓은 터에 포장을 쳐 놓고 서커스를 했어요. 우리 집이 광한루 근처에 있어서 시골에서 친척들이 구경 와서는 우리 집에서 다 모여 잤지요. 한방에 여러 사람이 모로 누워 다들 칼잠을 잤어요. 그 때는 여관이고 여인숙이고 숙박시설이 많지도 않았지만 사람이 어찌나 많이 오던지 집집마다 다 그랬어요. 춘향제 때 하루 벌어 1년 열두 달 먹고 산다고 할 정도였죠.
*
풍물계의 전설 양순용 선생님을 따라다니다
남원의 투사가 되다
김양오 : 그럼 어떤 계기로 이렇게 사회운동을 하게 되셨나요?
강경식 : 고등학교 졸업하고 하사관 지원해서 군대에 5년 있다가 나와서 이것저것 하다가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땄어요. 남원의 초창기 부동산 중개인이었죠. 부동산한 지 벌써 30년이 넘었네요. 순창 사거리에 개업을 했는데 부동산 윗층에 풍물패가 들어와 있었어요. 당시 유명한 양순용 선생님이 오셔서 강습도 하고 그랬죠. 당시 제 고향 보절면 호복동의 삼동굿이 대통령상을 받아서 보절 사람들이 임실 좌도굿의 전설적인 상쇠 양순용 선생님을 모셔 온 거에요.
부동산 사무실 윗층에 풍물패가 있으니 자연스럽게 같이 어울렸죠. 제가 가장 오래 배웠는데 기량이 안 늘어서 거의 심부름만 했어요. 음료수, 물, 술 사다 나르고 운전해 주고 잡일을 다 맡아했죠. 양순용 선생님이 저를 많이 가르치려고 무척 애를 쓰셨는데 워낙 못하니까 결국 심부름꾼만 한 거에요.
양순용! 강경식님의 입에서 양순용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나는 깜짝 놀라며 머릿 속 필름이 30년 전으로 급격히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대학에서 풍물 동아리를 했던 내게 그 이름은 가히 전설이었다. 인천에 있는 대학이었지만 우리 풍물 동아리도 양순용 선생님께 배우려고 해마다 임실로 전수를 갔었다. 하지만 나는 엄한 아버지 눈치에 한번도 전수를 못 가고 우석대학교에서 딱 한번 그분의 굿을 먼발치서 본 것이 다였고 늘 전설로 전해 들었던 이름이다.
강경식 : 그 때 전국에서 대학생들이 풍물을 배우러 왔어요. 임실이고 보절이고 얼마나 많이 오는지 말도 말아요. 그 때도 내가 잡일을 다 했죠. 양순용 선생님 기량은 정말 출충했어요. 지금도 풍물 잘 치는 사람이 많은데 아무리 쳐도 양순용 선생님같은 그런 소리가 안 나오는 것 같아요. 양순용 선생님이 치면 저절로 어깨가 움직여지고 그 소리가 좋아서 미쳐서 따라가고 그랬죠. 그러니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도 무조건 따랐죠.
늘 ‘우리 것은 푸짐한 것이야’ 그러시면서 베푸는 삶을 사셨어요. 굿도 잠깐 하는 것이 아니라 2박 3일 건립굿을 쳤고 맘에 들 때까지 치셨죠. 사람들이 다 어울려질 때까지 치셨으니까요. 늘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사신 푸근한 분이셨어요.
80년대 후반, 도시화되면서 사라졌던 풍물이 다시 살아나면서 붐을 일으켰던 시기다. 우리 가락 살리고, 우리 말과 글 살리고, 우리 옷 살리고 그런 때다. 우리 가락을 살리는 선두에 양순용 선생님이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강경식님이 있었고.
전라좌도굿을 배우러 전국에서 몰렸던 대학생들은 그 분의 굿을 배우는 것뿐 아니라 나누는 삶을 배우고 서로 연대할 수 있었던 토대를 마련했다. 농악이라는 말은 일제가 우리 가락을 농민들의 음악으로 한정시키면서 만든 말이라고 ‘풍물’이라는 말로 바꿔 쓰기 시작한 것도 그 때다.
강경식 : 그 때 풍물패들이 집회 현장만 있으면 나가서 풍물을 쳐줬어요. 그 때 맨 처음 나갔던 곳이 전교조 싸움 현장이었어요. 89년인가 전교조가 처음 생기면서 정말 많이 탄압을 받았지요. 그 때 우리 풍물패가 풍물을 쳐 주면서 힘을 보태줬지요. 나도 북을 같이 쳐주고 필요한 물건도 갖대 대고 운전도 해 주고 그랬죠. 지금은 기량 중심으로 보는데 그 때는 잘 치던 못 치던 사람들이 풍물만 쳐 주면 다 좋아했어요.
춘향제 때도 우리가 풍물을 치고 다니면 다들 좋아했어요. 다 잊혔던 것을 젊은이들이 들고 나오니 얼마나 좋겠어요. 춘향제 행사에 정식으로 초청 받은 것이 아니라 거리에서 그냥 쳤어요. 풍물 치면서 사람들이랑 같이 어깨춤도 추고 막걸리도 같이 마시고 그랬어요. 정말 흥겨웠지요.
80년대 후반에 춘향제 기간에 포장 쳐 놓고 막거리랑 파전 팔면서 기금 마련을 했는데 단체에서 술 팔고 기금 모은 것이 우리가 처음이었을 거에요.
*
김양오 : 가장 기억 남는 싸움의 현장은 어떤 곳이었나요?
강경식 : 2008년인가? 수자원공사 사장하다가 내려와 시장이 된 최중근 시장이 상수도를 수자원공사에 위탁해야 한다고 했을 때 시민단체에서 반대했어요. 그때도 우리 풍물패가 함께 했지요. 공사에서 관리하면 품질도 좋고 가격도 싸진다고 했는데 외국 사례를 비교해 보니 안 그런 거에요. 공사에서 물을 관리하면 수익성을 창출할 수밖에 없어서 값이 비싸진다는 결론을 내고 싸우기 시작한 거죠. 특히 물은 공공재니까 지자체나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그 때 남원 시민 사회가 가장 단결이 잘 된 것 같아요. 전교조, 종교단체, 특히 공무원 노조에서 가장 앞장 서서 싸웠어요. 시 사업인데 공무원 노조에서 반대한 거죠. 2년 가까이 1인 릴레이 시위하고 밤에 촛불집회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결국 막아냈는데 나중에 롯데마트 입점 반대 투쟁 때는 실패해서 무척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때 제가 집행위원장이었고 시민사회단체가 많이 모였는데도 막아내지 못했어요.
사진 : 2007년 상수도 민간위탁 반대 기자회견 현장
남원에는 특히 역사 관련 시민단체가 많이 있다. 강경식님은 그 중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와 김주열열사 기념사업회에 깊이 관여해 왔다. 동학에는 2004년 기념사업회 창립할 때부터 관여해 왔고 김주열열사 사업회에서는 얼마 전까지 회장을 맡았고 지금은 지난 7월 창립한 남원정신연구회 부회장이다.
김양오 : '남원정신'이란 무엇입니까?
강경식 :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에서 나라를 지키다 모두 함께 순절하신 만인의사의 정신, 수운 최제우와 김개남의 동학 정신, 불의에 항거한 춘향정신, 임진년 정유년 의병과 항일 의병 정신, 그리고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선 열사들의 정신이 모두 합쳐진 정신입니다. 그 중에 저는 동학 정신을 좀 더 비중있게 생각합니다.
특히 남원 동학과 전라 좌도 농민군의 대장 김개남 장군에 대한 연구가 부족해서 남원 동학이 제대로 자리매김하고 있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남원에서 농민군 7만명이 모인 동학 남원대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임실 상이암부터 남원 요천변까지 김개남을 따르는 동학군들이 끝없이 이어져 왔다니 7만명이 허튼 소리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남원 사람이다 보니까 남원에서 활동한 김개남 장군에게 끌리는 것도 있지만 사회를 완전히 변혁 시키려고 했던 강력한 정신에 더욱 끌립니다. 전봉준보다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사진 : 남원 동학 정신을 올바로 정립하고자 애쓴 강경식님
김양오 : 남원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역사와 인물이 있는데 이것을 사람들에게 좀 더 잘 알리기 위해서는 뭔가 새로운 방법을 써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는 너무 단체 회원들만의 학습에 집중된 것 같은데요.
강경식 : 춘향제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동학이나 남원성 전투, 김주열이나 이석규 열사 관련 문화 행사가 1년 내내 계속 이어져 나가야 합니다. 춘향제 하나에만 반짝 집중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역사와 인물 관련 다양한 문화 컨텐츠를 만들어서 1년 내내 공연을 펼치면 좋겠습니다. 연극이나 시극 노래 창극 그 무엇이든지 말이지요. 책도 소설이든 동화든 시집이든 다양하게 내고요. 지금처럼 토건과 건물 중심의 지원이 아닌 문화와 사람 중심의 행정 지원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들어오지 않는 공장 유치하려고 애쓰지 말고 굴뚝 없는 성장을 위해서 과감히 투자해야 합니다.
*
30년동안 한번도 남원을 떠나지 않은 채
남원역사를 공부하고 발로 뛰며 역사의 현장을 지켰던 사람
사진 : 남원성 북문의 정확한 자리를 측량해 찾아내고,
남원역의 플랫폼 받침돌들이 모두 성벽의 돌이라는 것을 밝힌 강경식님
100년 전 일제가 남원읍성을 부수고 철길을 깔고 남원역을 세워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남원성의 북문, 그 터를 찾아낸 것도 강경식님과 향토 사학자 한병옥 선생님이다. 한병옥 선생님이 구해 온 도면을 보고 줄자로 재가면서 찾아낸 북문 자리. 실제로 굴삭기가 와서 팠을 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며 고스란히 드러난 성문의 추춧돌들. 이렇게 한 자리에서 우직하니 지켜온 향토사학자와 활동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발굴이었다. 지금 그 자리는 북문과 북벽을 복원하기 위한 발굴작업이 거의 끝났다. 2025년이면 남원성의 북문이 세상에 다시 우뚝 설 예정이다.
강경식님은 말한다. 세계사를 봤을 때 역사와 문화와 뿌리를 잘 지켜나간 나라만이 튼튼한 나라로 존재하고 있다고. 그런 의미에서 북문을 찾은 것이고 동학혁명 정신을 비롯한 남원정신을 살리려고 한다고.
친일화가의 춘향 영정 철거에 만족하지 않고 올곧게 남원정신을 세워 나가려고 애쓰는 강경식님의 진지한 고민. 그것은 혼자만의 고민이어서는 안 된다. 한들거리며 곱게 피어난 코스모스에 묻힌 철길, 그 아래 피맺힌 채 죽어간 우리 선조들의 넋을 남원시민들과 우리 국민들 모두가 영원토록 잊지 말아야 다시는 그런 비참한 역사가 되돌아 오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