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쌀롱>은 다양한 지역에서 활동하는 손님을 모시고, 친근한 분위기에서 이야기 손님과 참가자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소통하고 교류하는 자리다. 2024년 5월 3일에 열린 올해의 첫 지리산쌀롱은 발제자와 참가자의 격없는 교류를 위해 새롭게 단장한 ‘지리산문화공간 토닥’에서 열렸다.
이야기 손님은 울산생태문화교육협동조합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는 유영순 씨. 울산의 알프스라 불리는 소호마을 이주 후 15년 간 소호야생차, 소호마을 산촌유학, 소호산촌협동조합을 만들고 함께 이끌어나가며 온몸으로 겪어낸 마을공동체와 협동조합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열정 가득했던 노동운동가, 울산의 시골마을로 오다.
20대와 30대 시절, 노동운동의 메카였던 울산에서 열정적인 노동운동가의 삶을 이어왔던 영순 씨는 32살의 나이에 소호마을로 이주했다. 다섯 살, 세살배기 두 아이의 양육을 책임지게 되면서 아이를 낳은 이후에도 지속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노동운동도 멈췄고, 이제 나는 무얼 하나 고민만 많던 시기였다.
“어느 날 아이를 데리고 버스를 타고 가는데 버스 창문에 비친 제 모습이 보였어요. 나의 꿈과 희망은 어디로 가고 지금 보이는 내 모습이 현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쯤에 소호마을에 놀러왔다가 아는 스님을 따라 쑥을 캔 적이 있어요. 쑥을 캐며 여기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딱 2년만 살아보자고 생각한 게 시작이었어요.”
구호를 외치고 데모하는 현장에서 한적한 소호마을로 이주하고 나니 할 일도, 시끄러운 소리도, 싸우자고 달려드는 사람도 없었다. 남는 것은 시간 뿐. 유기농 농사를 지으며 할머니들이 캔 산나물을 장에 날라주기도 하고, 지역에 부족한 문화 인프라를 고민하면서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영순 씨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골의 교육 문제. 30명 남짓 되었던 마을의 초등학교 전교생은 영순 씨의 아이들이 졸업할 무렵엔 8명으로 줄면서 폐교 위기에 놓였다. 폐교 반대 투쟁을 위해 교육청과 소통하던 영순 씨는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엄마를 데려오는 산촌유학
“그때만 하더라도 산촌유학이 한창 각광받기 시작하던 시기였어요. ‘너네는 유럽으로 여행가니? 우리는 산촌으로 유학간다’ 라는 슬로건이 언론에 나오던 시기였는데, 대부분의 산촌유학은 외부 활동가가 산촌에 센터를 만들어서 센터 중심으로 진행됐거든요. 저희는 마을이 중심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역아동센터를 만들어서 방과후수업이나 활동은 센터에서 하고, 돌봄과 양육을 농가에서 책임지는 기획으로 시작했죠.”
소호마을의 산촌유학은 지역 어르신들의 돈벌이와 인근 지역의 대안 교육 수요를 동시에 잡는 기획이었다. 산촌유학이 끝난 아이들의 높은 만족도는 엄마와 가족을 소호마을로 이주시키기에 충분했고, 마을에는 초등학생 자녀를 둔 귀촌자가 많아졌다. 농사를 지으면서 소호야생차 대표를 겸임했던 영순 씨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노년에도 연금처럼 30만 원 정도의 수익을 받는 경제공동체를 꿈꾸며 ‘야생차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때가 협동조합 기본법이 만들어진 직후였어요. 9명이 출자금을 모아서 협동조합을 만드니 농촌에서 농사 못 짓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직접 야생차를 만들고, 산으로 차를 채집하러 다니니 너무 재밌었어요. 실제로 각종 부처에서 우수마을과 우수 마을기업으로 지정도 될만큼 잘 됐고 만족도도 높았어요.”
노력의 끝에는 방황이 기다린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10년 남짓한 시간동안 지역에서 펼칠 수 있는 최대한의 영향력을 펼쳤다고 생각했다. 6천 명이 넘는 기업에서 귀농귀촌교육과 체험을 하기도 하고, 마을에 버스가 줄지어 서 있던 적도 있었다. 한 시골 마을 안에 경제공동체, 체험휴양마을, 산촌유학, 지역아동센터가 모두 생겼고 귀촌인도 많아졌다. 그러나 정작 영순 씨는 스스로 행복하지 않음을 깨달았고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해보기로 했다. 함께 일을 도모했던 세 명의 동료가 각자 자신의 전문적 분야를 구축하면서 영순 씨가 선택한 것은 다름아닌 명상이었다. 평소 실천적 불교에 관심있었던 영순 씨는 1년간 서울로 명상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일을 꾸리면서) 자기 마음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다스릴지에 대해서 많이 배우지 못하고 그 부분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자신의 사고의 힘으로 사유할 수 있는 명상이라는 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마을에서는 이런저런 활동을 만들자고 끌어들였던 사람이 떠난다고 하니 주변 친구들이 다 반대했는데, 그때 저는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말이 없더라고요. 차라리 미움받는 게 마음이 편했어요.”
가까운 사람에게서 찾은 해답
그래서 명상유학을 떠난 1년 간의 시간 동안 성과가 있었을까. 영순 씨는 ‘개쪽’이라 표현했다. 그렇게 부끄러움을 안고 마을로 돌아와 한동안 뒷산만 산책했다.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이제 조직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조직에 구속되니 필요없는 사업을 벌이고 사람이 아니라 일만 보게 되었기 떄문이다. 이 모습을 안타까워하던 동료 활동가들이 함께 공부하자, 지금 뭐 하고 싶냐 물으며 영순 씨와 함께했다.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스승은 곧 동료들이었다. 그렇게 영순 씨의 다짐은 얼마가지 못했다. 다시 해보자며 모든 경험을 밑거름 삼아 만든 조직은 ‘생태문화교육협동조합’. 단순한 모임 형태로는 활동을 체계적으로 이어나가기 어려웠기에 이번에도 영순씨가 선택한 형태는 협동조합이었다. 산촌유학 당시 귀촌했던 동료의 도움을 받아 명상센터와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거점공간도 만들었다. 거점이 생기니 조직의 활력도 되찾았다. 오랜 시행착오와 노하우가 담긴 이 새로운 활동의 주제는 ‘인간관계’였다.
“주변에 힘든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동안 우리가 공동체를 만들려고 한 이유도 사업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로 인해서 네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는데, 사업을 하다 보니 견해가 다른 상대를 미워하게 되고 싸우기도 하더라고요. 우리가 공동체를 외쳤지만 가까운 사람에게 마음속 이야기도 꺼내기 어려운 공동체를 만들었구나 하고 아쉬움이 많이 남았어요. 그래서 이제는 예전처럼은 일하지 말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 활동하다가 지친 사람들부터 도와주자 하며 조합을 시작했어요. 여기에서 쉬고 밥 먹으러 오라고 사람들에게 알렸죠. 그 과정들이 제 자신에게도 치유되고 뇌가 회복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좌충우돌 언니들의 시골살이
가까운 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쉬면서 즐길 수 있는 체험활동을 하나씩 만들다보니 자연스럽게 협동조합의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졌다. 이제부터 지원사업은 받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2022년 ‘시골언니 프로젝트’를 제안받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시골언니 프로젝트는 농림축산식품부가 추진한 <청년여성 농업농촌 탐색교육>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남성, 대규모농업 중심의 지역문화를 벗어나 지역이주를 희망하는 청년 여성들이 시골 언니와 연결되면서 새로운 방식의 지역 생활을 꿈꿔볼 수 있는 사업이었다. 기존에 진행해왔던 지원사업과 결이 다른 것을 느낀 영순 씨와 동료들은 적극적으로 공정여행 프로그램 개발에 착수했다.
“청년들을 만나니까 배움이 생기더라고요. 나는 왜 저런 생각을 못했을까 하고요. 우리가 너무 재미있게 성황리에 시골언니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기존의 공동체들을 둘러보면 어려운 부분이 이제 많이 고여있고, 마을과 네트워크가 되지 않고, 자기들끼리도 재미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기획자들이 재밌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공동체는 물감 팔레트
폐교를 막기 위해 시작한 영순 씨의 투쟁은 수많은 실패를 낳았다. 노동운동의 실패, 단체의 실패, 관계의 실패, 마을공동체 만들기의 실패. 그러나 이러한 실패가 곧 인생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마을과 공동체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내 옆에 있던 이웃, 함께 하는 동료, 마을 선주민과 귀촌 3세대의 행복을 고민했다. 이 마을에서 먹고 자라고 나누고 화합하면 그걸로 된 것 아닌가. 큰 꿈은 버렸다는 영순 씨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가 생각하던 공동체를 이제는 뒤집어봐야 할 것 같아요. 생각이나 가치를 중심에 두지 말고 색깔을 다양하게 둬야 할 필요성이 느껴져요. 다양한 색깔은 그 바운더리를 넓혀주거든요. 또, 마을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자란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우리는 마을공동체를 만들 때 의식적으로 시스템을 구축하고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연스럽게 세워질 것은 세워지고 마을은 어떤 형태로든 자라게 되어있어요. 오래 하다보니 마을도 여러 사람들이 모인 하나의 인격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을 공동체는 이미 스스로 자라고 있어요.”
글 | 승현
사진 | 누리
| 📚 영순 씨의 서가생태활동가, 청년 김우성의 기후숲 / 김우성
"삶의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지만 일상은 나와 가족, 그리고 가까운 동료들과 함께하는 모습이 예쁜, 가까이 사는 친구예요. 다시 돌아간다면 이렇게 살고 싶어서 이 책을 추천합니다." |
🎤 <지리산쌀롱>은 다른 지역에 사는 손님을 산내면으로 초대해 이야기 나누고 교류하는 자리입니다.
2024년의 <지리산쌀롱>은 브라이언임팩트의 임팩트그라운드 지원사업으로 진행합니다.
<지리산쌀롱>은 다양한 지역에서 활동하는 손님을 모시고, 친근한 분위기에서 이야기 손님과 참가자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소통하고 교류하는 자리다. 2024년 5월 3일에 열린 올해의 첫 지리산쌀롱은 발제자와 참가자의 격없는 교류를 위해 새롭게 단장한 ‘지리산문화공간 토닥’에서 열렸다.
이야기 손님은 울산생태문화교육협동조합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는 유영순 씨. 울산의 알프스라 불리는 소호마을 이주 후 15년 간 소호야생차, 소호마을 산촌유학, 소호산촌협동조합을 만들고 함께 이끌어나가며 온몸으로 겪어낸 마을공동체와 협동조합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열정 가득했던 노동운동가, 울산의 시골마을로 오다.
20대와 30대 시절, 노동운동의 메카였던 울산에서 열정적인 노동운동가의 삶을 이어왔던 영순 씨는 32살의 나이에 소호마을로 이주했다. 다섯 살, 세살배기 두 아이의 양육을 책임지게 되면서 아이를 낳은 이후에도 지속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노동운동도 멈췄고, 이제 나는 무얼 하나 고민만 많던 시기였다.
구호를 외치고 데모하는 현장에서 한적한 소호마을로 이주하고 나니 할 일도, 시끄러운 소리도, 싸우자고 달려드는 사람도 없었다. 남는 것은 시간 뿐. 유기농 농사를 지으며 할머니들이 캔 산나물을 장에 날라주기도 하고, 지역에 부족한 문화 인프라를 고민하면서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영순 씨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골의 교육 문제. 30명 남짓 되었던 마을의 초등학교 전교생은 영순 씨의 아이들이 졸업할 무렵엔 8명으로 줄면서 폐교 위기에 놓였다. 폐교 반대 투쟁을 위해 교육청과 소통하던 영순 씨는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엄마를 데려오는 산촌유학
소호마을의 산촌유학은 지역 어르신들의 돈벌이와 인근 지역의 대안 교육 수요를 동시에 잡는 기획이었다. 산촌유학이 끝난 아이들의 높은 만족도는 엄마와 가족을 소호마을로 이주시키기에 충분했고, 마을에는 초등학생 자녀를 둔 귀촌자가 많아졌다. 농사를 지으면서 소호야생차 대표를 겸임했던 영순 씨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노년에도 연금처럼 30만 원 정도의 수익을 받는 경제공동체를 꿈꾸며 ‘야생차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노력의 끝에는 방황이 기다린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10년 남짓한 시간동안 지역에서 펼칠 수 있는 최대한의 영향력을 펼쳤다고 생각했다. 6천 명이 넘는 기업에서 귀농귀촌교육과 체험을 하기도 하고, 마을에 버스가 줄지어 서 있던 적도 있었다. 한 시골 마을 안에 경제공동체, 체험휴양마을, 산촌유학, 지역아동센터가 모두 생겼고 귀촌인도 많아졌다. 그러나 정작 영순 씨는 스스로 행복하지 않음을 깨달았고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해보기로 했다. 함께 일을 도모했던 세 명의 동료가 각자 자신의 전문적 분야를 구축하면서 영순 씨가 선택한 것은 다름아닌 명상이었다. 평소 실천적 불교에 관심있었던 영순 씨는 1년간 서울로 명상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가까운 사람에게서 찾은 해답
그래서 명상유학을 떠난 1년 간의 시간 동안 성과가 있었을까. 영순 씨는 ‘개쪽’이라 표현했다. 그렇게 부끄러움을 안고 마을로 돌아와 한동안 뒷산만 산책했다.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이제 조직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조직에 구속되니 필요없는 사업을 벌이고 사람이 아니라 일만 보게 되었기 떄문이다. 이 모습을 안타까워하던 동료 활동가들이 함께 공부하자, 지금 뭐 하고 싶냐 물으며 영순 씨와 함께했다.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스승은 곧 동료들이었다. 그렇게 영순 씨의 다짐은 얼마가지 못했다. 다시 해보자며 모든 경험을 밑거름 삼아 만든 조직은 ‘생태문화교육협동조합’. 단순한 모임 형태로는 활동을 체계적으로 이어나가기 어려웠기에 이번에도 영순씨가 선택한 형태는 협동조합이었다. 산촌유학 당시 귀촌했던 동료의 도움을 받아 명상센터와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거점공간도 만들었다. 거점이 생기니 조직의 활력도 되찾았다. 오랜 시행착오와 노하우가 담긴 이 새로운 활동의 주제는 ‘인간관계’였다.
좌충우돌 언니들의 시골살이
가까운 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쉬면서 즐길 수 있는 체험활동을 하나씩 만들다보니 자연스럽게 협동조합의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졌다. 이제부터 지원사업은 받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2022년 ‘시골언니 프로젝트’를 제안받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시골언니 프로젝트는 농림축산식품부가 추진한 <청년여성 농업농촌 탐색교육>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남성, 대규모농업 중심의 지역문화를 벗어나 지역이주를 희망하는 청년 여성들이 시골 언니와 연결되면서 새로운 방식의 지역 생활을 꿈꿔볼 수 있는 사업이었다. 기존에 진행해왔던 지원사업과 결이 다른 것을 느낀 영순 씨와 동료들은 적극적으로 공정여행 프로그램 개발에 착수했다.
공동체는 물감 팔레트
폐교를 막기 위해 시작한 영순 씨의 투쟁은 수많은 실패를 낳았다. 노동운동의 실패, 단체의 실패, 관계의 실패, 마을공동체 만들기의 실패. 그러나 이러한 실패가 곧 인생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마을과 공동체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내 옆에 있던 이웃, 함께 하는 동료, 마을 선주민과 귀촌 3세대의 행복을 고민했다. 이 마을에서 먹고 자라고 나누고 화합하면 그걸로 된 것 아닌가. 큰 꿈은 버렸다는 영순 씨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
글 | 승현
사진 | 누리
📚 영순 씨의 서가
생태활동가, 청년 김우성의 기후숲 / 김우성
"삶의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지만 일상은 나와 가족, 그리고 가까운 동료들과 함께하는 모습이 예쁜, 가까이 사는 친구예요.
다시 돌아간다면 이렇게 살고 싶어서 이 책을 추천합니다."
🎤 <지리산쌀롱>은 다른 지역에 사는 손님을 산내면으로 초대해 이야기 나누고 교류하는 자리입니다.
2024년의 <지리산쌀롱>은 브라이언임팩트의 임팩트그라운드 지원사업으로 진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