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소리 보살 이화중선의 판소리 여행’ 작품 기획서 Ⅱ. 이 책을 쓰게 된 계기 Ⅲ. 책의 구성 Ⅳ. 이화중선은 누구인가? Ⅴ. 이화중선 소리에 대한 당시의 평가 Ⅵ. 이화중선이 참여한 ‘조선성악연구회’ Ⅶ. 참고 문헌 Ⅷ. 작품에 등장할 일제강점기 시,공간 배경 조사
Ⅳ. 이화중선은 누구인가? 1) 1899년 음력 9월 16일 목포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는 일찍 죽고 가난한 떠돌이 직업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아주 어려운 어린이시절을 보냈다. 갈빗대 하나가 없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고 키도 작고 얼굴이 이쁘지 않았다. 12세 이전에는 전남 벌교 장좌리에서 몇 년 살았는데 ‘여기도 극단’에서 노래도 해서 사람들이 판소리 신동으로 불렀다. 배다른 형제 이중선, 이화성, 이화봉이 있었고 이중선은 소리꾼으로 이화성은 고수로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이중선과는 창극을 함께 많이 해 이화중선 이중선 자매 명창으로 유명해졌다. 2) 12세 때 아버지가 이화중선과 이중선을 남원 권번에 맡겨 기적에 이름을 올라 기생이 되었다. 권번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판소리를 배웠고 14,15세 즈음에 남원시 수지면 홈실마을에 온 송만갑 명창이 이끄는 극단 협률사의 공연을 보고 소리 귀신이 씌였다. 그 이후 남원시 송동면 태동마을에 사는 장득진과 살면서 소리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남원에서 산 시간은 12세 - 19세이며 이 시기에 소리의 토대를 만들었으며 어릴 적 여기저기 떠돌아서 고향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 없었으니 7년동안 살았던 남원을 고향으로 여길 만하다. 즉, 육체의 고향은 아니지만 이화중선 소리의 고향이라고 볼 수 있다. 3) 장득진을 따라서 19세 때 순창군 적성면으로 이사 갔다. 이화중선이 살던 집을 ‘와우터’라고 한다. 현재 집은 없고 빈터만 남았다. 장득진 일가는 소리도 하고 줄도 타며 땅재주도 놀았던 예능 가족이었다. 이곳에서 5년 가까이 춘향가 전 바탕을 학습하고 판소리를 연마했는데 이화중선이 소리연마한 곳을 ‘매미터’라 한다. 4) 1921년 23세 때 상경했다. 조선권번에 기적 두고 활동했다. 당시 최고 명창인 송만갑, 이동백 명창의 지도를 받았다고 하나 이미 이화중선은 득음을 한 상태였다. 5) 26세인 1924년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장려회 주최 전국 판소리 경연대회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다. 당시 가장 인기있었던 여자 명창 배설향을 능가하는 인기였다. 심청가 중에 왕비가 된 심청이가 아버지를 그리워 하는 대목인 ‘추월만정’을 불러 수천명의 관중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조선물산장려회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나 조선물산장려회가 1년 정도만 왕성한 활동을 하고 유명무실해졌다. 이후 명성이 자자해져 전국에 공연을 다녔다. 6) 1927년부터 이화중선의 이름이 들어간 공연이 많이 기사화되었다. 대동가극단의 대표 소리꾼이 되어 공연할 때마다 돈을 가마니로 긁었다. 하지만 극단 식구들이 너무 많아 이화중선에게 돌아오는 돈은 많지 않았다. 공연 수입의 30%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썼고 어려운 가족을 다 건사했다. 공연비가 없어도 꼭 가야 할 곳은 가서 무료로 공연해 주기도 해서 소리보살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1928년 스승이자 남편인 장득진이 사망한다. 7) 만주 용정에 독립자금을 전달하러 가기도 했다는 구술이 있다. 평양 남원 진주 권번이 독립군 사령부와 연락하는 거점지였다고 한다. (남원향토사학자 김용근) 8) 1928년 도쿄 빅터 레코드 본사에 가서 처음으로 음반을 냈다. 우리나라 명창 중에서 처음으로 음반을 낸 것이다. 6월 빅터 레코드, 11월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음반을 냈다. 이후에도 일본에 다섯 번이나 가서 녹음해 최초 최다 녹음, 최다 판매한 명창이다. 1937년부터는 서울에서도 녹음을 한다. 9) 1931년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 322번지 이재삼의 처로 호적에 오른다. 이화중선과 이재삼은 호적상으로는 부부였으나 실제로는 이화중선은 서울에서 이재삼은 공사현장을 누비며 살았다. 오수의 부자였던 이재삼이 이화중선의 후견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재삼의 재산을 이화중선에게 헌납했다. 이재삼은 1943년 여수의 비행기 공사 현장에서 사망했다. 10) 1933년 김초향, 송만갑 명창이 주도한 조선성악연구회에 창립 회원으로 참여했다. 이 단체는 민족말살정책으로 사라지는 우리 소리와 음악을 지키고자 만든 전국 판소리 명창과 국악인들의 단체였다. 순천의 독립운동가 이영민이 돕고 김종익이 재정 지원을 했다. 11) 1943년 - 일본 나가사키에 두 번째 조선 근로자 위문 순회 공연을 하러 갔다. 가와타니 군수품 공장과 나가사키 니켈 광산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을 위문 공연을 한 뒤 작은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다가 1944년 1월 1일 풍랑으로 바다에 빠져 사망한다. 나가사키현 동피저군 강상촌 적자만에서 오후 7시 사망. 그 바다는 현재 나가사키 오무라만이다. 12) 화장해 오동나무함에 담겨 남편의 고향인 전라도 오수에 와서 묻혔으나(시어머니 이옥이 3월 16일 호적에 사망 신고함) 도로가 확장되면서 무연고 무덤이라 없어져 버렸다. 자손이 없었다. 송만갑, 송흥록, 임방울, 김소희.....수많은 명창들이 자기 고향이나 소리의 뿌리가 되는 곳에 비석이 세워져 있고 기념관이 있고 기리는 행사를 하고 있지만 이화중선은 그 어디에도 기리는 비석 하나 없다. 무덤을 지키지도 못했고 남원에서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도 매우 드물다. (보고서에서 인용)
<아리 아리 아라리요 : 대한의 독립을 노래한 소리꾼 이화중선> 출간 https://bit.ly/44SLaje |
※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의 지원사업을 통해 제작된 콘텐츠입니다.
<소리보살 이화중선의 판소리 여행> 집필을 위한 자료 조사와 현장 취재 보고서
<소리보살 '이화중선'을 찾아서> 결과 보고서
※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의 2022 작은변화 공모지원사업으로 지원한 <소리보살 '이화중선'을 찾아서> 사업을 통해 제작한 콘텐츠입니다.
남원 사람들이 잊고 있는 지역의 소중한 순간을 찾아내 의미를 되새기고 알리는 일들을 해오고 있는 김양오 님은 일본으로 끌려 간 조선 도공들을 다룬 <도자기에 핀 눈물꽃>, 최초의 지역 축제 춘향제를 만든 최봉선을 다룬 <백 년 동안 핀 꽃>,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전통가옥 몽심꿈과 마음이 담긴 집 몽심재>에 이어 일제강점기 시대, 이화중선이라는 남원 권번 출신의 여성 소리꾼에게 주목합니다.
판소리로 중생을 구제한다고 ‘소리보살’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화중선이 잊혀지기 전에 흩어져 있는 기억과 자료들을 한데 모아보고자 합니다.
Ⅳ. 이화중선은 누구인가?
1) 1899년 음력 9월 16일 목포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는 일찍 죽고 가난한 떠돌이 직업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아주 어려운 어린이시절을 보냈다. 갈빗대 하나가 없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고 키도 작고 얼굴이 이쁘지 않았다. 12세 이전에는 전남 벌교 장좌리에서 몇 년 살았는데 ‘여기도 극단’에서 노래도 해서 사람들이 판소리 신동으로 불렀다. 배다른 형제 이중선, 이화성, 이화봉이 있었고 이중선은 소리꾼으로 이화성은 고수로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이중선과는 창극을 함께 많이 해 이화중선 이중선 자매 명창으로 유명해졌다.
2) 12세 때 아버지가 이화중선과 이중선을 남원 권번에 맡겨 기적에 이름을 올라 기생이 되었다. 권번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판소리를 배웠고 14,15세 즈음에 남원시 수지면 홈실마을에 온 송만갑 명창이 이끄는 극단 협률사의 공연을 보고 소리 귀신이 씌였다. 그 이후 남원시 송동면 태동마을에 사는 장득진과 살면서 소리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남원에서 산 시간은 12세 - 19세이며 이 시기에 소리의 토대를 만들었으며 어릴 적 여기저기 떠돌아서 고향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 없었으니 7년동안 살았던 남원을 고향으로 여길 만하다. 즉, 육체의 고향은 아니지만 이화중선 소리의 고향이라고 볼 수 있다.
3) 장득진을 따라서 19세 때 순창군 적성면으로 이사 갔다. 이화중선이 살던 집을 ‘와우터’라고 한다. 현재 집은 없고 빈터만 남았다. 장득진 일가는 소리도 하고 줄도 타며 땅재주도 놀았던 예능 가족이었다. 이곳에서 5년 가까이 춘향가 전 바탕을 학습하고 판소리를 연마했는데 이화중선이 소리연마한 곳을 ‘매미터’라 한다.
4) 1921년 23세 때 상경했다. 조선권번에 기적 두고 활동했다. 당시 최고 명창인 송만갑, 이동백 명창의 지도를 받았다고 하나 이미 이화중선은 득음을 한 상태였다.
5) 26세인 1924년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장려회 주최 전국 판소리 경연대회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다. 당시 가장 인기있었던 여자 명창 배설향을 능가하는 인기였다. 심청가 중에 왕비가 된 심청이가 아버지를 그리워 하는 대목인 ‘추월만정’을 불러 수천명의 관중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조선물산장려회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나 조선물산장려회가 1년 정도만 왕성한 활동을 하고 유명무실해졌다. 이후 명성이 자자해져 전국에 공연을 다녔다.
6) 1927년부터 이화중선의 이름이 들어간 공연이 많이 기사화되었다. 대동가극단의 대표 소리꾼이 되어 공연할 때마다 돈을 가마니로 긁었다. 하지만 극단 식구들이 너무 많아 이화중선에게 돌아오는 돈은 많지 않았다. 공연 수입의 30%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썼고 어려운 가족을 다 건사했다. 공연비가 없어도 꼭 가야 할 곳은 가서 무료로 공연해 주기도 해서 소리보살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1928년 스승이자 남편인 장득진이 사망한다.
7) 만주 용정에 독립자금을 전달하러 가기도 했다는 구술이 있다. 평양 남원 진주 권번이 독립군 사령부와 연락하는 거점지였다고 한다. (남원향토사학자 김용근)
8) 1928년 도쿄 빅터 레코드 본사에 가서 처음으로 음반을 냈다. 우리나라 명창 중에서 처음으로 음반을 낸 것이다. 6월 빅터 레코드, 11월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음반을 냈다. 이후에도 일본에 다섯 번이나 가서 녹음해 최초 최다 녹음, 최다 판매한 명창이다. 1937년부터는 서울에서도 녹음을 한다.
9) 1931년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 322번지 이재삼의 처로 호적에 오른다. 이화중선과 이재삼은 호적상으로는 부부였으나 실제로는 이화중선은 서울에서 이재삼은 공사현장을 누비며 살았다. 오수의 부자였던 이재삼이 이화중선의 후견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재삼의 재산을 이화중선에게 헌납했다. 이재삼은 1943년 여수의 비행기 공사 현장에서 사망했다.
10) 1933년 김초향, 송만갑 명창이 주도한 조선성악연구회에 창립 회원으로 참여했다. 이 단체는 민족말살정책으로 사라지는 우리 소리와 음악을 지키고자 만든 전국 판소리 명창과 국악인들의 단체였다. 순천의 독립운동가 이영민이 돕고 김종익이 재정 지원을 했다.
11) 1943년 - 일본 나가사키에 두 번째 조선 근로자 위문 순회 공연을 하러 갔다. 가와타니 군수품 공장과 나가사키 니켈 광산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을 위문 공연을 한 뒤 작은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다가 1944년 1월 1일 풍랑으로 바다에 빠져 사망한다. 나가사키현 동피저군 강상촌 적자만에서 오후 7시 사망. 그 바다는 현재 나가사키 오무라만이다.
12) 화장해 오동나무함에 담겨 남편의 고향인 전라도 오수에 와서 묻혔으나(시어머니 이옥이 3월 16일 호적에 사망 신고함) 도로가 확장되면서 무연고 무덤이라 없어져 버렸다. 자손이 없었다. 송만갑, 송흥록, 임방울, 김소희.....수많은 명창들이 자기 고향이나 소리의 뿌리가 되는 곳에 비석이 세워져 있고 기념관이 있고 기리는 행사를 하고 있지만 이화중선은 그 어디에도 기리는 비석 하나 없다. 무덤을 지키지도 못했고 남원에서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도 매우 드물다.
(보고서에서 인용)
<아리 아리 아라리요 : 대한의 독립을 노래한 소리꾼 이화중선> 출간
https://bit.ly/44SLaj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