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군농촌이 희망이다, 그리고 농촌에는 여성 농민이 있다 – 구례군 용방면 정영이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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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용기와 위로, 든든한 비빌 언덕이 필요한 청년 여성 농부
  • ‘농촌에 희망이 있다’고 굳게 믿고 싶거나 혹은 의심하는 당신



노는 언니에 이어 요즘은 축구하고 농구하는 언니들이 대세다. 지리산 노고단과 마주한 구례군 용방면 죽정마을에는 농사짓는 언니, 25년차 농부 정영이 언니가 산다. 금목서, 은목서 향기 가득한 농부의 집에 들어서자 <언니네텃밭> 앞치마를 두른 정영이 농부가 우리를 반긴다. 

향긋한 차와 맛있는 감이 차려진 탁자에 마주보고 앉았다. 웃으며 시작한 이야기는 몇 분 지나지 않아 코끝 찡, 눈물 쏙이다.



구례군 용방면의 자택에서 만난 정영이 농부



만나서 반갑습니다. ‘행동하는 농부’ ‘매실박사’ 정영이 농부 앞에 붙는 수식어가 꽤 많던데요,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네, 저도 반갑습니다. 저는 구례에서 매실농사 짓는 정영이 입니다. 1966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졸업하고 고등학교와 대학을 광주에서 다녔어요. 80년대를 살면서 숙명처럼 학생 운동을 했고 마지막 학기를 마치지 못하고 제적이 되었다가 민주화 선언으로 복적이 되어서 남은 학기를 마치고 졸업했고요, 1991년에 결혼해서 아이 낳고 키우다 무조건 고향으로 가겠다는 남편과 같이 1996년에 구례로 들어왔어요.


노고단을 마주하고 인터뷰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집과 정원, 산과 마주하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운데요.

저희 집 이름이 노고마주인데요, 노고단을 마주하다의 줄임말입니다. 남편이 장비 사업을 하면서 일을 하러 가서 돈이 아니라 돌을 가져오고 나무를 얻어 와서 이 집과 정원을 만들었어요. 여기에 집을 짓고 자리 잡을 때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답니다.

원래는 이곳이 만 7천 평정도 되는 울창한 산이었어요. 산 주인은 따로 있었지만 시부모님이 산의 일부에 밤나무를 심어 평생 밤농사를 지었어요. 40대에 혼자되신 어머님이 밤 산을 일구면서 자식들을 키웠대요. 그러다 산이 팔린 거예요. 부모님이 평생 농사지은 땅을 어떻게 해서라도 지키고 싶은 마음에 4형제가 새 주인에게 무릎 꿇고 사정해서 어렵게 대출을 받아서 이 땅을 샀어요. 벌써 25년 전 일이네요. 그때 어머님이 정말 펑펑 우셨어요. 긴 세월동안 서러운 일도 많이 당했고 쌓인 한이 너무 많았던 거죠. 평생 밤농사 지었던 땅이었기 때문에 밤 수확할 때가 되면 항상 오셔서 도와주셨어요. 그렇게 5년을 더 사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저희가 집을 지어서 이사 온지는 18년 되었어요. 작은 컨테이너 하나 갖다 놓고 집을 짓기 시작했어요. 돈이 없으니까요. 농가주택자금 지원 받고 남편이 벽돌을 직접 찍어서 지은 집이에요. 우리 가족의 세월과 노동이 묻어 있는 집입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눈물을 흘리면 곤란한데요, 매실농사는 구례로 오자마자 짓기 시작한 건가요?

저희 첫 농사는 밤이었어요. 어머님이 여기서 밤농사를 지으셨으니까 같이 밤 수확을 했죠. 예전에는 매실이 집안에 배탈이 나거나 했을 때 약재로 쓰이는 용도로 한그루씩 있었지 따로 심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90년대에 1kg에 3,000원 했던 밤이 지금은 7~800원이에요. 30년 동안 물가도 오르고 인건비도 올랐는데 밤 값은 오히려 떨어진 거죠. 인건비도 안 나오는 농사를 계속 지을 수가 없어서 밤농사를 포기했어요. 그때부터 매실이 보급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럼 밤나무를 없애고 그 자리에 매실을 심은 건가요?

네. 매실도 심고, 단감도 심고, 대봉도 심고, 산수유도 심고요. 제법 농장의 모습을 갖췄죠. 남편은 이 산을 농장답게 만들고 싶었나 봐요. 밤 산은 말그대로 산이거든요. 남편은 밤나무를 모두 베자고 했는데 제가 아버님이 심었던 토종 밤나무 두 그루를 지켜냈어요(웃음). 집 입구에 한 그루, 집 뒤의 밤 산에 한 그루가 남아 있어요. 농사는 전체가 7천 평정도 되는데 매실이 제일 많고, 단감, 대봉을 주로 해요. 봄에는 고사리, 두릅, 엉개(엄나무순), 취나물, 계절별로 조금씩 다 해요.



정영이 농부가 수확한 밤



직접 토종 씨앗을 구하거나 채종을 하나요?

봄나물은 모두 자생이에요. 이미 이 땅에서 알아서 크고 있던 것들이어서 씨앗을 채종하지는 않아요. 채종은 나누기 위해서 하죠. 고사리는 햇빛 잘 들어오고 번성할 조건만 되면 뿌리에서 뿌리를 뻗어가거든요. 산에 나무를 다 베어내고 나니까 고사리 천지가 돼버린 거예요. 그리고 스스로 자리 잡고 크고 있던 취나물들이 보인 거죠. 봄에 산에 올라가면 고사리, 취나물 천지예요.

저는 텃밭농사도 하고 있으니까 의무처럼 토종 종자로 농사를 지어요. 우리 가족 먹을 거, 농사를 조금 더 많이 짓게 되는 건 <언니네텃밭> 통해서 소량이라도 판매를 하고요. 같이 힘들게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지은 제철 농산물 꾸러미로 보내드려요. 상추, 시금치, 아욱, 가지, 오이, 호박, 서리태, 배추, 무 안 하는 거 빼곤 다 지어요(웃음).


매실 농사는 부부가 함께 하는 거죠?

네. 사람은 절대 안 사요. 남편과 둘이서 할 수 있는 만큼만, 가족들이 할 수 있는 만큼만 지어요. 그 과정에도 사연이 좀 있어요.


또 손수건을 준비해야 하나요. 그 사연도 들려주세요.

음… 저희 땅은 산지잖아요. 경사도 가파르고. 거기에 매실 묘목부터 심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초기에 수확할 게 없었죠. 매실 값이 한창 좋을 때는 10kg 한 박스 평균가가 3만 5천원이거든요. 그래서 매실 농사를 좀 대대적으로 지으려고 완전 평지로 4천 8백 평 농지를 임대했어요. 연세 드신 농민들이 농어촌공사에 농지를 맡기면 농어촌공사가 농민들과 10년 단위로 계약을 하는 농지임대사업제도가 있어요. 마침 평생 농사를 지으신 분이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농어촌공사에 4천 8백 평 농지를 맡긴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10년 계약을 했어요.

그 정도 규모는 손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까 방제 작업도 하고 컨테이너 상자를 실을 수 있는 에스에스 기계를 2천 5백만 원 대출받아서 샀어요. 그리고 우리 농장과 임대한 땅에 거름, 퇴비를 낼 수 있는 농업용 작은 굴삭기도 샀어요. 그게 2천 7백만 원이에요. 그다음에 전지를 손으로 할 수가 없으니 전동가위가 필요했겠죠? 많은 양을 선별하려면 선별기도 필요하죠. 10년 치 임대료와 농기계 구입까지 하니 순식간에 제 앞으로 1억 원 빚이 생겼어요.

그런데 그 해부터 매실 값이 똥값이 돼버린 거예요. 평균가 3만 5천 원이었던 매실 값이 7천 원, 8천원이 되버렸어요. 완전히 바닥을 쳤어요. 농산물 가격이 그래요. 그러니 당연히 사람을 쓸 수도 없어요. 인건비가 안 나오니까. 우리끼리 할 수밖에 없었죠.

매실은 6월에 시작하면 한 달 안에 수확을 마쳐야 해요. 값을 제대로 받으려고 일찍 따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는 황매 예찬론자여서 6월 6일 망종부터 7월 20일까지 따거든요. 이 시기에 못 따면 그대로 낙과가 되는데 사람을 살 수 없으니까 낙과도 너무 많았어요. 5년을 하다가 도저히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어서 위약금을 내고 포기했어요. 우리에겐 부채만 남았어요. 농가부채가 이렇게 생기는 거예요. 큰 상처였죠.


지리산권 농부들 만나면서 몰랐던 세계를 하나씩 알게 되는데요, 오늘도 안타까운 현실 하나가 추가되었습니다. 돈을 벌기는커녕 농사를 지을수록 마이너스라니….

농사지어서는 절대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가 어려워요. 그러니까 다들 떠나는 거예요. 농촌에 살 수 없으니까. 80년대까지는 농민의 숫자가 1천만 명이라고 그랬거든요. 지금은 2백 5십만 명이 안돼요.

떠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생계를 꾸리기가 어려워요. 돈벌이가 안 되니까 자식들 키우려고 객지로 다 나가버리는 거예요. 저희도 많이 힘들었지만 빚도 지고 어떻게든 버텨 왔는데 주변에 그런 농민들이 너무 많아요. 농사만으로는 사실 생계가 안 돼요.

제가 귀농해서 1999년에 구례군 여성농민회(이하 여농)를 조직했어요. 창립할 때만 해도 여농 회원들 대부분 농사만 지었어요. 비닐하우스를 하거나 산수유 농사를 지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농외소득으로 생계를 유지해요. 학교급식 조리원, 요양보호사, 아니면 식당에 나가거나 여러 기관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해요. 농사는 짓더라도 규모를 많이 줄여버리게 된 거죠.



탁 트인 경치와 금목서, 은목서 나무가 반기는 정영이 농부의 집



정영이 농부는 농업수익 외에 다른 수익원이 있나요? 스테이를 운영하시는 것 같은데요.

스테이는 시작한 지 2년밖에 안 됐어요. 구례에서 초등학교 교사하는 아들을 독립시키려고 만든 별채공간인데 아들이 일주일도 못 살고 본채로 다시 들어오면서 비게 되었어요. 어느 날 어차피 비어있으니까 에어비앤비에 한번 올려보자 했는데 바로 그날 예약이 들어온 거예요. 손님이 온다니까 깨끗하게 청소하고 아들이 쓰려고 준비했던 침대와 이불을 세팅해 놓았죠. 그렇게 한 번 두 번 다녀갔던 분들이 이 공간을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지리산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고 해요. 스테이는 하루에 한 팀만 받아서 운영하고 있어요.


체험농장도 하셨다고요.

주 5일제가 시행되기 전부터 농촌 체험이 또 하나의 수익원이 될 수 있겠다 싶어 구례에서 체험이 가능한 농민들과 체험관광협회의를 조직했어요. 저희 밤 산에서도 체험을 하고 체험 가능한 농가들을 찾아다니면서 섭외했어요. 그렇게 마음 맞는 몇 명이 의기투합해서 조직을 만들고 제가 안내하는 역할을 하게 된 거예요. 체험객 일정 조율부터 체험 코스 정하고 거의 모든 일을 제가 하다 보니 내 농사에 소홀해지게 되더라고요.

초반에는 저희도 농촌체험 교육농장 사업에 신청해서 굉장히 활발하게 운영했어요. 그런데 새로운 부가가치 있는 사업을 하려면 교육 공간도 있어야 하고 하다못해 손 씻는 곳도 있어야 하고 화장실도 있어야 하는데 저희 같은 소농들은 그런 시설을 만드는 게 정책지원이 계속되지 않으면 힘들어요. 자연스럽게 체험은 줄어들게 되었어요. 농촌체험이 농가들에게 궁극적인 대안이 아니더라고요. 지금은 살아남은 곳이 많지 않아요.



정영이 농부가 일구는 밭. 인터뷰 당시 가지가 제철이었다.



<언니네텃밭>도 소개도 부탁합니다.

<언니네텃밭>은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회(이하 전여농) 식량주권사업의 일환인데요, 일종의 사업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언니네텃밭>사이트를 통해서 농사짓는 여성 농민들의 생산품을 판매해요.

여성 농민들이 식량주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고집스럽게 생태농업을 하면서 건강한 농산물을 생산하고 토종씨앗을 지키려고 하는데 이게 골병 드는 농사거든요. 더 많은 여성 농민들이 농사를 짓고 싶어도 수익과도 전혀 연결되지 않는 거예요. 판로도 없고 혼자서는 너무 고되잖아요. 그래서 우리 여성 농민들이 짓는 농사의 의미를 알아주는 소비자들과 함께하자는 취지로 <언니네 텃밭>이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슬로건도 ‘얼굴 있는 생산자와 마음을 알아주는 소비자가 함께하는 언니네텃밭’입니다. 만들어 진지 11년 되었는데 사업을 결정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건강하게 운영하기 위해서 굉장히 오랜 논의와 토론을 거쳤거든요.


• 언니네 텃밭 https://www.sistersgarden.org



매실도 <언니네텃밭>에서만 판매하나요?

매실은 양이 많으면 계통출하를 해요. 농협을 통해서 출하하거나 상인들이 수집해서 경매장으로 가지고 가는 방식이죠.


* 계통출하 : 농어민이 협동조합 계통조직을 통해 생산한 농수산물을 출하·판매하는 것을 말한다. 즉 농산물의 경우, 농민이 작목반을 통해 단위농협, 농협공판장, 슈퍼마켓 등의 유통과정을 거쳐 출하하는 것.



혹시 농사일지 쓰세요?

열심히 썼었죠. 저는 모든 작물을 친환경으로 짓고 친환경 인증은 유기전환까지 했었거든요. 그런데 2년차에 인증이 취소되었어요. 저희 뒷산에 매실이랑 밤이랑 같이 섞여 있거든요. 한쪽은 밤, 한쪽은 매실 그 위에 감이 있는데 이게 모두 한 필지예요. 조사 나와서 한 필지에 세 가지 작목이 있다고 취소되었어요. 그게 취소사유래요.

7년 정도 지났는데 지금은 그 법이 바뀌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때는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어요. 그해에 취소를 당하고 너무너무 화가 나서 생태농업을 계속하고 있지만 그 후로는 인증을 받지 않았어요. 제가 친환경으로 계통출하를 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농사일지는 계속 썼어요. 지금은 쓰다 말다 해요.


농사정보는 주로 어디서 얻나요? 혹시 유튜브?

저 유튜브랑 안 친해요(웃음). 전국에 있는 우리 여농 회원들, 동네 어머니들께 물어보죠. 동네 어머니들이 박사예요. 그분들에게 물어보는 게 제일 빨라요. <언니네텃밭> 생산자 방에 ‘이 종자가 필요해요’ 하면 그 방에서 전국에 있는 여성 농민들이 ‘나 있어!’, ‘이거 어떻게 해요?’ 하면 ‘그건 이렇게 하는 거야’ 알려줘요.


동네 어머니들과 전여농 회원들과의 정보교류, 남다른 네트워크입니다. 그동안 만난 농부들이 유튜브에서 정보를 얻더라고요. 요즘 다양한 채널에서 농사 정보를 얻을 수 있긴 하지만 지리산권 농부들끼리 농사기록을 공유하면 어떨까요?

그거 참 괜찮을 것 같아요. 사실 저도 궁금한 게 많아요. 우리 여농 회원들과 토종 종자로 작은 공간에 공동텃밭 농사를 짓기도 하거든요. 내가 농사짓지 않는 건 잘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회원들한테 ‘이 시기에 이걸 뿌려야 되니까 우리 모여서 뿌립시다’해야 하는 데 저는 과수와 산에서 자연스럽게 나는 자생 나물을 주로 하니까요. 절기에 맞춰서 어느 시기에 어떤 종자를 파종하고, 언제 수확하고 이 종자를 다시 채종하려면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 저도 궁금한 게 많거든요.



구례군 용방면의 자택에서 만난 정영이 농부



구례 여성농민회 운동은 어떻게 시작하신 건가요?

구례에서 농민운동을 할 생각은 없었어요. 저는 귀농, 귀촌이란 말을 안 쓰거든요. 그런 용어가 없을 때 구례에 와서 자연스럽게 농사를 지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요.

영농발대식 포스터를 보고 애들 데리고 발대식장에 갔어요. 보통은 꼬임을 당해서 나가야 되는데 저는 그냥 갔어요. 갔더니 같이 학생 운동했던 선배들이 있어요. 자연스럽게 영농 활동을 시작을 했죠. 그런데 농촌 지역이 가부장제가 너무 심해서 성평등하지 않은 실상들이 제 눈에 보였어요. 그때 ‘여성 농민회를 반드시 만들어야겠다’했죠. 여농은 1999년에 창립했어요.


여성농민의 지위와 권리 보장을 위해서도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요, 여성농민에게도 농민수당을 지급하라는 기자회견 기사와 한국농정 10월호 농민칼럼 ‘여성농부와 가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기본적으로 성평등하지 않지만 농촌 사회는 더더군다나 성평등하지 않아요. 농업 정책도 마찬가지고요. 모든 농업 정책들이 농가 단위로 만들어져요. 그런데 농가의 주인이 누구냐면 남성이에요. 농사는 남자를 중심으로 지어지고 있다고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정책도 애초에 그렇게 시작되어 온 거예요.

제가 이장을 하던 해에 ‘찾아가는 매실 교육’을 하는데 마을회관이 사람들로 가득 찼어요. 주변 3개 마을에서 매실 농사짓는 농민들이 모였는데 여성농민이 한명도 없는 거예요. 이장을 하면서 마을에서 바꾼 게 있어요. 교육과 마을회의에 어머니들이 참석하는 거예요. 

어떤 일이 있었냐면 마을 회의를 하면 사람들이 아침에 우루루 왔다 가요. 끝나고 마을 어머니가 문을 빼꼼 열고 “이장, 나 들어가도 돼?” 하는 거예요. 40대에 혼자되어서 자식들 다 떠나고 혼자 농사지으면서 사는 70대 어머니신데 들어오시라 하니까 “나 이 방에 한 번도 들어와 본 적이 없어” 하는 거예요. 그동안 이장실은 금녀의 공간이었던 거예요.

특히 이분은 볼 일이 있어도 회관 밖에서 이장 만나서 서서 얘기했다는데 그동안 얼마나 서러운 세월을 살았겠어요.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때부터 마을을 더 들여다보기 시작했죠. 그동안은 모든 게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고 어머니들은 어떤 주장도 할 수 없었던 거예요. 다음 회의부터는 어머님들도 오시라 하고, 특히 혼자 계시는 분들은 꼭 오시라고 했어요. 마을 회의에서는 엄청 중요한 것들을 결정하거든요.

성평등하지 않은 농촌의 현실을 심각하게 생각하다 보니 여성 농민 운동을 더 적극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고, 적극적으로 하니까 역할을 맡게 된 거죠.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전국 여성농민회 총연합 사무총장을 했어요.



구례군 용방면의 자택에서 만난 정영이 농부



농민수당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많으시죠?

‘이대로 두면 농촌은 소멸한다.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사람이 사는 농촌을 만들려면 농업과 농민들의 공익적 가치를 인정해라. 그 첫 번째 출발이 힘들겠지만 농민수당이다’라고 했죠. 그런데 정부에서 제대로 받아들이지를 못했어요. 절대 안 된대요.

그래서 전남부터 시작을 했죠. ‘전남이 농민수당을 만들자’고. 농민 수당은 농민들이 하는 공익적인 가치에 대한 사회적 보상입니다. 원래 연 120만원을 주장했는데 택도 없잖아요 (※‘어림도 없잖아요’의 전라도 사투리). 지금 연 60만원도 사실은 혁명 같은 일이에요. 이걸 만들기 위해서 투쟁도 있었고 주민발의 조례를 만들기 위해서 전체 농민들을 대상으로 서명을 받았어요. 토론회, 기자회견도 몇 번이나 하고 의원들과 도지사를 만나고 정책 협약하고 정말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이건 전체 농민회 단위로 요구한 거예요.

이때 전여농에서는 ‘모든 농민에게 농민수당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이제는 농업 정책에 대한 대전환이 필요해요. 여성 농민을 농민으로 인정하라고 했죠. 여성 농민들이 없으면 농촌은 없고 농사도 없어요. 그 가치를 인정하라는 거죠. 너무 당연한 거예요. 그래서 농민수당에 여성 농민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중앙에서 주장을 했죠. 문제는 농민에 대한 규정이 명확하지 않다는 거예요. 마지막까지 요구하고 주장했지만 결국은 농가당 하게 된 거예요. 전남이 가장 먼저 농민수당 제도를 시행하기 위해 양보라기보다는 도지사와 도의회, 다수의 농민들을 뛰어넘지 못해 전남에서도 여성농민들은 배제된 거죠.

지금 저는 조례 개정 운동을 하고 있어요. 이것 역시 주민발의로 하려고 서명까지 마친 상태예요. 전남에서 만 5천 명 서명을 받으면 되는데 2만 2천 명 서명받았어요. 이걸 여농에서 주관하고 있어요. 도의회와 집행부에서 받아줘야 하는데 안 받아주면 또 무산이 되는 거예요. 그럼에도 조건을 갖췄으니까 검토와 심의는 할 거라고 믿고 있어요.


“5만 명에 가까운 광주·전남 농어민이 연서(連署)해 광주시의회와 전남도의회에 각각 입법 청구한 ‘농어민 공익수당’ 관련 조례 제정·개정안이 제대로 된 심사조차 받지 못하고 폐기 수순으로 접어들었다.

전남에선 농어가 단위로 연 60만원씩 지급되는 현행 조례를 개정해 농어민 개개인에게 연 120만원, 75세 이상 은퇴농어민에게는 180만원을 지급하자는 내용이 담긴 주민청구 조례 개정안이 전남도를 거쳐 최근 도의회에 접수됐으나, 집행부와 의회 모두 재정 부족, 타 분야 형평성 등을 이유로 처리에 난색을 보이면서 오는 6월 말 현 도의원 임기 종료와 함께 폐기될 운명에 처했다. 농민수당이 지급되지 않고 있는 광주에서는 농민 등 1만8000여명의 시민이 발의에 동참한 농민수당 지급 관련 조례 제정안이 2020년 1월부터 2년째 잠자고 있다.”


-‘농민수당’ 신설·증액 조례안 예산 부담에 결국 폐기 되나 (광주일보 2022. 2. 10.에서 발췌)


농민수당은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고, 농촌과 농민이 반드시 필요하고 정말 공익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에 국민적인 동의를 받는다는 거예요. 농민으로서 자부심을 갖게 하는 큰 계기죠.


계속 무거운 얘기를 하게 되는데요, 농사얘기를 하다보면 기후위기에 대한 얘기를 안 할 수 없잖아요.

기후위기 저희도 실감하죠. 절실하게. 농사를 짓다보면 느껴져요. 올해 (※2021년) 봄은 냉해 때문에 고사리가 올라오다가 멈춰버렸어요. 그래서 고사리 작황이 전체적으로 너무 안 좋았어요. 그 시기에 매실은 꽃을 피워서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그게 제대로 안 되서 작황도 안 좋았죠. 섬진강 수해 때문에 농산물 피해도 어마어마하게 입었던 것 같아요. 엄청난 비가 온 게 기후변화 때문이라는 건 알고 있는 거고요. 서리도 너무 빨리 와버렸어요. 그것도 갑자기. 미처 거두지 못한 농작물들이 다 말라버렸어요.

올해 감농사는 작황이 전체적으로 안 좋아요. 저희는 감 수확이 평년에 비해 20% 정도 밖에 안됐어요. 보셨겠지만 우리 마을은 감나무가 많아요. 관행을 하는 분들도 여섯 번 약을 친 데는 그나마 괜찮지만 다섯 번 한 데는 딸 것도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저희는 어땠겠어요. 생태농업을 하는 사람들은 더 치명적인 거죠. 감, 사과는 약을 안 하면 농사짓기가 정말 힘들어요. 감농사만 하면 집중해서 전지도 하고 약도 제때 딱딱 맞춰서 6번을 친다고 하지만 농민들이 그렇게 하기 쉽지 않아요. 감농사도 짓고 매실농사도 짓고 논농사도 하는 분들은 남들보다 며칠 늦게도 하고 한번 건너뛰기도 하다 보면 못 잡는 거예요.


기후변화로 농작물 북방한계선도 달라진다고 하잖아요.

감 농사나 매실도 점차적으로 북상하고 있거든요. 우리 한반도에서 동남아시아에서나 볼 수 있던 작물들이 실제로 재배가 돼요. 지금 구례에도 망고, 애플망고 농사짓는 분들이 있어요. 좀 있으면 아마 ‘감은 금강산감이 제일 맛있어’ 할지도 몰라요. 지인이 SNS에 올린 걸 보니 몇십 년 후에는 ‘추억의 사과, 배, 감을 드시려면 러시아산을 사세요’라는 광고가 나올 거라고 하데요. 우스갯소리 같지만 농사 현장에서는 심각하게 체감하죠.



정영이 농부의 농장에서 키우는 대봉감



정영이 농부도 ‘작물을 바꿔야 하나’ 고민하고 계신가요.

‘우리도 고민해야겠구나’ 생각하죠. 딸 생각을 하면 더더욱이요.

딸이 전국여성농민회 총연합 최연소 회원인데 한국농수산대학을 졸업하고 학교에서 강원도 청년을 만나 결혼했어요. 지금은 부부가 강원도 정선에서 사과 농사지으면서 <보란정민 열매달> 농장을 운영해요. 결혼해서 처음 3년은 눈물로 보내더라고요. 청년 농민이니까 농사에 성공할 수 없잖아요. 감자도 심었다가 무, 고추도 심어보고 하는데 계속 시행착오를 겪는 거예요. 부모님들이 하는 아스파라거스도 자기들이 종자부터 다시 키우는데 하는 족족 생산비도 못 건지는 거예요. 노동은 너무 고되고, 둘은 농사 아니면 아무 수입원이 없는 거예요.

그렇게 전업으로 농사짓는 청년 농부들이 별로 없어요. 언젠가 ‘엄마, 나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갈까? 엄마한테 가서 농사지으면 안 돼?’ 울면서 전화를 했더라고요.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농사짓는 것도 너무너무 힘든데 부모님들은 당신들 농사 방식으로 지으라고 간섭을 하시니까 더 서러웠나 봐요. 5년째 되니까 농사기술도 익히고 부모님들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이 배운 것 적용하면서 작년부터 사과농사도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어요.

농사로 이제 조금 성공을 해 가는 딸을 보니 고민이 더 커지는 거예요. 이 아이들이 5년 동안 이렇게 공들여서 사과 농사를 지었는데 몇 년이나 더 지을 수 있을까 싶은 거죠. 앞으로 평생 농사를 지어야 되는데……. 그래서 딸이 농사지을 작목에 대해서 좀 고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희는 앞으로 얼마나 농사짓겠어요. 이건 대한민국 농업계에서도 고민하고 있고 지자체에서도 이런 고민들은 다 하고 있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기후가 바뀌면 망고라도 키워야죠. 그럼 그 작물이 우리 땅에 자라는 계절 농산물이 되는 거죠.


오늘 들은 얘기도 그렇고 25년 동안 농사지으면서 희로애락의 순간이 많았을 텐데요, 정영이 농부는 언제가 제일 행복한가요?

저는 농사일 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봄에 고사리 끊을 때가 되면 언제 고사리가 올라오나 매일 가서 문안 인사 드려요(웃음). 오늘도 올라가 보고, 내일도 올라가고.

올해는 날씨가 일찍 따뜻해졌다가 갑자기 냉해가 와서 추워지니까 처음에 고사리가 조금 올라오더니 한 달 동안 안 크는 거예요. 이만큼 올라왔다가 크지도 못하고 딸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어요. 그래서 날마다 문안 인사만 하러 다녔는데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동트기만 기다렸어요. 산에 올라가려고. 봄에는 우유 하나, 맥주 한 캔 가지고 새벽에 올라가서 오후 4시쯤에 내려왔어요.

모두 손으로 하니까 양이 많지는 않아요. 하루종일 끊으면 20kg 정도 되거든요. 내려와서 저녁 늦게까지 방 안에 펼쳐놓고 선별해서 다음 날 택배 작업해서 보내죠. 그렇게 일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또 씨앗 뿌려놓고 싹이 올라올 때, 싹이 딱 돋아 오를 때의 그 희열! 그게 농사짓는 행복인 것 같아요.



탁 트인 경치와 금목서, 은목서 나무가 반기는 정영이 농부의 집



눈물 흘린 시간도 수없이 많았겠지요.

아이들 키울 때 농가 부채 때문에 너무 힘들었고 매실 가격이 폭락했던 그해가 저에게는 가장 절망적인 시간이었죠. 그때 딸이 한농대 휴학하고 농사를 거들었거든요. 한겨울에 같이 전지하고, 잘라낸 팔뚝만 한 가지들을 파쇄하는데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엔진 소리가 커요. 4천 8백 평 작업을 딸이 모두 도왔어요.

그렇게 열심히 해서 수확을 했는데 친환경으로 하다 보니까 작황은 안 좋고 가격은 그 모양이 돼버렸죠. 경매로도, 농협으로도 출하하지 못하는 상황에 선별 작업하면서 딸도 울고 나도 울었어요. 부채를 갚아야 하는데 빚을 내서 빚을 갚아야 하는 상황이 된 거예요. 근데 빚을 낼 수도 없어요. 사실 통장 거래정지까지도 돼 봤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사지을 때가 제일 행복하십니까?

네. 농사일 할 때가 행복합니다.


최근에 정영이 농부처럼 농사를 짓겠다고, 농업을 해보겠다고 농촌에서 살아보겠다고 찾아오는 분들이 많습니다.

농촌에서 농사짓겠다고 오시는 분들, 저를 찾아오는 분들은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드리고 싶은데 제 여력이 안되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작년 [2020년] 에 전여농에서 ‘청년여성농민, 비빌 언덕을 만나다’라는 청년여성 대상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제가 청년 2명의 멘토로 활동했어요. 그중에 한 명은 구례수해대책본부에서 만났어요. 섬진강 수해가 터지니까 봉사하겠다고 나온 거예요. 구례에 수해가 나고 민간 조직이 꾸려졌는데 제가 구례 군민대책본부에 총괄 공동대표를 맡고 있거든요. 그 인연으로 귀농을 해서 남편과 힘들게 농사를 짓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교육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게 했죠. 제가 멘토로 같이 다니면서 경영체 등록부터 시작해서 귀농귀촌센터에서 필요한 교육도 받게 했죠. 지금은 여농 회원이 됐어요.

그렇게 우리가 비빌 언덕이 되어서 도움을 주면 청년 농부들도 버틸 힘이 생기는데 비빌 언덕이 없으면 정말 힘들 거예요. 그런 분들 오시면 힘이 닿는 대로 뭔가 도움을 주고 싶은데 여건이 안 되니까 안타까울 때가 너무 많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농촌으로 오셔라. 견뎌내시라, 결국은 농촌이 희망이다’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일구다’의 사전적 의미는 ‘밭을 만들기 위하여 땅을 파서 일으키다’, ‘현상이나 일 따위를 일으키다’이다. 정영이 농부의 25년은 여성 농민으로, 딸로, 며느리로, 엄마로 쉴 새 없이 ‘일구는’ 시간이었다.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노고단을 잠시 뒷전에 두고 우리는 같이 웃고 울었다.


지금도 힘겨운 정영이 농부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언니’라는 너무 무거운 짐을 하나 더 얹어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농촌과 농업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는 정영이 농부처럼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여성 농민이 더 많이 나타나야 한다. 모두 부디 지치지 마시길.




글 이경원

기획, 기록, 연결로 변화를 만드는 일과 사람을 돕는다. 2014년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궁금해서 찾았던 지리산시골살이학교 덕분에 지리산이음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때는 몰랐다. 7년이 지난 2021년 구례 남원 산청 하동 함양을 다니며 ‘농사를 업으로 하는 농부’들의 이야기를 글로 전하게 될 줄은.


사진/진행 이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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