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군외롭지만 義롭게, 그리고 自由롭게 - 구례군 문척면 서민수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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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만 義롭게, 그리고 自由롭게
외롭지만 의롭게, 그리고 자유롭게


서민수 농부는 구례군 문척면에서 감과 수박 농사를 짓는다. 오랜 도시생활 끝에 2000년대 초반 생협운동을 시작으로 2005년부터 고향인 구례로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순천에서 구례로 출퇴근하며 지었던 감 농사는 어느덧 17년 차로 접어들었고, 한살림 생산자가 된 지도 12년이 되었다. 동네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어 하우스 2동으로 시작한 수박 농사는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라고 한다. 서민수 농부의 감나무 밭에서 만난 우리는 어색하고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구례군 문척면에서 감과 수박 농사를 짓는 서민수 농부



반갑습니다. 서민수 농부는 고향이 구례라고 들었습니다. 농사는 언제부터 지었나요? 

저는 구례 산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구례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에서 대학을 다녔고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고 광주에서도 직장생활과 사업을 했습니다. 2005년에 고향인 구례에 부모님이 농사짓던 감밭에서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농사지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1988년은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린 해이기도 했지만 세계적으로는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러시아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되고 미국이 유일패권국이 되는 시기였습니다. 급격하게 변하는 세계 정세가 저는 상당히 혼란스럽더라고요. 그런 상황 속에서 ‘자연에 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나타났고, 주변 지인들 중 농민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어요. 저 역시 우리가 인간사회에서 겪는 불편함을 자연과 농업에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가능할 것 같았어요. 

마침 1990년대 말에 한살림운동이 시작되었는데 광주에서도 생협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죠. 저는 2000년에 합류해서 처음에는 소비자로서 한살림 운동을 같이 했었죠. 그러면서 ‘농사를 짓자’고 결심했죠. 2005년에 농사를 시작할 때는 순천에서 구례로 출퇴근하듯이 했어요. 2007년에 구례에도 거주지를 마련해서 생활하다가 식구들이 모두 이주한 건 7년 정도 된 것 같네요.

처음에는 농사를 잘 몰랐고 정보도 부족했어요. 좀 색다르게 농사를 짓고 싶어서 대학원에서 한의학을 공부해 농사와 한약을 연계해보려고도 했는데 논문을 쓰는 과정이나 비용도 만만치 않더라고요. 결국 그건 포기했죠.



‘나는 특수한 사람들만 취하는 농사는 하고 싶지 않다. 될 수 있으면 내 생산물들이 다수가,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라에서 파는 것들이 모두 친환경이어야 한다. 누구나 슈퍼나 장터에서 믿을 만한 농산물을 살 수 있어야 한다. 구조적인 틀이 바뀌어야 한다. 작은 노력이 퍼지고 퍼져서 큰 구조를 바꿔낼 때 다음 세대가 이어가도 탈이 없다. 돈을 중심 가치로 사는 세상은 공멸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지혜롭기 때문에 공멸을 막을 것이다. 그것은 농사꾼이 해낼 것이다. 여러분이 해낼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지리산포럼2020 지리산 로컬 섹션 @구례 중에서
(자세히 보기 https://url.kr/7htocv )



2020년 지리산포럼 로컬섹션에서 하신 얘기가 인상적이었어요. 
‘내 생산물은 특수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닌, 누구나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저는 농업의 시장성보다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친환경 농산물, 내 농산물을 누구나 쉽게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감 농사를 짓지만 처음에는 생협 납품을 하지 않았어요. 생산량이 들쑥날쑥하니까 안정적으로 공급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주로 지인들에게 판매했는데 대부분의 농산물은 상품성이 뛰어난 것과 없는 것을 선별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누구는 좋은 것 먹고 누구는 나쁜 것 먹느냐, 좋은 놈도 먹고 나쁜 놈도 먹고 그런 식으로 해야 되지 않겠느냐’ 생각해서 감을 모두 섞어버렸습니다. 이렇게 하면 공판장에서는 완전히 상품성 없는, 완전 나쁜 물건 취급을 받습니다. 

저도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 속에서 살다 보니까 결국 선별을 해야겠더라고요. 선별을 하지 않으면 상품성을 평가받지 못하고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지금은 한살림도 선별을 해요. 가격도 차별화하고요. 공자님도 시류를 따르라고 했는데 감히 범부인 제가 어떻게 시류를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웃음). 지금은 소비자가 원하는 대로 해 드리고 있는 편입니다.


시류와 타협을 하셨네요. 한살림 생산자가 된 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12년 정도 됩니다. 품목은 감을 주로 하고요.  


감은 유기농이 어렵다고 들었어요. 서민수 농부는 어떤 방식으로 재배하는지 궁금합니다.

과실은 완전 유기농이나 무농약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제가 생산하는 감도 완전한 무농약이나 유기농이 아닙니다. 한살림은 ‘참여인증제’라고 해서 현실적으로 농사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자연적이고 친환경적으로 농사를 짓도록 생산자와 소비자가 합의해서 생산하는 방식으로 운영합니다. 생산자는 서로가 합의한 대로 지은 농산물을 출하하고 조합원은 그 농산물을 먹게 되는 거죠. 저도 그 범위 안에서 감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한살림은 품질 관리팀이 있고 소비자들도 생산현장에 같이 와요. 생산자들도 지역공동체 형식으로 생산운동을 하는 차원에서 서로 감독하고 연구합니다. 많은 시행착오들을 겪으며 여기까지 발전해 온 거죠. 


건강한 먹거리를 원하는 소비자들은 친환경, 유기농을 선호할 수밖에 없어요. 솔직히 선호를 넘어 환호하죠. 
그런데 어떤 농산물을 골라야 할지 소비자도 헷갈릴 때가 많아요.  

완전한 유기농은 실패율이 너무 높아요. 위험 부담이 너무 커서 생산 농가들도 지속가능하지가 않아요. 예전에는 농산물이 저농약, 무농약, 유기농으로 인증이 나눠져 있었어요. 현재 국가인증제는 유기농과 무농약 밖에 없습니다. 농산물의 친환경 인증제는 저농약을 오래 유지시키면서 친환경으로 유도해야 하는데 갑자기 제도가 바뀌다 보니 약을 조금이라도 사용했던 농가들은 바로 낙오돼 버리니까 친환경시장이 오히려 축소되는 거죠. 농산물 친환경 인증제는 국가에서도 관리 체계에 대해 많이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친환경 농산물에 대해서 고민한 나라들의 정책을 들여다보고 우리나라 실정에도 맞는지 잘 살펴야 하는데 솔직히 현실에 맞지 않는데도 억지로 꿰어 맞추는 경향이 좀 있어요. 농업 정책들도 그렇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협운동을 열심히 하는 분들이 영향력을 발휘해서 정부정책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고 봅니다.



2022년 봄, 연두색 조끼를 입은 서민수 농부가 감밭에 서 있다.



우리나라의 농업 환경에서 유기농, 무농약 농사는 개인 농가의 의지만으로는 힘들다고 들었어요.
공동체가 함께 하거나 정책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할 것들이 많겠지요.

우리나라의 자연농법이나 유기농법 연구를 보면 우리 조상들이 참 잘해왔던 게 많더라고요. 그런데 1970, 80년대에 다수확을 위해서 과도하게 농약을 사용하고 비료도 쓰면서 토지나 자연생태계 자체에 혼란을 가져왔어요. 우리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이미 넘어버렸다고도 볼 수 있는 거죠. 예전의 자연 상태로 회복하기란 쉽지가 않고요. 그나마 조금이라도 회복하려면 단순하게는 친환경이나 유기농을 하는 농가들이 전체농가의 50% 이상으로 늘어나서 일정한 질적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강하죠.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가 감수해야 할 부분들이 있거든요. 자연이 회복되는 동안 유기농 농가들의 생산물 양이라든지 수익, 생산일정을 관행농하는 분들과 어느 정도는 맞춰주면서 가야 하는데 시장은 그렇지가 않잖아요.


친환경으로 농사를 지어보려는 분들이 그 고민을 제일 많이 하시더라고요. 가치를 시장에서는 제대로 인정받을 수 없다고.

네. 저도 친환경 수박을 다른 농가들과 같이 판매하려고 조직도 해봤어요. 친환경 수박을 같이 생산해서 학교급식 식자재로 납품하기로 했는데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식자재 납품처에서는 시장 상인들에게 사는 것이 경제적으로 안전하다는 거예요. 코로나 전에는 농민들과 직접 계약해서 일정량을 확보하면 납품이 편했는데 이제는 학교가 언제 쉴지도 모르니 필요한 양만 매입하는 게 낫다고 판단하니까 거래가 끊어져버린 거죠. 

같이 해보자고 했던 생산자들도 가격이 안정적으로 보장되지 않으니까 결국 포기하고 이탈해버리더라고요. 공판장에 가면 친환경으로 지은 수박이 관행으로 지은 것보다 모양이 안 좋습니다. 외관이 안 좋으니 상품의 품위가 떨어진다고 가격을 제대로 못 받으니까 전부 돌아서더라고요. 같이 했던 생산자 절반 이상이 지금은 수박을 안 합니다.


서민수 농부는 수박농사를 왜 시작했나요?

하우스가 두 동이 있어서 그냥 했죠. 남들도 하니까(웃음). 이 지역은 수박이 주소득원이기도 하고요. 실은 감 농사는 좀 개별적이에요. 소위 공동체가 그렇게 필요하지 않은 농사입니다. 자기가 혼자 알아서 키워서 파는 형태인데 수박농사는 나름대로 공동체가 형성이 되더라고요. 수박 농가들끼리는 연합도 되고 해서 저도 시골에 농사를 짓겠다고 왔으니까 사람들과 좀 친하고 싶어서 수박을 시작했죠. 친화에 도움이 될 것 같았거든요. 수박이 감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노동량은 훨씬 더 많이 들어갑니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수박에만 집중할 수 없고 정보도 부족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교류와 연대를 위해 수박농사를 선택하셨군요.
수박이 규모는 작지만 손은 더 많이 간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면에서 손이 많이 간다는 건지 궁금합니다. 

수박은 하우스 시설에서 재배되기 때문에 물을 자주 줘야 해요. 거의 3~ 4일에 한 번씩 줍니다. 경운 작업을 하고 거름을 하는데 수박이 상당히 거름을 많이 먹는 작물이고요. 또 고온산 작물이라 추워지면 안 되니까 이른 봄이 되면 밤에는 덮어주고 낮에는 걷어주는 작업을 해줘야 해요. 3월 17일 경부터 4월 중순, 그러니까 4월 10일 전후해서 완전히 열어주는 20~30일 동안은 보온덮개로 밤에는 덮어주고 아침에 해가 나면 걷어주는 작업을 합니다. 부모님 이부자리를 그렇게 정성으로 덮어주고 걷어주고 하면 효자소리 들을 텐데 수박한테는 그런 소리도 듣지 못하면서 하고 있습니다(웃음). 


그렇게 해주면 잘 자라긴 하나요?

잘 자란다기보다는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죠. 생명이 있는 건데 죽어버리면 농사를 망치는 것이니 해야 하는 거죠. 저는 수박을 무농약으로 하는데 친환경 제제들을 자주 살포해야 돼요. 이렇게 더운 계절에는 진딧물이 나옵니다. 그러면 또 살지 못하고 죽어버리죠. 수박이 쉽지 않아요. 어려워요.



'홍시용 감'이라고 쓰여 있는 포장박스들



17년째 짓고 있는 감 농사는 어떤가요? 어렵습니까? 

감도 쉬운 게 아닙니다. 제대로 약제방제를 못하면 9, 10월에 낙엽이 싹 떨어져버려요. 

대부분의 농작물들이 그렇다고 보면 됩니다. 감 농사를 잘 몰랐을 때 낙엽병으로 입이 싹 떨어져 버리고 과실도 다 떨어져 버렸어요. 계절은 가을인데 감나무밭은 완전히 겨울이 돼 버린 거죠. 온 밭이 피고름으로 물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익지 않은 홍시 감이 피고름 같이 보이더라고요. 내 눈에는. 

그때는 한살림에 싣고 갈 감이 없을 정도였어요. 온 밭이 그 모양이 되니 보기도 싫어지고. 도시 살 때 가끔 뉴스에서 보던 ‘농부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얘기가 왜 나오는지 알겠더라고요. 엊그저께까지 그렇게 좋았던 밭이, 감들이 며칠 사이에 급격하게 병증이 드러나면서 낙과되고 낙엽 지는 거 보면 정말 보기가 싫어집니다. 참혹해요. 참혹한 광경들을 서너 번을 겪었어요. 지금도 트라우마가 있죠. 

9월 초, 중순만 되면 병기가 나타날까, 올해는 방제가 잘 됐나 안 됐나에 대한.


횟수를 줄이려고 애를 쓰지만 약을 치지 않는 건 힘들다는 얘기를 계속 들어왔어요.

저는 처음에는 태평농법, 자연농법 한다고 농약을 거의 안 했어요. 그렇게 지을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아서였지 안전했던 게 아니었던 거죠. 제가 그렇게 농사지을 때 다른 농민들이 비만 오려고 하면 농약 분무기를 들고 나가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습관처럼 농약을 한다’고 판단하고 비난했어요. 그런데 몇 번에 걸쳐서 낙과와 낙엽을 경험하고 나니 그 분들이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더라고요. 비만 오면 농약통 들고 나서고 농약을 뒤집어쓰는 그 고통들이 엄청날 텐데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농사는 커리큘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해마다 달라요. 날씨 조건도 다르고. 비가 많이 올 때도 있고 비가 적게 올 때도 있고 또 바람이 불 때도 있고 일기 상황이 다르고. 지금은 기후질서가 말 그대로 문란해요.

지금까지 살아온 선배 농민들은 이미 여러 경험들을 겪었고 언제 병이 올지 모르니까 약을 치는 거예요. 대부분의 곰팡이와 균류들은 비를 통해서 확산되니까 그걸 막기 위해서. 그런데 저는 ‘버릇처럼 습관화되어 버렸구나’ 생각했던 것이죠. 


트라우마까지 생긴 실패의 경험이 다른 농민들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네요.
그럼에도 그분들과 같은 방식으로 지을 수 없는 게 서민수 농부의 감농사고요. 

대부분의 고수들은 어느 시기에 어떤 병이 온다는 것을 대부분 알아요. 저도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은데 아직도 가끔 실패하죠. 약제가 안 맞을 수도 있고, 한살림에 납품을 해야 하니 사용하는 약제에 제한도 있죠. 다른 분들이 ‘이거 한방이면 싹 가버려’ 하는 약제나 일반 농약상에서 권장하는 약들을 쓰지 못하죠. 그렇다 보니 ‘내가 쓴 약이 제대로 방제가 되었을까’에 대한 염려가 늘 있죠. 다른 농부들에 비해서. 한편으로는 약제를 사용하는데 제한이 있고 약 치는 것도 정해진 횟수만큼만 하면 되니 제가 좀 게을러지는 면도 있어요(웃음). 방제작업을 많이 하면 솔직히 힘들거든요. 


유기농이나 무농약으로 농사짓는 분들은 자부심도 강하고 병에 대해 충분한 대비책이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오히려 더 바짝 긴장하시는군요. 

저보다 훨씬 먼저 유기농을 시작했고 19년 정도 감 농사를 지은 선배 농부도 그런 경험을 하시더라고요. 그분이야말로 농사에 대한 프라이드가 대단해서 ‘내가 하는 유기농 자재로 살포하면 충분히 방제가 가능해’ 확신을 가졌는데도 초가을에 겨울을 맞더라고요. 그래서 유기농이든지 무농약이든지 감 농사가 참 어렵습니다.



감밭을 둘러보는 이경원 작가 (좌), 서민수 농부 (우)



감은 한살림으로 주로 출하된다고 하면, 수박은 어떻게 판매하나요?

감은 80% 이상은 생협으로 출하되고 나머지는 지인 판매를 합니다. 수박은 계약결과에 따라 생협으로 나가기도 하고 계약이 결렬되면 공판으로 나갑니다. 아주 헐값으로.


고향으로 귀농하셨는데요, 정착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처음 마을에 들어왔을 때 돼지 2000두를 키우는 돈사가 있었어요. 악취가 너무 심해서 지금처럼 이렇게 앉아서 대화를 못 할 정도였어요. 군에 민원도 계속 넣고 10년 동안 싸워서 결국 2018년에 철거되었습니다. 돈사를 철거하는데 제가 주도적으로 운동을 했습니다. 그때 마을 주민들의 반응은 ‘자기 땅에서 자기 돈으로 자기 농사지어서 돈 버는데 네가 뭔데 그걸 하라 마라 하느냐’라는 식이었어요. 돈사로 인해 주민들이 어떤 고통을 받는지, 환경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보다 사적 소유물이 갖는 힘이 강하다는 의식을 다들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좀 힘들었습니다. 

 

10년 동안의 투쟁이라니 가끔 맡는 냄새도 힘든데 계속 같이 지내는 건 정말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겠네요.
다른 지역에서도 마을 어귀에 걸린 축사 반대 현수막을 본 적이 있습니다.

돈사에서 계속 악취가 나면 사람과 공존하기가 어려운데 몇 시간 단위로 환기를 하니 견딜만할 때도 있었어요. 저희 감 농장에 오겠다는 분들을 환기하는 시간대에 맞춰 오게 하느라고 엄청 애를 먹었습니다. 아마 축사와 관련해서 귀농, 귀촌하신 분들이 겪는 고통들이 상당히 많을 거예요. 이런 부분은 국가적으로도 단순히 거리 단위의 제한이 아니라 악취나 환경적인 요소들을 고려해서 장소를 물색하고 선정해서 밀집화시키는 시책을 펴야 한다고 봅니다. 세상이 변한만큼 정책도 변해야 하는데 ‘생산량 최고주의’ 사고에서 아직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현실이죠. 


귀향이긴 하지만 농촌에 살면서 ‘이런 건 좀 안타깝다’ 느끼는 순간도 있을 것 같은데요.

농촌 사회는 도시민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시골 어르신들은 ‘내가 다른 일을 못 해서 농사를 짓고 있다’는 사고가 굉장히 팽배해 있어요. 시골에서 직접 생활을 해보면 상부상조하며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공동체 의식도 있지만 자본주의에서 생산된 낡은 그림자도 안고 있고요. 그 속에서 농민들이 갖는 피해의식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받는 혜택에 대한 시기와 질투도 있어요. 요즘은 시골에도 농업분야 지원사업이라든가 보조 사업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선출직 지자체와 맞물리면서 농촌 사회가 문화적으로는 조금 피폐해진 것 같아요. 

시골에는 아직도 토호 세력들이 존재하고 그동안은 주민들이 이장이나 몇몇 사람에게 많이 의존해 왔어요. 그런데 귀농, 귀촌한 분들은 행정공무원들과 소통하는 방식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상당히 매끄럽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그동안 몇몇 사람에게 의지해 왔던 일들이 별거 아니라는 게 보이죠. 그러니 ‘우리는 그동안 왜 이렇게 살았나’ 싶은 약간의 박탈감을 느끼게 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위협을 느끼게 되죠.   


그 위협에 대한 대응이 귀농인들의 입장에서는 텃세로 느껴지는 거 아닐까요?

도시에서 귀농한 분들은 시골 사람들의 텃세라고 한다던데 저는 자기방어기제를 작동하는 거라고 봅니다. 저 역시 초등학교를 여기서 나왔지만 초등학교 동창들과 비교하면 농사도 농촌생활도 늦게 시작한 거죠. 가끔 자기방어기제가 일어나는 모습이 답답하고 안타깝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합니다. 그동안 살아온 경험치가 다르니까요. 



작업장에는 소쿠리와 컨테이너가 쌓여 있다.



정부와 지자체의 농업 정책에서 고민해주었으면 하는 것도 있겠죠? 농업정책에서도 농업인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소통하는 과정에서 농민들과 직접 만나고 공감하는 과정이 좀 더 필요한 것 같아요. 

군에서 농사나 지역과 관련되어 하려는 일들이 이장이나 관변단체를 통해서 진행되고  농민이나 주민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토호가 형성되어버리는 거죠. 지자체장이나 의원들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쓸모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게 좋겠지만 주민들 입장에서는 갈등의 요인입니다. 

한정된 사업이 주어졌을 때 이장이 알아서 정리해버리면 쉽게 정리가 되긴 하죠. 공개적으로 하면 너도 나도 하겠다고 할 테니까요. ‘갈등을 만들 필요가 있겠느냐’ 생각하는 것 같은데 사람들이 눈이 있는데 겪어보면 ‘저 사람은 그 사업에 합당하다’ 인정해 줄 거 아닙니까.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하는 게 어렵다고들 생각하는데 그런 갈등은 자주 겪으면 사실은 해소되는 거거든요. 오히려 몇몇 사람의 짐작 내지는 일방적인 정리로 가다보니까 지원이 편중되고 표현은 못 해도 응어리진 갈등의 요인들이 되어버리는 거죠. 


어딜 가든 토호, 기득권이 있다고는 하지만 듣고 있으니 조금 답답해지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촌에서 농민으로 사는 것에 즐거움이 있겠죠?

고독해질 줄 알면 시골에서 사는 게 참 좋아요. 제가 처음 시골에 살겠다고, 농사를 짓겠다고 하니까 저보다 먼저 시골살이를 했던 분이 외로워질 줄 알아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무슨 얘기인가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혼자서 지낼 수 있어야, 정말로 그래야만이 시골살이가 편안해요. 유혹으로부터도 좀 자유로워야 되고. 지나고 보니 저는 그걸 못 했던 것 같아요(웃음).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지원사업의 유혹이죠. 남들이 안 해서 나한테 주어진 지원사업인데도 그걸 모르고 국가에서 50%를 지원해주는 사업이 있다고 하니까 좋다고 받아서 했어요. 남들이 하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어요(웃음). 


귀향귀농, 귀촌인의 입장에서 본 지역에서의 토호 세력과 이주민들의 갈등에 대해 얘기해주셨는데요, 농부 서민수가 생각하는 지금 농촌과 농민들에게 닥친 가장 큰 위기는 무엇일까요? 

지금은 농업의 재생산 구조가 일어나지 않고 있어요. 후배 농민들이 계속 나와야 하는데 잘 되지 않고 있어요. 젊은 친구들이 농업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야 하거든요. 같이 일할 수 있는 동료들이 좀 있어야 하고. 농업노동자로 고통을 감수해내던 할머니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옛날에는 마을에 밭을 매고 순을 치고 경작활동을 하는 데에는 상부상조할 수 있는 인력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인력들이 줄어들어서 외국인에게 의존하고 있어요. 도시민들이 들어오기도 하는데 규칙적이지 못하고 불안정하죠. 그러니까 앞으로 농사짓기가 갈수록 어려워질 거예요. 

청년들이 농촌으로 와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려면 농사를 안전하게 짓게끔 젊은이들에게 할 수 있는 만큼 하라고 해야 하는데 그렇게 안 되잖아요. 젊은 친구들에게 무리한 노동력을 요구하면 당연히 농사 안 짓고 싶죠. 그러면 시골로 안 오죠. ‘이거 할 거 못 되는구나’하고 있는 것도 다 버리고 나가 버릴 거예요.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는 얘기죠. 적정한 수익을 보장해 주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 줘야죠.

농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꼭 필요한 부분이거든요. 우리 민족의 근간이 농업입니다. 우리가 유목민과 다른 건 지역에 정착해서 경작활동을 하면서 문화를 형성해 온 것인데, 농민이 사라지고 농업이 사라지면 우리 민족이나 우리 문화를 주장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립니다. 지금이 그런 상황인데도 농민들의 재생산 구조를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특히 농업정책을 개발하고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해야 할 사람들이 그런 고민을 안 해요. 그게 좀 안타깝습니다.


서민수 농부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요.

다행히 저는 아들이 농사를 짓겠다고 합니다. 도시에서 직장생활하면서 차별이나 부조리한 일들을 겪으면서 시골에서 농사짓는 아버지의 삶이 더 자유롭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요즘은 농업대학을 나오든지 국가에서 시행하는 교육과정을 거쳐야만 농민으로서 할 수 있는 조건들이 갖춰지더라고요. 아들도 농민이 되기 위해 받아야 할 일련의 교육들을 얼마 전에 마쳤어요. 

앞으로 저나 아들이나 서로의 가치관을 배워야 하겠지만 조금 염려스러운 건 시골에 살면 가난하게 사는 방법을 알아야 되는데 아직은 그걸 모르더라고요. 도시에서 했던 것들을 계속 하고자 하는 것 같아요.



2022년 봄, 연두색 조끼를 입은 서민수 농부가 감밭에 서 있다.



농사를 짓기로 결심한 아들과 지금 귀농, 귀촌을 하는 사람들에게 꼭 알아야 할 것, 혹은 생존 전략에 대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지금은 아들에게 가난하게 사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앞으로는 싸움의 방법을 가르치려고 해요. 젊은 친구들이 오면 농업인으로 충분히 대접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싸움도 불사해야 된다는, 그럴 필요가 있다는 것을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정책적으로든 구조적으로든 농민이 사람답게 대접받고 농업이 다른 산업들과 동등하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싸워내야 한다는 걸. 좋은 사례로 ‘우리가 마을의 냄새나는 돈사 몰아내지 않았느냐’라고.


싸움의 좋은 사례라...  좀 더 얘기 듣고 싶은데요.

처음에 다들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주민들 동원해서 집회신고하고 돈사 앞에서 시위도 하고 마을회관 앞에서 구호도 외치고 몇 번 했어요. 근방에서 고통받는 주민들마저도 처음에는 아무 말도 못하다가 시위 몇 번 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모이면 시위하러 가자고 했어요. 돈사 철거 시위로 주민들 스스로 내 의견을 얘기해도 되고 필요한 주장은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이전에는 개인적으로 냄새난다고 불평만 하다가 ‘명분이 있는 일이라면 불편을 호소해도 되는구나’ 알게 된 거죠. 저는 지자체장이 지역 여론을 듣는 자리에 나가서 계속 얘기를 했고, 다행히 우리 이장님이 적극적으로 동조해 주셨고요. 주민들이 나서서 시위를 하니까 지자체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적극적으로 나서줬어요. 이런 명분이 분명한 싸움이라면 저는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요. 

그래서 젊은 친구들이 시골에 오면 명분이 확실하고 당위성만 있다면 큰 조직과도 맞설 수 있어야 하고, 농민이 살 수 있는 길들을 열어가는 데 나서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그래도 구례나 지리산권에는 그런 분들이 좀 많아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지리산권 농부들이 좀 더 즐겁게 살 수 있을까요.

서로 연계되는 게 필요하죠. 지리산권이라고 하면 남원, 구례, 하동, 함양, 산청지역이 서로 조직적으로 연계될 수 있게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능이 생기면 좋겠죠.

그렇게만 된다면 구례 용방에 있는 아이쿱 같은 거대 조직들이 지역의 소농들과 농산물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끔 싸움을 해서라도 지역민들이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겠나 싶어요. 각자 따로 놀고 자기주장만 하면 안 되잖아요. 서로 스며들다 보면 뭔가 답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향에서 살아남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그동안 감 농사 이야기는 들을 만큼 들었으니 수박 농사는 어떻게 짓는지 들어볼 작정이었다. 

인터뷰는 보기 좋게 예상을 빗나갔다. 서민수 농부의 회고와 반성의 감 농사 분투기와 농촌에서 살아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한 맞서는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짐작건대 앞으로도 서민수 농부의 구례 생활은 그리 두루뭉술하지도, 평탄하지도 않을 것 같지만 누구보다 고독을 즐기며 의롭고 자유롭게 살아가리라 믿는다. 때로는 당당히 맞서며.




글 이경원

기획, 기록, 연결로 변화를 만드는 일과 사람을 돕는다. 2014년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궁금해서 찾았던 지리산시골살이학교 덕분에 지리산이음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때는 몰랐다. 7년이 지난 2021년 구례 남원 산청 하동 함양을 다니며 ‘농사를 업으로 하는 농부’들의 이야기를 글로 전하게 될 줄은.


사진/진행 이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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