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시골에서 농사짓고 민박하고 카페하며 3대가 함께 잘 살 수 있을까 궁금한 중장년 귀농, 귀촌 희망자
- <김석봉의 산촌일기>만 읽어본, 농부 김석봉의 산촌마을 일상이 궁금한 독자 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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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하는 거 빼고 조금씩이라도 농사는 다 합니다.”
함양군 마천면으로 귀촌한 지 15년. 김석봉 농부는 아내, 아들, 며느리, 손녀, 동물가족들과 함께 어울려 살며 산촌민박을 운영한다. 돌담이 정겨운 마을길을 따라 지리산 둘레길 핫플레이스 <안녕 카페>를 지나 한창 작업 중인 산 아래 밭으로 향했다. 카페 주인장이 알려준 ‘이 길이 맞나 싶을 때 우회전하세요’는 지도보다 정확했다. 오늘도 오전 5시 30분 고양이 밥주기로 하루를 시작한 김석봉 농부는 들깨 밭에 거름 주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지금이 인생 최고로 행복한 시기라는 농부 김석봉의 농사 이야기, 그리고 산촌마을에서 3대가 함께 사는 이야기를 들었다.
※ 김석봉 농부 인터뷰는 4월 중순에 진행되었습니다. 본문을 읽을 때 참고해 주세요.
함양군 마천면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촌민박을 운영하는 김석봉 농부
김석봉 농부의 농사이야기부터 듣고 싶습니다. 어떤 작물을 키우고 어떻게 판매하나요?
작물은 안 하는 게 없어요. 조금씩이라도 거의 다 하고 있어요. 콩, 들깨, 가장 많이 짓는 건 고구마, 그리고 양파, 감자입니다. 민박을 하다 보니까 닭백숙을 주문하는 분들이 있어서 우리가 1년 동안 사용할 황기도 재배해요. 농산물은 우리 블로그와 개인 SNS로 직거래 판매하고요. 한 해 농사 중에 판매 수익으로는 고구마가 제일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그 다음이 고추, 감자와 양파 순이고 그 외에는 조금씩 조금씩 주문을 받아 판매합니다.
화학비료 없이 제대로 키운 김석봉표 농산물이 궁금하다면 블로그 산촌민박의 <소박한 장터>를 방문해보자. ‘다섯 식구 사는 이야기’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드니 주의가 필요하다.
블로그 산촌민박 바로가기 https://blog.naver.com/qkqwkdtk
농사 규모는 어느 정도 되는지요.
규모로 따지면 고사리 밭까지 합해서 3천 6백 평 정도 됩니다.
올해가 농사 짓는 게 제일 많아요. 그러니까 바쁘지요. 일이 산더미입니다(웃음).
농사는 혼자 지으시죠? 오늘은 어떤 작업 중인가요?
네. 주로 혼자서 합니다. 오늘은 아침에 일찍 고사리 꺾어 놓고, 내일쯤 새로 장만한 들깨 밭에 경운을 해도 되겠다 싶어서 거름 까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환경운동을 오래 하셨죠? 함양으로 귀촌한 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이제 15년 되었습니다. 들어와서 처음 5년은 맡은 역할들이 있어서 바깥일을 했어요. 내려온 이듬해 사단법인 숲길 상임이사를 맡아 지리산 둘레길 1구간부터 5구간까지 만드는 일을 했고, 그 이듬해에는 환경운동연합 대표를 3년 정도 맡아 했어요. 2012년에는 녹색당을 창당하면서 공동운영위원장을 맡아 일을 했고요.
그럼 본격적인 농부가 된 지는 10년 정도 되신 건가요?
그렇죠. 그 전에는 4, 5백 평 정도로 조금씩 짓는 소농이었죠.
농부가 된 지금, 행복하십니까?
행복하죠. 최고로 행복한 시기지요.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기. 정치적 상황만 생각하지 않으면 걱정할 게 없으니까요(모두 웃음). 그것 말고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요. 자식이 많아 자식 걱정을 하겠어요? 아무 걱정이 없어요.
김석봉 농부와 인터뷰 내내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반려견의 뒷모습
김석봉 농부의 산촌민박 블로그의 다섯 가족사는 이야기는 농촌에서의 삶에 로망을 갖게 한다. 한 편의 동시를 낭독하듯 나도 모르게 운율에 맞춰 읽게 된다. 하지만 한국농정신문에 연재한 <농민칼럼>이나 오마이뉴스의 <김석봉의 산촌일기>에는 농촌, 농업, 농민에 대한 진지하고도 깊은 고민이 투박하지만 날카롭게 전해진다. 누군가는 엄청 찔릴 것이다. 이런 걸 촌철살인이라고 하나.
이 마을에는 어떤 인연이 있어 오게 되었나요?
인연은 없었어요. 그냥 좋아서 왔어요. 생명연대운영위원장을 하고 있을 때 지인을 따라 처음 왔어요. 동네에 빈집이 있다고 해서 보러 가는데 저도 그냥 따라갔지요. 2년 동안 비어있던 집이라 상태가 엉망이었어요. 시골집이니까 곳곳에 돼지막(돼지우리의 방언)도 있고 퇴비간도 있고 어수선했죠. 그런데 집에 들어가니까 너—무 느낌이 좋았어요. 그길로 서울에 있는 아내를 내려오라고 했어요. 그 다음 주에 둘이 가서 다시 봤는데 그때도 좋은 거예요. 금액을 정하고 계약서를 쓰고 24일 만에 이 집으로 이사 왔어요.
귀농, 귀촌을 생각하면서 집을 알아보고 있던 것도 아닌데 일사천리로 이주가 진행된 건가요?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나요?
‘시골에 들어가야지’ 하고 여기저기 집을 알아보고 다닌 건 전혀 아니었어요. 아내도 너무 좋다고 했고요. 싫다고 하면 못 왔지요. 이 집터가 우리를 끌어들인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좋은 날만 계속 되고 있어요. 우연이 인연이 되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까지 왔네요.
농사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기후위기인데요, 환경운동가가 아닌 10년차 농부로서 기후위기, 실감하십니까?
지금 고사리를 심어 놓은 밭에 콩을 심으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콩은 6월 초순까지 밭갈이를 하면 되니까 아직 여유가 있거든요. 오늘 아침에 밭에서 거름을 내는데 개구리들이 뛰어다니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밭갈이를 해도 되겠구나’ 생각했어요. 지난해에도 풀이 많이 자라 있는데도 밭이랑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는 걸 보고 ‘드디어 개구리들이 나왔구나, 이제 밭갈이를 해도 되겠구나’ 했었고요.
그런데 날씨가 따뜻해져서 동네 사람들의 밭갈이 하는 시기가 점점 빨라져요. 땅속 생물들이 미처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밭갈이를 해버리는 거예요. 물론 날씨가 따뜻해지면 땅속 생물들도 빨리 나오겠지만 모두 그런 것만은 아니잖아요. 갑자기 서리가 내리기도 하니까요. 생물들은 그런 것에 굉장히 민감하잖아요. 이런 현상을 보면서 ‘생물들이 기후에 따라 굉장히 위협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그 뿐만이 아니죠. 지난해에는 눈이 거의 안 왔잖아요. 그래서 고사리 꺾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눈이 와서 고사리 대를 적당히 납작하게 눌러줘야 순이 뚫고 올라오는데 대가 그냥 뻣뻣하게 서 있으니까 고사리 순이 올라와도 눈에 잘 안 보이는 거예요. 아주 단순하지만 고사리 꺾으면서 ‘눈이 안 오면 고사리 꺾는 것도 큰일이네’ 했다니까요(웃음).
밭일을 하다가 땅 속에서 개구리가 자고 있어 깜짝 놀랐다는 분 얘기를 들은 적 있어요.
우리도 그래요. 감자는 농사를 일찍 시작하니까 밭을 장만하면 반드시 잠자는 개구리가 나와요. 그럴 때는 한쪽에 다시 묻어주기는 하는데 자기 숨구멍으로 뚫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상황이 되면 참 안타깝지요.
기후 위기가 농부들의 농사 뿐 아니라 땅속 생물에게도 큰 위협이네요. 15년 전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달라진 게 또 있을까요?
우리 마을은 옻 순을 따서 파는 시기가 있어요. 한 번 나오기 시작하면 3일 이내에 모두 따서 팔아야 해요. 순이 뻣뻣해지면 전혀 못 쓰니까요. 처음에 왔을 때 마을에 인터넷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이웃집 옻 순을 제가 많이 팔아줬거든요. 처음에는 4월 27일부터 4월 말 무렵에 옻 순을 따서 보냈는데 지금은 일주일 정도 빨라진 느낌이 들어요. 4, 5년 전만 해도 주로 4월 25일 전, 후였는데 지금은 내일(인터뷰일 기준 4월 21일)이라도 따오겠다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것들을 보면 모든 게 많이 앞당겨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후위기 이야기로 다소 심각해진 분위기를 깨는 전화벨이 울린다.
“알았어. 아직. 알았어. 예... 그래요. 알았습니다.” 전화의 주인공은 블로그에도 자주 등장하는 시끄러비 아지매였다. 제사라서 전을 굽고 있으니 일 마치면 내려와서 꼭 오라고. 김석봉 농부는 마을에서 관계가 그리 넓지 않다고 했지만 의리를 지켜야 하는 이웃들에게는 역시 인기쟁이였다.
퇴비를 뿌릴 준비를 하고 있는 밭
지금까지 조금씩 농사규모를 늘려온 것 같은데요, 앞으로 농사규모를 더 키울 계획이 있나요?
아니오. 이제 줄일 거예요. 그런데 농부가 자기 농사를 줄이는 게 쉽지 않아요.
자기 밭 옆에 좋은 밭이 있는데 농사를 짓지 않고 있으면 ‘저 밭이 좋은데 왜 올해 농사를 짓지 않을까’ 궁금해져요. 농사를 짓지 않는 게 아까워서 밭주인에게 이야기해서 또 늘리게 돼요. 저도 그렇게 올해 600평을 또 늘렸어요. 우리 밭 바로 아래에 있는 밭인데 아주 넓고 좋아요. 그런데 밭갈이를 안 하더라고요. 왜 안하냐고 물어보니까 저더러 하려면 하라고 해서 그냥 했어요(웃음).
그래서 올해 농사가 늘었군요. 새로 장만한 600평에는 어떤 작물을 심었나요?
200평 정도에는 강낭콩*을 심었어요. 강낭콩은 여름에 거두는 콩이니까. 지금 싹이 잘 올라왔어요. 나머지 2군데는 서리태를 심었어요. 서리태는 게으른 농부가 하기에 좋아요. 왜냐하면 추수가 늦으니까. 가을에 한꺼번에 가을걷이 하려면 힘들잖아요. 서리태는 11월에 서리가 내리고 난 한참 뒤에 한가하게 추수해도 괜찮거든요.
*'강낭콩'은 표준어로 원래 '강남콩(江南-)'에서 온 말이지만 어원이 분명하지 않게 되어 '강낭콩'으로 쓰고 있습니다.
3대가 같이 사는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아들 부부는 농사 대신 카페를 운영하는데요, 대부분은 가족이 함께 농사를 많이 짓잖아요.
아들은 ‘농(農)’의 니은 자도 모릅니다(웃음).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살아야지 내가 ‘농사를 지어라 말아라’ 할 게 있나요.
같이 사는 건 어떠세요?
좋지요. 같이 사니까 내 마음이 편합니다. 아무리 좋은 직업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부모는 자식과 떨어져 있으면 걱정을 할 수밖에 없잖아요.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별의별 생각을 할 거 아니에요. 내 눈앞에 보이니까 내 마음이 편하죠.
불편하지는 않은가요?
불편한 점은 크게 없어요. 글쎄.... 여름에 웃통 벗고 누워 있기가 좀 그래서 그렇지 다른 건 불편함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자식하고 같이 살면 짐 된다’는 말도 많이 하는데 같이 살아보면 달라요. 사람들이 단순하게 듣고 본 것을 마치 자기 일인 양 여기는 경우가 참 많아요. 고부간 갈등이 없는 드라마가 없죠. 그 이미지가 완전히 고착되어서 무조건 고부가 만나면 갈등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나는 아주 만족해요.
밥이 아주 맛있기로 소문이 난 농가민박도 운영하시는데요, 경제적 수익은 농사와 민박 어느 쪽이 더 큰가요?
경제적 수익은 민박이 훨씬 크죠. 우리 민박이 시설이 아주 좋은 것이 아닌데도 손님이 많은 편입니다. 편안하게 하룻밤 지낼 수 있고 밥도 해줘서 그런지 민박 손님이 많아요.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요.
농사는 늘 시간에 쫓기고 육체적 노동을 해야 하고 판로에 가격까지 별의별 걱정을 하잖아요. 민박은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는 건데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는 게 힘들다 할지라도 오늘 온 손님에게만 정성을 다하면 걱정할 게 없어요. 우리는 민박이 경제적으로도 굉장히 큰 버팀목이죠.
귀농, 귀촌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시골에서 조그맣게 텃밭농사하면서 민박이나 할까?’생각하지만 쉽지 않잖아요.
요즘은 우리처럼 농가민박을 찾아보기가 참 어려워요. 대부분 펜션형이고 숙박 예약사이트로 관계가 만들어져 버리니 어떤 손님이 오는지도 잘 몰라요. 글쎄요. 우리 민박이 그랬다면 아마 손님들도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산촌민박은 지난해부터 화요일, 수요일을 정기 휴일로 정했다. 시골농가민박이 정기휴일이라니. 그것도 일주일에 이틀씩이나. 실로 대단한 결정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정기휴일에는 꼭 쉬겠다는 주인장의 굳은 결심이 지켜지기를 응원한다.
코로나 때문에 많이 뜸해지긴 했지만 전에는 저녁에 밥 같이 먹으면서 잔치처럼 모르는 사람들끼리 어우러져서 통성명도 하고, 고기도 구워서 나눠 먹고, 술도 나눠 먹었어요. 그게 너무 좋았어요. 저도 젊은이들과 어울려서 술도 한 잔씩 얻어 마시고 우리 창고에 있는 술도 내주곤 했죠.
산촌민박의 매력은 편안한 잠, 맛있는 밥, 나누는 술. 자연스러운 관계로 정리가 된다. 지붕에 올라 바라보는 지리산자락의 풍경도 산촌민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다.
퇴비를 주는 김석봉 농부
조심스럽게 여쭤 봅니다. 요즘 정부 지원 사업이나 보조금 사업이 많아지면서 마을 주민 간 갈등도 많다고 들었어요.
자기 혼자 농사짓고 살면 갈등이 일어날 이유가 없지요. 농촌에서의 갈등은 마을에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데 누군가 거기에 도전한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견제가 들어오면서 생깁니다. 예를 들어 주민들끼리 영농조합을 설립해서 판매망도 만들고 마을 공동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 보자고 하면 그 세력이 커질 것 같으니까 견제가 들어와요. 그러면 살기가 피곤해지는 거죠.
15년 동안 살면서 김석봉 농부가 마을에서 겪었던 갈등도 있겠네요.
저도 많이 겪었죠. 지금은 마을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호적으로 잘 지내던 동네 사람들, 지금도 나와 의리를 지키고 지내는 사람들도 동회에서 나를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발언을 할 수가 없어요. 그게 시골마을입니다. 여러 일을 겪으면서 ‘마을은 천지가 개벽하지 않고서야 바뀔 수가 없구나’ 생각했어요.
김석봉 농부는 2012년 외부 활동을 정리하고 마을주민들과 지역의 자원을 활용해 공동사업을 도모하고자 했다. 2013년, 마을 동회에서 마을기업과 마을공동사업을 제안하는 설명회를 가졌고, 2014년에는 우여곡절 끝에 출범한 마을기업에서 휴업상태였던 산촌생태마을 운영을 시작했다. 사비를 투자해 시작한 마을사업은 꽤 성공적이었지만 2015년 석연치 않은 마을주민의 민원과 고발로 조사를 받고 기소유예 처분까지 받기도 했다. 2016년에는 농어촌 체험휴양마을로 지정 받아 마을과 주민들에게 꽤 많은 수익을 가져다주었지만 2016년 10월 결산을 끝으로 마을 일을 그만두었다. 농부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결산자료와 영수증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귀농, 귀촌을 하려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조금은 폐쇄적이고 기득권 중심으로 돌아가는 농촌 문화라고 해요.
요즘 우리 마을도 귀향한 사람들이 많이 늘었어요. 제 또래이거나 조금 젊은 층이 많이 들어왔어요. 그럼 마을이 좀 젊어지고 변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마찬가지예요.
귀향한 사람들이 저를 보면 ‘낯선 사람이 들어와 사네?’인 거예요. 귀향한 사람들끼리는 어제 왔든, 오늘 왔든 서로 동지예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40년이라는 세월을 각자 떨어져 살았는데도 만나면 동지인거죠. 자기 아버지와 나는 같은 마을에서 15년 동안 관계를 맺고 살아 왔지만 그와 나는 지금부터 관계가 시작되는 거예요.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귀농, 귀촌인들이 우리 마을에 들어와서 살면서 자기들끼리만 어울린다는 시선도 있지요.
저도 처음에는 귀농, 귀촌한 사람들끼리는 잘 모이면서 동네 사람들과는 잘 안 어울리는 걸 보면 ‘꼭 저렇게 살아야 하나? 그래도 동네 이웃들과 잘 어울려야지’ 했는데 제가 살아보니까 오히려 그렇게 만나는 게 서로에게 더 편해요. 동네 사람들은 항상 보니까 농사 이야기도 하고, 술도 한 잔 나누기도 하지만 다른 대화를 할 수가 없어요. 차라리 저 산 너머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흉도 보고 무슨 이야기든 할 수가 있어요.
3대가 함께 살고 있긴 하지만 2대인 아들과 며느리가 느끼는 시골살이는 더 힘들 수도 있겠네요.
더 힘들겠지요. 제가 항상 하는 걱정이 ‘내가 만약에 여기를 떠난다면 예를 들어서 제주도 감귤농장에 다섯 달 동안이라도 일하러 가버리면 우리 가족이 마을에서 보이지 않는 이런 저런 견제들을 견디면서 살아낼 수 있을까?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예요. 아무래도 지금은 내가 있으니까 함부로 못 하는 부분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나는 나이도 있고 마을에서 관계를 좀 해 온 부분이 있으니까.
쉽지 않군요. 지금 이 순간에도 지역살이, 시골살이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을까요?
자신의 의지가 굉장히 중요하겠지만 농촌이나 농촌사회를 건강한 공동체로 일구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내려온다면 글쎄요... ‘아마 안 될걸?’ 이라고 얘기하고 싶네요. 안 될 확률이 95%? 99%? 정말입니다. 그건 어느 마을로 가나 마찬가지일겁니다.
시골이라고 시기심이 없을 것 같아요? 칭찬에 인색하고 공짜가 없는 곳입니다. 처음에 와서 이웃집 할머니가 분무기 지고 농약을 치러 가는 걸 보는 게 너무 안타까워서 도와드렸더니 저녁에 꽁꽁 언 고기 한 덩이를 집으로 가져 왔더라고요. 고맙다고.
그걸 어떻게 받아요. 내가 선의를 베풀어도 그걸 그냥 선의로 받아주지 않아요. 그래서 함부로 도와주겠다는 말을 못 해요. 도와주면 ‘저 사람 진짜 고맙네’하는 마음으로 받아주면 좋은데 해 줬으니까 또 뭔가를 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까 서로에게 부담이죠.
차라리 안 보고 지나가는 경우가 더 많아요. 이제는. 그게 우리 마을의 현실입니다.
지리산권 농부들에게 농사이야기도 듣지만 우리가 가진 시골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조금씩 깨지고 있어요.
지리산권에서 즐겁게 농사지으며 함께 모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교류도 좋고, 놀이도 좋고요.
그런 게 있으면 좋긴 하겠죠. 그런데 다들 지향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고 삶의 가치관에도 차이가 있으니까 오히려 그런 교류나 관계가 더 큰 장애나 벽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귀촌을 하거나 귀농을 한 사람들도 각자가 다 달라요. 농사도 각자 자기 방식대로 짓잖아요. 하나로 엮이고 묶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냥 자유롭게 만나는 게 더 편안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퇴비만으로 농사를 지어왔어요. 화학비료는 아직까지 한 톨도 내 손에 묻혀 보지도 않았으니까. 퇴비만 갖고 하는데도 어떤 사람은 퇴비 많이 한다고 뭐라고 합니다. 또 내가 멀칭을 하면 누군가는 왜 멀칭을 하느냐고 뭐라고 해요. 멀칭 안 하고 이 나이에 어떻게 농사를 짓습니까, 그 많은 풀을 어떻게 하며, 이미 종자 개량이 돼서 멀칭 하지 않은 노지에서는 고추를 키울 수도 없고 키운다고 해도 제대로 수확량을 낼 수가 없어요. 그걸 감수하면서 일할 노동력도 없고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부담돼요. ‘자유롭게, 편안하게 얼굴 보고 그러면 됐지’ 이런 생각이 들어요.
환경운동가로 지리산권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유명인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할까? 개인 블로그부터 그동안 연재한 칼럼, ‘함양 김석봉’을 검색하자 쏟아지는 다양한 정보들을 읽으며 살짝 주눅 들기까지 했다. 과연 사진 속의 활짝 웃는 표정을 우리도 볼 수 있을까? 걱정했다.
괜히 긴장했다. 굳이 안분지족(安分知足), 안빈낙도(安貧樂道)같은 단어를 갖다 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풍요롭고 적당히 유쾌하고 호쾌한 삶이다. 듣는 내내 즐거웠고 알 수 없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날 우리가 함께 마주한 풍경 때문인지, 집에서 함께 지내는 동물가족과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주는 농부의 다정함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손과 땅을 잇는 지리산권 농부들과의 마지막 만남이 김석봉 농부여서 행운이었다. 김석봉 농부와 가족 모두의 행복을 기원한다.
7월의 마지막 일요일 저녁, KBS1-TV <동물극장 단짝>에 반갑고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인터뷰에서 미처 담지 못한 김석봉 농부와 동물가족 이야기는 방송을 통해 확인해 주시길.
글 이경원
기획, 기록, 연결로 변화를 만드는 일과 사람을 돕는다. 2014년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궁금해서 찾았던 지리산시골살이학교 덕분에 지리산이음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때는 몰랐다. 7년이 지난 2021년 구례 남원 산청 하동 함양을 다니며 ‘농사를 업으로 하는 농부’들의 이야기를 글로 전하게 될 줄은.
사진/진행 이현주
🌱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안하는 거 빼고 조금씩이라도 농사는 다 합니다.”
함양군 마천면으로 귀촌한 지 15년. 김석봉 농부는 아내, 아들, 며느리, 손녀, 동물가족들과 함께 어울려 살며 산촌민박을 운영한다. 돌담이 정겨운 마을길을 따라 지리산 둘레길 핫플레이스 <안녕 카페>를 지나 한창 작업 중인 산 아래 밭으로 향했다. 카페 주인장이 알려준 ‘이 길이 맞나 싶을 때 우회전하세요’는 지도보다 정확했다. 오늘도 오전 5시 30분 고양이 밥주기로 하루를 시작한 김석봉 농부는 들깨 밭에 거름 주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지금이 인생 최고로 행복한 시기라는 농부 김석봉의 농사 이야기, 그리고 산촌마을에서 3대가 함께 사는 이야기를 들었다.
※ 김석봉 농부 인터뷰는 4월 중순에 진행되었습니다. 본문을 읽을 때 참고해 주세요.
함양군 마천면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촌민박을 운영하는 김석봉 농부
김석봉 농부의 농사이야기부터 듣고 싶습니다. 어떤 작물을 키우고 어떻게 판매하나요?
작물은 안 하는 게 없어요. 조금씩이라도 거의 다 하고 있어요. 콩, 들깨, 가장 많이 짓는 건 고구마, 그리고 양파, 감자입니다. 민박을 하다 보니까 닭백숙을 주문하는 분들이 있어서 우리가 1년 동안 사용할 황기도 재배해요. 농산물은 우리 블로그와 개인 SNS로 직거래 판매하고요. 한 해 농사 중에 판매 수익으로는 고구마가 제일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그 다음이 고추, 감자와 양파 순이고 그 외에는 조금씩 조금씩 주문을 받아 판매합니다.
화학비료 없이 제대로 키운 김석봉표 농산물이 궁금하다면 블로그 산촌민박의 <소박한 장터>를 방문해보자. ‘다섯 식구 사는 이야기’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드니 주의가 필요하다.
농사 규모는 어느 정도 되는지요.
규모로 따지면 고사리 밭까지 합해서 3천 6백 평 정도 됩니다.
올해가 농사 짓는 게 제일 많아요. 그러니까 바쁘지요. 일이 산더미입니다(웃음).
농사는 혼자 지으시죠? 오늘은 어떤 작업 중인가요?
네. 주로 혼자서 합니다. 오늘은 아침에 일찍 고사리 꺾어 놓고, 내일쯤 새로 장만한 들깨 밭에 경운을 해도 되겠다 싶어서 거름 까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환경운동을 오래 하셨죠? 함양으로 귀촌한 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이제 15년 되었습니다. 들어와서 처음 5년은 맡은 역할들이 있어서 바깥일을 했어요. 내려온 이듬해 사단법인 숲길 상임이사를 맡아 지리산 둘레길 1구간부터 5구간까지 만드는 일을 했고, 그 이듬해에는 환경운동연합 대표를 3년 정도 맡아 했어요. 2012년에는 녹색당을 창당하면서 공동운영위원장을 맡아 일을 했고요.
그럼 본격적인 농부가 된 지는 10년 정도 되신 건가요?
그렇죠. 그 전에는 4, 5백 평 정도로 조금씩 짓는 소농이었죠.
농부가 된 지금, 행복하십니까?
행복하죠. 최고로 행복한 시기지요.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기. 정치적 상황만 생각하지 않으면 걱정할 게 없으니까요(모두 웃음). 그것 말고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요. 자식이 많아 자식 걱정을 하겠어요? 아무 걱정이 없어요.
김석봉 농부와 인터뷰 내내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반려견의 뒷모습
김석봉 농부의 산촌민박 블로그의 다섯 가족사는 이야기는 농촌에서의 삶에 로망을 갖게 한다. 한 편의 동시를 낭독하듯 나도 모르게 운율에 맞춰 읽게 된다. 하지만 한국농정신문에 연재한 <농민칼럼>이나 오마이뉴스의 <김석봉의 산촌일기>에는 농촌, 농업, 농민에 대한 진지하고도 깊은 고민이 투박하지만 날카롭게 전해진다. 누군가는 엄청 찔릴 것이다. 이런 걸 촌철살인이라고 하나.
이 마을에는 어떤 인연이 있어 오게 되었나요?
인연은 없었어요. 그냥 좋아서 왔어요. 생명연대운영위원장을 하고 있을 때 지인을 따라 처음 왔어요. 동네에 빈집이 있다고 해서 보러 가는데 저도 그냥 따라갔지요. 2년 동안 비어있던 집이라 상태가 엉망이었어요. 시골집이니까 곳곳에 돼지막(돼지우리의 방언)도 있고 퇴비간도 있고 어수선했죠. 그런데 집에 들어가니까 너—무 느낌이 좋았어요. 그길로 서울에 있는 아내를 내려오라고 했어요. 그 다음 주에 둘이 가서 다시 봤는데 그때도 좋은 거예요. 금액을 정하고 계약서를 쓰고 24일 만에 이 집으로 이사 왔어요.
귀농, 귀촌을 생각하면서 집을 알아보고 있던 것도 아닌데 일사천리로 이주가 진행된 건가요?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나요?
‘시골에 들어가야지’ 하고 여기저기 집을 알아보고 다닌 건 전혀 아니었어요. 아내도 너무 좋다고 했고요. 싫다고 하면 못 왔지요. 이 집터가 우리를 끌어들인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좋은 날만 계속 되고 있어요. 우연이 인연이 되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까지 왔네요.
농사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기후위기인데요, 환경운동가가 아닌 10년차 농부로서 기후위기, 실감하십니까?
지금 고사리를 심어 놓은 밭에 콩을 심으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콩은 6월 초순까지 밭갈이를 하면 되니까 아직 여유가 있거든요. 오늘 아침에 밭에서 거름을 내는데 개구리들이 뛰어다니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밭갈이를 해도 되겠구나’ 생각했어요. 지난해에도 풀이 많이 자라 있는데도 밭이랑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는 걸 보고 ‘드디어 개구리들이 나왔구나, 이제 밭갈이를 해도 되겠구나’ 했었고요.
그런데 날씨가 따뜻해져서 동네 사람들의 밭갈이 하는 시기가 점점 빨라져요. 땅속 생물들이 미처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밭갈이를 해버리는 거예요. 물론 날씨가 따뜻해지면 땅속 생물들도 빨리 나오겠지만 모두 그런 것만은 아니잖아요. 갑자기 서리가 내리기도 하니까요. 생물들은 그런 것에 굉장히 민감하잖아요. 이런 현상을 보면서 ‘생물들이 기후에 따라 굉장히 위협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그 뿐만이 아니죠. 지난해에는 눈이 거의 안 왔잖아요. 그래서 고사리 꺾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눈이 와서 고사리 대를 적당히 납작하게 눌러줘야 순이 뚫고 올라오는데 대가 그냥 뻣뻣하게 서 있으니까 고사리 순이 올라와도 눈에 잘 안 보이는 거예요. 아주 단순하지만 고사리 꺾으면서 ‘눈이 안 오면 고사리 꺾는 것도 큰일이네’ 했다니까요(웃음).
밭일을 하다가 땅 속에서 개구리가 자고 있어 깜짝 놀랐다는 분 얘기를 들은 적 있어요.
우리도 그래요. 감자는 농사를 일찍 시작하니까 밭을 장만하면 반드시 잠자는 개구리가 나와요. 그럴 때는 한쪽에 다시 묻어주기는 하는데 자기 숨구멍으로 뚫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상황이 되면 참 안타깝지요.
기후 위기가 농부들의 농사 뿐 아니라 땅속 생물에게도 큰 위협이네요. 15년 전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달라진 게 또 있을까요?
우리 마을은 옻 순을 따서 파는 시기가 있어요. 한 번 나오기 시작하면 3일 이내에 모두 따서 팔아야 해요. 순이 뻣뻣해지면 전혀 못 쓰니까요. 처음에 왔을 때 마을에 인터넷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이웃집 옻 순을 제가 많이 팔아줬거든요. 처음에는 4월 27일부터 4월 말 무렵에 옻 순을 따서 보냈는데 지금은 일주일 정도 빨라진 느낌이 들어요. 4, 5년 전만 해도 주로 4월 25일 전, 후였는데 지금은 내일(인터뷰일 기준 4월 21일)이라도 따오겠다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것들을 보면 모든 게 많이 앞당겨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후위기 이야기로 다소 심각해진 분위기를 깨는 전화벨이 울린다.
“알았어. 아직. 알았어. 예... 그래요. 알았습니다.” 전화의 주인공은 블로그에도 자주 등장하는 시끄러비 아지매였다. 제사라서 전을 굽고 있으니 일 마치면 내려와서 꼭 오라고. 김석봉 농부는 마을에서 관계가 그리 넓지 않다고 했지만 의리를 지켜야 하는 이웃들에게는 역시 인기쟁이였다.
퇴비를 뿌릴 준비를 하고 있는 밭
지금까지 조금씩 농사규모를 늘려온 것 같은데요, 앞으로 농사규모를 더 키울 계획이 있나요?
아니오. 이제 줄일 거예요. 그런데 농부가 자기 농사를 줄이는 게 쉽지 않아요.
자기 밭 옆에 좋은 밭이 있는데 농사를 짓지 않고 있으면 ‘저 밭이 좋은데 왜 올해 농사를 짓지 않을까’ 궁금해져요. 농사를 짓지 않는 게 아까워서 밭주인에게 이야기해서 또 늘리게 돼요. 저도 그렇게 올해 600평을 또 늘렸어요. 우리 밭 바로 아래에 있는 밭인데 아주 넓고 좋아요. 그런데 밭갈이를 안 하더라고요. 왜 안하냐고 물어보니까 저더러 하려면 하라고 해서 그냥 했어요(웃음).
그래서 올해 농사가 늘었군요. 새로 장만한 600평에는 어떤 작물을 심었나요?
200평 정도에는 강낭콩*을 심었어요. 강낭콩은 여름에 거두는 콩이니까. 지금 싹이 잘 올라왔어요. 나머지 2군데는 서리태를 심었어요. 서리태는 게으른 농부가 하기에 좋아요. 왜냐하면 추수가 늦으니까. 가을에 한꺼번에 가을걷이 하려면 힘들잖아요. 서리태는 11월에 서리가 내리고 난 한참 뒤에 한가하게 추수해도 괜찮거든요.
*'강낭콩'은 표준어로 원래 '강남콩(江南-)'에서 온 말이지만 어원이 분명하지 않게 되어 '강낭콩'으로 쓰고 있습니다.
3대가 같이 사는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아들 부부는 농사 대신 카페를 운영하는데요, 대부분은 가족이 함께 농사를 많이 짓잖아요.
아들은 ‘농(農)’의 니은 자도 모릅니다(웃음).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살아야지 내가 ‘농사를 지어라 말아라’ 할 게 있나요.
같이 사는 건 어떠세요?
좋지요. 같이 사니까 내 마음이 편합니다. 아무리 좋은 직업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부모는 자식과 떨어져 있으면 걱정을 할 수밖에 없잖아요.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별의별 생각을 할 거 아니에요. 내 눈앞에 보이니까 내 마음이 편하죠.
불편하지는 않은가요?
불편한 점은 크게 없어요. 글쎄.... 여름에 웃통 벗고 누워 있기가 좀 그래서 그렇지 다른 건 불편함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자식하고 같이 살면 짐 된다’는 말도 많이 하는데 같이 살아보면 달라요. 사람들이 단순하게 듣고 본 것을 마치 자기 일인 양 여기는 경우가 참 많아요. 고부간 갈등이 없는 드라마가 없죠. 그 이미지가 완전히 고착되어서 무조건 고부가 만나면 갈등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나는 아주 만족해요.
밥이 아주 맛있기로 소문이 난 농가민박도 운영하시는데요, 경제적 수익은 농사와 민박 어느 쪽이 더 큰가요?
경제적 수익은 민박이 훨씬 크죠. 우리 민박이 시설이 아주 좋은 것이 아닌데도 손님이 많은 편입니다. 편안하게 하룻밤 지낼 수 있고 밥도 해줘서 그런지 민박 손님이 많아요.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요.
농사는 늘 시간에 쫓기고 육체적 노동을 해야 하고 판로에 가격까지 별의별 걱정을 하잖아요. 민박은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는 건데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는 게 힘들다 할지라도 오늘 온 손님에게만 정성을 다하면 걱정할 게 없어요. 우리는 민박이 경제적으로도 굉장히 큰 버팀목이죠.
귀농, 귀촌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시골에서 조그맣게 텃밭농사하면서 민박이나 할까?’생각하지만 쉽지 않잖아요.
요즘은 우리처럼 농가민박을 찾아보기가 참 어려워요. 대부분 펜션형이고 숙박 예약사이트로 관계가 만들어져 버리니 어떤 손님이 오는지도 잘 몰라요. 글쎄요. 우리 민박이 그랬다면 아마 손님들도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산촌민박은 지난해부터 화요일, 수요일을 정기 휴일로 정했다. 시골농가민박이 정기휴일이라니. 그것도 일주일에 이틀씩이나. 실로 대단한 결정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정기휴일에는 꼭 쉬겠다는 주인장의 굳은 결심이 지켜지기를 응원한다.
코로나 때문에 많이 뜸해지긴 했지만 전에는 저녁에 밥 같이 먹으면서 잔치처럼 모르는 사람들끼리 어우러져서 통성명도 하고, 고기도 구워서 나눠 먹고, 술도 나눠 먹었어요. 그게 너무 좋았어요. 저도 젊은이들과 어울려서 술도 한 잔씩 얻어 마시고 우리 창고에 있는 술도 내주곤 했죠.
산촌민박의 매력은 편안한 잠, 맛있는 밥, 나누는 술. 자연스러운 관계로 정리가 된다. 지붕에 올라 바라보는 지리산자락의 풍경도 산촌민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다.
퇴비를 주는 김석봉 농부
조심스럽게 여쭤 봅니다. 요즘 정부 지원 사업이나 보조금 사업이 많아지면서 마을 주민 간 갈등도 많다고 들었어요.
자기 혼자 농사짓고 살면 갈등이 일어날 이유가 없지요. 농촌에서의 갈등은 마을에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데 누군가 거기에 도전한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견제가 들어오면서 생깁니다. 예를 들어 주민들끼리 영농조합을 설립해서 판매망도 만들고 마을 공동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 보자고 하면 그 세력이 커질 것 같으니까 견제가 들어와요. 그러면 살기가 피곤해지는 거죠.
15년 동안 살면서 김석봉 농부가 마을에서 겪었던 갈등도 있겠네요.
저도 많이 겪었죠. 지금은 마을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호적으로 잘 지내던 동네 사람들, 지금도 나와 의리를 지키고 지내는 사람들도 동회에서 나를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발언을 할 수가 없어요. 그게 시골마을입니다. 여러 일을 겪으면서 ‘마을은 천지가 개벽하지 않고서야 바뀔 수가 없구나’ 생각했어요.
김석봉 농부는 2012년 외부 활동을 정리하고 마을주민들과 지역의 자원을 활용해 공동사업을 도모하고자 했다. 2013년, 마을 동회에서 마을기업과 마을공동사업을 제안하는 설명회를 가졌고, 2014년에는 우여곡절 끝에 출범한 마을기업에서 휴업상태였던 산촌생태마을 운영을 시작했다. 사비를 투자해 시작한 마을사업은 꽤 성공적이었지만 2015년 석연치 않은 마을주민의 민원과 고발로 조사를 받고 기소유예 처분까지 받기도 했다. 2016년에는 농어촌 체험휴양마을로 지정 받아 마을과 주민들에게 꽤 많은 수익을 가져다주었지만 2016년 10월 결산을 끝으로 마을 일을 그만두었다. 농부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결산자료와 영수증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귀농, 귀촌을 하려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조금은 폐쇄적이고 기득권 중심으로 돌아가는 농촌 문화라고 해요.
요즘 우리 마을도 귀향한 사람들이 많이 늘었어요. 제 또래이거나 조금 젊은 층이 많이 들어왔어요. 그럼 마을이 좀 젊어지고 변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마찬가지예요.
귀향한 사람들이 저를 보면 ‘낯선 사람이 들어와 사네?’인 거예요. 귀향한 사람들끼리는 어제 왔든, 오늘 왔든 서로 동지예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40년이라는 세월을 각자 떨어져 살았는데도 만나면 동지인거죠. 자기 아버지와 나는 같은 마을에서 15년 동안 관계를 맺고 살아 왔지만 그와 나는 지금부터 관계가 시작되는 거예요.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귀농, 귀촌인들이 우리 마을에 들어와서 살면서 자기들끼리만 어울린다는 시선도 있지요.
저도 처음에는 귀농, 귀촌한 사람들끼리는 잘 모이면서 동네 사람들과는 잘 안 어울리는 걸 보면 ‘꼭 저렇게 살아야 하나? 그래도 동네 이웃들과 잘 어울려야지’ 했는데 제가 살아보니까 오히려 그렇게 만나는 게 서로에게 더 편해요. 동네 사람들은 항상 보니까 농사 이야기도 하고, 술도 한 잔 나누기도 하지만 다른 대화를 할 수가 없어요. 차라리 저 산 너머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흉도 보고 무슨 이야기든 할 수가 있어요.
3대가 함께 살고 있긴 하지만 2대인 아들과 며느리가 느끼는 시골살이는 더 힘들 수도 있겠네요.
더 힘들겠지요. 제가 항상 하는 걱정이 ‘내가 만약에 여기를 떠난다면 예를 들어서 제주도 감귤농장에 다섯 달 동안이라도 일하러 가버리면 우리 가족이 마을에서 보이지 않는 이런 저런 견제들을 견디면서 살아낼 수 있을까?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예요. 아무래도 지금은 내가 있으니까 함부로 못 하는 부분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나는 나이도 있고 마을에서 관계를 좀 해 온 부분이 있으니까.
쉽지 않군요. 지금 이 순간에도 지역살이, 시골살이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을까요?
자신의 의지가 굉장히 중요하겠지만 농촌이나 농촌사회를 건강한 공동체로 일구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내려온다면 글쎄요... ‘아마 안 될걸?’ 이라고 얘기하고 싶네요. 안 될 확률이 95%? 99%? 정말입니다. 그건 어느 마을로 가나 마찬가지일겁니다.
시골이라고 시기심이 없을 것 같아요? 칭찬에 인색하고 공짜가 없는 곳입니다. 처음에 와서 이웃집 할머니가 분무기 지고 농약을 치러 가는 걸 보는 게 너무 안타까워서 도와드렸더니 저녁에 꽁꽁 언 고기 한 덩이를 집으로 가져 왔더라고요. 고맙다고.
그걸 어떻게 받아요. 내가 선의를 베풀어도 그걸 그냥 선의로 받아주지 않아요. 그래서 함부로 도와주겠다는 말을 못 해요. 도와주면 ‘저 사람 진짜 고맙네’하는 마음으로 받아주면 좋은데 해 줬으니까 또 뭔가를 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까 서로에게 부담이죠.
차라리 안 보고 지나가는 경우가 더 많아요. 이제는. 그게 우리 마을의 현실입니다.
지리산권 농부들에게 농사이야기도 듣지만 우리가 가진 시골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조금씩 깨지고 있어요.
지리산권에서 즐겁게 농사지으며 함께 모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교류도 좋고, 놀이도 좋고요.
그런 게 있으면 좋긴 하겠죠. 그런데 다들 지향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고 삶의 가치관에도 차이가 있으니까 오히려 그런 교류나 관계가 더 큰 장애나 벽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귀촌을 하거나 귀농을 한 사람들도 각자가 다 달라요. 농사도 각자 자기 방식대로 짓잖아요. 하나로 엮이고 묶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냥 자유롭게 만나는 게 더 편안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퇴비만으로 농사를 지어왔어요. 화학비료는 아직까지 한 톨도 내 손에 묻혀 보지도 않았으니까. 퇴비만 갖고 하는데도 어떤 사람은 퇴비 많이 한다고 뭐라고 합니다. 또 내가 멀칭을 하면 누군가는 왜 멀칭을 하느냐고 뭐라고 해요. 멀칭 안 하고 이 나이에 어떻게 농사를 짓습니까, 그 많은 풀을 어떻게 하며, 이미 종자 개량이 돼서 멀칭 하지 않은 노지에서는 고추를 키울 수도 없고 키운다고 해도 제대로 수확량을 낼 수가 없어요. 그걸 감수하면서 일할 노동력도 없고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부담돼요. ‘자유롭게, 편안하게 얼굴 보고 그러면 됐지’ 이런 생각이 들어요.
환경운동가로 지리산권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유명인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할까? 개인 블로그부터 그동안 연재한 칼럼, ‘함양 김석봉’을 검색하자 쏟아지는 다양한 정보들을 읽으며 살짝 주눅 들기까지 했다. 과연 사진 속의 활짝 웃는 표정을 우리도 볼 수 있을까? 걱정했다.
괜히 긴장했다. 굳이 안분지족(安分知足), 안빈낙도(安貧樂道)같은 단어를 갖다 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풍요롭고 적당히 유쾌하고 호쾌한 삶이다. 듣는 내내 즐거웠고 알 수 없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날 우리가 함께 마주한 풍경 때문인지, 집에서 함께 지내는 동물가족과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주는 농부의 다정함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손과 땅을 잇는 지리산권 농부들과의 마지막 만남이 김석봉 농부여서 행운이었다. 김석봉 농부와 가족 모두의 행복을 기원한다.
7월의 마지막 일요일 저녁, KBS1-TV <동물극장 단짝>에 반갑고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인터뷰에서 미처 담지 못한 김석봉 농부와 동물가족 이야기는 방송을 통해 확인해 주시길.
글 이경원
기획, 기록, 연결로 변화를 만드는 일과 사람을 돕는다. 2014년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궁금해서 찾았던 지리산시골살이학교 덕분에 지리산이음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때는 몰랐다. 7년이 지난 2021년 구례 남원 산청 하동 함양을 다니며 ‘농사를 업으로 하는 농부’들의 이야기를 글로 전하게 될 줄은.
사진/진행 이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