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50대 이후에도 현장에서 일하고 싶은 영원한 현역을 꿈꾸는 중년
-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지어볼까 고민하는 중년의 귀농, 귀촌 희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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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에서 농부로 정착중이라는 귀향 5년차 왕규식 농부는 매실과 감농사를 지으며, 마을에서 생산하는 농산물과 가공품들로 악양농산물꾸러미를 운영하고 있다. 섬진강 따라 구례를 지나 하동에 도착하니 51번째 악양농산물꾸러미 작업이 한창이다.
“저희가 바쁜 날 왔죠.” 소심하게 인사를 건네자 “언제와도 바빠요. 일단 밥 먹으러 갑시다.”한다.
새마을미용실이 있는 악양 다운타운에서 점심을 먹고 작업장으로 돌아왔다.

하동군 악양면의 작업장에서 만난 왕규식 농부
귀향하기 전에 학원 강사, 수학 연구소, 대안학교 설립, 공연기획 연출까지. 다양한 일을 하셨지요.
학원 강사를 오래했어요. 수학을 가르쳤는데 ‘이대로 수학을 가르쳐서는 세상이 곤란하다. 나도 곤란하고 세상도 곤란하다. 새로운 방식의 수학교육이 뭘까?’ 고민하기 시작했고 대안교육을 생각하게 되었죠. 2004년에 수학 교사 모임을 만들고 2006년에 대안학교를 설립했어요. 처음에는 수학만 가르치다가 2007년부터 대안학교 선생으로 온전히 살았어요. 아이들을 가르친 건 2010년까지였네요. 그 이후로는 교사와 부모교육을 주로 했어요. 공연기획은 2007년부터 2017년까지 10년 정도 했어요.
교육자가 어쩌다 공연기획자가 되었습니까?
아내가 전통국악인, 소리꾼이었어요. 아내를 중심으로 젊은 국악인들이 새로운 소리를 해보고 싶어 뭉쳤는데 예술가들이라 경영을 잘 못해요. 마침 대안학교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고 있었는데… 고민하다 대표를 맡게 되었죠.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만 시간의 법칙 있잖아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3년만 열심히 하면 그 분야 전문가 되는 거죠. 전문가가 별거 있나요. 어릴 때 기타치고 노래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음악도, 국악도 잘 몰랐어요. 내 능력이 안 되고 부족한 부분도 있겠지만 내가 가진 집중력으로 일정 기간을 노력하다보면 일정 수준에 도달해 그 분야에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국악도, 대중음악도 몰랐지만 집중해서 하면 되요. 농사도 그렇고요.
도시에서도 충분히 재미있고 의미 있게 삶을 꾸린 것 같은데 귀향을 결심한 계기가 있나요?
50대 초반에 하동으로 내려왔는데 386 세대의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쓰임새가 다 되었는데 앉아 있으면 꼰대 밖에 더 되겠어요. 꼰대가 되기 싫었어요.
교육도 어른 대상으로 하게 되고, 정치적 활동도 어느 정도 했는데 뒷짐 지고 지켜보거나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중요한 의사 결정자라고 하는데 그렇게 생각되지 않더라고요. 뒷방 늙은이 같지. 전략적 결정, 중요하지요. 그런데 그걸 매일 합니까? 일주일, 한 달에 한번 하는데.
밥 먹으러 갈 때 나 빼고 간다든지, 공연 끝나고 뒷풀이는 젊은 사람들끼리 가더라고요.(웃음)
결정타네요.
결정타죠. 농담이고요, 저는 무엇보다 현장이 좋아요.
악양농산물꾸러미는 2017년부터 시작했죠?
2016년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고 2017년에 귀향하고, 4월부터 꾸러미를 시작했어요.
그 전에는 농사를 짓지 않았죠?
아버지가 9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밭농사는 남을 줬지만 아버지가 하시던 농사가 있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돌봤죠. 약 치고 수확하고 그 정도는. 비용을 드리긴 했지만 이웃 분들한테 부탁해서 약치는 것은 도움도 많이 받았죠. 지금 대안학교 아이들이 집에 와 있어요. 대안학교 설립 전부터 아이들 데리고 해마다 집에 왔어요. ‘자연 속 학교’라고 제가 만든 학교 학생들은 일 년에 6번 정도를 전국으로 놀러 다니고 자연 속에 있어요. 지금 6학년 아이들은 11박 일정으로 와서 아침, 저녁으로 매실 따고 있어요.
지금 짓는 농사규모는 어느 정도나 되나요?
제가 내려와서 규모가 좀 늘었어요. 우리 집만 하면 매실, 감, 밭 합해서 5~6천 평이 안 되었을 것 같은데, 우리 집 바로 앞에 큰집이 있어요. 큰아버지 돌아가신 지 20년이 되었는데 제가 내려오기 전까지 거의 방치되어 있었죠. 집이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았어요. 제가 내려오니 말은 못하지만 사촌들이 은연중에 내가 맡아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어요. 큰집을 보살핀다는 건 문중을 돌본다는 거예요. 벌초부터 시작해서. 처음엔 내가 왜? 노땡큐했죠.
3년 지나고 보니 도저히 안 되겠어요. 태풍 불면 양철 지붕이 날아가고 하는데 그냥 둘 수가 없어요. 작년부터 큰집 과수원, 여기 앞에 보이는 논, 밭에 손을 대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만 7~8천 평 되는 것 같아요.
혼자서 이걸 다 짓나요?
네. 그래서 ‘안 짓는 농작물’을 심잖아요. 감나무, 매실나무는 밭작물에 비해 손이 많이 안가는 편이예요. 밭작물은 한 평에 얼마가 나오는지 따지지만 감나무는 한 그루에 7~8평 차지해요. 매실도 수령이 40년쯤 되면 5평 정도는 되고요. ‘한 평에 고추 10개’ 이렇게 해서는 감당이 안 돼요.
작업장 규모도 생각보다 꽤 커요. 시설도 많고.
이 창고를 2017년에 악양농산물꾸러미 시작하고 바로 지었거든요. 이 작업을 집에서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불가능하죠. 나의 모든 재산을 올인했지요.
왜 꾸러미였나요? 귀농, 귀촌하면 일단 농사부터 지어보고 판로를 고민하던데요.
동네에서 서울로 같이 간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20대 귀향해서 농사를 짓고 있었어요. 제가 내려오기 전에 친구들이 농민대회 한다고 서울에 왔어요. 술 한잔하면서 “내가 고향 가면 뭘 할 수 있겠냐?”했더니 친구들이 “네가 농사지으면 얼마나 지을 수 있겠냐, 농사는 40년, 50년 지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네가 잘 할 수 있는 거 해라.” 하는 거예요. “그래? 그럼 너희가 필요한 건 뭔데? 네가 생각하는 내가 잘하는 게 뭔데?” 했더니 “유통을 해라. 우리는 판매망이 꼭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래? 생각해볼게.”하고 조사를 해보니 일반적으로 농산물을 유통하는 건 상회를 차려서 가락시장이나 경매시장에 물건을 내보는 거예요. 농부들에게 그게 제일 도움이 되는 거일지도 몰라요. 농협에서 하는 게 그런 일이잖아요. 수매해서.
예를 들어 매실이 지금 아주 좋은 게 1kg에 2,000원인데, 선별해서 포장하는 순간 4,000원이 되고 소비자들은 6,000원 정도에 사요. 무조건 3배예요. 농협에서 2,000원에 수매를 한다고 치면, 나 같은 사람이 2,200원만 쳐준다고 해도 농민들은 10%를 더 받으니 굉장히 큰 도움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유통을 전문적으로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유통을 지향하되 전문유통은 안 하겠다 했어요. 내가 장사꾼 하려고 고향 내려온 건 아니니까. 그래도 유통에 대한 고민은 계속 하자가 첫 번째 이유고요.
두 번째는 ‘소규모라도 나도 먹고 살려면 판매망은 있어야 한다.’였어요. 악양 내려가서 농사지으면 농산물을 지인들한테 보내줘야 되고, 팔기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꾸러미를 만들자 했어요. 한 달에 열 명씩만 늘려서 2년 안에 200명을 만들자 목표를 정했죠. 더 하면 큰일 날 것 같고. 3년 만에 달성했어요. 170명 넘어 가니 잘 안 늘더라고요. 홍보도 전혀 안하니까. 홍보에 에너지를 쓸 바에야 농사에 힘을 쓰는 게 낫지. 지금도 190명에서 205명 사이로 왔다 갔다 해요. 1년 단위로 계약하는데 2명이 빠져 나가면 한, 두 명이 또 들어와요. 소문 듣고 왔다고.

포장 중인 양파와 마늘
꾸러미는 할 만 한가요? 전문유통을 하셨어도 잘 하셨을 것 같아요.
서울로 대학가고 도시에 살아도 1년에 10번은 집에 내려와서 아버지 농사를 도왔어요. 가족들도 그렇고 주변에서 유통을 하는 게 기질에 맞지 않겠냐는 얘기도 많이 했어요.
저는 농산물 유통을 하려면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얘기해요. 농민들의 정서를 모르고 유통만 하면 장사꾼밖에 안 되거든요. 예를 들어서 매실을 1kg 2,000원에 수매하는데 농민들이 2,200원 달라고 하면 2,000원으로 깎을지, 2,200원을 드릴지 굉장히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잖아요. 농사를 지어보지 않으면 당연히 2,000원으로 합니다. 농사를 지어보면 ‘아이고 네네 2,200원, 아니 2,300원에 하시지요.’ 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모든 농사가 그렇지만 매실 농사가 얼마나 힘든지 그 상황을 모르면 수익을 따지게 되지 농산물의 가치와 그분들의 삶을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저도 고향에 와서 어머니들 농사짓는 것을 눈으로 보지만 내가 해보지 않으면 농산물의 가치, 내재된 가치를 측정할 수 없어요. 그래서 내가 농사를 최소한 3년은 짓겠다. 그 이후에 유통을 할지, 가공을 할지 고민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지금 5년째 농사를 짓고 있죠. 꾸러미도 보내고. 직접 하는 건 아니지만 잼 기계도 들여오고, 이런 저런 조건들도 만들어 가고 있고.
악양농산물꾸러미는 일 년에 몇 품목 정도 보내나요?
한 달에 3~5품목 정도해서 40품목 정도 보내고 있어요. 물론 혼자 다 짓는 건 아니고요.
내가 짓는 건 제일 큰 게 감하고 매실이고요. 감은 10월부터 1월까지 단감, 대봉감, 감말랭이, 곶감 순서로 달마다 한 품목을 만들고, 매실은 지금이 철인데 생과도 팔고, 매실청, 매실초가 있어요. 매실원액은 발효시키면 항염효과가 탁월하죠. 밭작물은 지금이 봄농사 작물인데 양파, 마늘, 감자, 가을농사로 보면 쥐눈이콩, 검정콩, 메주콩이 있고 늦가을에서 겨울 수확물은 무가 있고, 올해는 생강을 처음 시작해요. 딱 200명분에 플러스 알파로 지어요. 처음에는 지인부터 시작했으니까 ‘나는 200명을 기준으로 농사를 짓겠다. 여러분이 가입을 해주든지 안 해주든지 나는 200명분 농사만 짓겠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나를 먹여 살리세요.’ 했지요.
남거나 모자라는 거 없이 계획대로 잘 되고 있나요?
지금 꾸러미 가격이 월 30,000원인데요, 우리 꾸러미의 가격원칙은 ‘산지가격에 20%를 더한다’ 예요. 어머니들께 2,000원을 드리면 저는 2,400원에, 2,500원을 드리면 3,000원을 받아요.
올해는 양파를 많이 지었어요. 재작년인가 처음 품목에 넣었는데 맛있다고 더 지어달래요. 기본품목으로 넣어 달라고요. 3kg를 보내는데요, 그런데 가격이 너무 싸요. 양파가격을 우리는 10kg에 15,000원으로 책정했는데 마트에 가면 10,000원이에요. 이 가격에 맞춰서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요. 다른 품목은 산지가격을 기준으로 하지만 양파는 이 가격에 하자고 했어요.
거기에 가공품들이 있어요. 동네 어머니들, 우리 생산자 회원들이 농사지은 취나물이나 마늘쫑으로 장아찌 담고 해서 보내지요.
농산물과 가공품 비율이 정해져 있나요?
그렇진 않아요. 이번 달은 모두 농산물이고 5월에는 모두 가공품이었어요. 회원들의 요청도 고려해야 하거든요. 특이한 건 수도권과 부산·서부 경남권 회원들의 생활양식이 달라요. 쉽게 얘기하면 서울 사는 회원들은 매실청을 원해요. 친구들도 아무도 매실 주문을 안 해요. 매실 보내면 제발 그만 보내라고 해요. 가공품으로 달라고. 그런데 부산에 사는 분들은 ‘왜 이렇게 가공품이 많아요? 싱싱한 걸로 좀 보내 봐요’ 이런 식이죠.
고정 고객이 있지만 어렵네요. 악양농산물꾸러미의 특별한 회원관리 노하우가 있을 것 같아요.
꾸러미를 판매망으로만 보면 실패해요. 내 형제들이 도시에 살고 있는데 내가 지은 농산물 보내면서 고객으로 생각하진 않잖아요. 식구들이 먹을 거라고 생각하고 보내는 거지. 내 농산물 팔아주니까 보내준다 이런 생각은 곤란해요. 회원들도 마찬가지예요. 잘 먹지 않는 콩이 올라오면 ‘이거 어떡하지?’ 하다가도 ‘규식이가 농사지은 거니까 먹어야지’하는 거예요. 이렇게 관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한 거지 판매망으로만 보면 다 실패해요. 그렇게는 몇 년 못갑니다.
꾸러미 처음 시작할 때 가공품이 꽤 많이 들어갔거든요, 그 이유가 도시 사는 형님, 누나들 바빠 죽겠는데 그거 손질하고 해 먹으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럼 내가 손질해서 조금 더 비싸게 받자 그런 전략도 있었어요. (웃음)
좋은 전략인데요, 역시 기획자십니다.
어쨌든 저는 꾸러미를 소통의 창구로 본 거예요. 내가 살아가는 삶의 소통 창구. 도시에서 귀농, 귀촌이 어려운 건 귀양 가는 느낌이 드는 거거든요. 일종의 고립감 같은 거요. 저는 고립 대신 꾸러미를 통해서 고립되지 않겠다, 꾸러미로 비고립하겠다 했어요.
밭작물 씨앗이나 모종은 어떻게 구하나요?
우리가 스스로 씨앗을 마련하는 것도 있어요. 쪽파는 무조건 해야 하고. 콩도 내가 써봐서 좋은 종자는 유지하려고 해요. 지자체나 농협 통해서 오는 종자는 일반 상인들에게 사는 것보다 훨씬 믿음이 가니까 그 종자들을 주로 사용하죠. 감자는 고랭지 감자가 아니면 종자의 가치가 없거든요.
농작물마다 그런 게 있어요. 올해 아무리 수확이 좋다고 해도 내년에 심으면 제대로 안 나와요.
'토종으로만 농사짓겠다'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네요.
토종씨앗이나 종자를 고민하는 분들은 농사의 생산량을 안 따지면 몰라도 생산량을 따지면 작업이 안돼요. 이걸 팔아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농민은 노동자인 동시에 자영업자잖아요. 자본가이기도 하고. 상인이 되었다가 노동자가 되었다가 춤을 춰야 하는데 토종씨앗만을 고집할 순 없어요. 농부들에게 농민소득 주면서 그렇게 농사지으라고 하면 몰라도.

2021년 6월의 악양농산물꾸러미 구성 안내지
꾸러미가 경제 활동 전체를 차지하는 건 아니지요?
꾸러미를 기본으로 하고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죠. 꾸러미가 내 삶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꾸러미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면 꾸러미 소비자들에게 휘둘리게 되잖아요.
월 30,000원에 200명 회원이면 꾸러미로 월 600만원 매출이 나와요. 농산물 비용을 제하고 나면 2명의 최저 임금비 정도가 나와요. 자기농사로 월 300만원을 가지면 100만원이 부대비용이고 200만원이 수입이 돼요. 두 농가가 겨우 농사지을 정도가 된다는 거죠. 그런데 내가 이번 달은 내가 많이 하지만 다른 달은 농가들과 나눠야 하고, 내가 농사를 짓지 못할 때는 꾸러미 수입은 없는 거니까 그걸로는 먹고살기 힘들죠.
꾸러미가 좋은 건 회원이 200명 정도 되니까 추가 주문이 들어와요. 그래서 전체매출이 꾸러미매출의 1.5배 정도가 되는 거예요. 내가 팔 수 있는 품목을 적어 놓으면 회원들이 그걸 선택해서 주문을 해요. 꾸러미 매출 600만원에 추가 주문이 더해져 900만 원 정도가 되요. 정확하게 계산은 안 해봤지만 연매출이 1억 정도 되는 걸로 봐서는.
매실과 감은 꾸러미로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꾸러미 통해서 나가는 매출 중에서도 상당 부분 감, 매실이 들어가죠. 설 명절 때 곶감 선물을 하는 분들이 주문해주기도 하고.
부가수익이 더해지는 거네요.
저는 스마트스토어도 하고 있어요. 작년 대봉감은 없어서 못 팔았어요.
유통이 웃겨요. 정직하게 산지가격에 20%만 더해서 내 가격을 올려요. 산지가격에 3배로 파는 데랑은 경쟁이 안 되지요. 너무 잘 나가니까 저도 살짝 욕심이 생겨요. 그런데 못 올리겠더라고요. 스마트스토어는 검색이 핵심이거든요. 검색으로 노출이 되는 날은 하루에 어마무시하게 주문이 들어와요.
검색 광고를 하나요? 아니면 특별한 노하우가 있나요?
광고는 전혀 안 해요. 나름대로 ‘리뷰가 중요하다’는 건 조금 알겠어요.
리뷰 한, 두 개 정도는 주문한 분들에게 부탁하기도 하고, 고객들이 먼저 좋은 리뷰를 남겨주기도 해요. 최근 열흘 동안 매실이 하루에 50~60kg가 주문이 들어왔어요. 리뷰효과인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토종매실이거든요. 토종매실을 키워드로 넣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점심 먹으면서 최저임금 정도는 나오니 아직은 농사지을만하다고 했는데요. 개인적인 어려움이나 귀향인이어서 겪는 고충은 없는지 궁금해요.
어려운 게 뭐 한 두가지여야지죠. 그보다 귀향해서 농사짓는 나도 그렇지만 주위의 어머니들, 전업농들의 어려움이 단순한 문제는 아니에요. 귀농이야기* 에도 썼지만 농촌에서 농민으로 먹고 사는 데는 3가지 길이 있더라고요.
첫째는 대농이 되는 거예요. 친구들 중에도 있어요. 논농사 백마지기, 약 2만 평 정도를 지으면 먹고 살 수 있어요. 두 번째는 특작물을 하는 거예요. 비닐하우스나 스마트농업 같은 시설재배는 초기시설비가 들어가서 그렇지 오이나 호박, 딸기, 부추 농사지으면 부부가 먹고 살만한 정도는 돼요. 어느 정도까지 벌이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저임금은 넘어서는, 평균 임금 정도 수준의 중위 소득은 될 수 있을 거예요. 물론 몸은 고생하지요. 농사의 전제는 몸이 고생한다는 겁니다. 대농들도 고생은 마찬가지예요. 농사철 되면 잠도 못자요. 헤드라이트 켜놓고 모내기해야 할 판이거든요. 아무튼 몸은 고생해도 먹고 살 정도는 된다는 거예요.
그 다음이 과수원을 하는 거예요. 5천 평 이상 규모로 동네 특작물로 과수원 하면 일정하게 수익이 발생해요. 하동은 감이예요. 대봉감. 시배지거든요. 여기 감이 가장 비싸요. 크기도 크고 맛있어요. 우리는 다른 데 감은 싱거워서 못 먹겠다고 하거든요. 당도가 2~3브릭스 정도 차이가 나요. 감농사 5천 평 정도면 기본 소득 이상 살림으로 먹고 살 수 있어요. 그런데 농협에 수매만 해서는 불가능해요. 감농사는 시설 재배가 아니라 생산량에 한계가 있어서 경매, 수매도 하지만 가공까지 포함했을 때 과수원하면 ‘먹고 살 수는 있다’입니다. 이 3개 정도가 농촌에서 그나마 농사꾼들이 먹고 사는 거고 나머지 농사꾼들, 3천 평 이하, 열다섯 마지기 이하는 농사지어서 먹고 살 수가 없어요.
| * 왕규식 농부는 귀향인으로 5년 간의 경험을 공유하며 귀농귀촌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020년 10월부터 6개월 동안 하동신문에 귀농이야기를 연재했다. |
다른 지역 농부들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하동신문 연재에서도 ‘소규모 다품종 농부가 살길은 오직 직거래’라고 강조했던 거군요.
귀농, 귀촌인들은 내려오면서 자기가 전략적으로 선택을 한단 말이에요. 시설재배를 할 거냐, 과수원을 할 거냐. 귀농, 귀촌해서 당장 대규모농사는 못 지어요. 시설재배가 제일 쉬워요. 딸기면 딸기만 파면 되니까. 과수원도 그나마 좀 쉬워요. 감이면 감, 사과면 사과 하나만 연구하면 되니까.
그런데 토박이 농사꾼들은 대대손손 내려온 땅에서 농사를 짓는데 땅이 고르지도 않고 졸망졸망해요. 저도 아버지 농사짓던 땅에서 농사를 짓는데 경지 정리가 되어 있다 해도 험악하더란 말이에요. 평평한 땅에 경지 정리된 밭보다 3배, 4배 힘들어요. 그 땅 보면 이 어른들이, 과거의 농사꾼들이 먹고 살려고 얼마나 힘들게 농사지었는지 알 수 있죠. 또 그 작은 땅에서 소출이 난다고 한들 얼마나 되겠어요.(한숨)
여기 팔려고 양파 농사짓는 사람들 없어요. 자기 먹을 거만 짓지. 참깨도 마찬가지고요. 중국산 참깨하고 맛은 다를 바가 없는데 가격이 중국산과 경쟁이 안돼요. 양파도 최소한 1kg에 최소한 1,000원에서 1,500원은 받아야 8개월 동안 키운 보람이 있는데 1kg에 800원 받으면 한 달에 1kg 양파 키우는 내 임금이 100원 이예요. 그러면 대규모는 아니어도 천 평 이상은 지어야 해요. 그 정도가 안 되니까 여기 있는 소작농들은 농사를 지어도 팔수가 없어요. 양파, 고구마, 옥수수 마찬가지예요.
아주 특별하게 팔리는 몇 가지가 있긴 한데…… 고사리, 토란대, 취나물. 산나물이 그나마 특별하게 팔려요. 그러니까 옆집 할머니는 주구장창 토란대만 손으로 벗기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천 평을 짓겠어요. 2천 평을 짓겠어요. 겨우 2백 평이란 말이에요. 아무리 비싸다 해도 그걸로 얼마나 벌겠어요. 눈물겨워요. 그래서 소농으로는 먹고 살 수 있는 기조가 없다는 거예요. 나처럼 직거래를 할 때만 그나마 먹고 살 수 있어요. 나는 우리 이웃들이 아무도 못 먹고 산다고 봐요. 도대체 농민들은 뭘 먹고 사는지 모르겠어요.
농사짓는 어려움보다 어쩌면 이런 현실이 마주하는 게 더 힘들겠네요.
내가 힘들다기보다 현실이 그래요.

하동군 악양면의 작업장에서 만난 왕규식 농부
화제를 좀 바꿀게요. 귀농이든 귀촌이든 농촌에서 정착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라고 쓴 기고를 읽었어요. 왕규식 농부는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교류하십니까?
도시와 악양처럼 아름답게 갇힌 이 공간에서의 교류는 개념에서 차이가 있어요.
도시의 교류는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끊임없이 사건, 사고를 이야기하고 자신의 삶을 보여줘야 해요. 그런데 농촌에서 교류는 저 사람이 필요하면 내가 가주는 거예요. 내가 필요할 때 그 사람을 내가 알고 있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집 보일러가 고장 났을 때 보일러 고칠 줄 아는 내 친구 아버지가 같은 동네 살아. 그걸 알면 되는 거예요. 내가 얼어 죽겠다고 하면 밤 12시에도 달려와 준단 말이지요.
끊임없이 나를 보여 주고 공통점을 찾는 것이 도시적인 교류라고 한다면 여기는 서로의 필요를 알고 도와주는 것이 첫 번째예요. 그 사람의 삶의 방식, 철학 상관없이 굉장히 공동체적인 거죠. 내가 엊그제 트랙터 타고 내려가다 비탈길에서 빠지는 사고가 났어요. 찰과상을 입어서 지금도 굉장히 아파요. 그 때 친구한테 전화를 했어요. 지금 이런 상황이다 했더니 지금 모내기 중이래요. 그런데 모내기하다 말고 왔어요. 모내기가 뭐가 중요해 사람이 먼저지.
관계 자체가 아주 친하지 않고, 딱히 주고받는 것도 없어요. ‘그래 고맙다’하고 그냥 끝나는 거지만 서로의 필요성을 충분히 공감하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 이게 우리가 말하는 교류라는 거지요.
그럼 농사기술이나 정보들은 어떻게 교환하나요? 같이 연구를 한다거나……
우리는 연구 그런 거 없어요. 술 한 잔 하면서 그런 정보들은 도시의 가십거리 못지않게 끊임없이 얘기해요. ‘올해 고추농사는 내가 약을 좀 잘못 친 것 같아.’, ‘올해는 태풍 때문에 망했어.’하면 ‘내년에는 뭘 해볼 생각이냐?’, ‘어찌 되겠지, 내 잘 해볼게.’ ‘그래, 잘 해봐라.’ 이런 정도지 도시처럼 미주알고주알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 친구가 올해 고추농사를 천 평 정도 했고, 콩을 만평 정도 도전하는 친구가 있다 생각하고 있다가 다음 해 내가 두부를 만들어야 하면 그 친구한테 연락하는 거예요.
귀농, 귀촌인들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리겠어요. 이게 안 되면 농촌에서 공동체의 일원이 못되는 건가요?
공동체의 일원이 되라고 하는 것은 도시적 사고방식을 버리라는 거예요.
여기 와서 도시에서 배운 공동체 방식을 아무리 주장한다고 해도 먹히지 않아요. 여기 사는 사람들은 몸에 배인 공동체가 있는데 도시인들은 몸 자체에 공동체가 없단 말이에요. 거꾸로 머리에만 공동체가 있어요. 이념으로만. 여기 사람들이 착하고 선하지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게 굉장히 봉건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하단 말이에요. 귀농, 귀촌인들에게 공동체 일원이 되라는 말은 네 생각이 진보든 보수든 상관없다. 여기 사람들을 존중하고 가족처럼 생각하는 마음이 몸에 배이고 몸이 움직여 주어야만이 공동체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안하면 도움도 못 받고 영원히 객지인인 거예요.
어쩐지 식당에서 ‘이모, 요 젓갈 좀 주이소’할 때 ‘아, 이분 뭔가 원주민 포스다’ 생각했어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증거였군요.

왕규식 농부가 농산물을 포장하고 있는 모습
귀향해서 농사짓겠다고 했을 때 가족과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요?
우리 가족은 항상 ‘하고 싶은 건 알아서 하자’주의라서 아내도 마음으로 응원해줬고 지금은 같이 내려와서 농사짓고 있어요. 내가 먼저 내려가서 2년 동안 살아볼게. 그 후에 내려올지를 결정하라고 했죠. 내려와서 고생 많이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작업장에서 양파 포장하고 있어요.
주변에서는요? 2016년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함께 했던 동료들 반응이 궁금해요.
‘그래? 잘 가라’죠 뭐. 젊었을 때부터 내가 하겠다는 일은 말려봤자 말려지지 않을 것이고 응원해봤자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는 거 아니까.(웃음)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친구들도 꽤 있었어요. 뒤늦게 도시에서 내가 해줬으면 하는 역할을 요청하기도 했고요. ‘앞으로 이런 일이 필요하지 않겠어?’ 제안할 때는 알아듣지도 못하더니 뒤늦게 바지 가랑이 잡고 말린다고 말려질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죠. 어쨌든 가서 열심히 농사짓고 열심히 살면 또 만나지겠지 그러나 우리가 끊어지지는 말자. 했어요.
끊어지지 않는 방법이 ‘꾸러미를 열심히 하자.’군요.
맞아요. 도시에 살 때는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으로만 알던 분들이 꾸러미 통해서 제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아요. 이틀에 한 번씩은 밴드에 내가 농사짓는 일상을 올리거든요. ‘회원님들, 오늘은 취재를 당했어요.’ 이를테면 이런 일상을 올리는 거죠. 사람들과 훨씬 더 잘 지내고 있다고 봐요.
2017년 귀농을 준비할 때부터 블로그에 준비 과정을 올리고 지금도 농사일기, 꾸러미 일지를 아주 꼼꼼하게 기록하고 계신데요, 이 기록은 개인 블로그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공유해도 좋겠다 싶었어요.
저는 좋아요. 제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100% 오케이입니다.
선하게 사용된다면 기꺼이 공공재가 되겠다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나는 공공재가 될 수 없지만 내가 만들어낸 결과물, 내가 가진 것들이 잘 쓰인다면 마다하지 않아요. 지금 이 건물만 해도 그래요. 네다섯 명이 매일같이 이 공간을 같이 사용해요. 내 재산을 쏟아 부어 만들었다고 아끼면 뭐해요. 저온창고도 마찬가지예요. 가끔은 불편하기도 하지요. 내 물건 넣어야 하는데 남의 물건이 가득 들어 있으면.
그럴 땐 어떻게 하나요?
뭘 어떻게 해요. 내가 정리정돈해서 물건 넣을 공간을 만드는 거지요.
동네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 하고 있다는 보람을 느끼나요?
그런 생각자체가 도시적인 거예요. 이웃집에서 쓰겠다는데 못 쓰게 할 거예요? 해봤자 잠시 잠깐인데. 저도 마찬가지예요. 어머니 오늘 기계 좀 쓸게요. 하면 오냐 그래라 하는 거죠. 가끔은 약속이 잘 안 지켜지는 게 문제지. 그럴 땐 ‘네가 어지간히 바쁘면 그러겠어.’ 하고 넘어가야죠. 농사는 정말 바쁜 거니까. 이걸 도시와 농촌의 수준 차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 돼요.
농사가 정말 바쁘긴 하죠.
농사는 인간에 맞춰서 하는 게 아니에요. 자연에 맞춰서 하는 거지. 다음주 25일이 넘어가는 순간, 콩도 못 심고, 팥도 못 심어요. 그러니 새벽이라도, 저녁 늦게라도 심어야 한단 말이에요. 숨 쉴 틈은 자연이 주는 거지, 인간이 주는 거 아니란 말이지요. 내가 농사를 포기하고 일을 안 하겠다 하면 몰라도.
최근에 기후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요. 지난해 섬진강 일대는 홍수로 큰 피해를 입기도 했고요. 농사지으면서 체감하시나요?
대학가기 전까지만 해도 해마다 태풍피해가 어마무시했어요. 제방기술이 떨어졌기 때문에 둑터짐이 생겼고 치수능력이 부족했어요. 20대 이후부터는 치수문제가 없어졌어요. 둑도 생기고 도로도 잘 깔리고, 하천 정리도 잘 되었고요. 작년에 이 지역에 완전 물난리가 났어요. 비가 엄청나게 와서 섬진강 일대가 다 잠겼어요. 친구들 창고도 다 잠겨서 그것 보면서 안타깝고 허탈했죠. 홍수가 나고 피해를 당한 건 인재 때문이라고 하지만 비가 이렇게 온다는 건 기후적인 문제도 있다고 생각해요. 또 저는 잠정적으로는 기후문제라고 생각하나 꼭 기후문제라고도 할 수 없는 게 올해는 일주일 정도 모든 시기가 빨리 와요. 꽃피는 시기부터 열매 맺고 수확하는 시기가 빨라요. 내 머릿속에는 작년 생각만 있어서 6월 25일까지 매실을 따면 되겠다고 했는데 매실이 이미 떨어지고 있어요. 과학적으로 좀 생각해 볼 문제이긴 하나 윤달이 끼면 철이 빨리 온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시는데 진짜로 빨리 와버렸어요. 이런 현상이 기후위기가 아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우리는 곶감 만들 때 한파가 안 오면 자연건조에 문제가 있어요. 작년 같은 경우에는 날씨가 따뜻해서 말리는 데 고생했죠. 농작물 재배 한계선이 점점 올라가는 건 다들 느끼는 거잖아요. 그나마 감, 매실은 사과처럼 북방한계선이 있는 게 아니라 전국적으로 되는 작물이어서 아직은 크게 문제가 되진 않지만 여기도 대체작물이 제법 보이기 시작해요. 따뜻한 지방에서 되는 묘목들이 심어지고 있어요.
“86세대들이 귀농 귀촌하게 되면, 50대까지 겪어온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의 경험들이 큰 자산이 된다. 전통문화의 마지막 계승자이자 지킴이가 될 것이고, 소멸 대신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며, 정보화 경험으로 새로운 산업과 문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현장에서 살아가기를 좋아하는 86세대에겐 귀농 귀촌이 적격이며 가치가 큰 삶이니 함께 하기를 권한다. 농촌에서 귀농 귀촌인은 ‘존재가 가치’다.”
-하동신문 <왕규식의 농사이야기>중에서
중년의 귀향을 장려하시죠? 귀농, 귀촌을 생각하는 중년들에게 조언 부탁합니다.
음… 그분들이 어떤 생각으로 귀농, 귀촌을 하려는 지는 잘 모르겠어요. 중년이 되면 자기 삶의 완성도도 있고 고집도 세지고, 생각이 말랑말랑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귀농, 귀촌을 결심하기가 어려워요. 설사 한다 해도 농촌에서 잘 살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50대 넘어가면 우리가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잖아요. 현직에서 물러난 도시노인들이 노인복지회관 시스템 외에 삶이 과연 있는가? 생각하면 없는 것 같아요. 이게 저는 큰 문제 같아요. 기업 임원 출신들이 경비로 일 하는데 만족도가 높다는 기사도 가끔 나오잖아요. 그 이유가 할 일이 있어서 기쁘다는 거잖아요.
저는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시골로 와라, 현장에 있고 싶은 사람은 여기로 와라, 그 방법밖에 없다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할 일 없는 도시와 할 일이 어마무시하게 많은 농촌 중에 어디를 택할래? 하는 거죠. 특히 남자들, 요양원에 공연을 하러가도, 영화관에 가도, 강연을 가도 모두 여성들이에요. 도대체 남자들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주위에 물어보면 혼자 등산하고 혼자 산책하고 가끔 친구들하고 당구장 가고 막걸리 한잔 드시고 한다는데 저게 재미있나 싶어요. 그러니까 맨날 TV만 보고 자식들 오는 거 기다리는 거예요. 그러다 꼰대가 되는 거죠. 그 분들은 아니겠지만 저는 그렇게 나이 드는 건 좀 비참하다고 생각해요.
여기는 적어도 노인이 존중받거든요. 특히 농사짓는 이력이 쌓이면 80세가 되더라도 현장에서 잔소리꾼이 아니라 노하우를 가진 선배가 되는 거예요. 우리 동네 비닐하우스 세 동으로 농사짓는 73세 형님이 저한테 두 동을 지어보라고 해요. 기술을 전수해준다고. 저는 노년에 먹고 살 새 길을 찾았고 그 형님도 저를 보고 자신의 역할을 찾은 거지요.
그 형님이 앞으로 20년 후의 왕규식 농부의 모습일수도 있겠네요.
네, 맞아요. 얼마나 좋은 기회에요. 비닐하우스 하나에 2~3천 만 원 인데 농사도 짓고 재배기술도 전수받고. 정말 고맙지요. 그러면서 세대교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거죠.

인터뷰를 위해 만난 왕규식 농부
지리산 이음에서 작지만 기금을 조성해서 농부들의 소소한 활동을 지원하는 일을 해보려고 하는데요, 어떻게 쓰면 좋을까요?
기금이 얼마일지는 모르나 소작농들이 농산물을 생산하는데 기쁨을 줄 수 있도록 쓰이면 좋겠어요. 지금 소작농들은 돈이 안 된다는 자포자기적 심정이 있어서 몸이 점점 게을러지고 있어요. 농사일 대신 날품팔이나 인력시장에 나가요. 안 그러면 손에 현금이 안 들어오니까. 그리고 농사일보다 훨씬 수입이 좋으니까 어쩔 수 없어요.
어제 동네 누님들 매실 따달라고 모셨는데 일당이 9만원이거든요. 20일 동안 일한다고 생각해보세요. 180만원 수입이 생겨요. 농사로 180만원을 벌기가 상당히 힘들거든요. 그러니 몸이 움직이면 하시려고 한단 말이에요. 그리고 요양보호사 자격증 따면 월 250만원도 벌 수 있는데 누가 농사를 짓겠어요. 소작농들이 농사로 벌이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삶의 방식을 바꾸고 있다는 게 농촌에서 굉장히 큰 문제예요. 그렇게 되면 텃밭농사나 작은 규모의 농사들은 황폐화된다고 봐야 돼요. 땅이 산이 되고 숲으로 돌아가면 좋은데 그걸 또 놀리기는 아까워서 제초제나 약품으로 농사를 짓게 돼요. 손이 덜 가면 되는 거니까. 그럼 땅이 망가지는 거지요.
직거래나 꾸러미로 판매를 돕는 방식도 도움이 될까요?
판매망이 되어도 좋고요. 예를 들어 도시의 동네 슈퍼에 악양농산물 매대를 작게라도 만들어서 로컬푸드매장처럼 운영할 수도 있잖아요. 도시농부들 생산물로 로컬푸드매장을 만들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그분들은 겸업이잖아요. 취미일수도 있고. 그러니 전업농 중, 특히 소작농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좀 고민해주면 좋겠어요. 동네 신문을 만드는데 할머니 인터뷰를 했어요. 그 분 월수입이 50만원이 안 돼요. 기초노령연금 30만원 제외하면 20만원이 안된다고요. 3마지기 농사지어서 그만큼이에요. 어쨌든 이런 분들에게 기금이 쓰이면 좋겠어요.
조금 더 확장해서 농업 정책에 대한 생각도 듣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농업정책이 다양하게 있는데 저는 농업지원정책은 재고가 필요하다고 봐요. 농업지원정책은 대부분 50% 보조금 지원이거든요. 좀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다 치워버리고 농촌에 기본수당, 농민소득 줬으면 좋겠어요. 80세 어르신들이 농사도 안 짓는데 기계를 살 리가 있어요? 그럼 젊은 사람들한테 기계를 사라고요? 젊은 사람들은 농사지을 마음도 없고, 지을 사람도 없어요. 그런 건 공중에 떠버리는 지원정책인거죠.
노인복지는 그나마 기초노령연금 30만원이 생겨서 어르신들한테 큰 도움이 됐는데 얘기했던 어머니처럼 소작농들의 삶을 생각해보면 도리가 없어요. 우리나라는 직접 지원하는 정책은 직불금 밖에 없는데 간접 지원하는 보조금 제도 없애버리고 농민수당 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그 분들 삶이, 농민들 삶이 훨씬 나아지죠. 200만원 벌기 위해서 하루에 12시간 일하던 걸 하루에 8시간 일하게 될 거예요. 8시간만 일을 해도 농민들의 삶이 달라져요.
농민소득은 계속 얘기가 나오고 있어요. 곧 실현될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어르신들을 보고 맨날 일 많이 하지 마시라고 얘기했는데 아버지, 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두 가지 때문에 일을 하는 거예요. 하나는 현실적으로 돈이 없어서. 자식들이 십 만원, 이십 만원 주지만 그 돈으로 살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존심 때문에라도 벌이가 있어야 하니까 일을 해요. 자식들도 백 만원도 아니고 십 만원 용돈 드리면서 아버지 농사짓지 마시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죠. 기초노령연금이나 복지가 조금씩 좋아지니까 이제 농사 안지어도 돼 하는 거예요. 자식들한테 손 안 벌리고 30만원 가지고 병원은 갈 수 있으니까. 여기는 먹고 사는 건 농사로 해결하니까 최소한의 생활은 가능해요. 농민수당까지 주어지면 삶이 굉장히 윤택해 질 거라는 거죠.
두 번째는 그 분들이 할 수 있는 게 일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평생을 하루에 12시간, 14시간씩 일해 왔는데 갑자기 영화를 만들겠어요. 공연을 만들고 연주를 하겠어요. 오로지 머릿속에는 일밖에 없는데. ‘오늘 벚꽃이 피었네, 그럼 뒷산에 두릅이 나왔겠네, 그거 따러 가야지.’ 이런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벚꽃 피었다고 꽃놀이 갈 수가 있겠어요. 그런데 농민수당이 주어지면 ‘지금은 전어가 맛있는 철이네, 오늘은 전어를 먹으러 어디를 가야겠네.’ 이게 가능해진다는 거죠. 꼭 좋다 나쁘다를 떠나 삶의 여유를 찾을 수 있도록, 내 몸이 계절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거죠. 아프면 오늘은 병원을 좀 가봐야겠네 하고 몸에 쉼을 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거죠.
이제는 농촌정책이 노인복지 차원이 아니라 농민복지가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네. 그런 지원이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은 권력을 가진 소수의 기득권이 아니라 다수의 비기득권에게도 혜택이 가고 있어요. 그래서 농민수당이 그냥 허황된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할 수도 있겠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생각해요.
인구소멸을 걱정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의 관심이 청년에게 쏠리고 있다. 농촌을 지키고 살리는 길은 고향 떠난 중장년, 그 시절의 청춘들이 돌아오는 거라고 조용히 주장해 왔다. 그런 삶을 사는 주인공을 만나 더없이 반가웠고 도시인의 나름대로 합리적인 사고가 농촌 공동체에선 통하지 않는다는 값진 배움도 얻었다. 대기업 다니며 승진을 걱정하고 꼰대 될까 안절부절하는 친구에게 진심을 담아 물어야겠다.
“너 고향이 어디니?”
글 이경원
기획, 기록, 연결로 변화를 만드는 일과 사람을 돕는다. 2014년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궁금해서 찾았던 지리산시골살이학교 덕분에 지리산이음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때는 몰랐다. 7년이 지난 2021년 구례 남원 산청 하동 함양을 다니며 ‘농사를 업으로 하는 농부’들의 이야기를 글로 전하게 될 줄은.
사진 / 진행 이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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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에서 농부로 정착중이라는 귀향 5년차 왕규식 농부는 매실과 감농사를 지으며, 마을에서 생산하는 농산물과 가공품들로 악양농산물꾸러미를 운영하고 있다. 섬진강 따라 구례를 지나 하동에 도착하니 51번째 악양농산물꾸러미 작업이 한창이다.
“저희가 바쁜 날 왔죠.” 소심하게 인사를 건네자 “언제와도 바빠요. 일단 밥 먹으러 갑시다.”한다.
새마을미용실이 있는 악양 다운타운에서 점심을 먹고 작업장으로 돌아왔다.
하동군 악양면의 작업장에서 만난 왕규식 농부
귀향하기 전에 학원 강사, 수학 연구소, 대안학교 설립, 공연기획 연출까지. 다양한 일을 하셨지요.
학원 강사를 오래했어요. 수학을 가르쳤는데 ‘이대로 수학을 가르쳐서는 세상이 곤란하다. 나도 곤란하고 세상도 곤란하다. 새로운 방식의 수학교육이 뭘까?’ 고민하기 시작했고 대안교육을 생각하게 되었죠. 2004년에 수학 교사 모임을 만들고 2006년에 대안학교를 설립했어요. 처음에는 수학만 가르치다가 2007년부터 대안학교 선생으로 온전히 살았어요. 아이들을 가르친 건 2010년까지였네요. 그 이후로는 교사와 부모교육을 주로 했어요. 공연기획은 2007년부터 2017년까지 10년 정도 했어요.
교육자가 어쩌다 공연기획자가 되었습니까?
아내가 전통국악인, 소리꾼이었어요. 아내를 중심으로 젊은 국악인들이 새로운 소리를 해보고 싶어 뭉쳤는데 예술가들이라 경영을 잘 못해요. 마침 대안학교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고 있었는데… 고민하다 대표를 맡게 되었죠.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만 시간의 법칙 있잖아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3년만 열심히 하면 그 분야 전문가 되는 거죠. 전문가가 별거 있나요. 어릴 때 기타치고 노래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음악도, 국악도 잘 몰랐어요. 내 능력이 안 되고 부족한 부분도 있겠지만 내가 가진 집중력으로 일정 기간을 노력하다보면 일정 수준에 도달해 그 분야에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국악도, 대중음악도 몰랐지만 집중해서 하면 되요. 농사도 그렇고요.
도시에서도 충분히 재미있고 의미 있게 삶을 꾸린 것 같은데 귀향을 결심한 계기가 있나요?
50대 초반에 하동으로 내려왔는데 386 세대의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쓰임새가 다 되었는데 앉아 있으면 꼰대 밖에 더 되겠어요. 꼰대가 되기 싫었어요.
교육도 어른 대상으로 하게 되고, 정치적 활동도 어느 정도 했는데 뒷짐 지고 지켜보거나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중요한 의사 결정자라고 하는데 그렇게 생각되지 않더라고요. 뒷방 늙은이 같지. 전략적 결정, 중요하지요. 그런데 그걸 매일 합니까? 일주일, 한 달에 한번 하는데.
밥 먹으러 갈 때 나 빼고 간다든지, 공연 끝나고 뒷풀이는 젊은 사람들끼리 가더라고요.(웃음)
결정타네요.
결정타죠. 농담이고요, 저는 무엇보다 현장이 좋아요.
악양농산물꾸러미는 2017년부터 시작했죠?
2016년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고 2017년에 귀향하고, 4월부터 꾸러미를 시작했어요.
그 전에는 농사를 짓지 않았죠?
아버지가 9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밭농사는 남을 줬지만 아버지가 하시던 농사가 있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돌봤죠. 약 치고 수확하고 그 정도는. 비용을 드리긴 했지만 이웃 분들한테 부탁해서 약치는 것은 도움도 많이 받았죠. 지금 대안학교 아이들이 집에 와 있어요. 대안학교 설립 전부터 아이들 데리고 해마다 집에 왔어요. ‘자연 속 학교’라고 제가 만든 학교 학생들은 일 년에 6번 정도를 전국으로 놀러 다니고 자연 속에 있어요. 지금 6학년 아이들은 11박 일정으로 와서 아침, 저녁으로 매실 따고 있어요.
지금 짓는 농사규모는 어느 정도나 되나요?
제가 내려와서 규모가 좀 늘었어요. 우리 집만 하면 매실, 감, 밭 합해서 5~6천 평이 안 되었을 것 같은데, 우리 집 바로 앞에 큰집이 있어요. 큰아버지 돌아가신 지 20년이 되었는데 제가 내려오기 전까지 거의 방치되어 있었죠. 집이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았어요. 제가 내려오니 말은 못하지만 사촌들이 은연중에 내가 맡아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어요. 큰집을 보살핀다는 건 문중을 돌본다는 거예요. 벌초부터 시작해서. 처음엔 내가 왜? 노땡큐했죠.
3년 지나고 보니 도저히 안 되겠어요. 태풍 불면 양철 지붕이 날아가고 하는데 그냥 둘 수가 없어요. 작년부터 큰집 과수원, 여기 앞에 보이는 논, 밭에 손을 대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만 7~8천 평 되는 것 같아요.
혼자서 이걸 다 짓나요?
네. 그래서 ‘안 짓는 농작물’을 심잖아요. 감나무, 매실나무는 밭작물에 비해 손이 많이 안가는 편이예요. 밭작물은 한 평에 얼마가 나오는지 따지지만 감나무는 한 그루에 7~8평 차지해요. 매실도 수령이 40년쯤 되면 5평 정도는 되고요. ‘한 평에 고추 10개’ 이렇게 해서는 감당이 안 돼요.
작업장 규모도 생각보다 꽤 커요. 시설도 많고.
이 창고를 2017년에 악양농산물꾸러미 시작하고 바로 지었거든요. 이 작업을 집에서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불가능하죠. 나의 모든 재산을 올인했지요.
왜 꾸러미였나요? 귀농, 귀촌하면 일단 농사부터 지어보고 판로를 고민하던데요.
동네에서 서울로 같이 간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20대 귀향해서 농사를 짓고 있었어요. 제가 내려오기 전에 친구들이 농민대회 한다고 서울에 왔어요. 술 한잔하면서 “내가 고향 가면 뭘 할 수 있겠냐?”했더니 친구들이 “네가 농사지으면 얼마나 지을 수 있겠냐, 농사는 40년, 50년 지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네가 잘 할 수 있는 거 해라.” 하는 거예요. “그래? 그럼 너희가 필요한 건 뭔데? 네가 생각하는 내가 잘하는 게 뭔데?” 했더니 “유통을 해라. 우리는 판매망이 꼭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래? 생각해볼게.”하고 조사를 해보니 일반적으로 농산물을 유통하는 건 상회를 차려서 가락시장이나 경매시장에 물건을 내보는 거예요. 농부들에게 그게 제일 도움이 되는 거일지도 몰라요. 농협에서 하는 게 그런 일이잖아요. 수매해서.
예를 들어 매실이 지금 아주 좋은 게 1kg에 2,000원인데, 선별해서 포장하는 순간 4,000원이 되고 소비자들은 6,000원 정도에 사요. 무조건 3배예요. 농협에서 2,000원에 수매를 한다고 치면, 나 같은 사람이 2,200원만 쳐준다고 해도 농민들은 10%를 더 받으니 굉장히 큰 도움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유통을 전문적으로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유통을 지향하되 전문유통은 안 하겠다 했어요. 내가 장사꾼 하려고 고향 내려온 건 아니니까. 그래도 유통에 대한 고민은 계속 하자가 첫 번째 이유고요.
두 번째는 ‘소규모라도 나도 먹고 살려면 판매망은 있어야 한다.’였어요. 악양 내려가서 농사지으면 농산물을 지인들한테 보내줘야 되고, 팔기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꾸러미를 만들자 했어요. 한 달에 열 명씩만 늘려서 2년 안에 200명을 만들자 목표를 정했죠. 더 하면 큰일 날 것 같고. 3년 만에 달성했어요. 170명 넘어 가니 잘 안 늘더라고요. 홍보도 전혀 안하니까. 홍보에 에너지를 쓸 바에야 농사에 힘을 쓰는 게 낫지. 지금도 190명에서 205명 사이로 왔다 갔다 해요. 1년 단위로 계약하는데 2명이 빠져 나가면 한, 두 명이 또 들어와요. 소문 듣고 왔다고.
포장 중인 양파와 마늘
꾸러미는 할 만 한가요? 전문유통을 하셨어도 잘 하셨을 것 같아요.
서울로 대학가고 도시에 살아도 1년에 10번은 집에 내려와서 아버지 농사를 도왔어요. 가족들도 그렇고 주변에서 유통을 하는 게 기질에 맞지 않겠냐는 얘기도 많이 했어요.
저는 농산물 유통을 하려면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얘기해요. 농민들의 정서를 모르고 유통만 하면 장사꾼밖에 안 되거든요. 예를 들어서 매실을 1kg 2,000원에 수매하는데 농민들이 2,200원 달라고 하면 2,000원으로 깎을지, 2,200원을 드릴지 굉장히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잖아요. 농사를 지어보지 않으면 당연히 2,000원으로 합니다. 농사를 지어보면 ‘아이고 네네 2,200원, 아니 2,300원에 하시지요.’ 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모든 농사가 그렇지만 매실 농사가 얼마나 힘든지 그 상황을 모르면 수익을 따지게 되지 농산물의 가치와 그분들의 삶을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저도 고향에 와서 어머니들 농사짓는 것을 눈으로 보지만 내가 해보지 않으면 농산물의 가치, 내재된 가치를 측정할 수 없어요. 그래서 내가 농사를 최소한 3년은 짓겠다. 그 이후에 유통을 할지, 가공을 할지 고민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지금 5년째 농사를 짓고 있죠. 꾸러미도 보내고. 직접 하는 건 아니지만 잼 기계도 들여오고, 이런 저런 조건들도 만들어 가고 있고.
악양농산물꾸러미는 일 년에 몇 품목 정도 보내나요?
한 달에 3~5품목 정도해서 40품목 정도 보내고 있어요. 물론 혼자 다 짓는 건 아니고요.
내가 짓는 건 제일 큰 게 감하고 매실이고요. 감은 10월부터 1월까지 단감, 대봉감, 감말랭이, 곶감 순서로 달마다 한 품목을 만들고, 매실은 지금이 철인데 생과도 팔고, 매실청, 매실초가 있어요. 매실원액은 발효시키면 항염효과가 탁월하죠. 밭작물은 지금이 봄농사 작물인데 양파, 마늘, 감자, 가을농사로 보면 쥐눈이콩, 검정콩, 메주콩이 있고 늦가을에서 겨울 수확물은 무가 있고, 올해는 생강을 처음 시작해요. 딱 200명분에 플러스 알파로 지어요. 처음에는 지인부터 시작했으니까 ‘나는 200명을 기준으로 농사를 짓겠다. 여러분이 가입을 해주든지 안 해주든지 나는 200명분 농사만 짓겠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나를 먹여 살리세요.’ 했지요.
남거나 모자라는 거 없이 계획대로 잘 되고 있나요?
지금 꾸러미 가격이 월 30,000원인데요, 우리 꾸러미의 가격원칙은 ‘산지가격에 20%를 더한다’ 예요. 어머니들께 2,000원을 드리면 저는 2,400원에, 2,500원을 드리면 3,000원을 받아요.
올해는 양파를 많이 지었어요. 재작년인가 처음 품목에 넣었는데 맛있다고 더 지어달래요. 기본품목으로 넣어 달라고요. 3kg를 보내는데요, 그런데 가격이 너무 싸요. 양파가격을 우리는 10kg에 15,000원으로 책정했는데 마트에 가면 10,000원이에요. 이 가격에 맞춰서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요. 다른 품목은 산지가격을 기준으로 하지만 양파는 이 가격에 하자고 했어요.
거기에 가공품들이 있어요. 동네 어머니들, 우리 생산자 회원들이 농사지은 취나물이나 마늘쫑으로 장아찌 담고 해서 보내지요.
농산물과 가공품 비율이 정해져 있나요?
그렇진 않아요. 이번 달은 모두 농산물이고 5월에는 모두 가공품이었어요. 회원들의 요청도 고려해야 하거든요. 특이한 건 수도권과 부산·서부 경남권 회원들의 생활양식이 달라요. 쉽게 얘기하면 서울 사는 회원들은 매실청을 원해요. 친구들도 아무도 매실 주문을 안 해요. 매실 보내면 제발 그만 보내라고 해요. 가공품으로 달라고. 그런데 부산에 사는 분들은 ‘왜 이렇게 가공품이 많아요? 싱싱한 걸로 좀 보내 봐요’ 이런 식이죠.
고정 고객이 있지만 어렵네요. 악양농산물꾸러미의 특별한 회원관리 노하우가 있을 것 같아요.
꾸러미를 판매망으로만 보면 실패해요. 내 형제들이 도시에 살고 있는데 내가 지은 농산물 보내면서 고객으로 생각하진 않잖아요. 식구들이 먹을 거라고 생각하고 보내는 거지. 내 농산물 팔아주니까 보내준다 이런 생각은 곤란해요. 회원들도 마찬가지예요. 잘 먹지 않는 콩이 올라오면 ‘이거 어떡하지?’ 하다가도 ‘규식이가 농사지은 거니까 먹어야지’하는 거예요. 이렇게 관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한 거지 판매망으로만 보면 다 실패해요. 그렇게는 몇 년 못갑니다.
꾸러미 처음 시작할 때 가공품이 꽤 많이 들어갔거든요, 그 이유가 도시 사는 형님, 누나들 바빠 죽겠는데 그거 손질하고 해 먹으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럼 내가 손질해서 조금 더 비싸게 받자 그런 전략도 있었어요. (웃음)
좋은 전략인데요, 역시 기획자십니다.
어쨌든 저는 꾸러미를 소통의 창구로 본 거예요. 내가 살아가는 삶의 소통 창구. 도시에서 귀농, 귀촌이 어려운 건 귀양 가는 느낌이 드는 거거든요. 일종의 고립감 같은 거요. 저는 고립 대신 꾸러미를 통해서 고립되지 않겠다, 꾸러미로 비고립하겠다 했어요.
밭작물 씨앗이나 모종은 어떻게 구하나요?
우리가 스스로 씨앗을 마련하는 것도 있어요. 쪽파는 무조건 해야 하고. 콩도 내가 써봐서 좋은 종자는 유지하려고 해요. 지자체나 농협 통해서 오는 종자는 일반 상인들에게 사는 것보다 훨씬 믿음이 가니까 그 종자들을 주로 사용하죠. 감자는 고랭지 감자가 아니면 종자의 가치가 없거든요.
농작물마다 그런 게 있어요. 올해 아무리 수확이 좋다고 해도 내년에 심으면 제대로 안 나와요.
'토종으로만 농사짓겠다'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네요.
토종씨앗이나 종자를 고민하는 분들은 농사의 생산량을 안 따지면 몰라도 생산량을 따지면 작업이 안돼요. 이걸 팔아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농민은 노동자인 동시에 자영업자잖아요. 자본가이기도 하고. 상인이 되었다가 노동자가 되었다가 춤을 춰야 하는데 토종씨앗만을 고집할 순 없어요. 농부들에게 농민소득 주면서 그렇게 농사지으라고 하면 몰라도.
2021년 6월의 악양농산물꾸러미 구성 안내지
꾸러미가 경제 활동 전체를 차지하는 건 아니지요?
꾸러미를 기본으로 하고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죠. 꾸러미가 내 삶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꾸러미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면 꾸러미 소비자들에게 휘둘리게 되잖아요.
월 30,000원에 200명 회원이면 꾸러미로 월 600만원 매출이 나와요. 농산물 비용을 제하고 나면 2명의 최저 임금비 정도가 나와요. 자기농사로 월 300만원을 가지면 100만원이 부대비용이고 200만원이 수입이 돼요. 두 농가가 겨우 농사지을 정도가 된다는 거죠. 그런데 내가 이번 달은 내가 많이 하지만 다른 달은 농가들과 나눠야 하고, 내가 농사를 짓지 못할 때는 꾸러미 수입은 없는 거니까 그걸로는 먹고살기 힘들죠.
꾸러미가 좋은 건 회원이 200명 정도 되니까 추가 주문이 들어와요. 그래서 전체매출이 꾸러미매출의 1.5배 정도가 되는 거예요. 내가 팔 수 있는 품목을 적어 놓으면 회원들이 그걸 선택해서 주문을 해요. 꾸러미 매출 600만원에 추가 주문이 더해져 900만 원 정도가 되요. 정확하게 계산은 안 해봤지만 연매출이 1억 정도 되는 걸로 봐서는.
매실과 감은 꾸러미로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꾸러미 통해서 나가는 매출 중에서도 상당 부분 감, 매실이 들어가죠. 설 명절 때 곶감 선물을 하는 분들이 주문해주기도 하고.
부가수익이 더해지는 거네요.
저는 스마트스토어도 하고 있어요. 작년 대봉감은 없어서 못 팔았어요.
유통이 웃겨요. 정직하게 산지가격에 20%만 더해서 내 가격을 올려요. 산지가격에 3배로 파는 데랑은 경쟁이 안 되지요. 너무 잘 나가니까 저도 살짝 욕심이 생겨요. 그런데 못 올리겠더라고요. 스마트스토어는 검색이 핵심이거든요. 검색으로 노출이 되는 날은 하루에 어마무시하게 주문이 들어와요.
검색 광고를 하나요? 아니면 특별한 노하우가 있나요?
광고는 전혀 안 해요. 나름대로 ‘리뷰가 중요하다’는 건 조금 알겠어요.
리뷰 한, 두 개 정도는 주문한 분들에게 부탁하기도 하고, 고객들이 먼저 좋은 리뷰를 남겨주기도 해요. 최근 열흘 동안 매실이 하루에 50~60kg가 주문이 들어왔어요. 리뷰효과인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토종매실이거든요. 토종매실을 키워드로 넣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점심 먹으면서 최저임금 정도는 나오니 아직은 농사지을만하다고 했는데요. 개인적인 어려움이나 귀향인이어서 겪는 고충은 없는지 궁금해요.
어려운 게 뭐 한 두가지여야지죠. 그보다 귀향해서 농사짓는 나도 그렇지만 주위의 어머니들, 전업농들의 어려움이 단순한 문제는 아니에요. 귀농이야기* 에도 썼지만 농촌에서 농민으로 먹고 사는 데는 3가지 길이 있더라고요.
첫째는 대농이 되는 거예요. 친구들 중에도 있어요. 논농사 백마지기, 약 2만 평 정도를 지으면 먹고 살 수 있어요. 두 번째는 특작물을 하는 거예요. 비닐하우스나 스마트농업 같은 시설재배는 초기시설비가 들어가서 그렇지 오이나 호박, 딸기, 부추 농사지으면 부부가 먹고 살만한 정도는 돼요. 어느 정도까지 벌이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저임금은 넘어서는, 평균 임금 정도 수준의 중위 소득은 될 수 있을 거예요. 물론 몸은 고생하지요. 농사의 전제는 몸이 고생한다는 겁니다. 대농들도 고생은 마찬가지예요. 농사철 되면 잠도 못자요. 헤드라이트 켜놓고 모내기해야 할 판이거든요. 아무튼 몸은 고생해도 먹고 살 정도는 된다는 거예요.
그 다음이 과수원을 하는 거예요. 5천 평 이상 규모로 동네 특작물로 과수원 하면 일정하게 수익이 발생해요. 하동은 감이예요. 대봉감. 시배지거든요. 여기 감이 가장 비싸요. 크기도 크고 맛있어요. 우리는 다른 데 감은 싱거워서 못 먹겠다고 하거든요. 당도가 2~3브릭스 정도 차이가 나요. 감농사 5천 평 정도면 기본 소득 이상 살림으로 먹고 살 수 있어요. 그런데 농협에 수매만 해서는 불가능해요. 감농사는 시설 재배가 아니라 생산량에 한계가 있어서 경매, 수매도 하지만 가공까지 포함했을 때 과수원하면 ‘먹고 살 수는 있다’입니다. 이 3개 정도가 농촌에서 그나마 농사꾼들이 먹고 사는 거고 나머지 농사꾼들, 3천 평 이하, 열다섯 마지기 이하는 농사지어서 먹고 살 수가 없어요.
다른 지역 농부들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하동신문 연재에서도 ‘소규모 다품종 농부가 살길은 오직 직거래’라고 강조했던 거군요.
귀농, 귀촌인들은 내려오면서 자기가 전략적으로 선택을 한단 말이에요. 시설재배를 할 거냐, 과수원을 할 거냐. 귀농, 귀촌해서 당장 대규모농사는 못 지어요. 시설재배가 제일 쉬워요. 딸기면 딸기만 파면 되니까. 과수원도 그나마 좀 쉬워요. 감이면 감, 사과면 사과 하나만 연구하면 되니까.
그런데 토박이 농사꾼들은 대대손손 내려온 땅에서 농사를 짓는데 땅이 고르지도 않고 졸망졸망해요. 저도 아버지 농사짓던 땅에서 농사를 짓는데 경지 정리가 되어 있다 해도 험악하더란 말이에요. 평평한 땅에 경지 정리된 밭보다 3배, 4배 힘들어요. 그 땅 보면 이 어른들이, 과거의 농사꾼들이 먹고 살려고 얼마나 힘들게 농사지었는지 알 수 있죠. 또 그 작은 땅에서 소출이 난다고 한들 얼마나 되겠어요.(한숨)
여기 팔려고 양파 농사짓는 사람들 없어요. 자기 먹을 거만 짓지. 참깨도 마찬가지고요. 중국산 참깨하고 맛은 다를 바가 없는데 가격이 중국산과 경쟁이 안돼요. 양파도 최소한 1kg에 최소한 1,000원에서 1,500원은 받아야 8개월 동안 키운 보람이 있는데 1kg에 800원 받으면 한 달에 1kg 양파 키우는 내 임금이 100원 이예요. 그러면 대규모는 아니어도 천 평 이상은 지어야 해요. 그 정도가 안 되니까 여기 있는 소작농들은 농사를 지어도 팔수가 없어요. 양파, 고구마, 옥수수 마찬가지예요.
아주 특별하게 팔리는 몇 가지가 있긴 한데…… 고사리, 토란대, 취나물. 산나물이 그나마 특별하게 팔려요. 그러니까 옆집 할머니는 주구장창 토란대만 손으로 벗기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천 평을 짓겠어요. 2천 평을 짓겠어요. 겨우 2백 평이란 말이에요. 아무리 비싸다 해도 그걸로 얼마나 벌겠어요. 눈물겨워요. 그래서 소농으로는 먹고 살 수 있는 기조가 없다는 거예요. 나처럼 직거래를 할 때만 그나마 먹고 살 수 있어요. 나는 우리 이웃들이 아무도 못 먹고 산다고 봐요. 도대체 농민들은 뭘 먹고 사는지 모르겠어요.
농사짓는 어려움보다 어쩌면 이런 현실이 마주하는 게 더 힘들겠네요.
내가 힘들다기보다 현실이 그래요.
하동군 악양면의 작업장에서 만난 왕규식 농부
화제를 좀 바꿀게요. 귀농이든 귀촌이든 농촌에서 정착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라고 쓴 기고를 읽었어요. 왕규식 농부는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교류하십니까?
도시와 악양처럼 아름답게 갇힌 이 공간에서의 교류는 개념에서 차이가 있어요.
도시의 교류는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끊임없이 사건, 사고를 이야기하고 자신의 삶을 보여줘야 해요. 그런데 농촌에서 교류는 저 사람이 필요하면 내가 가주는 거예요. 내가 필요할 때 그 사람을 내가 알고 있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집 보일러가 고장 났을 때 보일러 고칠 줄 아는 내 친구 아버지가 같은 동네 살아. 그걸 알면 되는 거예요. 내가 얼어 죽겠다고 하면 밤 12시에도 달려와 준단 말이지요.
끊임없이 나를 보여 주고 공통점을 찾는 것이 도시적인 교류라고 한다면 여기는 서로의 필요를 알고 도와주는 것이 첫 번째예요. 그 사람의 삶의 방식, 철학 상관없이 굉장히 공동체적인 거죠. 내가 엊그제 트랙터 타고 내려가다 비탈길에서 빠지는 사고가 났어요. 찰과상을 입어서 지금도 굉장히 아파요. 그 때 친구한테 전화를 했어요. 지금 이런 상황이다 했더니 지금 모내기 중이래요. 그런데 모내기하다 말고 왔어요. 모내기가 뭐가 중요해 사람이 먼저지.
관계 자체가 아주 친하지 않고, 딱히 주고받는 것도 없어요. ‘그래 고맙다’하고 그냥 끝나는 거지만 서로의 필요성을 충분히 공감하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 이게 우리가 말하는 교류라는 거지요.
그럼 농사기술이나 정보들은 어떻게 교환하나요? 같이 연구를 한다거나……
우리는 연구 그런 거 없어요. 술 한 잔 하면서 그런 정보들은 도시의 가십거리 못지않게 끊임없이 얘기해요. ‘올해 고추농사는 내가 약을 좀 잘못 친 것 같아.’, ‘올해는 태풍 때문에 망했어.’하면 ‘내년에는 뭘 해볼 생각이냐?’, ‘어찌 되겠지, 내 잘 해볼게.’ ‘그래, 잘 해봐라.’ 이런 정도지 도시처럼 미주알고주알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 친구가 올해 고추농사를 천 평 정도 했고, 콩을 만평 정도 도전하는 친구가 있다 생각하고 있다가 다음 해 내가 두부를 만들어야 하면 그 친구한테 연락하는 거예요.
귀농, 귀촌인들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리겠어요. 이게 안 되면 농촌에서 공동체의 일원이 못되는 건가요?
공동체의 일원이 되라고 하는 것은 도시적 사고방식을 버리라는 거예요.
여기 와서 도시에서 배운 공동체 방식을 아무리 주장한다고 해도 먹히지 않아요. 여기 사는 사람들은 몸에 배인 공동체가 있는데 도시인들은 몸 자체에 공동체가 없단 말이에요. 거꾸로 머리에만 공동체가 있어요. 이념으로만. 여기 사람들이 착하고 선하지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게 굉장히 봉건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하단 말이에요. 귀농, 귀촌인들에게 공동체 일원이 되라는 말은 네 생각이 진보든 보수든 상관없다. 여기 사람들을 존중하고 가족처럼 생각하는 마음이 몸에 배이고 몸이 움직여 주어야만이 공동체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안하면 도움도 못 받고 영원히 객지인인 거예요.
어쩐지 식당에서 ‘이모, 요 젓갈 좀 주이소’할 때 ‘아, 이분 뭔가 원주민 포스다’ 생각했어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증거였군요.
왕규식 농부가 농산물을 포장하고 있는 모습
귀향해서 농사짓겠다고 했을 때 가족과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요?
우리 가족은 항상 ‘하고 싶은 건 알아서 하자’주의라서 아내도 마음으로 응원해줬고 지금은 같이 내려와서 농사짓고 있어요. 내가 먼저 내려가서 2년 동안 살아볼게. 그 후에 내려올지를 결정하라고 했죠. 내려와서 고생 많이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작업장에서 양파 포장하고 있어요.
주변에서는요? 2016년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함께 했던 동료들 반응이 궁금해요.
‘그래? 잘 가라’죠 뭐. 젊었을 때부터 내가 하겠다는 일은 말려봤자 말려지지 않을 것이고 응원해봤자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는 거 아니까.(웃음)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친구들도 꽤 있었어요. 뒤늦게 도시에서 내가 해줬으면 하는 역할을 요청하기도 했고요. ‘앞으로 이런 일이 필요하지 않겠어?’ 제안할 때는 알아듣지도 못하더니 뒤늦게 바지 가랑이 잡고 말린다고 말려질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죠. 어쨌든 가서 열심히 농사짓고 열심히 살면 또 만나지겠지 그러나 우리가 끊어지지는 말자. 했어요.
끊어지지 않는 방법이 ‘꾸러미를 열심히 하자.’군요.
맞아요. 도시에 살 때는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으로만 알던 분들이 꾸러미 통해서 제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아요. 이틀에 한 번씩은 밴드에 내가 농사짓는 일상을 올리거든요. ‘회원님들, 오늘은 취재를 당했어요.’ 이를테면 이런 일상을 올리는 거죠. 사람들과 훨씬 더 잘 지내고 있다고 봐요.
2017년 귀농을 준비할 때부터 블로그에 준비 과정을 올리고 지금도 농사일기, 꾸러미 일지를 아주 꼼꼼하게 기록하고 계신데요, 이 기록은 개인 블로그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공유해도 좋겠다 싶었어요.
저는 좋아요. 제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100% 오케이입니다.
선하게 사용된다면 기꺼이 공공재가 되겠다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나는 공공재가 될 수 없지만 내가 만들어낸 결과물, 내가 가진 것들이 잘 쓰인다면 마다하지 않아요. 지금 이 건물만 해도 그래요. 네다섯 명이 매일같이 이 공간을 같이 사용해요. 내 재산을 쏟아 부어 만들었다고 아끼면 뭐해요. 저온창고도 마찬가지예요. 가끔은 불편하기도 하지요. 내 물건 넣어야 하는데 남의 물건이 가득 들어 있으면.
그럴 땐 어떻게 하나요?
뭘 어떻게 해요. 내가 정리정돈해서 물건 넣을 공간을 만드는 거지요.
동네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 하고 있다는 보람을 느끼나요?
그런 생각자체가 도시적인 거예요. 이웃집에서 쓰겠다는데 못 쓰게 할 거예요? 해봤자 잠시 잠깐인데. 저도 마찬가지예요. 어머니 오늘 기계 좀 쓸게요. 하면 오냐 그래라 하는 거죠. 가끔은 약속이 잘 안 지켜지는 게 문제지. 그럴 땐 ‘네가 어지간히 바쁘면 그러겠어.’ 하고 넘어가야죠. 농사는 정말 바쁜 거니까. 이걸 도시와 농촌의 수준 차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 돼요.
농사가 정말 바쁘긴 하죠.
농사는 인간에 맞춰서 하는 게 아니에요. 자연에 맞춰서 하는 거지. 다음주 25일이 넘어가는 순간, 콩도 못 심고, 팥도 못 심어요. 그러니 새벽이라도, 저녁 늦게라도 심어야 한단 말이에요. 숨 쉴 틈은 자연이 주는 거지, 인간이 주는 거 아니란 말이지요. 내가 농사를 포기하고 일을 안 하겠다 하면 몰라도.
최근에 기후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요. 지난해 섬진강 일대는 홍수로 큰 피해를 입기도 했고요. 농사지으면서 체감하시나요?
대학가기 전까지만 해도 해마다 태풍피해가 어마무시했어요. 제방기술이 떨어졌기 때문에 둑터짐이 생겼고 치수능력이 부족했어요. 20대 이후부터는 치수문제가 없어졌어요. 둑도 생기고 도로도 잘 깔리고, 하천 정리도 잘 되었고요. 작년에 이 지역에 완전 물난리가 났어요. 비가 엄청나게 와서 섬진강 일대가 다 잠겼어요. 친구들 창고도 다 잠겨서 그것 보면서 안타깝고 허탈했죠. 홍수가 나고 피해를 당한 건 인재 때문이라고 하지만 비가 이렇게 온다는 건 기후적인 문제도 있다고 생각해요. 또 저는 잠정적으로는 기후문제라고 생각하나 꼭 기후문제라고도 할 수 없는 게 올해는 일주일 정도 모든 시기가 빨리 와요. 꽃피는 시기부터 열매 맺고 수확하는 시기가 빨라요. 내 머릿속에는 작년 생각만 있어서 6월 25일까지 매실을 따면 되겠다고 했는데 매실이 이미 떨어지고 있어요. 과학적으로 좀 생각해 볼 문제이긴 하나 윤달이 끼면 철이 빨리 온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시는데 진짜로 빨리 와버렸어요. 이런 현상이 기후위기가 아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우리는 곶감 만들 때 한파가 안 오면 자연건조에 문제가 있어요. 작년 같은 경우에는 날씨가 따뜻해서 말리는 데 고생했죠. 농작물 재배 한계선이 점점 올라가는 건 다들 느끼는 거잖아요. 그나마 감, 매실은 사과처럼 북방한계선이 있는 게 아니라 전국적으로 되는 작물이어서 아직은 크게 문제가 되진 않지만 여기도 대체작물이 제법 보이기 시작해요. 따뜻한 지방에서 되는 묘목들이 심어지고 있어요.
중년의 귀향을 장려하시죠? 귀농, 귀촌을 생각하는 중년들에게 조언 부탁합니다.
음… 그분들이 어떤 생각으로 귀농, 귀촌을 하려는 지는 잘 모르겠어요. 중년이 되면 자기 삶의 완성도도 있고 고집도 세지고, 생각이 말랑말랑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귀농, 귀촌을 결심하기가 어려워요. 설사 한다 해도 농촌에서 잘 살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50대 넘어가면 우리가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잖아요. 현직에서 물러난 도시노인들이 노인복지회관 시스템 외에 삶이 과연 있는가? 생각하면 없는 것 같아요. 이게 저는 큰 문제 같아요. 기업 임원 출신들이 경비로 일 하는데 만족도가 높다는 기사도 가끔 나오잖아요. 그 이유가 할 일이 있어서 기쁘다는 거잖아요.
저는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시골로 와라, 현장에 있고 싶은 사람은 여기로 와라, 그 방법밖에 없다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할 일 없는 도시와 할 일이 어마무시하게 많은 농촌 중에 어디를 택할래? 하는 거죠. 특히 남자들, 요양원에 공연을 하러가도, 영화관에 가도, 강연을 가도 모두 여성들이에요. 도대체 남자들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주위에 물어보면 혼자 등산하고 혼자 산책하고 가끔 친구들하고 당구장 가고 막걸리 한잔 드시고 한다는데 저게 재미있나 싶어요. 그러니까 맨날 TV만 보고 자식들 오는 거 기다리는 거예요. 그러다 꼰대가 되는 거죠. 그 분들은 아니겠지만 저는 그렇게 나이 드는 건 좀 비참하다고 생각해요.
여기는 적어도 노인이 존중받거든요. 특히 농사짓는 이력이 쌓이면 80세가 되더라도 현장에서 잔소리꾼이 아니라 노하우를 가진 선배가 되는 거예요. 우리 동네 비닐하우스 세 동으로 농사짓는 73세 형님이 저한테 두 동을 지어보라고 해요. 기술을 전수해준다고. 저는 노년에 먹고 살 새 길을 찾았고 그 형님도 저를 보고 자신의 역할을 찾은 거지요.
그 형님이 앞으로 20년 후의 왕규식 농부의 모습일수도 있겠네요.
네, 맞아요. 얼마나 좋은 기회에요. 비닐하우스 하나에 2~3천 만 원 인데 농사도 짓고 재배기술도 전수받고. 정말 고맙지요. 그러면서 세대교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거죠.
인터뷰를 위해 만난 왕규식 농부
지리산 이음에서 작지만 기금을 조성해서 농부들의 소소한 활동을 지원하는 일을 해보려고 하는데요, 어떻게 쓰면 좋을까요?
기금이 얼마일지는 모르나 소작농들이 농산물을 생산하는데 기쁨을 줄 수 있도록 쓰이면 좋겠어요. 지금 소작농들은 돈이 안 된다는 자포자기적 심정이 있어서 몸이 점점 게을러지고 있어요. 농사일 대신 날품팔이나 인력시장에 나가요. 안 그러면 손에 현금이 안 들어오니까. 그리고 농사일보다 훨씬 수입이 좋으니까 어쩔 수 없어요.
어제 동네 누님들 매실 따달라고 모셨는데 일당이 9만원이거든요. 20일 동안 일한다고 생각해보세요. 180만원 수입이 생겨요. 농사로 180만원을 벌기가 상당히 힘들거든요. 그러니 몸이 움직이면 하시려고 한단 말이에요. 그리고 요양보호사 자격증 따면 월 250만원도 벌 수 있는데 누가 농사를 짓겠어요. 소작농들이 농사로 벌이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삶의 방식을 바꾸고 있다는 게 농촌에서 굉장히 큰 문제예요. 그렇게 되면 텃밭농사나 작은 규모의 농사들은 황폐화된다고 봐야 돼요. 땅이 산이 되고 숲으로 돌아가면 좋은데 그걸 또 놀리기는 아까워서 제초제나 약품으로 농사를 짓게 돼요. 손이 덜 가면 되는 거니까. 그럼 땅이 망가지는 거지요.
직거래나 꾸러미로 판매를 돕는 방식도 도움이 될까요?
판매망이 되어도 좋고요. 예를 들어 도시의 동네 슈퍼에 악양농산물 매대를 작게라도 만들어서 로컬푸드매장처럼 운영할 수도 있잖아요. 도시농부들 생산물로 로컬푸드매장을 만들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그분들은 겸업이잖아요. 취미일수도 있고. 그러니 전업농 중, 특히 소작농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좀 고민해주면 좋겠어요. 동네 신문을 만드는데 할머니 인터뷰를 했어요. 그 분 월수입이 50만원이 안 돼요. 기초노령연금 30만원 제외하면 20만원이 안된다고요. 3마지기 농사지어서 그만큼이에요. 어쨌든 이런 분들에게 기금이 쓰이면 좋겠어요.
조금 더 확장해서 농업 정책에 대한 생각도 듣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농업정책이 다양하게 있는데 저는 농업지원정책은 재고가 필요하다고 봐요. 농업지원정책은 대부분 50% 보조금 지원이거든요. 좀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다 치워버리고 농촌에 기본수당, 농민소득 줬으면 좋겠어요. 80세 어르신들이 농사도 안 짓는데 기계를 살 리가 있어요? 그럼 젊은 사람들한테 기계를 사라고요? 젊은 사람들은 농사지을 마음도 없고, 지을 사람도 없어요. 그런 건 공중에 떠버리는 지원정책인거죠.
노인복지는 그나마 기초노령연금 30만원이 생겨서 어르신들한테 큰 도움이 됐는데 얘기했던 어머니처럼 소작농들의 삶을 생각해보면 도리가 없어요. 우리나라는 직접 지원하는 정책은 직불금 밖에 없는데 간접 지원하는 보조금 제도 없애버리고 농민수당 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그 분들 삶이, 농민들 삶이 훨씬 나아지죠. 200만원 벌기 위해서 하루에 12시간 일하던 걸 하루에 8시간 일하게 될 거예요. 8시간만 일을 해도 농민들의 삶이 달라져요.
농민소득은 계속 얘기가 나오고 있어요. 곧 실현될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어르신들을 보고 맨날 일 많이 하지 마시라고 얘기했는데 아버지, 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두 가지 때문에 일을 하는 거예요. 하나는 현실적으로 돈이 없어서. 자식들이 십 만원, 이십 만원 주지만 그 돈으로 살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존심 때문에라도 벌이가 있어야 하니까 일을 해요. 자식들도 백 만원도 아니고 십 만원 용돈 드리면서 아버지 농사짓지 마시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죠. 기초노령연금이나 복지가 조금씩 좋아지니까 이제 농사 안지어도 돼 하는 거예요. 자식들한테 손 안 벌리고 30만원 가지고 병원은 갈 수 있으니까. 여기는 먹고 사는 건 농사로 해결하니까 최소한의 생활은 가능해요. 농민수당까지 주어지면 삶이 굉장히 윤택해 질 거라는 거죠.
두 번째는 그 분들이 할 수 있는 게 일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평생을 하루에 12시간, 14시간씩 일해 왔는데 갑자기 영화를 만들겠어요. 공연을 만들고 연주를 하겠어요. 오로지 머릿속에는 일밖에 없는데. ‘오늘 벚꽃이 피었네, 그럼 뒷산에 두릅이 나왔겠네, 그거 따러 가야지.’ 이런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벚꽃 피었다고 꽃놀이 갈 수가 있겠어요. 그런데 농민수당이 주어지면 ‘지금은 전어가 맛있는 철이네, 오늘은 전어를 먹으러 어디를 가야겠네.’ 이게 가능해진다는 거죠. 꼭 좋다 나쁘다를 떠나 삶의 여유를 찾을 수 있도록, 내 몸이 계절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거죠. 아프면 오늘은 병원을 좀 가봐야겠네 하고 몸에 쉼을 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거죠.
이제는 농촌정책이 노인복지 차원이 아니라 농민복지가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네. 그런 지원이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은 권력을 가진 소수의 기득권이 아니라 다수의 비기득권에게도 혜택이 가고 있어요. 그래서 농민수당이 그냥 허황된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할 수도 있겠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생각해요.
인구소멸을 걱정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의 관심이 청년에게 쏠리고 있다. 농촌을 지키고 살리는 길은 고향 떠난 중장년, 그 시절의 청춘들이 돌아오는 거라고 조용히 주장해 왔다. 그런 삶을 사는 주인공을 만나 더없이 반가웠고 도시인의 나름대로 합리적인 사고가 농촌 공동체에선 통하지 않는다는 값진 배움도 얻었다. 대기업 다니며 승진을 걱정하고 꼰대 될까 안절부절하는 친구에게 진심을 담아 물어야겠다.
“너 고향이 어디니?”
글 이경원
기획, 기록, 연결로 변화를 만드는 일과 사람을 돕는다. 2014년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궁금해서 찾았던 지리산시골살이학교 덕분에 지리산이음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때는 몰랐다. 7년이 지난 2021년 구례 남원 산청 하동 함양을 다니며 ‘농사를 업으로 하는 농부’들의 이야기를 글로 전하게 될 줄은.
사진 / 진행 이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