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어렵고 힘들어도 인간 삶의 기본은 농사, 그 길을 계속 가련다 – 함양군 백전면 정미은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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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께 농사짓고 더불어 살아가는 느슨한 공동체를 꿈꾸거나 실패의 경험이 있는 분
  • 정미은 농부와 함께 함양에서 온배움터 재건에 힘을 쏟고 싶은 능력자



정미은 농부는 녹색대학의 정신을 계승해 생태적 삶을 지향하는 온배움터와 농사로 자립을 꿈꾸는 산아래농부들협동조합 대표이자 함양군 백전면 부녀회장이다. 

귀농 18년차 농부에게 듣게 될 함께 농사지으며 더불어 살아가는 느슨하고 평화로운 공동체 이야기를 기대하며 온배움터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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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 백전면의 온배움터에서 만난 정미은 농부



함양으로 오신지 얼마나 되었나요? 오게 된 계기도 궁금해요.

함양 온지는 18년째네요. 서울에서 학원을 운영하기도 했고, 학생들을 가르쳤거든요. 1997년에 산청 간디학교가 개교했는데 녹색평론에 양희규 선생님의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내가 먼저 들자’라는 글과 함께 산청 간디학교 교사모집 공고가 났어요. 그걸 보고 지원해서 2학기에 산청으로 왔죠. 대안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2003년에 함양에 녹색대학이 생겨서 녹색교육학과 대학원 과정을 다녔어요. 함양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네요.


녹색대학은 2001년 장회익 전 서울대 교수, 시인 김지하, 박노해 씨, 문규현 신부, 환경운동가 장원 씨 등 시민환경단체 인사 33명의 발기로 탄생했다. 녹지사(녹색대를 지원하는 사람들) 회원 2000여 명의 후원금 2억여 원으로 경남 함양군 백전면의 폐교인 백전중학교를 매입해 문을 열었지만 정식으로 개교한 것은 2년 6개월 준비기간을 거친 2003년 4월 5일이다. 
–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발췌



녹색대학 첫 입학생이셨네요? 대안교육공동체를 지향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안대학이라는 소개를 읽은 적 있어요.

네. 개교 당시에 녹색대학 학부과정은 40여명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자급자족 공동체 생활을 지향했어요. 대학원생들은 주로 직장인이어서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오후까지 수업을 들었어요. 24시간 동안 여기서 머물다 가는 거죠. 전국에서 대안교육에 뜻있는 대안학교 선생님, 현직 교사 30여 명 모였어요. 모두 비슷한 고민으로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었어요.

저는 토요일 되면 도망치듯이 여기로 왔어요. 대안학교 교사가 생각보다 고단해요(웃음). 여기 오면 학생도 선생님도 같은 편이라는 편안함이 있었어요. 토요일 낮에 만나서 수업하고 밤새 술 마시고 놀다가 그 다음날 되면 또 열심히 공부하고. 제가 교육학과 운영위원 이었는데 학교에 여러 가지 일들이 생겼어요. 2004년에 후원회 일을 맡게 되면서 아예 학교로 들어왔어요. 함양이라는 지역보다는 녹색대학을 선택하면서 이곳으로 오게 된 거죠.


함양으로 오자마자 농사를 지었나요?

저는 농업과는 관계없는 일을 해 왔지만 농사는 계속 지었어요. 제 마음속엔 항상 ‘인간 삶의 기본은 농사여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대학교 1학년 때 농활을 가면서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서울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걸 처음 알게 됐어요. 세상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데 나는 서울에만 갇혀 있었던 거죠. 

여름방학에 농활을 가면 부녀회에서 새참을 해 왔어요. 큰 정자나무 아래서 같이 일했던 분들과 막걸리를 마시는데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너무 시원한 거예요. 뭔가 묘한 기운이 들어오면서 ‘내가 이때까지 땀 흘려 일해본 적이 없구나, 나는 땀 흘려 일하면서 살 거야. 언젠가는 농촌으로 와서 살 거야’ 다짐 아닌 다짐을 하게 됐어요. 그게 가슴 속에 심어져 있었나 봐요. 그러다 학교를 졸업하고 마지막 농활을 갈 때쯤에는 내 꿈이 정해졌어요.


일종의 장래희망 같은 건가요? 그 꿈이 궁금한데요. 

부녀회장이요. 부녀회장이라는 분명한 꿈이 생겼어요. 근데 대단한 막연한 꿈이었죠.


함양에 온 지 18년, 부녀회장의 꿈은 이루었습니까? 

네. 우리 마을회장을 10년 했고, 4년 전부터 백전면 16개 마을 부녀회장 모임에서 면회장을 하고 있어요. 처음 부녀회장이 되고 교육을 받으러 간 자리에서 소감을 얘기하라고 해서 “저는 꿈을 이뤘습니다. 제 꿈은 부녀회장이었거든요.” 했더니 사람들이 막 박수를 치더라고요(웃음). 제가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니까 계속 일을 시키더라고요. 저는 무조건 ‘설거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화장실 청소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해요. 그러다 백전면 회장까지 선출되었어요.


농사도 바쁠 텐데 학교에, 협동조합에, 부녀회장까지 아주 다양한 역할을 하고 계신데요.
농부 정미은은 지금 어디에 가장 많이 힘을 쏟고 있나요? 

지금은 협동조합이죠. 산아래농부들협동조합.


녹색대학은 2001년 장회익 전 서울대 교수, 시인 김지하, 박노해 씨, 문규현 신부, 환경운동가 장원 씨 등 시민산아래농부들협동조합은 농촌 환경 보전과  친환경 농업의 가치를 공유하는 귀농· 귀촌인들로 2017년에 결성되었다.


제가 인간 삶의 기본은 농업이어야 한다고 얘기했잖아요, 녹색대학은 젊은이들에게 농사를 경험하게 하려고 학부과정 4년 중 2년은 모든 학과가 농사를 기본으로 했어요. 그런데 생명농업학과에 학생들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러다보니 제대로 경작이 안 되고 농사 선생님들도 계속 떠나는 상황이 된 거예요. 그럼 우리끼리라도 모여서 학교 농사를 짓자 해서 10년 전부터 매주 화요일 농사모임을 합니다. 한 두 명이라도 학생이 있을 때는 농사모임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는데 학생이 없으니 생명농업학과라고 얘기하기가 그래서 농사모임으로 부르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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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백전중학교 자리에 터를 잡은 온배움터



농사모임과 협동조합 구성원들은 녹색대학과 인연 있는 분들인가요? 백전면 마을 주민들인가요? 

다양해요. 녹색대학을 졸업하신 분도 있고 온배움터를 바라보고 부산귀농학교에서 오신 분도 있고요. 청미래 마을이라는 배후마을에서 오시는 분도 있어요. 자연의학과에서 강의하던 선생님이 주변지역에 살면서 개인농사를 짓다가 농사모임에 합류해서 조합원이 되기도 하고요. 협동조합이 설립된 건 5년 정도 되었어요.


같이 농사짓는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요? 

지금은 논 일곱 마지기 1,400평으로 벼농사 짓고, 학교 전체 면적이 4,000평 정도 되는데 밭 500평을 경작해요. 농사모임만 하는 분도 있지만 대부분 협동조합에 들어와서 같이 농사를 짓고 있어요.

농사를 지으면 생산물을 나눠 가지고도 남아요. 우리가 다 먹을 수가 없잖아요. 일곱 마지기 논에서 1년 쌀농사 지어서 수확하면 얼마나 많이 남겠어요. 이걸 어떻게 할까? 하다가 ‘팔자!’ 했어요. 우리 학교를 후원하는 500명에게 ‘우리 이런 농작물을 팔 수 있습니다’하고 알렸어요. 10년 전부터 수확한 쌀과 감자, 고구마도 넣어서 꾸러미로 만들어 팔게 됐어요. 다들 개인 농사도 지으니까 가능했어요. 꾸러미를 계속 팔려면 조합을 만들어야 된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됐고 조합 만드는 작업을 한 제가 산아래농부들협동조합 대표가 된 거예요. 조합은 작년에 예비마을기업으로 선정됐어요.


협동조합은 농사모임에서 출발한 거네요. 산아래농부들협동조합 결성과 운영에 대해 조금 더 얘기해주세요. 

농사모임하면서 “일주일에 하루 농사지어서 자립이 되겠어?” 얘기를 많이 했는데 ‘협동조합 할 사람 모여라’ 했더니 농사모임 사람들이 다 모였어요. 자립을 하려면 돈을 벌어야 되니까 될 만한 농사를 제대로 해보자 해서 어마어마하게 큰 밭을 임대했어요. 

그런데 농사가 일주일에 하루 일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화요일에 농사모임하고 일주일에 두세 번은 따로 모여야 일이 되는 거예요. 1년 동안 그렇게 하다 보니 다들 완전히 농사꾼이 돼버리는 거예요.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는 내가 농사만 지으려고 여기 왔나 하는 생각을 계속하게 되는 거예요.


주로 어떤 작물을 키웠는데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했어요. 천연 염색하는 분과 계약재배로 200평 규모로 쪽을 키웠고 들깨와 팥도 심었죠. 쌀은 대부분 개인농사를 했었어요. 저도 우렁이 농법으로 열다섯 마지기까지 벼농사를 지었어요.

조합 만들고 우리가 지은 농산물 제대로 팔아보자 해서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꾸러미를 보냈어요. 너무너무 숨차게 일 년을 그렇게 지냈어요. 일이 중심이 되니까 1년 후에는 나가떨어지는 사람이 생기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하려고 조합하나’, ‘이러려고 시골 왔나’ ‘생태적으로 살고 싶다’ 각자의 입장과 이유는 많았어요. 그건 본인의 선택이니 어쩔 도리가 없는 거죠. 꾸러미는 2주에 한 번으로 바꿔서 지금까지 5년째 하고 있어요.


꾸러미 운영방식을 바꾸고 협동조합은 안정화 되었나요?

네. 그리고 ‘개인 농사도 제대로 짓자’로 방향을 정했어요. 조합에 너무 모이니까 개인 농사지을 시간이 없는 거예요. 개인 농사와 학교 논밭을 같이 가꾸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더라고요. 

지금 조합은 크게 생산, 가공, 판매, 교육 네 영역으로 운영돼요. 생산은 학교 논밭과 조합원들 개인 밭에서 하고 판매는 개인 농산물까지 꾸러미 제품으로 넣어요. 2주에 한번 우리가 팔 수 있는 작물들을 정리해서 주문서를 만들어서 500명에게 안내메일을 보내요. 평균 다섯 꾸러미 정도는 주문이 들어오는데 주문을 받은 꾸러미에 들어갈 품목들을 생산자가 화요일 농사 모임에 가지고 오면 꾸러미 담당자가 포장해서 수요일에 발송을 하죠. 

꾸러미 품목 중에 된장, 고추장, 청국장이 있어요. 그건 가공을 담당하는 팀에서 맡아서 하고요. 그 사람이 그 사람이지만 조합 안에서도 생산에 주력하는 분이 있고 여성들 중심의 가공팀이 있어요. 판매는 오롯이 한 사람이 맡아서 화요일에 점검하고 수요일에 포장해서 발송해요. 교육은 제가 맡아서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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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 백전면 온배움터에서 만난 정미은 농부



교육은 온배움터와도 연결이 될 것 같은데요.

조합의 좋은 교육프로그램을 온배움터에서 교육과정화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조합에도 교육 파트를 넣었어요. 예를 들면, 우리나라 최고의 자연 치유자이고 장애인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임락경 목사님을 모시고 2박 3일 동안 건강과 철학을 공부하는 건강 강좌를 5년째 하고 있어요. 온배움터는 올해 1학기에 백경선생을 모시고 약초교실을 매주 1회씩 12회 동안 운영했어요. 

우리가 건강하고 좋은 것을 사먹는 것 외에 삶에 필요한 것들,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생태적으로 건강을 지키는 방법들을 알고 있는 어른들을 모시려고 해요. 그 분들의 지혜를 우리가 계승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죠. 농사와 건강 차원에서 협동조합에 맞으면 협동조합 교육프로그램으로, 학교차원에서 하면 좋겠다 싶은 것은 수업과정으로 준비하고 있어요.


개인 농사로 생산한 농산물은 주로 어떻게 판매했나요?

쌀농사를 지었을 때는 조합도 없을 때라 서울에서 친구들에게 ‘쌀 좀 팔아야 한다’ 전화를 했죠. 저는 개인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어쨌든 다 팔았어요. 묵혀서 못 먹은 쌀은 없었으니까. 

저는 아직까지 유기농을 해요. 비닐도 안 쓰고. 이제는 논도 줄이고 밭 600평 정도만 하고 있거든요. 들깨 심고, 된장해서 하니까 메주콩 심고, 검은 콩은 잘 팔리니까 심고, 녹두는 해독력에 최고니까 심어야 되고. 다 해야 되는 것들이에요. 고구마는 거름을 안 해도 되니까 심고, 감자는 우리 먹을 만큼만 해요. 무, 배추도 하고요. 고추는 250포기 정도로 한정해서 하고요.


모두 명분이 있는 작물들이네요. 

그렇죠.  


다시 협동조합 얘기로 돌아가서 조합이 농사모임과 개인농산물을 같이 판매하면 수익은 어떤 방식으로 분배하나요? 

조합의 원래 취지가 모든 조합원들에게 수익을 분배하는 형태잖아요. 우리는 농사모임과 협동조합을 별개로 운영해요. 농사모임에서 지은 농산물 꾸러미 수입은 10% 조합발전기금을 공제하고 농사모임 통장으로 들어가요. 개인 농산물은 생산자에게 판매액의 10%를 조합발전기금으로 공제하고 조합 통해서 개인에게 지급해요.

생산자들이 무농약으로 혹은 유기농으로 재배를 해도 지금의 시장 유통구조에서는 농부들이 유통망을 가지기도 힘들고 제초제 치는 것과 비교해서 가격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잖아요. 조합은 꾸러미 안내를 받는 500명의 회원이 있으니까 무농약, 유기농으로 생산품을 구분하고 한살림 기준으로 가격을 책정해서 올리고 있어요.


조합에서는 무농약, 유기농 농산물만 판매하고 있나요? 조합만의 원칙이 있겠죠? 

네. 원칙이 있죠. 조합원이 7명인데 전업농부는 2명 밖에 안돼요. 대부분 자기 먹을 거에서 조금 더 짓는 정도예요. 유기농이니까 많이 지을 수도 없잖아요. 품목이 굉장히 한정적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못하는 꿀 같은 건 동네 이장님이 생산한 걸 팔기도 해요. 

지금까지는 우리가 생산한 팥이 다 팔리고 나면 더 이상 팔지 않았어요. 이제는 마을 분들 생산품도 같이 팔아보자는 논의도 하고 있어요. 우리는 유기농과 무농약까지만 취급하는데 마을 분들 농산물은 그렇지 않은 것도 있으니까 지금 그걸로 계속 논의를 하고 있어요.

처음에 유기농만 팔다가 무농약을 포함시킬 때도 엄청 치열하게 논의하고 결정했거든요. 저는 유기농을 안 할 거면 의미가 없다, 마트에서 사 먹으면 되지 뭐 하러 우리가 이걸 하냐고 했죠(웃음). 그런데 농사를 많이 짓는 사람들은 유기농이 너무 힘들어요.


같이 농사를 짓고 같이 팔면서 생긴 갈등이라면 갈등이네요. 

모두 유기농하고 싶어서 온 사람들이지만 유기농이 너무 어려우니까요. 저도 어렵다는 걸 알죠. 

무농약은 농약은 안 쓰고 화학 비료는 쓴다는 얘기예요. 무농약 하면 농약 안 쓰는 것만 생각하는데 무농약은 화학 재료를 쓴다는 말이 그 속에 숨어 있어요. 무농약도 취급하자는 분들의 입장은 밭을 장만할 때만이라도 화학비료를 쓰자는 거예요. 밭 장만할 때 땅에 필요한 화학 성분을 넣어줘야 작물이 부피 성장을 하는 시기에 확 자라서 병충해를 견딜 수 있고 상품성 있는 작물이 만들어진다는 거죠. 그러니까 화학 비료를 안 쓰고는 안 된다, 그리고 화학 비료는 어느 시점이 되면 화학 성분이 사라진다고 계속 설득하면서 몇 년을 싸웠어요.

결국 ‘학교 농사는 그래도 유기농이다. 대신 개인 농사는 무농약까지 받아준다’로 타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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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 멀칭을 하지 않은 밭



협동조합의 취지는 좋지만 실제로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어려움이 많죠. 농사 뿐 아니라 조합의 성장까지 고민해야 하니까요.

조합원들이나 학교와 이어져 있는 사람들은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느리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에요. 내면 깊이 자기 속도로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새로운 일을 만들려고 하면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계속 주시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모색하고 전환을 해야 하는데 사실 좀 느리죠. 마을기업이나 공동체 센터에서 제공하는 교육도 다들 받으면 좋겠는데 크게 관심이 없어요.

올해 초 치유농업법이 국회에 통과되었어요. 우리도 내년에 마을기업 선정을 목표로 사업계획서에 치유농업을 넣으려고 하거든요. 그건 나 혼자 생각이고 치유농업이 무엇인지, 마을에서 왜 필요한지, 우리가 왜 해야 하는지 조합원과 합의를 해야 하잖아요. 누군가 교육을 받아서 공유하면 좋은데 그게 안 되니까 고민만 하고 일은 안 되고 있어요. 내가 교육을 받아야 하나 싶다가도 조합 일만 하는 것도 아니니까 마음만 늘 바빠요. 지금도 ‘내년에 어떻게 하지?’ 이러고 있어요.


너무 현실적인 고민이에요.

처음에 협동조합 하겠다고 했을 때 서울에서 직원협동조합 하는 분이 “하지마. 너무 골치 아파” 그랬거든요. 그 말이 딱 맞았어요(웃음). 제가 설명하고 설득하는 능력이 부족한가 봐요. 조합원 5명이 같은 마음일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조합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지 않으면 일이 안 돼요. 그냥 회의에서 분위기 봐서 결정하고 돌아가서 잊어버리면 이제 자기 일을 하는 거예요. 그게 제일 힘들어요. 

학교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이거 해보자 했을 때 계속 안 되는 이유만 얘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사람이 모이게 하고 수업이 일어나야 그다음이 있지 우리의 원칙만 내세우고 여기에 맞는 사람만 들어오게 해서는 학교는 안 되는 거죠. 녹색대학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자립을 굉장히 많이 얘기했어요. 조금이라도 외부 지원을 받으면 우리의 자립정신이 훼손되는 줄 알 정도로. 그래서 계속 학생을 모아야 된다고만 생각했던 거예요. 그동안은 50만원 지원 사업을 받아도 이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 토론했어요. 

그나마 예비마을기업이나 공익형 직불제 신청은 제가 밀어붙여서 한 거예요. 지금까지 20년 동안 자립만 외치다가 자립은커녕 학교 페인트가 다 벗겨지는 지경인데 하면서 내가 서류 만들고 넣을게 해서 시작한 거예요.


10년 동안 함께 해 온 농사모임도 예외는 아니겠죠? 

처음 농사모임 할 때는 6시, 7시까지 일하고 저녁 먹고 계속 얘기하면서 조합을 만들어야 한다, 이 작물은 어떻다 하면서 정보를 교환했어요. 지금은 여름에는 7시에도 모이지만 올해는 9시에 모여서 5시에 가요. 진짜 농부들은 새벽 5시에 나가서 일하고 9시, 10시 되면 들어가서 쉬잖아요. 우리는 9시에 모여서 차 한 잔 하고 10시쯤 밭에 나가서 뙤약볕에 땀 흘리면서 일하고 같이 채취한 걸로 식사 당번 정해서 점심해서 먹어요. 2시 반 정도까지 쉬었다가 5시까지 일하고 헤어져요.

10년 째 농사모임에 참여하는 사람은 ‘이렇게 해서 농사가 될까’ 얘기해요. 저도 계속 드는 생각이 농사모임 자체가 농부의 시간과 맞지 않은 거예요. 진짜 농부들이 일하는 시간에 자다가 농부들이 일 끝나고 들어갈 시간에 부랴부랴 챙겨서 9시에 모여서 10시쯤 일을 시작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농부들은 점심 먹고 3시 4시부터 또 밭으로 가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2시 반, 3시쯤에 일한다고 나가서 1시간 정도 하다가 4시 부터는 또 갈 준비를 해야 되는 거예요. 일주일에 한 번 모여서 논밭에 가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일하는 시간도 농사와 맞지 않은데 어쨌든 구성원들이 그렇게 결정했으니까 그걸 따르는 거예요. 

저는 고추 담당인데요, 뜨거울 때 일하기 싫으니까 화요일 7시에 혼자 나와서 고추 따러 가요. 보통 할머니들은 4, 5일에 한 번씩 가거든요. 제 개인 농사도 그렇게 하고요. 고추 따서 씻어서 물 빼놓고 사람들을 기다리죠.


농사모임에서 토종 씨앗과 토종모종으로 농사를 짓는다고 들은 것 같아요. 지금도 하고 계신가요? 

농사모임 구성원 중에 함양 토종 씨앗 모임에 나가는 분들이 있었어요. 그 분들이 계실 때는 구억배추, 경종배추, 흰 당근, 토종당근도 키우고 학교 육묘장으로 사용하는 논 반마지기에 완전히 토종 쌀로 농사를 지었었죠. 토종 쌀이 밥맛은 참 좋은데 생산량이 적었어요. 3년 정도 토종으로 농사를 지었는데 개인 사정으로 못나오는 분들도 계시고, 농사모임에 조합원들만 남게 되면서 지금은 할 수 있는 걸 논의해서 짓기로 해서 토종씨앗을 고집하진 않아요.


농부들을 만나서 물어보면 기후나 소비자 기호, 외부 환경이 변하니까 토종을 고수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렇죠. 저희는 논농사도 다 육묘를 해요. 모판 작업이라고 하죠. 상토를 놓고 볍씨를 꺼냈다 넣었다 하면서 싹이 트기 좋게 축축한 상태로 만드는 작업을 일주일 전부터 해요. 한 사람이 소독약을 조금 넣고 볍씨를 넣었다 뺐다 계속 해줘야 해요. 하루 전날 볍씨를 모두 꺼내서 물기를 빼내는 작업을 해요. 볍씨 깔고 상토를 덮고 그 모판을 논에 넣어 물이 들어오게 해야 되는데 일곱 마지기 심을 거 외에 토종볍씨는 따로 처리를 해야 하니까 손이 두 배로 가는 거예요. 

저희가 일손을 계속 줄이는 쪽으로 가니까 지금은 토종 씨앗으로 하는 게 몇 가지 안 돼요. 흰당근하고 한 고량 정도에 앉은뱅이 고추, 칠성고추 심어서 씨를 받아서 갖고 있자는 정도로 하고 있어요. 뜻이 있는 개인이 하는 정도니까 토종씨앗으로 농사짓는다고 내세울 만하지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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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은 농부가 밭을 배경으로 서서 웃고 있다.



농사 모임에서는 공동으로 농사 일지를 쓰나요? 

농사 모임 메신저에 오늘 한 일, 다음 주에 할 일 정도를 쓰고 있죠. 일종의 농사모임 업무일지죠. 2018년부터 2년 동안은 그 일지로 우리가 언제 무엇을 심었고, 언제 수확해서 어떤 음식을 해 먹었다까지 넣어서 농사달력도 만들었어요. 수첩처럼 만들어서 농사모임 식구들도 나눠주고 작년에 우리가 이렇게 농사를 지었는데 올해는 어떻게 할까 얘기할 때 그걸 꺼내서 활용했었죠. 그 일을 했던 사람이 개인사정으로 그만두고 나니까 ‘내가 하겠습니다’ 하는 사람이 없으니 끊어지게 되었어요.


농부들이 제일 힘들어 하는 게 기록이라고 하더라고요. 필요하다는 걸 알지만 잘 안되고 누가 좀 도와주면 좋겠다고…. 기후위기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요, 정미은 농부는 농사를 오래 지었고 대안적인 삶도 고민하고 계신 분이라 기후 변화에 민감할 것 같아요. 

2020년에 54일간 비가 왔어요. 고랑에 물이 차고, 마을에서 외출하지 말라는 방송이 나왔어요. ‘지구가 고장 난 거 아니야? 큰일 났다’ 하면서도 한편으로 ‘우리가 여기까지 왔구나. 비가 일주일 더 와서 다리 위로 물이 넘치고 오갈 수가 없어야 우리가 정신을 차리겠구나’ 생각했어요. 키웠던 작물이나 재배방식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까지 오고 있잖아요.


정미은 농부는 이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요? 

제가 체감하는 기후변화는 일단 병충해가 너무 심해요. 저는 20년 전에도 농약을 쓰지는 않았지만 고추는 지금 탄저가 너무 심해요. 고추 농사는 병충해가 올 시기, 장마 전까지 고추를 확 키워놓으면 대적이 돼요. 그렇지 않으면 병충에 다 먹혀 버려요. 그동안의 경험으로 나름의 방책은 거름을 많이 줘서 부피 성장을 할 때 잘 키워서 병충해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게 하죠. 퇴비를 필요로 하는 작물에는 퇴비를 많이 줘요.

저는 그렇게 대비하지 기후에 맞는 작물들로 바꿔 심어본 적은 아직 없어요. 20년 전에 심기 시작했던 것들을 그대로 심어요. 그것들은 우리가 안 먹으면 안 되는 것들이잖아요.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수만 년 동안 먹어왔던 것을 놓으면서 별난 걸 하려고 하지 말고 지금 우리가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을 지켜내자. 그 생각으로 농사를 지어요. 농약을 써야 하고 비료를 써야 상품성이 있다고 하지만 그 대안으로 밭장만, 논장만 할 때 신경을 많이 써서 퇴비를 듬뿍 주고 부피 성장할 시기에 확 키워 내는 게 맞다 생각해요. 저는 그 외에 특별한 건 안 해요.

개인 농사하는 분들 중에 농업학과를 나오신 분도 있고, 나름 합리적인 선진 농업을 하는 분들도 있고, 요새는 유투브에 정보들이 엄청 많아요. 천연농약 만들어서 계속 실험하는 분도 있어요. 우리도 멀구슬나무과의 병해충에 굉장히 효과적인 님오일과 소금을 2% 정도씩 물에 녹여서 살포를 했어요. 올해는 장마가 좀 늦게 왔잖아요. 장마가 오면 병이 확 퍼지거든요. 그런데 올해는 날이 너무 뜨거워서 그런지 탄저가 없어요. 고추는 올해 다들 풍년이더라고요.


풍년이면 값이 또 내려가는 거 아닌가요? 

그렇죠. 농민들은 농사가 잘 되도 걱정, 못 되도 걱정이에요. 그래서 농민 수당이나 농민 기본 소득이 보장돼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지 않으면 이 논밭을 지켜내기가 쉽지 않다고 봐요. 지금 농민인구가 3%예요. 제가 대학교 다닐 때 노태우 정부의 정책이 농민을 5%대로 줄이는 거다 얘기 하면서 시위했었거든요.

정부의 일관된 농업 죽이기 정책이 농민인구를 3%까지 오게 만든 거예요. 이 3%의 농업인구가 손을 드는 순간, 이 거대한 자연, 저수지 댐 역할을 하는 논밭이 사라지게 되면 기후 위기는 막을 수가 없죠. 

전 세계적으로 기후위기를 막는 방법은 논밭을 지키는 거 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농민과 농업, 기후위기는 하나로 꿰어서 생각해야 해요. 지금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농민이 무너지지 않게 농민 소득을 지급하고, 농산물 가격이 안정적이어야 해요. 그리고 유기농과 무농약, 국내산의 가격 조정이 확실해져야 하고요. 시장에서 농민들이 가격 책정 권한이 있어야 된다는 얘기들을 계속 하지만 누군가가 싸워야 되는 일이에요. 저는 아직 거기까지는 못 가고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얘기하는 수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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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 백전면 온배움터에서 만난 정미은 농부



생산자가 가격 결정권이 없는 게 유일하게 농산물이라는 얘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너무 황당해요 정말로. 올해 제가 고추를 50근 정도 할 것 같아요. 한살림 가격을 보니까 한 근에 23,900원이더라고요. 제 판매망에 있는 지인들에게 슬쩍 한살림 가격이 2만 3천 원이니 나는 2만 원에 해야 되겠지? 했더니 바로 2만원이면 많이 나가겠다며 3천원을 깎는 거예요. 순간 ‘아.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되긴 했지만 김장할 때까지 50근을 들고 앉아 있을 순 없고 일단 팔아야 되잖아요. 보관도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 2만원에 하자’ 했더니 5근이면 10만원이니까 택배비를 빼달라는 거예요. 

그들은 내가 어떻게 농사를 짓는지 아무리 설명해도 유기농과 무농약을 구분할 수 없고 관심이 없어요. 좋은 건 먹고 싶어서 유기농을 먹어야 되고 맨날 농부들을 살려야 된다고 말은 하지만 저렴한 게 최고예요. 

평소에 제가 이런 얘기를 할 때는 열심히 호응을 해주다가도 막상 본인이 돈을 내야 할 때는 싸야 되는 거예요. 그럴 땐 ‘그래, 농사를 짓지 말아야 겠다’ 하다가도 내가 유기농 농사도 안 짓고 농촌에서 왜 사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니까 계속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게 돼요.


앞으로도 농사는 계속 지으시겠네요. 

지어야죠. 친구들이 이제 퇴직할 나이가 되니까 다들 시골 가서 살까 이런 생각들을 해요. 퇴직 앞두고 있는 친구들이 집을 알아봐 달라는 얘기도 많이 해요. 그러면 나는 농사짓기 너무 잘했다, 내가 만약에 농사를 안 지었으면 서울에서 뭘 하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얼마나 갈증을 느끼며 살았을까 싶어요. 

농사지으면서 이건 이렇게 지어야 되고 저건 저렇게 지어야 되고. 해보니 이렇더라, 저렇더라 하는 게 나는 너무 좋거든요.


지금까지 힘들게 농사짓고 있고 온배움터로 농사를 배우러 오는 학생들도 있을 텐데요.
귀농, 귀촌을 고민하는 예비 농부들에게 어떤 얘기 해주고 싶은가요? 

이번 주 화요일에 귀촌한 부부가 찾아왔어요. 그 분들은 논농사 직접 지어서 막걸리를 만드는 게 꿈이래요. 산청에서 1년 살다가 함양으로 아예 옮겼는데 여기에 온배움터와 농사 모임이 있다는 걸 듣고 농사 배우고 싶어서 왔다고 해요.

쌀을 재배해서 막걸리를 하고 싶다? 쉽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했어요. 지금 농촌은 기계가 들어갈 수 있게 경지 정리가 잘 되어 있어요. 그야말로 문전옥답이죠. 그래서 백마지기까지 농사짓는 분들도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논에 물이 빠졌나 둘러보는데도 하루 종일 걸린대요. 농촌 인구가 노령화이니까 할머니들도 기계가 있는 사람들에게 논밭을 임대해주고 도지를 받아요. 그것도 내부 거래로.

그 분들의 규모에 맞는 논은 아마도 경지 정리가 안 된 논일 거예요. 처음부터 논둑을 다 발라야 하고 풀도 손으로 뽑아야 되고. 자리 잡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런 논이 처음 귀농 귀촌한 사람들이 실제로 구할 수 있는 정도예요.


뼈 때리는 조언을 해 주셨네요. 

네. 그래서 일단 텃밭 하면서 마을 속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다른 거 내세울 필요도 없고 할머니들, 할아버지들하고 섞여서 일하다 보면 좋은 땅을 얻을 수도 있겠죠. 귀농, 귀촌을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일단 그 마을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해 주고 싶어요.


‘내부거래의 구성원’이라 백전면 전체 부녀회장님의 조언이라 더 와 닿습니다. 

마을 구성원이 되지 않으면 도시에서의 삶과 다르지 않아요. 대안학교의 배후마을로 계속 생태마을들이 만들어지잖아요. 마을에 굉장히 멋진 집들을 짓고 들어가지만 그건 도시에서 농촌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옮긴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에요. 도시의 생활 패턴을 그대로 끌고 와서 공동체 이름 붙이고 사는 거잖아요. 

마을 속으로 들어가서 할머니들이 어떤 얘기를 나누는지, 무엇을 해서 먹는지 함께 해먹어보고 그들이 진짜 필요한 게 뭔지 살펴보고 조금씩 거들어주고 채워주지 않으면 관계는 만들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마을 활동도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동네 형님들한테 나도 육십 넘으면 형님들 따라 놀러 다닐 거라고 농담 삼아 얘기해요.


부녀회장의 꿈을 이뤘으니 정미은 농부의 다음 꿈은 동네형님들 따라 놀러다는 거겠네요. 그 외에 진짜 이루고 싶은 꿈이 있겠죠? 

농사모임 안에 협동조합을 만든 건 사람을 모으고 온배움터가 제대로 된 학교의 꼴을 갖추게 하고 싶어서예요. 녹색대학이 처음 문을 연 2003년을 생각해보면 주중에는 50여 명이 이 학교에서 살았고 주말에는 150명 넘는 사람들이 모였어요.

생태농업학과가 생겼을 때 ‘생태가 뭐야? 동태하고 어떻게 달라?’ 이런 질문을 할 정도였어요. 굉장히 앞서갔던 거죠. 생태적인 마인드로 대안적인 학교를 만드는 거였으니까. 저는 지금 학교를 재건하는 제일 중심에 있어요. 뭐라도 해보자 해서 과감하게 대표도 하겠다고 했고요. 교육이라는 그물로, 대안이라는 그물로 못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냥 사람들을 모아보자. 저는 지금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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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배움터 전경



학교의 재건을 위해 온배움터에서 해보고 싶은 일들도 있겠네요. 

생태교육체험센터를 만들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요. 주변에 엄청난 자원들이 있어요. 교사를 퇴직한 분 중에 별명이 새 박사가 있어요. 그 분을 모시면 새에 대해 강의할 수 있겠죠? 식물, 초본류, 목본류에 대해 강의할 수 있는 분들도 많고, 숲해설사, 야생식물, 곤충, 물고기, 별자리 선생님들을 모두 모아서 ‘온배움터에 가면 모두 배울 수 있어’ 할 정도의 생태교육체험센터를 만들어보자고 얘기하고 있어요.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리산 이음이 앞으로 지리산권 농부들에게 활력을 주고 끈끈한 연대를 돕는 일을 해보려고 해요. 

사람이 필요해요. 하고 싶지만 못하는 일들이 많아요. 예를 들면, 협동조합을 만들거나 사업계획서 쓰는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와 농촌에서 협동조합이 성장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농사를 잘 짓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개인이 마을에서 살아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지속적으로 책임감 있게 제공해 주는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어요. 그런 역할을 온배움터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마을 안에서 섬처럼 되어버렸어요. 그게 너무 안타까워요. 

만약 이런 지원이 된다면 우리가 가진 교육과 생태 분야 노하우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의 노하우를 지리산이음에서 컨텐츠로 만들어 지리산권 농부들과 공유하면 좋지 않을까요?




농부의 신념과 리더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시간이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힘주어 말한 ‘인간의 삶의 기본이 농사’는 온배움터를 떠난 뒤에도 한참을 맴돌았다. 내리는 비 때문이었을까, 20년 전 생태 농업과 대안의 삶에 대한 열정으로 모인 사람들로 가득했던 학교 운동장이 쓸쓸하다. 그

럼에도 군데군데 놓인 의자와 비닐하우스, 꿋꿋하게 자라고 있는 풀과 나무들은 다시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만 같다. 정미은 농부가 지금의 신념을 잃지 않고 농사짓고, 공부하고, 마을 형님들과 마음껏 놀러 다닐 수 있도록 함께 할 사람들이 이곳에 다시 모이면 좋겠다. 너무 늦지 않게.  




글 이경원

기획, 기록, 연결로 변화를 만드는 일과 사람을 돕는다. 2014년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궁금해서 찾았던 지리산시골살이학교 덕분에 지리산이음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때는 몰랐다. 7년이 지난 2021년 구례 남원 산청 하동 함양을 다니며 ‘농사를 업으로 하는 농부’들의 이야기를 글로 전하게 될 줄은.


사진 임현택

진행 이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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